주체의 은유인 사랑하는 대상

  

이선영(미술평론가)

  

봉제인형을 조각화한 박성하의 작품들을 실제가 아닌 사진으로만 본다면 정말 인형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하나의 돌덩어리를 수 만 번 쪼아서 만든 질감은 봉제인형 특유의 느낌이 그대로 살아있기 때문이다. 10여개 정도의 작품 대부분이 곰 인형을 모델로 한다. 인형과 비슷한 크기, 다양한 색상, 인형특유의 무표정함, 부속 장식 등은, 최초의 참조대상이 곰이 아니라 곰 인형 임을 확실히 한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거의 모든 인형들에 꿰맨 흔적이 있다. 봉제인형 자체가 꿰매진 존재지만, 알루미늄 와이어로 굵직한 봉합선이 강조된다. 전시부제인 ‘치유하다’는 이들 상처 받은 존재들에 대한 치유의 과정을 말한다. 아이들 장난감인 곰 인형은 성년을 맞아서 다시 겪는 마술적 체험과 연관된다. 작가에게 작품의 소재가 된 곰 인형은 연인의 선물이었기도 하고, 스스로를 투사하는 대상이기도 하다. 거기에는 곰에 대한 부정적, 긍정적 이미지가 모두 포함된다. 자아와 타자는 이 마술 같은 대상을 매개로 연결된다.   




그러나 선물처럼 주어지는 각별한 행복에는 상실에의 두려움이 내재해 있으며, 그것이 사실로 변하는 순간, 상처를 치유하려는 은유적 움직임이 발생하게 된다. 상처를 봉합하는 선은 돌 색에 맞춰진 색색의 금속선으로 되어 있으며, 그 자체가 또 다른 장식적 효과를 자아낸다. 여기에서 상처는 극복 되었든 아니든, 아름다운 무늬로 고양될 수 있다. 박성하가 조각에 사용하는 돌도 그 다채로운 색이 인상적이다. 빨간색, 녹색, 베이지색, 노란색, 분홍색을 띄는 사암은 조각가의 솜씨에 힘입어 돌이라는 질료적 저항을 이겨내고, 만지면 폭 들어갈 것 같은 부드럽고 감미로운 대상으로 탄생한다. 그가 사용하는 사암은 모래로 된 돌인데, 낱낱이 흩어지는 뜨거운 남국의 모래알들이 얼마나 강력한 힘을 받으면 돌덩이가 될까하는, 분자들을 융합시키는 어떤 힘의 존재를 생각하게 한다. 돌조각으로 재탄생한 인형들은 독특한 재료와 공정과정 덕분에 태곳적의 순수함, 자연, 인연, 인내 등을 내포하게 된다.      


곰 인형들은 치유중이어서 그런지 활달하지 않고, 정적이다. 외향적이기 보다는 내면적이다. 그것들은 의자에 또는 바닥에 철푸덕 앉아 있곤 한다. 슬픔을 담은 어떤 연극적 표정을 짓고 있다기 보다는, 인형 특유의 무표정함이 더욱 우울하게 보인다. 슬픔의 정점에 있는 [피에타]도 예외가 아니다.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검은 태양; 우울증과 멜랑콜리]에서 우울증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를 나르시스 신화의 그 축축한 늪지대로 데려간다고 본다. 그런데 우리가 거기서 보게 되는 것은 찬란하고도 부서지기 쉬운 사랑의 이상화가 아니라, 그 반대로 타인의 상실에 의한 절망의 그림자이다. 멜랑콜리는 열렬한 사랑의 어두운 이면이다. 타자 대신에 집착하는 대용물인 인형은 무생물의 은유를 통해 죽음에 이르는 우울을 예시한다. 그런데 눈의 표현이 독특하다. 검은 돌을 조각하여 박아 넣은 눈은 그저 눈이라는 것을 표시할 뿐이다. 



심지어 어떤 작품에서는 단추 구멍 형태로 만들어 붙인 것도 있다. 그렇게 생긴 눈은 마치 모든 감정표현을 단추 꿰듯이 조절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단추 구멍 눈을 가진 작품은 류시화의 시집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에서 영감 받은 것으로, 사랑에는 반대편 눈이 있는 이가 필요하다는 시적 메시지를 담았다. 두 개의 붕어빵은 봉제 선에 의해 하나가 되었다. 그것은 이별의 거부, 상호보완적인 존재, 그리고 사랑에 특유한 맹목(盲目)성도 암시한다.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사랑의 역사]에서 가시적인 타자가 아름다운 것은 우리가 지닌 풍부한 다정함을 거기에 투영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사랑 속에는 정확히 눈에 보인 아름다움은 없다. 보는 사람의 환상, 시선만이 남아있다. 사랑은 깨지는 것이 아니라, 환상이 현실로 복귀하는 것일 뿐이다. 반은 토끼이고 반은 곰인 형태를 붙여놓은 작품 [너와 나]는 갈등하는 주체와 타자를 보여준다. 두 개체가 하나가 된다함은 결코 자연스러운 과정은 아니다. 


합체, 또는 하나 되기에 대한 이상은 단란한 가족의 이미지에서 선명하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오리 가족과 곰 가족은 모든 역경을 이겨낸 듯 귀엽게 웃고 있다. 어머니가 작가에게 붙여준 별명은 곰 인형이 자신의 투사임을 알려주지만, 자아와 한 쌍을 이루어야 할 타자 역시 같은 부류이다. 작가는 어린 시절 로봇보다는 여자아이들의 장난감으로 간주되곤 하는 곰 인형을 갖고 싶었다고 한다. 자신 안의 타자는 사회의 상징적 질서에 의해 억압되곤 하는데, 그가 다름 아닌 작가가 되었기 때문에 억압된 것들이 회귀하는 무대를 마련할 수 있었다. 사랑은 자기 안의 타자와의 사랑이라는 나르시시즘적 속성이 있다. 나와의 사랑은 애틋하면서도 기만적이다. 누가 실연을 토로하는 장에서, 자기연민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자신만 상처받았다고 믿지만 상대는 더할 수도 있는 그런 과정 말이다. 그래서 치유는 나와 타자 모두를 향한다. 


박성하의 작품에서 대부분의 곰 인형이 중성적, 또는 남성적이지만 여성적인 것들도 있다. 의자 위에 다소곳이 앉아있는 밝은 색의 곰 인형은 여성적이다. 누비 모양의 피모는 더욱 부드럽고 따뜻하게 다가온다. 또 다른 날씬한 곰은 꿰맨 흔적이 없다. 그것은 상처받기 전, 또는 시간, 특히 예술을 통해 완전히 치유되었다는 이상이 투사된 것일까. [누군가를 위한 선물]은 빨간 리본 매고 배는 하트모양인 곰과 부치지 못한 편지가 함께 있는 작품이다. 안개꽃 같은 무늬를 가진 돌 편지에는 작가 이니셜 ‘P’가 밀랍 봉인된 인장으로 찍혀있다. 밀봉된 편지는 공개되거나 보내기 힘든 상황을 암시한다. 사랑은 예술만큼이나 언어의 한계를 시험하는 무대이다. 그것에 대해 객관적으로 말할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치유는 상당히 진행된 것이다. 말하기와 쓰기는 치유의 과정이 될 수 있다. 박성하는 자신이 가장 잘하는 언어인 조각으로 말하려 한다. 



그것이 어떤 귀결을 낳을 행동은 아니고, 단지 말해진 무엇에 불과할 지라도 전/후의 변화는 있다. 그래서 고백은 종교적 전통부터 정신분석에 이르기까지 빼놓을 수 없는 필수적 과정이 되었고, 예술 또한 이 역할을 일부분 이어받는다. 치유의 과정은 단순한 합리화가 아니다. 박성하는 불연속성에 그럴듯한 연속성을 부여하지 않는다. 틈은 틈으로 남겨둔다. 그 틈에서 관객의 상상력 또한 발휘될 것이다. 그의 작품에서 사랑의 담론은 직설적이지 않고, 은유적으로 나타난다. 크리스테바에 의하면 은유는 가시적인 것을 향한 여행이며, 사랑하는 대상은 주체의 은유이다. 또한 은유는 융합이다. 왜냐하면 두 가지 용어가 온전하게 지속되는 비교와는 달리, 은유는 두 부분 중 어느 것도 배제하지 않으면서 이원성을 확인하기 때문이다. 모든 은유는 변신을 품고 있다. 흩뿌려진 자아는 오로지 은유로써만 중심이 잡히고 글로 쓰일 수 있다. 


은유는 사랑의 담론 그자체이다. 작가는 명명하기 힘든 것을 명명하는 자로, 자신의 내밀한 상처를 밖으로 드러내는 노출증 환자가 아니라, 치유의 과정을 공유함으로서 또 다른 소통을 튼다. 그러한 상상적 과정은 실제보다 더 만족스러울 수도 있다. 사랑하는 주체와 사랑받는 대상이 일원화된 박성하의 작품은 사랑에 대한 기원의 한 가닥과 연결된다. 가족 유사성을 가지는 곰의 무리들은, 어떤 원형적 모델을 전제한다. 원형적 모델은 단지 추상적 사변이 아니라, 경험적으로 다가온다. 가령 실연의 슬픔을 딛고서 비슷한 유형을 사랑하게 되는, 또는 한눈에 반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사랑의 역사]에서 사랑으로 눈부신 이러한 태양적 양태의 기원을 플라톤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본다. 플라톤은 [파이드로스]에서 사랑하는 영혼은 천상의 사물들의 모방인 닮은 대상을, 그것들을 닮았고 바로 그런 이유에서 영혼을 사랑에 빠지게 만드는, 다시 말해서 정신을 잃게 만드는 지상의 사물들 속에서 알아본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기억에 현존하는 이상을 닮은 것을 사랑한다. 즉 은유적 이동의 모든 움직임은 이미 닮은 대상과의 관계 속에 있다는 것이다. 특별한 개인 보다는 어떤 유형에 대한 사랑이 있다. 박성하의 인형은 이러한 유형적 아름다움이 투사되기 쉬운 대상으로 나타난다. 그의 작품은 닮음을 강조한다. 더 나아가 그것은 융합을 지향한다. 굵은 봉제 선은 닮음과 융합을 통해 상실을 치유하는 방식이다. 알랭 바디우가 [사랑예찬]에서 말하듯이, 사랑은 이데아적 세계를 향한 도약이며, 이를 통해 사랑은 보편이라는 초월적 개념 쪽으로 이동한다. 사랑은 또한 자아와 주체의 기원을 설명해준다. 크리스테바에 의하면 플라톤적인 이상성이 사변적 내면성으로 전환한 것이 주체성이다. 여기에서 내면성은 정신적 고독의 공간을 확립하는 것이며, 외부와 대립되는 내면적인 삶, 즉 내부가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내/외부의 구별이 불안을 자아낸다. 불안은 의식의 차원에서 일어나지, 무분별한 무의식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거울 앞에서 조각난 신체를 붙여볼 뿐인 상상적 자아는 늘 해체의 위험을 안고 있다. 




박성하의 작품에서 의식, 즉 자아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불안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단지 타자와의 분리 때문일까. 크리스테바에 의하면 불안은 언제나 사랑의 배제에서, 즉 자신을 사랑하는 자아에서 생긴다. 사랑은 쾌락만큼이나 자신에게 방점이 찍혀 있곤 한다. 이기주의와 개인주의가 경쟁력을 보장하는 현대사회에서, 타자는 희미한 참조대상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사랑의 관계는 한편으로는 나르시스적인 만족감에, 다른 한편으로는 이상화에 기초를 둔다. 이상화된 타자는 자아와 걸 맞는 훌륭한 인물이며, 주체는 이상적 타자와 동일시한다. 타자에게 품고 있는 사랑을 통해 자아는 통일되고, 하나의 주체를 만든다. 사랑 속에서 주체성은 찬란하게 빛난다. 작품 [별이 빛나는 밤에]에는 마법사로 분한 작가의 분신이다. 별이 빛나는 옷과 모자를 착용하고 의기양양한 그는 웃음 짓고 있으며, 전능한 사랑의 마술사로 변모한다. 박성하의 곰 인형 작품들은 자아와 타자를 매개하는 나르시스적인 상처의 대체물이다. 그것은 ‘자리바꿈하여 되풀이되고, 다시 시작되는 사랑의 체험을 통한 끝없는 재생에 대한 탐색’(크리스테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