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의 때와 곳을 향한 향수
이선영(미술평론가)
조상은의 그림은 어릴 적에 봤던 작은 스티커나 그림엽서처럼, 그 자체로 자족적인 우주가 있다. 그 속은 따스하고 다채로우며 들어가서 나오기 싫은 그런 세상이다. 그 안으로 파고들수록 바깥세상은 더 차갑고 단조로운 곳으로 다가온다. 30대 초반의 작가가 아직도(?) 이러한 동화같은 세계에 푹 잠겨있다는 것은 신기하다. 그러나 20대 후반에 가슴 통증을 앓으면서, 하루 15시간 작업하고 1시간 요가하고 4시간 자던 시절을 보낸 이에게 그림은 누구에게 보이고 이해받기 위한 것이 아니었으며, 우선 나만의 세상일 수 있어야 했다. 그것은 그 자신만이 온전하게 누릴 수 있는 유아론적 세계였지만,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으며, 세상을 이루는 다양한 풍경에 또 하나의 신기한 세상을 선사하는 그러한 유아론이었다. 물론 지금은 치유의 시기를 떠나 상징들을 이어주는 서사를 정교하게 가다듬고 있는 상황이다.

상록의 싱그러운 세상으로 여행을 떠나요,112.1ⅹ162.2cm, Oil on canvas, 2011
요즘 작품에서 사람과 사람, 또는 풍경의 이 요소와 저 요소를 연결짓는 가느다란 실타래는 공간 속에 시간성을 부여하면서 이야기를 이끄는 선이 된다. 낭만주의 풍경화나 동양화처럼, 자연에 비해 인간의 위상이 미소한 숭고한 풍경은 정신적인 이상향을 추구하는 고독한 단독자의 내면이다. 그것은 단순한 상상을 넘어서 붓과 물감이라는 물질로 구현된 구체적 대상이었기에, 자신 뿐 아니라 타자와도 소통 할 수 있었다. 조상은이 첫 개인전을 통해 보여줄 상징적 우주는 ‘상승과 하강이 뒤범벅된 세상’(전시부제)이다. 자신이 보고 싶은 세상을 자신이 가장 잘 구사할 줄 아는 언어로 오롯이 구현해낸 그 세상은 이런저런 요소들이 조화롭게 어우러질 수 있는 풍경의 형식을 취한다. 작품 [상록의 싱그러운 세상으로의 여행을 떠나요]를 보면, 기암괴석 위에 별장 같은 것이 보이고 전경의 산에 막혀 있는 물 위에 배가 떠 있다. 그림은 불꽃놀이나 축포를 쏘는 듯한 상승하는 기운들로 가득하다.
산, 나무, 물, 배, 창, 상승하는 에너지 등의 요소는 [은행나무 비가 내리는 어느 날]같은 다른 작품에서도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그것은 묘사가 아니라 상징적으로 재구성된 풍경이다. 다채로운 이미지들이 전해주는 이야기는 비슷하다. 조상은의 작품에 나타나는 장소(토포스)는 다소간 정형적인 이야기를 전달하는데, 그것은 토포스라는 용어가 지형학과 수사학을 동시에 함축하고 있음도 알려준다. 그림을 죽 나열해 놓고 보면 한 작가의 그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만큼의 정형적 장면이나 원형적 인물이 있다. 상승과 하강이라는 방향성에 내포된 조상은의 토포스는 ‘토대 없는 심연’(하이데거)을 상징한다. 그것은 현대적 주체가 처해있는 공간성을 표현한다. 그러나 분리는 연결을 위한 조건이다. 하이데거는 이 우주적 공간 일체에 틈새들이 없다면 그 다양한 자리와 방향이 어떻게 조직될 수 있는가를 물으면서, 진정한 시작은 항상 도약에 있다고 강조한 바 있다.

은행나무 비가 내리는 어느 날, 145.5ⅹ89.4cm, Oil on canvas, 2011
조상은의 작품에서 이러한 불연속적 공간성은 시간성과 연결된다. 어딘가를 향한 끝없는 항해는 시간의 화살을 내재하는 것이다. 공간성과 시간성을 연결하는 기류나 연결고리는 작품에서 자주 발견된다. 이 상상적 지형학에서 떨어지는 물이든, 흐르는 물이든 물이 풍부하게 나타나지만, 탁 트여있지는 않다. 고향 마산의 해안 풍경처럼, 바다는 다른 육지에 의해 막혀있다. 그 속에 있으면 주체가 행복해지는 이상적 세계, 즉 유토피아적 세계상은 지금여기가 아닌 미지의 세계이긴 하지만, 조상은의 경우 남국의 황금빛 섬으로 상징되는 이국적 상상력의 산물은 아니다. 산으로 둘러싸인 바다에 떠있는 배는 유년시절을 보낸 고향의 풍경에서 온 것으로, 그녀의 풍경이 따스한 기운으로 가득 차 있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그림의 상상적 지형학에서 심상지도(mental map)는 고향과 연결되어 있다, 종교학자 조너선 스미스는 [자리잡기 to take place]에서 장소에 대한 가치가 담긴 친밀하고 의미 있는 경험을 고향자리(home place)에 대한 성찰로부터 끌어낸다.
저자에 의하면, 고향/자리로서의 자리는 뚜렷이 노스탤지어--‘고향에 돌아옴’의 뜻인 그리스어 nostos에서 파생한 단어--의 범주이다. 고향은 공상들의 응축으로서 지각된다. 고향은 내가 태어난 자리나 내가 살던 자리일 뿐 아니라, 기억이 머무는(housed) 곳이다. 모든 참된 거주 공간은 고향의 속성이 있다. 작품 속 다양한 지역들은 추상적 공간을 넘어 구체적 자리가 된다. 고향의 토포스로부터 비롯된 풍경 속의 물은 자궁 속의 양수처럼 에워싸인 공간에 담겨 있다. 물은 개체의 처음과 최후를 함께 하는 원초적 물질이다. 그러나 물은 중력에 순응한다. 아래로 떨어지고 가닿을 수 없는 심연을 형성한다. 복잡한 산세를 타고 여러 겹 드리워진 폭포수나, 배 아래에서 소용돌이치는 파장은 위로 상승하는 기운과 상대적인 위치에 있다. 물 위에 떠 있는 배는 자아의 상징이었다. 그것은 상승과 하강이라는 두 힘의 역학관계에 의해 조율되는 세상을 탐험하는 내면풍경이다. 이 내면풍경은 아픈 몸을 비롯하여 화가에게 별로 우호적이지 않은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욕구와 욕망으로 가득하다.

부유하는 나무섬, 89.4ⅹ145.5cm, Oil on canvas, 2012

소망나무속을 노닐다, 112.1ⅹ112.1cm, Oil on canvas, 2011
작품 [부유하는 나무섬]은 거대한 나무실루엣이 은하수 천정이 되어 풍요로운 섬을 보호해 주는 모습이다. 섬 전체가 배다. 거대한 나무 아래에서 사람들이 모여서 노는 여행지의 장면으로부터 영감 받은 이 작품은 땅과 하늘을 연결하는 세계수가 그 장소를 세계의 중심으로 만드는 유토피아이다. 유토피아가 일종의 섬이듯, 그곳은 노 젓는 사람도 보이고 섬 전체가 배처럼 움직이는 느낌도 있다. 작품 [소망나무 속을 노닐다]는 유치원이 아니라 미술학원에서 글과 그림을 배운 작가의 기억에 남아있는 거대한 크리스마스트리가 눈에 띈다. 여기에는 다른 작품들에서 발견되는 어느 배보다도 크고 든든한 배가 등장 한다. 소망을 적어서 걸어놓는 나무장식에는 메모지 대신에 그 형태로 뚫린 창과 작은 인간들이 보인다. 위로 피어오르는 흰 연기는 하늘을 향해 소망의 메시지를 전달했던 인류의 풍습을 떠올리며, 그자체로 장면 전체의 훈훈한 기운을 북돋아준다.
조상은의 작품에서 서로 다른 세계를 연결하는 선이나 입구는 중요하며 그자체로 서사를 이끈다. 가령 기암괴석 위에 비현실적으로 서있는 집은 그자체가 의미가 있다기 보다는 창을 그리기 위한 수단이다. 아치형 등으로 나타나는 창은 구멍이며 또 다른 공간을 연다. 작품 [상승-초록빛깔]은 언덕을 이루는 파동 위로 솟구치는 에너지만 집중하여 표현한 것으로, 자연의 풍요를 암시하는 초록의 힘을 증폭시킨다. 상승하거나 하강하는 힘으로 가득한 우주는 물활론적이다. 거기에서 인간은 아주 작게 나타나며, 배, 또는 배에 타고 있는 모습이다. 한명이든 여러 명이든 배 안팎의 인물은 작가 자신이다. 그 그림들은 무엇보다도 조상은의 세계이기 때문에 주인공도 자신인 것이다. 인간이 화면 곳곳에 여럿으로 나타날 경우, 거기에는 애니매이션처럼 비슷한 시각상의 연속에서 야기되는 잠재적 운동감이 있다.

상승-초록 빛깔, 60.6ⅹ72.7cm, Oil on canvas, 2011

상승과 하강이 뒤범벅된 세상, 193.9ⅹ130.3cm, Oil on canvas, 2011
작품 [상승과 하강이 뒤범벅된 세상]은 가운데 등불이 있는 배 그 주위로 또다른 배들이 있는 풍경이다. 나무 숲 사이의 물 안에서 불 밝힌 배가 있는 작품 [생으로의 여행-자화상]이나, 뭔가 강력하고 농밀한 구역 한가운데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배가 있는 작품 [영원의 나부낌]은 세상을 항해하는 주체의 다양한 상황을 알려준다. 큰 등불이 있는 배아래 소용돌이가 있는 작품 [소망여행]은 자아가 봉착한 어떤 심연을 표현한다. 그 심연은 주체를 더욱 풍부하게 할 것인가, 아니면 주체를 삼켜버릴 것인가. 그 경계는 확실치 않으며, 이러한 불확실성은 붓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작가가 어떤 상상의 세계를 재현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림은 단지 어떤 세계를 보여주는 투명한 창에 머물지 않는다. 조상은의 그림에는 작업 과정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질료의 불투명성이 있다. 작가는 작은 그림들로 물감의 다양한 상태가 드러나는 다양한 붓질을 실험한다. 작은 패널들에 그려진 [깊고 무거운 어느 날] 연작들이 그것이다.
그러나 추상은 그 자체로 서있기 보다는 세계의 일부가 될 때 더 큰 힘을 발휘한다. 작품 [사유의 무게]는 푸른 바탕에 얼룩들이 폭포수처럼 떨어지는 일종의 추상화인데, 작가는 거기에 매달리고 떨어지는 흰색의 인간을 흐리게 그려 넣었다, 우연한 사고로 뚫린 캔버스의 사각형 구멍이나 행위의 흔적이기도 한 물감얼룩들은 주체의 어떤 상황을 표현하기 위한 또 다른 방식이다. 여기서 한 획들의 위상은 한 인간을 날려버릴 정도로 강력하다. 작품이 자신의 세계를 보여주는 창에 머물렀다면 그것은 유아론적인 동화의 세계를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작품 곳곳에는 붓질과 채색방식에 대한 다양한 실험이 발견되고, 그것이 서사와 연결되면서 서로를 강화한다. 화사한 색감은 자못 실존주의적 묵직함을 가지는 작품을 저 밑으로 가라앉지 않게 해준다. 이전 작업의 주조를 이루는 녹색과 푸른색은 그자체가 치유를 부르는 색이다. 블랙을 사용하지 않는 화면은 매우 선명하다. 툭툭 던지는 듯한 붓질 아래의 색은 팔렛트가 아니라 화면에서 직접 만들어진다.

생으로의 여행-자화상, 112.1ⅹ162.2cm, Oil on canvas, 2014

염원의 나부낌. 162.2ⅹ97cm. Oil on canvas. 2011
유화로 그리면서도 수채화 같은 투명한 느낌이 독특하다. 대작이든 작은 작품이든 화면 속에는 흘리고, 튀기고 뿌린 자국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차분히 앉아서 내면세계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는 내내 서서 왔다 갔다 하면서 에너지가 분출하듯이 속사포처럼 그린다. 그림은 정적으로 보여도 제작 과정은 동적이다. 그림 속에 상승과 하강의 기운들이 있듯이, 그리기는 화면 안으로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과정의 연속이다. 작은 작품들의 제작 또한 즉흥적 요소가 강하다. 10호 크기의 캔버스에 그날그날 연습하듯이 그린 것들은 그때그때의 순간적인 감성을 절묘하게 고착시킨 것으로, 대작의 부분들을 구성한다. 그것은 작은 작품들을 집약하게 큰 작품으로, 또는 큰 작품을 부분적으로 특화시키곤 하는 조상은의 방식이 붓질에서도 관철된다. 그림 속의 상승과 하강이라는 수직적 움직임이 그러하듯, 이러한 작업방식은 역동성과 불안감을 동시에 준다.
‘상승과 하강이 뒤범벅된 세상’을 헤쳐 나가는 작은 배/자아는 착종된 상태에 빠져있는 지금 여기를 벗어나려는 희망으로 움직여진다. 은총 가득할 그곳은 위/아래, 중심/주변의 갈등이 없는 하늘 높은 곳에, 또는 세상의 중심에 있을지 모른다. 조상은의 작품에 서려있는 유토피아를 향한 초월의 움직임은 상승과 하강이라는 긴장감 있는 구도를 형성하게 했다. 고향 풍경으로부터 온 산, 나무, 물 같은 요소는 수직적 구조에 내재해 있는 초월적 지향성 때문에 야기되었을 불안을 가라앉혀주는 요소이다. 자신을 찾아 떠나는 초월적 여행은 현재의 고통으로부터 구원받겠다는 종교적 충동과도 연결된다. 서구에 지배적인 종교적 전통에 의한다면, 인간은 추락(타락)한 존재이며, 원죄 이전의 낙원으로 가야한다. 낙원은 자신 비롯된 곳이기 때문이다. 조상은의 낙원 풍경은 동시에 실낙원의 풍경이다. 배는 낙원을 향한 여정의 작은 도구이며 지상적 현실 속에서 이런저런 모순에 맞딱뜨려 투쟁하는 고독한 단독자의 은유이다.

상승과 하강이 뒤범벅된 세상-삶과 죽음, 193.9ⅹ334.5cm, Oil on canvas, 2014

사유의 무게, 193.9ⅹ130.3cm, Oil on canvas, 2014
여기에서 분명한 ‘개인의 영성이 지니는 무한한 열정과 객관적 불확실성 사이의 대립’(키에르케고르)은 종교적이다. 조상은의 그림 역시 현재의 고통과 불안이 가지는 의미를 통해 자아를 찾아나가는 것에 있다. 세상에 홀로 던져진 주체의 소외된 상황을 극복하려는 여정에 개인과 역사의 방향이 놓여있다. 이 여정에서 이미지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미셸 마페졸리는 [현대를 생각한다]에서, 이미지가 대우주와 소우주, 보편적인 것과 구체성, 종과 개체, 일반적인 것과 특수성 사이에 존재하는 일종의 중간세계라고 말한다. 물론 저자는 유대-기독교 전통, 좀 더 광범위하게는 이스라엘 유대전통이 이미지에 대해서 아주 오래되고 본질적인 경계심을 지니고 있음을 강조한다. 종교사와 분리될 수 없었던 예술사는 우상숭배와 우상파괴 사이의 사상적 투쟁을 보여준다. 종교의 힘이 약화된 근대에 와서도 모더니즘적 추상의 종말론적 비전이나 금욕주의 등이 거론되곤 한다.
우상파괴론자들은 현상계를 신에 대한 거부의 상태로 파악하며, 그 표현은 자연과의 차이, 완전 무결성(신)과 불완전성(세계) 사이에 존재하는 질적인 차이를 말한다. 미셸 마페졸리에 의하면, 그 같은 분리는 건전한 이성과 상상 사이에 다시 위치하게 될 것이었다. 여기에서 이성이란 자연적 인간 속에서 신의 싹이자 완전무결함의 중추를 말하며, 상상이란 즉시 비상식에 동화되며 인간에게 있어서 동물성 즉 인간 이전의 모습을 보여주는 모든 것, 한마디로 직면했을 때 거리를 두거나 속죄해야 하는 지하와 사악한 세계를 보여주는 모든 것을 대표한다. 그러나 이미지를 낙인찍으려는 세상에 대한 이분법적 시각과는 달리, 이미지적 시각은 어떤 대상과 혹은 사건들을 구체성과 현존성, 그리고 그것이 지니고 있는 역동성에 세심하게 주목한다. 미셸 마페졸리는 종교적 기쁨을 초월이 아닌, 연결하고 관계를 맺는 기쁨이라고 다시 읽는다. ‘연결(신뢰를 통한)(reliance)’은 우리가 타인과 함께 나누는 이미지를 둘러싸며 이루어진다. 종교란 그 어원에 타자와 연결되려는 충동을 내포한다. 그것은 논리적이지도 아니며 합리적이지도 않은 신비스러운 결합을 말한다. 조상은의 작품에 나타나는 여러 요소들 간의 연결망은 그러한 성스러운 접촉과 연결을 말한다. 이때 미학적 인간(Homo aestheticus)은 자연스럽게 종교적 인간(Homo religiosus)과 겹쳐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