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예술의 지속가능성을 위한 조건
이선영(미술평론가)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Anyang Public Art Project)가 시작된 2005년은 전국적으로 기존의 공공미술 뿐 아니라, 미술에 있어서 공공성을 재고해보자는 대안의 공공미술에 대한 요구가 생겨나기 시작했던 때로 기억한다. 안양의 경우, 예술성과 공공성이 적절하게 어우러진, 최초에 그것이 출발했던 성격을 유지하면서 꾸준히 이어왔던 사례로 평가된다.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가 출발할 즈음에 문화부에서도 ‘Art in City’라는 이름으로 공공미술추진위원회가 발족되어 전국 단위의 사업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 이전에도 공공문화예술에 대한 움직임은 있어왔지만, 공공정책이 함께 하면서 개개인의 의지를 넘어서 수면 위로 올라왔고, 10여년이 지난 지금은 미술 분야뿐 아니라, 지자체의 문화정책에 있어서도 빠져서는 안 될 중요한 아이템으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공공문화예술 사업은 먹고 놀자 판으로 흐르곤 하는 일회성 행사, 가령 지역의 시시한 축제들보다 가치 있다. 이름만 축제지, 문화적 의미나 시민의 자발성과는 거리가 먼 관주도의 행사들은 점차 하향 평준화되고 있다.
이도저도 아니라면, 지역의 문화유산이나 자연을 잘 보존하는 방향도 좋겠지만, 모든 것이 코드화되는 21세기는 이러한 소극적 정책만으로 충분치 않다. 뭔가 사건이라 할 만한 것을 만들지 않으면 조직의 유지와 재생산도 힘들어지는 세상이 왔다. 현대사회는 좋은 의미든 아니든 정체를 거부한다. 기왕에 변화가 필요하다면 그 변화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끄는 것이 중요하다. 무엇인가가 자동화되는 한편에, 결정 불가능한 새로운 사안들이 끝없이 생겨나는 것이 살아있는 사회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공문화예술이라는 다소간 모험적인 영역에 공공기관이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최초에 평범한 조각공원으로 기획되었다가, 1회 감독인 이영철의 파격적인 제안이 받아들여져 시작된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는 제도의 자동적인 실행이 아니라, 사건으로 다가왔다. 사건성이 없는 구조의 평범한 재현이야 말로 예산만 낭비하는 행사를 위한 행사라는 점에서 그렇다. 예산이 대폭적으로 삭감된 2013년에도 그러한 사건성이 유지되었던 것은 안양시나 미술계로서는 행운이다.
대안적 공공문화예술의 사례는 10여년의 세월이 흘러 어느덧 보편화 되어, 오히려 지금은 그것들이 제대로 시행 되고 있는지에 대한 객관적 검증이 필요할 시점이 되었다. 물론 여기에서 검증이라 함은 정치경제학의 논리에 따라 그것의 대차대조표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출발했던 애초의 목적이 제대로 수행되고 있는가를 따져보는, 보다 내재적인 차원을 말한다. 그런 맥락에서 지난 프로젝트들을 자체 점검해 본 아카이브 성격의 ‘퍼블릭 스토리’(2013)는 의미가 있다. 문화든 예술이든 공공적인 것이란 결코 단기적으로 이익을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한그루의 나무를 심어 키우는 것과 같다. 꾸준히 가꾸면 언젠가는 꽃과 열매를 맺고 넉넉한 그늘을 만들어 흩어진 사람들을 모이게 하는 소중한 자리가 된다. 현대 사회는 모든 것을 돈으로 계산하려 들지만, 삶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들은 계산 불가능한 것들에 있다. 그리고 이 계산 불가능한 소중한 것들은 한때의 추억이 아니라, 지속가능해야 한다. 그래서 공공성에 관심을 가지는 문화예술인들은 당면한 문화 예술적 과제 뿐 아니라, 사회적 합의를 끌어내는데도 힘써야 한다. 그러한 기술도 예술이다.
그저 소외된 일상을 장식할 뿐인 순응적이고 밋밋한 실행을 넘어서 이슈를 만들고, 구체적 대안까지는 아니더라도 사회에 어떤 문제를 던질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특별한 요구를 담아내기 위해서는 다양한 형식과 시도가 필요하고, 그래서 공공문화예술은 실험적인 면모도 갖게 된다. 그러나 언제나 어두운 그림자는 있다. 대안의 공공예술이 프로젝트의 성격을 띠면서 기존의 공공미술과 같은 물리적 증거물을 많이 남기지 못하기에, 가시적 성과에 대한 의문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여기에다가 문화예술의 공공성과 예술성에 대한 의지나 경험도 없이, 시류에 힘입어 떴다 방 같은 기회주의적 사례 또한 가세하면 어려움은 더욱 커진다. 사뭇 모든 큰 사업들이 그러하듯이, 그때그때의 정책에 부침하면서 낡은 아이템들을 재조합할 뿐인, 서류 작성에만 능한 무리들이 끼어들곤 한다. 대안의 공공예술이 극복하고자 했던 매너리즘이 이름과 외양만 바꾸어서 반복될 때 공공문화예술에 대한 피로도는 급상승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미술인을 포함한 시민의 무관심을 낳고 무관심 속에서 파행이 야기된다. 공공문화예술은 각 분야의 경계를 파열할 수 있는 대표적인 예이다. 경계는 진정한 각 분야의 자율성을 낳기 보다는 기득권 수호 및 유지와 관련이 있다. 각자의 자리로 후퇴함으로서 공공영역은 껍데기만 남는다. 지배적 권력이 진정 원하는 것은 철저한 개별화이다. 서로가 아니라, 각자의 핸드폰만 바라보는 현실은 전체주의를 위한 조건으로서의 개별화를 단적으로 예시해준다. 강렬한 경험을 주어야 하는 문화예술에도 공허한 명분과 당위가 판을 치고, 교육이나 교양, 장식이나 투자 같은 기능으로 축소된다. 소수의 이익을 수호하기 위한 오도된 자율성이 아니라, 공공을 위한 진정한 자율성이 필요하다. 일회성 프로젝트나 장식적 기념비로 양분된 공공문화예술계에 독특한 영역을 차지하던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가 제4회 째에 대폭적인 예산삭감이 이루어진 것은 정책적 편의, 이를테면 정치의 자율성을 위해 문화예술의 자율성을 침해한 것이다.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가 애초에 그때그때 필요한 인원을 충원하는 임시조직이었다는 것이 파행의 빌미를 줬다.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는 예술계와 사회에 새로운 이슈를 던지고 그것을 전문적이고 지속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과제를 가지고 있다. 프로젝트를 담당하던 안양 공공예술재단이 사라지고, 새로 생겨난 안양문화예술재단의 한 개 팀으로 축소된 것은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가 본래의 성격을 유지하면서 지속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의구심을 품게 한다. 2005년에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지어진 세계적인 건축가의 작품 알바루 시자홀은 작년에야 본래 의도대로 파빌리온의 역할을 되찾았다. 그때그때의 정책에 따라 공공문화예술에 대한 소중한 성과물도 이합집산하는 신세를 벗어나 공공문화예술의 실행 거점이자 관련 자료실로 전국, 아니 세계에서 찾아오는 장소가 되어야 하는데, 예산과 전담 인원이 지금처럼 불안정할 경우, 이후에는 어떻게 될 것인가. 전국에서 열리고 있는 다른 공공문화예술 사업과 큰 변별점이 없는 평범한 사업으로 후퇴할 것인가.
출전; 터무늬진(안양문화예술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