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의 대상으로서의 사물


사물학-디자인과 예술 전 (6. 5--10. 5, 국립현대미술관)

  

이선영(미술평론가)

  

‘사물학-디자인과 예술’ 전은 동시대 디자인과 예술 작품을 통해 디자인/예술작품을 포괄하는 더 큰 범주라 할 수 있는 사물의 위상을 다각도로 살펴보는 기획전이다. 전시는 단편영화부터 3D작품까지 장르를 초월한다. 이 전시의 다양한 사물들 각 장르의 순수성을 위해 확보되어야 했던 모더니즘의 매체 제한적(medium-specific) 특성으로부터 자유롭다. 그것들이 사물이라면 잡다한 사물이어서, 관객들에게는 각자 나름의 사물 분류법을 가동시키게 할 것이다. 통상적으로 디자인은 쓸모에 충실하고, 미술은 순수한 것이라고 간주된다. 통섭과 이접의 시대에 ‘순수’라는 말이 이상하긴 하지만, 응용미술/순수미술이라는 일상적 분류법이 엄존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미술 역시 장식이나 투자, 소통이나 치유 같은 기능이 있으며, 디자인 역시 단순한 기능을 넘어서 심미주의의 대상이 되곤 한다. 평범한 물건도 골동품이나 예술작품이 될 수 있고, 예술작품도 막 출시된 상품처럼 취급될 수 있는 것이다. 


마티유 메르시에, 드럼과 베이스

디자인이든 예술이든 그 주체는 인간이었다. 그러나 인간은 정점이자 한계였다. 사물의 편에 선다는 것은 인간주체와는 다른 관점을 선택을 말한다. 사물의 편에 서고자 했던 작가 프랑시스 퐁주는 [사물의 광란]에서, 언제나 있는 그대로의, 다른 것으로서의 대상 그자체로 돌아와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있는 그대로의 대상을 위해서는 표현방식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때로 그 표현방식은 즉물성을 취한다. 의미의 핵심과 연결된 시점의 고정 대신에, 시점을 대상의 표면에 흩어지게 하는 즉물성은 대상과 그 의미를 모호하게 한다. 초현실주의 오브제부터 신즉물주의 사진에 이르기까지, 미술사에는 정밀함과 모호성의 역설적 결합을 보여주는 예가 종종 발견된다. 수수께끼의 차원으로 고양된 대상은 독특한 관점이나 해석, 또는 오랜 시간의 흐름을 탄 결과이다. 디자인/예술이 그 주체인 인간에게 호소한다면, 기능적 혹은 심미적 대상에 내재한 인간주의를 흐릿하게 하는 것은 사물이다. 


현대에 인간을 중심에 놓는 사고가 도전받고 있는 즈음에 부상하는 것은 사물이다. 이전시대의 인간이 인공물보다는 자연에 에워싸여 살았듯이, 현대인간은 자연이나 인간보다는 사물에 더 둘러싸여 산다. 이 단계에서 사물은 자연의 버금가는 위상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과거에 자연학(自然學)이 있었듯이, 지금은 사물학이 요구되는지도 모른다. 예술가는 사물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위해 인간이란 단어에 선험적으로 깔린 상징적 의미로부터 벗어나려 한다. 그것은 말 그대로 비인간적인 세계가 확대됨을 말함과 동시에, 비인간적인 세계를 낳는 근본원인이 편협한 의미의 인간주의임을 각성하고 인간이란 범주를 상대화, 해체, 또는 확장하는 것이다. 이때 사물은 디자인도 예술도 아닌, 미지의 대상을 포괄하는 새로운 위상을 가질 수 있다. ‘창안이란 무(無)에서의 창조가 아니라, 기지의 것에서 미지의 것으로 재 맥락화라는 점에서, 사물은 디자이너에게나 미술가에게나 도전의 대상이다. 


문경원&전준호, 뉴스프럼노웨어, 2012

디자인/예술 뿐 아니라 다른 모든 분야도, 같은 대상을 어떻게 보는가, 그렇게 본 것을 어떻게 언어(작품)로 풀어내는가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당장에 알아볼 수 있거나 그것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금방 파악되는 것들은 아무런 흥미도 자아내지 않는다. 그런 것들이 주체에 대응하는 단순한 대상에 머물러 있다면, 사물은 그렇지 않다. 미지의 대상이 바로 사물이다. [사물학] 전의 작품들은 미지의 대상인 사물에서 무한한 해석학적 상상력을 발휘한다. 그것들이 친근한 것으로부터 파생된 것이기에 더욱 흥미롭다. 한편 인간도 단순한 대상의 운명을 벗어나지 못할 때가 많다. 현대인 또한 단순한 대상처럼 그가 어디에 속해있는지 어떻게 활용될 것인지를 파악당하며/파악한다. 작가란 이러한 환원으로부터 비켜가려는 부류다. 이러한 비켜남이 그를 궁지에 빠뜨리게도 하고 긍지를 갖게 하기도 한다. 공유되는 기호, 더 나아가 약호로 환원될 수 있는 대상은 금방 고갈된다. 


끝없이 의미의 보충이 일어나며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대상의 창조는, 극악스럽게 모든 것을 소비의 대상으로 폐기시켜버리는 풍요로운 사회의 빈곤함에 대한 대안이 되어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대상의 새로운 상태인 사물에 주목한다. 그것은 인간 역시도 새로운 상황으로 이끌 것이다. 그러나 우리 앞에 있는 저것들을 어떻게 새롭게 볼 것인가. 어떻게 새롭게 읽어서 새롭게 쓸 것인가. 모든 작가의 고민이 다 거기에 있는 것 아닌가. 작품이라는 미지의 대상을 앞에 둔 관객처럼 말이다. 다섯 갈래로 분포된 [사물학] 전은 미지의 대상을 알려진 몇 가지 범주로 환원하고, 협소한 쓸모와 상징적 의미에 귀속시키고, 구매를 통해서 완전히 소유했다고 믿는 것을 넘어서, 사물과 인간이 동시에 풍요로워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전시장 초입에 걸린 메티유 메르시에의 작품 [드럼과 베이스]는 이번 전시의 주제인 사물학의 개념에 출발점이 된 작품이라고 한다. 


박미나, 114isMVP&KLN;Hadggfxc^, 2008, 이미지 출처, 국제갤러리

몬드리안의 작품을 연상케 하는 엄격한 수직수평선과 삼원색이 사용되었지만, 그것은 또한 물건들이 배열된 선반이기도 하다. 플라톤의 형이상학적 세계를 떠올릴 수 있을법한 기하추상의 세계는 현대적 환경을 구성하는 보편적 원리로 변모한다. 추상은 구체로 상승하는 것이다. [Section 1 :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에서는 무엇인가를 계획하는 디자인의 속성이 예기할 수 있는 유토피아적 관점이 있으며, 이러한 유토피아가 또 다른 관점에서는 디스토피아가 될 수 있음을 말한다. 대체로 소수의 설계자들은 유토피아를 꿈꾸지만, 이러한 설계의 대상이 되는 보다 많은 이들에게 유토피아는 디스토피아로 역전될 수 있다. 가령 소비자 세상은 유토피아적으로 보이지만, 동시에 소비자들은 모든 주도권을 상실해 가는 생산자라는 점에서 당면한 세계가 유토피아일 수만은 없다. [Section 2 : 사물의 언어로 말하기]에는 당대의 참조대상들로부터 온 언어를 취한다. 


인간이 했다기 보다는 고양이가 자판을 마구 밟아대서 만들어진 문자 열 같은 박미나의 작품 제목 [114isMVP&KLN;Hadggfxc^], [111122223333444556677888999000AABBFGgJoVvWwx]은 수많은 기호들의 공존과 중첩으로 이루어진 작품의 구성/해체를 보여준다. 박미나가 쇄도하는 기호들의 세계에 살고 있다면, 다양한 꽃무늬로 이루어진 [월 페이퍼 아카이브]의 윌리엄 모리스는 자연의 세계에 살고 있었다. 19세기에서 21세기에 걸쳐 있는 이 작품들에서 자연에서 기호로, 기호가 기표로 해체되는 단계가 추적된다. [Section 3 : 조망하는 사물들]에서는 물건들의 자리 바꾸기가 일어난다. 신미경의 [트랜스레이션 시리즈]에서 사용되어 닳아 없어지는 비누덩어리는 영원한 미의 표본으로 제시되는 귀중한 컬렉션처럼 연출되었고, 박불똥의 작품 [길]은 못에 의해 포박된 망치를 표현한다. 김보연이 만든 꿈틀거리는 듯한 의자는 인간이 물화되는 만큼이나 물건이 물활론적 생기를 획득하는 현대를 표현한다.


김보연, Twist armchair, 2013

[Section 4 : 기능적으로 변모하는 조각과 미술로 변모하는 가구]에서는 예술에서 사물로 강조점을 옮아가게 한 현대미술 사조인 미니멀리즘의 미학이 있다. 기하학적 구조체가 죽 나열되면서 작품의 구성요소들이 도대체 무슨 관계와 의미를 가지는지 의문에 붙이는 도널드 저드의 작품은, 과거 조각의 기본질서였던 의인론(anthromorphism)으로부터 탈피를 말한다. 로잘린드 크라우스나 핼 포스터같은 논자는 관계적 구성과 환영적 공간을 피하는 것이 미학적으로 관념론을 피할 수 있다고 본다. 이를 통해 지금여기의 사물과 선입견 없이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빨래 건조대라는 일상적이고 기능적인 물건에 막을 씌운 양혜규의 작품은 초현실주의나 미니멀리즘처럼 관객의 시선을 사물의 표면에 띄워놓음으로서, 중심과 표면 사이의 투명한 관계 파악으로 가능한 의미를 탈루시킨다. [Section 5 : 신세기 가내공업사]에서는 3D프린팅의 제작 기법(Digital Fabrication)이 사물의 새로운 차원으로 소개된다. 현박의 [다면 화병 제작소]는 입력된 알고리즘에 따라 직접 3차원 상에서 구현되는 새로운 대상이다. 그것은 공장이 아닌 개인의 생산물이며, 그러면서도 수공품은 아니다. 


장 보드리야르는 [소비의 사회]에서  우리 시대는 자연에서 문화의 세계로 이행하는 양식을 보여 주는데, 그것은 곧 현실이 기호의 체계로 변환하는 과정이라고 말한바 있다. 이러한 기호의 세계에서는 자연 조차도 하나의 시뮬레이션 모델, 즉 유통과정에 재투입된 자연의 기호로 간주된다. 현실은 코드의 요소들의 조합에 근거하는 완전한 인조품인 새로운 현실로 대체된다. 그것은 아름다움과 독창성의 미학 대신에 시뮬레이션의 미학을 강조한다.  일견 서로 섞일 수 없을 것 같은 이질적인 범주들은 전시에 호출된 다양한 미학의 범주들에 상응한다. [사물학] 전은 이러저러한 사물들을 나열한 전시가 아니라, 사물과의 거리를 좁히기 위한 다양한 언어의 시도와 실험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술도 물건도 아닌 미지의 대상으로서의 사물은 포획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접근법이 필요하며, 기존의 언어적 그물망으로는 불가능하다. 말과 사물 사이에 멀찍이 떨어진 이 공간 속에서 치열한 공방전이 펼쳐진다. 


양혜규, 비-접힐수 없는 것들, 2009-2010, Installation view of Closures, Galerie Wien Lukatsch, Berlin, 2010 (Photo Nick Ash)

언어의 공간과 실제(literal)의 공간을 어떻게 만나게 할 것인가. 이 공간에서 거듭되는 도전과 좌절은 하나의 언어적 체계로 환원시키려는 유혹을 낳는다. 자연에서 무의식까지 모든 것을 코드화하려는, 근대부터 시작되어 그 완성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정보시대의 기획이 바로 그러하다. 그러나 체계의 일관성을 위해 실제를 괄호치고 언어만의 자족적 왕국을 건설하려는 시도는  각종 포스트 증후군--포스트 모더니즘, 포스트 미니멀리즘, 포스트 구조주의, 포스트 휴머니즘 등--에 의해 부정되고 있다. 다양한 ‘포스트-’의 세계에서 임의적으로 고정시킨 추상적 현재성 대신에 중요한 것은 지속이다. 지속하는 시공간 속에서의 지각과 체험, 그리고 사물과 몸이다. 사물은 상징적 우주의 매개 없이 그것을 만난 몸에게 직접 질문한다. 질 들뢰즈는 [프루스트와 기호들]에서 진리는 어떤 사물과의 마주침에 의존하는데, 이 마주침은 우리에게 사유하도록 강요하고 참된 것을 찾도록 강요한다고 한다. [사물학] 전은 이 축 위에서 마주친 사물들로 시작될 또 다른 여정을 위한 기회이다. 


출전; 국립현대미술관 웹진 ART:M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