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의 목소리들을 받아쓰기
이선영(미술평론가)
얼기설기 엮여 있는 각목들 뒤로 화면 가득 노을이 가득히 펼쳐지는 영상설치 작품 [징후; 무너지는 것의 무게]는 뭔가 소멸하고 무너지는 비극적 분위기가 있다. 다른 면에서 흘러나와 영상과 함께 읽혀지도록 배열된 소설적 텍스트는 날아가는 새들이 더 이상 무리 짓지 않는다는 섬뜩한 사실에 대한 경고를 담는다. 짐승들이 모종의 치명적인 돌림병에 의해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는 상황이 인간사회에도 적용될 때, 사회의 구조들은 그 내부로부터 붕괴해 갈 것이라는 메시지이다. 나지막한 섬들 위로 노을이 펼쳐지는 시적 풍경은 어떤 한 문명의 종말을 예시하면서 활활 타오르다가 어둠 속에 감긴다. 타자를 알아보지 못하는 자연의 병적인 상황은 자기만 아는 현대인의 소아병적 상황과 연계된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알아보지 못하게 된 타자를 무게라는 방식으로 감지할 수 있다고 말한다. 서로를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게 될 때, 서로를 묶은 끈에서 느껴지는 무게로 존재를 확인한다는 것이다.

[징후; 무너지는 것의 무게]
이러한 맹목(盲目)적 상황에서, 냄새, 소리, 온기, 촉감 같은 다른 요인을 제치고, 무게라는 개념을 주요 변수로 삼은 점이 흥미롭다. 그것은 생물학적인 본능이나 인간적 감상주의보다는, 물리학이라는 좀 더 썰렁하고 가치중립적인 맥락에 나(동일자)와 너(타자)를 놓는 것이다. 무게는 중력 뿐 아니라 끌림을 야기한다. 제임스 글릭의 [아이작 뉴턴]은 뉴턴의 중력법칙이 수립되기 전에 ‘gravity’라는 단어가 무거움을 뜻했다고 지적한다. 무거움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과 달리, 뉴턴은 ‘끌리다(gravitate)’라는 의미를 강조했다. 뉴턴에 의하면 달은 지구를 향해 끌리고(gravitate) 이러한 중력(gravity)의 힘에 의해 당겨져 궤도를 유지하게 된다. 모든 행성이 서로에 대해 무게를 갖고 서로에 대해 끌리듯이, 인간 또한 그러할 것이다. 중력이라는 가장 보편적인 자연 법칙은 우주에 있는 물질의 모든 입자는 다른 입자를 끌어당긴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중력이 서로 떨어져 있어도 공동을 가로지르는 작용이 있다는 자연 법칙이듯, 우리는 서로 각자이지만 각자의 무게로 인해 서로를 끌어당기고 이 땅위에 터전을 일구고 살아나간다. 이러한 공공의 삶이란 자연의 힘에 버금가는 보편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중력은 뉴턴에 의해 수학적으로 증명되었지만, 여전히 마술적이고 신비로운 분위기가 있었다. 제임스 글릭은 인력이나 반발력처럼, 원격 작용에 의한 힘 개념은 당시에 주로 연금술사나 마술사들이 쓰던 용어였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뉴턴의 중력 법칙이 우주를 관장하는 절대적 타자(신)의 존재를 배제하는 것도 아니라는 점도 강조한다. 나 이외의 존재에 대한 감지, 즉 타자에 대한 인식은 우주 뿐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적 삶에 대한 빛을 던져준다. 독일에서 미디어 아트를 전공하고, 이후 섬 지역을 비롯하여 수 년 간 커뮤니티 기반 예술(Community-based Art)의 영역에서 실험 해온 고영택에게, 공동체, 즉 나와 공존하는 타자에 대한 인식의 흔들리는 지점이 이 작품에서 발견된다.

공동체3부작-연인들의 공동체-남산 안산
현대사회에서 공동체가 가능할 수 있는가, 더 나아가 예술에서 공동 작업이 가능할 수 있는가에 대한 밑바닥까지의 회의를 거치지 않고서는 공동체에 기반 하는 예술은 피상적으로 흐르기 쉽다. 예술은 선한 의도와 밝은 계몽주의로부터 시작될 수는 있지만, 그것만으로 유지되거나 끝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는 타자가 또한 질병을 일으키는 바이러스 같은 존재임도 명확하다. 타자는 개체의 경계를 침투하여 동일성을 교란한다. 그러나 개체의 동일성이라는 것 또한 현대사회의 병적 징후라 할 때, 동일성을 교란하는 타자의 침투란 백신을 맞는 것 같은 치유의 효과도 있을 것이다. 작가는 ‘개체 이며 전체, 전체이며 개체’을 강조하고, ‘너는 시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논리는 굉장한 도약이지만, 타자와의 관계 자체가 비대칭에 근거한 도약과 비약으로 점철되어 있다. 모든 공통성의 결핍을 전제로 하는 관계로 인간관계를 사유할 필요가 있다고 보는 모리스 블랑쇼는 나와 타자간의 관계는 어떤 척도로도 환원될 수 없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작가는 개체와 전체가 더 이상 대립되지 않는 상태를 꿈꾼다. 고영택은 그러한 온전한 개체를 ‘시’라고 규정하면서 예술의 목적을 예시한다. 그에게 예술은 개인을 초월하는 타자성을 말하는 또 다른 방식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공동체 예술이란 표현은 동어반복에 불과하다. 그것은 진정한 예술은 공동체에 기반하고, 공동체를 묶는 것은 예술이라는 것을 말한다. 이는 예술이 독특한 개인의 표현이며, 사회의 작동원리는 개인의 이해관계일 뿐이라는 지금의 지배적 상식과는 상당히 유리되어 있는 생각이다. 개인이란 예술보다는 돈이나 지위로 평가, 또는 표현된다는 지금의 지배적 현실과 상당히 거리가 있는 판단이다. 그러나 이러한 파편적 현실의 잠재적 차원에 공공성이 있다는 예감이다. 고영택의 작품에서 공공성은 추상적인 차원이 아니라, 구체적 사례를 통해 전개된다. 현재에도 진행 중인 작품 공동체 3부작은 연인이라는 친밀한 차원에서 동호회라는 사회적 차원, 죽음이라는 형이상학적 차원에 이르는 세 가지 계열의 공동체를 주제로 한다.

공동체3부작-죽음의공동체-홍제천
먼저 ‘연인들의 공동체(같이 있음)’는 등산로에서 포착된 연인들과 남산에서 자물쇠를 잠그며 아기자기하게 남녀 간 사랑을 확인하는 풍경이 나온다. ‘사랑은 의지와 상관없이 생겨났다 사라져요’라는 작품 속 대사는 가장 강렬하면서도 가장 취약할 수 있는 두 개인 간의 공동체를 예시한다. ‘죽음의 공동체(거기 있음)’는 강변 산책로에서 운동하는 사람과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이를 회상하는 인물을 등장시켜, 죽음을 통해 타인에게 존재하는 자신의 부분을 드러낸다. ‘C는 D가 죽은 뒤 모든 것을 잃어버린 듯한 상실감에 하루하루가 힘들다’는 대사는 깊은 상실감을 주지만, 지금 살아서 건강을 챙기려 애쓰는 다른 사람들 또한 그 옆에 흐르는 물처럼 함께 도달할 죽음의 운명을 피할 수 없다. 타인의 부재는 또한 자신의 죽음을 예견케 한다. 그것은 죽음이 살아남은 자를 하나로 만들게 하고, 종국에는 모든 사람의 공동운명이 된다는 사실의 확인이다.
‘취미의 공동체(그냥 있음)’는 그냥 있는 것을 못견뎌하는 인간들끼리의 얽힘을 말한다. 빈 시간을 채울 그것이 뭐든, 개인의 이익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다. 고영택의 작품에 비친 테니스, 야구 같은 동호회들은 마냥 순수하지만은 않다. 그것은 회사 내의 결속, 사업 파트너 간의 유대관계, 자기계발, 가족의 화합 또는 가족에게 미안한 어쩔 수 없는 일 등으로 비춰진다. 공동체 3부작은 소설적 대사가 함께하는 사례들로, 현실의 공동체로부터 들려오는 소리를 쓰는 작업에 해당된다. 고영택은 잡지 [경기문화 마루]에 쓴 글에서, ‘현재를 살아가는 내게 동시대의 소리를 기록하고 작업으로 옮기는 일’의 중요성을 말한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들으면서 배우게 되는 각기 다른 삶의 태도와 이해의 방식은 항상 나의 예상을 뛰어 넘는다’고 한다. 예술이든, 공공예술이든 이처럼 자기 스스로도 매혹되는 지점이 없다면, 지속 가능하기 힘들다.

공동체3부작-취미의공동체-한강

동호회 작업
얼마 전에 인천 송림동에서 진행한 [메아리 라디오 극장]은 3km 반경 내에서 들을 수 있는 소 출력 라디오라는 매체를 가지고 지역 주민과 소통한 작품이다. 그것은 일주일에 한 번씩 주민 한명의 이야기를 방송으로 내보내고 영화도 찍는 골목 안 방송국이었다. 개인의 사연을 재구성한 내용과 옛 음악 및 영화와 함께 한 이 프로젝트는 주 대상이었던 어르신들의 옛날 추억을 떠오르게 하면서, 타자의 이야기를 듣고 자기 이야기를 시작하게 한다. 그것은 단순히 개인의 일대기를 재현한 것이 아니라, 생성의 차원에 놓인다. 가령 103세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기억이나 사건들이 조금씩 덧붙여진다는 사실이다. 함께 듣는 라디오나 함께 만드는 영화 등을 통해, 한 세대의 회복된 기억과 말은 현대의 도시계획에 의거하여 무조건 사라져야 한다고 간주되는 달동네만큼이나 타자화 된 것이다. 타자적인 것은 억압되어 있지만, 이질성과 새로움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그것은 동일성의 원리가 지배하는 현 사회에 대한 반성과 도전, 대안이 될 수 있다. 왜 동일성이 문제시되는가. 벵상 데꽁브는 [동일자와 타자]에서, 동일자의 지평은 전체성이고, 그것은 무한히 자기 자신을 확장해 가는 힘이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예술을 차이이다. 질 들뢰즈에 의하면, 존재를 구성하고 우리가 그 존재에 대해 사유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바로 차이이다. 현대예술은 고전주의 이후, 줄곧 이 타자에 관심을 가져왔다. 그것은 하나의 목소리가 아니라, 다수의 소리였다. ‘단성이 아니라 다성’(바흐친)이었다. 낭만주의는 하나의 결정적 지점에서 보고 말하는 고전주의에 대항했다는 점에서 현대예술의 출발점이 된다. 이 다수의 소리를 지칭하는 명칭이 ‘영감, 무의식, 기회, 우연성, 계시’(옥타비오 파스) 등, 그 무엇으로 불리웠든 간에 그것은 언제나 ‘타자의 목소리’(옥타비오 파스)였던 것이다. 그것은 동시에 존재의 다원론과 연결된다. 그것은 단순히 타자와 하나 됨에 대한 열망에 머물지 않는다.

엠마누엘 레비나스는 [시간과 타자]에서 일치, 또는 융합을 염두에 두는 플라톤의 에로스에 대하여 비판한다. 레비나스에 의하면, 무아경의 혼융은 관계항의 이원성을 충분히 유지하지 못한다. 에로스의 경험이야말로 타자의 타자성, 즉 타자와의 차이를 체험할 수 있는 경험이다. 타인과의 관계, 그것은 타자의 부재이다. ‘어떻게 나는 너 안에 흡수되지 않고 나를 잃지 않으면서 너의 타자성 안에서 나로 남아 있을 수 있는가. 어떻게 자아는 자신에게 타자가 될 수 있는가’라는 레비나스의 문제의식은 타인과의 관계 뿐 아니라, 예술에도 해당될 수 있다. 레비나스에 의하면, 타자의 출현과 더불어 내가 타자를 영접하고 대접할 때 진정한 의미의 주체성이 성립된다. 그러나 레비나스는 타자와의 관계가 공동체와의 전원적이고 조화로운 관계도 아니며, 우리가 타자의 입장에서 봄으로서 우리자신이 그와 유사하다고 인식하는 공감도 아니라고 말한다.
타자와의 관계는 하나의 신비의 관계이다. 그것은 미래처럼 손에 거머쥘 수 없는 것이며 우리를 엄습하여 사로잡는 것이다. 미래, 그것은 타자이다. 미래와의 관계, 그것은 타자와의 진정한 관계이다. 이 미래에는 죽음 또한 포함된다. 레비나스에 의하면, 죽음의 접근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절대적으로 다른 것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의 고독은 죽음을 통해 굳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음을 통해 깨어진다. 고통을 통해 자신의 고독을 더욱 팽팽하게 지탱하고 죽음에 직면해서 설 수 있는 존재만이 타자와의 관계가 가능한 영역에 자신을 세울 수 있다. 예술, 그리고 공동체는 모두 죽음에 가까운 극단적이면서도 내밀한 체험을 요구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고영택의 작품 [징후; 무너지는 것의 무게], [연인들의 공동체], [죽음의 공동체]는 타자의 철학이 흐른다. 이러한 타자의 철학으로 동시대 유력한 담론으로 부상하고 있는 예는 ‘무위의 공동체’(장 뤽 낭시), ‘불가능한 공동체’(모리스 블량쇼), ‘도래하는 공동체’(조르조 아감벤) 등을 꼽을 수 있다.

[메아리 라디오 극장] 공개방송
실제에 있어서나 작품에 있어서나 고영택의 목소리는 나지막하다. 공공성이라는 대담론을 구사할 때 통상적인, 자신의 큰 목소리 때문에 타자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오류에 빠지지 않는다. 또한 듣는 것에만 머문다면 자신이 들었던 타자의 소리를 또 다른 타자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할 길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쓴다. 작품이란 그것이 어떤 형식을 가지든 간에 쓰는 것에 해당된다. 작품이란 문학의 형식이 아니어도, 말하기/듣기와는 다른 쓰기의 차원을 가진다. 말하고 듣는 것은 홀로 할 수 없지만, 쓴다는 것은 혼자만의 작업이다. 쓰기란 예술의 개별적 차원을 말한다. 이 자의식적인 과정을 통해서 집중적으로 들려져야 할 타자의 소리가 선별되어 기록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작은 목소리도 큰 울림을 야기할 수 있다. 공공성에 무게를 중심을 두는 예술은 헌신적일 뿐 아니라, 뛰어난 작가 역시 요구하는 것이다. 일회성 프로젝트를 넘어서 그 현장을 넘어서도 자신의 문제로 지속적으로 안고갈 수 있어야 한다. 프로젝트/개인작업 간의 괴리는 이 분야에 몰두하는 모든 작가들의 과제로 남겨져 있으며, 고영택 역시 ‘2 track’의 상황에 있다. 그의 향후 작업은 이 평행선이 수렴되는 지점, 또는 분열의 시점 어딘가에 놓여 있을 것이다.
출전; 인천아트플랫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