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체발생적으로 축약된 몸의 역사
이선영(미술평론가)
지금 광주 비엔날레와 서울의 국립현대미술관에 전시된 작품들 사이에서 관객들이 유추할 수 있는 이불의 작품 여정은 기괴한 자연에서 사이보그로, 그리고 그러한 실체들이 살고 있다고 가정된 도시 생태계이다. 그것은 동시대 예술 뿐 아니라, 만화나 영화같은 대중-하위문화에서도 공유되며, 작가는 이러한 동시대적 주제를 의미있는 형식으로 가시화해 왔다. 동시대인이 공유할 수 있는 보편적 주제를 완성도 있는 형식에 담는다는, 자못 쉬운 듯 하면서도 쉽지 않은 과제들을 수행한 지난 25 년간의 작품들 중심에는 몸이 있다. 몸은 그것을 둘러싼 환경 간의 역학관계 속에서 다양한 형상으로 변주되었다. 몸은 환경으로 확장하고 공격받으며, 그것과 결합한다. 주체와 객체의 경계는 허물어지고 그 와중에 괴물들이 생겨난다. 80년대 말, 이불의 초기 작업에서 괴물들은 제어할 수 없는 살덩어리 같은 형태를 가졌다. 그것은 몸에 착용되어 몸의 경계를 유동적인 것으로 만들며, 몸과 접속하는 기계를 예견하는 것이었다.

cravings_red(1989년작을 2011년 다시제작)
광주의 전시장에서 어둑한 공간에 걸린 뭉글뭉글한 것은 작가가 착용하고 퍼포먼스를 벌였던 것으로, 마치 벗겨진 허물처럼 보인다, 항상성을 유지해야하는 생명체라면 가져야할 적절한 한계를 넘어서 사방팔방으로 왕성하게 생명력을 뻗치고 있다. 붉은 기운이 도는 살덩어리 형태는 여성적 느낌을 주며, 문명이 완벽하게 제어하지 못한 야생적 자연을 떠오르게 한다. 가만히 놓아두어도 꿈틀대는 듯한 형태는 코드를 넘어 탈주하는 자연이 재난 아닌 축제적인 활기가 될 수 도 있음을 보여준다. ‘흥겨운 살’이 판치는 카니발의 무대에 어울리는 그것은 모든 것을 정형화하는 계몽의 사슬을 벗어나려는 원초적 자연이다. 자연보다 위에 있다고 가정된 문명의 주인은 인간이었으며 그 인간은 남성으로 대표되었기 때문에, 이불의 작품은 페미니즘이라는 또다른 동시대적 담론과 연결망을 가진다. 이불이 형상화한 원초적 자연은 더 이상 순종이 아니다. 사방팔방으로 뻗는 촉수들은 그만큼 다양한 접속과 접촉 지점들을 잠재한다.
그것이 몸에 걸칠 수 있는 것이라는 점은 자연스럽게 유기체와 기계의 결합인 사이보그로 이어진다. 자연을 기계적으로 파악한 서구적 관점은 이제 동시대적이 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변화는 단절이 아니라 연속선상에 있다. 자연이든 기계이든 예상치 못한 결과는 있기 마련이다. 1990년대에 발표된 이불의 사이보그는 움직이지 않으며 완전한 형태를 가지고 있지도 않다. 현대미술가의 또 다른 강박관념이 된, 기술에 정통했다는 것을 과시할 필요 없이 그것들이 상징하는 바에만 집중한다. 사이보그들은 성이 없는 기계의 세계에서 성적 차이가 더욱 과장되고 있음을 알려준다. 현실 속 여성보다 더 매력적인 몸매와 능력을 겸비한 사이보그는 더 수동적이다. 조각난 채 고깃덩이처럼 매달린 사이보그 형상들은 인간의 차원을 넘어선 곳에도 여전히 작동하고 있는 재현의 체계를 말한다. 그것은 여성(자연)/ 남성(문명)이라는 이원적 구조의 분업을 통해 남성이 더 경쟁력을 가지게 된, 또는 독점하게 된 과학기술이 여타의 생명들을 타자화한 결과물이다.

마치 사회주의적 전망이 그러했던 것처럼, 사이보그같은 가변적인 육체가 자연에 묶여있는 인간을, 특히 여성을 해방시켜 줄 것이라는 낙관적 전망도 있었다. 그러나 이성과 과학을 일치시킬 수 있는가의 문제는 남아있다. 그것은 플라톤이 꿈꾸었을 법한 이상이다. 어쨌든 이상은 현실보다는 예술에서 더 큰 힘을 발휘한다. 이후 이불은 인간이 품어온 이상의 역사와 대화 한다. 가까운 과거, 즉 근대가 그 대표적인 시기였다. 온통 앞당겨진 미래로 가득했던 근대의 이상주의는 아방가르드의 전성시대이기도 했다. 과학기술은 이상주의를 앞당겨줄 것이라는 기대를 낳았다. 예술 또한 그러한 비전에 조응하여 새로움의 역사가 개막되었다. 그러나 과학기술 자체에 내장된 자연을 앎으로서 그것을 소유하고 지배한다는 전제, 그로부터 비롯된 언어의 통일성과 중앙집중식의 분업은 발전된 생산력의 뒤켠에 남겨진 다수의 타자를 양산해낼 따름이다. 지식과 지배(권력)의 연결이 그때만큼 강한 적도 없었을 것 같다.
여기에서 여성이나 예술가의 자리는 어디인가. 미래사회의 비전을 선취한 1920년대 무성영화 [메트로폴리스]에는 진보된 기술의 매력을 상징하는 여성 사이보그의 선동으로 도시는 혼란에 빠지지만, 종국에는 마녀처럼 희생양이 됨으로서 평화를 찾는다는 이야기가 있다. 여전히 창조주의 입장에 놓인 남성 과학자, 그리고 동물이 기계로 전이 되었을 뿐인 요부의 신화이다. 그러나 감독이나 작품 속 과학자, 즉 창조자가 타자의 관점을 취했다면 발전된 문명 속에서 평화를 향한 인간의 시나리오는 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프리츠 랑 감독의 영화 [메트로폴리스]에는 사이보그 뿐 아니라, 근대적 이상에 의해 건설된 도시가 나온다는 점에서 이불의 작품을 읽는 참조점이 되어줄 수 있다. 결정적인 차이는, 이불에게 있어서는 여성/사이보그가 아니라 도시가 무너진다는 것이다. 2000년대 중반부터 시작되는 이불의 ‘나의 거대 서사’는 주인공들이 등장하지 않는 미래주의적 환경을 형상화한다.


영화 [메르로폴리스]의 장면들
2010년 pkm갤러리에서 전시된 [sternbau]는 혁명과 전쟁을 거치면서 세계를 원점에서 다시 건설하게 될 기회를 가진 근대 건축가들의 들뜬 이상을 오마주했다. 산업혁명에 의해 가능해진 재료와 기술로 구축될 미래주의 풍의 건축은 자연이나 문화유산이 상징하는 녹색과 고동색의 오래된 묵직함이 아니라, 태양과 가까워지는 투명하고도 경쾌한 구조물로 공중에 붕 떠있다. 섬세하고 취약하며 장식적이기까지 한 이 작품에 사용된 재료는 근대적이지만 조합의 방식은 근대적이지 않다. 작가는 투명한 재료를 불투명한 방식으로 배열한다. 여기에서는 시각적 공간보다는 지각과 기억이 작동되는 시간이 중요하다. 근대 건축 및 도시의 축소모델이라 할 수 있는 이 영롱한 구조물은 진보의 파토스로 가득했던 시대의 희망사항에 깔려 있는 역설을 표현했다. 거기에는 지배적 질서로 고착화되기 이전 발생기 모더니즘의 활기같은 것이 반짝거린다. 거대서사의 종언을 말한 리오따르가 말했듯이, 발생기의 모더니즘은 더 이상 모더니즘이 아니다.
작품구상들이 담긴 스케치들로 에워싸인 [sternbau]가 비유에 머물렀다면, 현대미술관에서의 전시는 무대처럼 연출된 미래 도시의 한 켠에 관객들을 들여보낸다. 이불의 거대 서사는 한 목소리에 억압되어 있는 또 다른 소리들을 듣는다. 누군가의 유토피아는 다른 누군가의 디스토피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보는 사람이 말한다면, 듣는 사람은 쓴다. 말하기가 아닌 쓰기의 대목에서, 드로잉은 큰 역할을 한다. 몸과 무의식이 직접적으로 분출될 수 있어 보다 자연에 가까운 드로잉은 질서 속에 내재한 카오스, 동일성 속에 내재한 타자들이 풀려나올 기회를 제공한다. 그러다보면 마침내 구상을 실현시킬 기회가 온다. 잠재성과 현실성과의 긴밀한 관계 속에서, 규모는 커져도 개념이나 세부가 무뎌지지는 않는다. 쓰기가 탄탄했기 때문에, 큰 목소리가 공허해지지 않는다. 그것이 이불의 특징이다. 거대서사의 여정에서, 드넓고 높은 장소에 울려 퍼질 하나의 소리를 대신하는 것은 막 지나갔을 파국적 상황에 남아있는 메아리들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전시는 유기적, 기계적 돌연변이체라는 또다른 주체보다는, 그 주체들의 서식지라 할만한 도시 생태계를 구현한다.

[태양의 도시]
그러나 대폭발 또는 붕괴라는 이미지가 선명한 그 생태계는 사이보그만큼이나 원초적이고 미래적으로 다가온다. 주체와 객체는 테크놀로지를 매개로 서로에게 깊숙이 스며든다. 자연의 기계화와 기계의 자연화를 통해 양자는 공진화한다. 거기에는 주거공간을 기계로 간주했던 근대건축의 유토피아적, 또는 디스토피아적 비전이 있다. 그 기계는 이상을 실현할 수 있을까. 아니면 시한폭탄처럼 애초부터 그 한계를 내장하고 있었을까. 거대 기계의 파편들이 공중과 바닥에 산재한 [새벽의 노래]와 [태양의 도시]라는 거대서사의 결말은 원래의 그 출발(역사주의, 진보주의)이 그러했듯이 종말론적이다. 전체적인 조망을 가지기 힘든 안개와 거울반사는 지금 여기 지각과 짧은 기억을 원할 뿐, 근대적 이상이 요구했던 기원과 미래를 향한 장기적 비전을 무력하게 한다.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저편에 여전히 환영의 불빛이 깜빡거리고 있지만, 현실일지 허구 일지 모를 거기와 여기 사이에 깨진 퍼즐같은 미로가 놓여있다. 반쯤은 동물이자 기계인 현대인들은 신비와 침묵에 휩싸인 미래주의 풍의 폐허를 소요하면서 불확실한 좌표를 체험한다.
출전; 이불 작가와의 대화(국립현대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