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의 투명성을 교란하는 몸의 불투명성

 

이선영(미술평론가)

 

시각은 인간의 감각 중 가장 지적인 것이기에, 본다는 것을 문제 삼는 작가, 특히 화가의 작품은 인식론적인 문제가 얽혀 있는 탐구적 경향에 기운다. 본다는 것과 관련하여 육안과 경쟁하는 여러 가지 광학기계의 시점, 특히 사진과의 관계는 피해 갈 수 없다. 그러한 문제의식의 한가운데 있는 작가 최영의 [두 눈으로 본 그림] 시리즈는 수년간 두뇌 뿐 아니라 눈과 손을 혹사시켜 왔다. 사실, 보기와 그리기라는 극히 자명한 듯한 관계 속에는 여러 차원이 개입되어 있다. 그것은 가장 단순하게는 입력과 출력의 문제이다. 입력된 것과 출력된 것이 똑같을 수 없음은 생활의 모든 차원에서 확인된다. 가령 읽기와 쓰기, 듣기와 말하기, 사물과 언어 사이에는 간극이 있다. 두 항 간의 균열과 간극이 없는 이상적 조합, 예컨대 훈련된 눈과 훈련된 손의 조합은 형식적 아카데미의 전수 과정에나 필요할 뿐이다. 

 

 The picture of two eyes - horse drawing, 91 x 116.8cm, oil stick and oil on canvas, 2014

 

 The picture of two eyes - hand drawing, 91 x 116.8cm, oil stick and oil on canvas, 2014


 

그 간극을 좁히기 위한 과학기술도 나날이 발전되고 있고--가령 3D 프린팅 기술은 제3차 산업혁명이라고 평가 된다--그러한 기술들이 유포하는 시각들은 다시금 인간에게 피드백 되기에, 현대 화가의 문제는 단순히 눈과 손의 문제에 머물지 않는다. 사실 다양한 광학기계들은 화가들의 오랜 도구였다. 최영은 카라밧지오, 베르메르, 앵그르, 호크니같은 대가들의 예를 든다. 그의 최근 작품들은 포커스가 달리 맞춰진 듯한 두 이미지를 병렬시킨다. 한 화면에는 스케치풍의 이미지를 그리고 있는 손의 손 부분을 극사실적으로 묘사하고, 다른 화면에는 스케치 부분에 포커스를 맞춘다. 포커스가 맞춰지지 않은 스케치나 손은 모두 시차에 의해 흐릿해진 모습이다. 손에는 스케치를 그렸을 때 사용했던 필기구가 쥐어져 있다. 어떤 것은 연필, 어떤 것은 오일 스틱 등, 화면 저편에 그려진 이미지에 따라 달라진다. 남자 손이지만 곱디고운 피부는 그리기 외의 삶의 어떤 노동으로부터도 면제된 모습이다. 

 

언뜻 보면 두 화면 모두 뭔가 그리는 과정을 담은 사진 같다. 특히 손부분의 흐릿함은 그리는 중의 동세를 포착한 것 같기도 하다. 원경의 드로잉과 달리 전경의 손은 화면에 바짝 붙어서 세필로 집요하게 그린다. 이러한 부분은 그저 그리기의 즐거움에 빠져 작업한 최근 풍경화들과 큰 차이가 있다. 만약 그리는 대상과 그리는 주체의 간극을 표현한다는 개념이 중심에 있다면, 사진으로도 가능할 수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그 두 화면이, 그리고 두 이미지가 모두 그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이 신기에 가까운 그리기 기술은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것인가를 묻게 된다. 우선 왜 손과 그림일까라는 질문이 있을 수 있다. 작품의 일부를 이루는 극사실주의는 기술 뿐 아니라, 시간이 많이 드는 작업이다. 손을 제외한 부분이 스케치가 아니라, 작품 [steroscopic](2012)처럼 조각 작품이거나, 작품 [망막에 비친 그림-portrait](2010)처럼 그림을 그리는 자기 얼굴 같은 것이라면 노고는 x2가 된다. 

 


Choi Young   Binocular parallax   91x71.2cm  oil on canvas   2011

 

Choi Young   Binocular parallax   91x71.2cm  oil on canvas     2011

 

화실에 수인처럼 갇혀서 가장 많이 보는 것이 하얀 캔버스 위에 그림을 그리는 자기 손이기에 손은 모든 작품의 중심에 있다. 손 및 손이 구사하는 기술은 작가가 보았던 것이 무엇인가를 증명하는 핵심이다. 최영은 보기-그리기의 조합이라는 최소한의 조건 속에서 최대한의 논의를 끌어내려 한다. 특히 육안이 가지는 양안시차가 적용된 이미지는 크고 작은 인터페이스를 채우는 사진을 상대화하는 시점이 있다. 2012년 개인전의 부제 ‘stereoscopic’이 알려주듯, 최영은 시각의 역사에 있어 큰 전환점을 이룬 사진과 비슷한 시기에 발명된 입체경(stereoscope)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양안시차(Binocular parallax)가 적용된 회화란 ‘왼쪽 눈과 오른쪽 눈의 거리와 차이로 인해 생기는 시각현상을 두 개의 화면을 통해서 즉흥적인 드로잉과 극사실적인 표현으로 그리는’ 것이다. 사진이 기록도구는 물론 예술로도 승승장구하고 있을 때, 장난감으로 머물다가 사라진 것이 입체경이다. 

 

그의 작업실에는 옛날 스타일의 입체경이 있는데, 아직 대세가 되지는 않았지만 곧 인간의 눈을 사로잡을 3D 기술의 맹아를 갖고 있다기에는 매우 소박하게 생겼다. 입체경은 외눈박이 괴물(cyclops)같은 카메라와 달리, 인간의 양쪽 눈을 응용한 것으로, 양안으로 바라보는 시각에 대한 작가의 관심에 부응한다. 그는 ‘만약 단 하나의 렌즈가 아닌 두 개의 렌즈를 활용해 양쪽의 시각을 운동시키는 입체경이 19세기부터 지금까지 현대사회에 사진이나 카메라보다 더욱 일반화 되어왔다면 우리의 시각문화는 어떻게 변했을까’를 물으면서, 사진을 매개로한 다양한 복제매체가 지배하는 21세기에 ‘아직도’ 그리고 있는 자신의 행위를 변호한다. 2012년 작가 노트에는 ‘언젠가 작업실 공간을 찍은 사진과 함께 주변을 둘러보던 중, 사진에는 모든 정보가 스며있지만, 내가 느꼈던 입체감은 담아내지 못한다는 사실’에 대한 깨달음이 담겨 있다. 

 


Choi Young   Stereoscopic  oil on canvas  90.9 x 72.7cm  2012

 

그래서 그는 ‘캔버스에 실제 두 눈으로 바라 볼 때와 같은 장면을 표현하고’ 싶었고, ‘대상과 거리에 따른 입체감이 다르게 보이기 위한 장치로서 두 개의 캔버스를’ 마련했다고 말한다. 그렇게 함으로서 ‘마치 망막에 비친 그림처럼’ 보이길 원했다. 그러나 단안이든 양안이든, 한정된 조건 속에서 보기에 치중하다보면, 물신적 시각을 피할 수 없다. 최영의 초기 작업인 2009년의 작품 [불러다 준 그림] 시리즈는 시각 실험이라는 미명아래, 화실에 갇혀있는 지금처럼 인터넷 세상에 갇혀있었던 산물이다. 그때 그는 ‘저장 이미지 중 개인적인 취향을--프로이트, 부게로의 누드화, 마네의 [풀밭위의 식사], 쿠르베의 [세상의 기원] 등, 명작들의 일부분이나 노골적인 성애 이미지들’을 그렸다. 인터넷을 채우고 있는 사진술은 세상을 시각적으로 객관화하고 범주화하는데 남용되곤 한다. 그것은 메두사의 응시로 인해 돌로 변한 듯 굳게 하는 시선의 폭력성을 내재한다. 포르노에서 전형적이듯이 응시(gaze)의 주체와 대상 간에는 권력관계가 내재되어 있다. 

 

최영의 초기 작업에서 응시에 대한 관심은 보다 폭넓은 시각성(opticality)의 문제로 확장되었다. 핼 포스터가 편집한 [시각과 시각성]에서, 핼 포스터는 ‘시각(vision)은 사회적이고 역사적이기도 하며, 시각성(visuality)은 신체와 정신을 포함한다’고 시작한다. 여러 저자들이 참여한 이 책은 카메라로 대변되는 하나의 강력한 시각 대신에, 시각의 신체성을 강조함으로서 동일자(the same)로 전유되거나 혹은 타자로서 엄격히 분리되지 않게 해야 한다는 방향성을 가진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자면 최영의 작품은 차이가 억압되지 않도록, 다양한 시각성들이 작동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동시대 담론에 조응한다. 요컨대 카메라로 대변되는 고정된 단일한 눈은 비판되어야 했다. 마틴 제이는 [모더니티의 시각체제들]에서 근대의 지배적인 시점은 두 개의 눈이라기보다는 하나의 단일한 눈, 이는 곧 앞에 놓여있는 장면을 하나의 구멍을 통해서 들어다보는 어떤 고립된 눈이라는 방식으로 착상된 것이라고 지적한다. 

 

The picture of two eyes - Horse drawing  228 x 175cm  oil, oil stick on canvas  2013

 

후대의 과학자들에 의해서 입증된 것처럼 ‘불규칙하고 단속적인’ 움직임들로서 하나의 초점에서 다른 초점에로 옮겨 다니는 동적인 눈이라기보다는, 정적이고 깜박거리지 않는 고정된 눈으로서 이해된 바로 그 눈 말이다. 노만 브라이슨의 용어로 하자면, 그 눈은 일별(glance) 보다는 응시(gaze)의 논리를 따랐으며, 그리하여 영속적인 하나의 시점에로 환원되고 탈신체화된 시각을 산출한다. 마틴 제이에 의하면, 화가의 응시란 현상들의 흐름을 정지시키고 어떤 유리한 조망지점에서부터 시각 장을 관조하는 것이다. 근대는 이러한 응시의 차가움이라는 시각 질서가 채택되었다. 화가나 관람자와 분리되어서 그 맞은편인 캔버스 위에 묘사된 시각 장은 자본주의적인 교환의 순환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운반 가능한 하나의 상품이 될 수 있었다. 마틴 제이는 하이데거를 인용하면서, 기술공학적인 세계관을 통해 자연 세계는 지배적인 주체의 감시와 조작을 위한 고정된 보존 물로 변형되었다고 비판한다.

 

그것은 전적으로 세계 밖에 존재하는 비역사적이고 무관심적인 탈 신체화된 주체에 특권을 부여하며, 세계는 오로지 멀리서만 인식될 수 있다고 암시한다. 그러므로 인간중심주의(humanism)의 특징인 초월적 주체성이라고 하는 의심스러운 가정--메를로 퐁티가 세계의 살이라 즐겨 불렀던 것 속에 우리가 파묻혀 있음을 완전히 무시하는--이 근대적 시각 체제에 내재하게 된다. 그러나 노먼 브라이슨의 [확장된 장에서의 응시]가 말하듯이, 응시도 확실한 것이 아니다. 노먼 브라이슨은 말 하는 주체가 발화의 중심에 있지 않은 것처럼, 보는 주체가 시각 경험의 중심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내가 볼 때 내가 보는 것은 나의 봄에 앞서 이미 놓여 있던 궤도들 혹은 의미망들에 의해 형성된다. 나 자신은 내가 말할 때 어떤 중심에 머무른다고 느낄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나를 중심에서 밀어내는 것은 언어의 의미망이다. 정신분석은 타자의 장 위에서 이루어지는 말하기의 경험을 알려준다. 사실, 시각은 타자의 장 주변에서 전개되는 것이다. 

 


Choi Young   Stereoscopic   oil on canvas  193 x 130.3cm  2012

 

[시각과 시각성]에 포함된 조나단 크래리의 논문 [시각의 근대화]는 카메라의 시점을 더욱 근본적으로 문제 삼는다. 이후의 논의는 이 논문을 중심으로 전개한다. 가령 카메라의 원시적 형태인 카메라 옵스큐라는 그 원리가 적어도 2천년 전부터 알려져 있었는데, 그것은 권력기술과 깊이 연루되어 있다. 이런 관점에서 카메라는 근대의 발명품이라기보다는 서양의 시각 전통의 일부로 봐야 한다. 이토우 도시하루는 [사진과 회화]에서 예술이라는 구조를 크게 흔들어 놓기 시작했던 최초의 사건이 사진의 출현이라고 평가하지만, 오히려 사진이 원래 미술사의 논의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주장도 있음을 지적한다. 그는 피터 가라시의 연구를 인용하면서, 사진의 영향을 받지 않고도 회화가 이미 사진적 시각을 갖고 있었다는 사례를 든다. 피터 가라시는 근대회화에서 확연한 외계(外界)를 잘라내는 방법이나 시점의 위치를 정하는 방법 등 사진적 재현과 표현방식 뿐 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로는 원근법이라는 개념을 통해 특정 순간, 특정 시점에서 대상을 재현하는 형식의 공통점으로부터 사진과 회화의 관계를 읽는다. 

 

다시 조나단 크래리의 논의로 돌아오자면, 카메라 옵스큐라는 관찰자에게 무엇이 지각의 진리를 구성해주는지를 규정해주는 수단이었고, 또 일련의 고정된 관계들의 윤곽을 그려줌으로서 관찰자가 그러한 관계들에 대한 주체로서 설정되도록 한다. 카메라 옵스큐라는 세계에 대한 객관적 진리에의 접근을 보장해주는 장치였던 것이다. 카메라 옵스큐라야말로 인간의 인식을 세계에 대한 순수하고 객관적인 관찰에 입각하려는 의도에 적합하다. 왜냐하면 카메라의 구멍 혹은 창이란 그로부터 세계가 논리적으로 연역되고 재현될 수 있는 수학적으로 규정이 가능한 단일지점에 상응하기 때문이다. 단안 모델은 양쪽 눈에 비친 서로 다른, 따라서 일시적이고 잠정적인 이미지를 서로 합치시켜야 한다는 어려운 문제를 아예 배제한다. 원근법이나 기하학적 광학과 마찬가지로, 단안이라는 성질 역시 르네상스적 약호(code)들 중 하나였다. 

 

Choi Young   Stereoscopic  oil on canvas  193 x 130.3cm  2012

 

르네상스는 그러한 약호들을 통해서 시각적인 세계를 체계화된 불변적 상수들에 따라 구성하며, 또 그러한 약호들로부터 어떤 불일치나 불규칙성도 축출하는데, 이는 동질적이고 통일된, 그리고 완전히 읽어낼 수 있는 공간의 형성을 보증하기 위해서였다. 카메라 옵스큐라의 엄격성, 선적인 광학체계, 고정된 위치, 내부와 외부의 범주적 구분, 지각과 대상의 동일시 등의 관례는 전통사회가 무너지는 유동적인 근대에 너무도 경직된 것이었다. 그러나 19세기에 와서 두 눈의 차이, 즉 인간은 양쪽 눈으로 서로 약간 다른 이미지를 본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19세기에 발달한 생리학은 시각에서 신체가 새로운 중심으로 등장함을 알려준다. 이러한 새로운 과학의 흐름에 의하여 전에는 믿을 수 없는 신체의 약점이 드러난 것으로 여겨졌던 잔상이 시각의 적극적인 부분으로 간주되었다. 시각의 대상들이 자신의 신체와 공존하게 되면 시각은 단일한 내재적 측면이라는 위치를 잃게 된다. 

 

말하자면 외부와 내부라는 양극적인 배치가 사라지게 된다. 주관적인 시각은 명백히 시간적이라는 점이다. 생리학은 해부학과 달리, 시간성이라는 변수가 중요하다. 19세기의 새로운 과학에 있어서 ‘신체는 끊임없이 움직이기 위해 존재’(캉길렘)했다. 광학기술이든 회화의 기술이든, 기술에서도 신체의 움직임을 추적하는 것은 이후 매우 중요한 문제로 대두 되었다. 조나단 크래리의 논문은 기계적인 광학체계의 투명성을 연구했던 고전과학이 이제 불투명한 영역으로서의 인간의 눈에 대한 인식적 지도 그리기로 바뀌었다고 결론 내린다. 시각에 있어서 중립적이거나 혹은 눈에 드러나지 않았던 신체가 이제는 시각에 대한 지식이 그로부터 도출되는 두꺼운 층이 되었다. 19세기의 광학기구들을 연구하면서, 육안에 가까운 양안 시차로 출발한 최영의 작업은 시각성에 내재된 몸, 즉 시각의 투명성을 교란하고 도전하는 몸의 불투명성을 드러내고 있다. 

 

출전; 인천아트플랫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