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재와 만나는 공공예술의 다양한 방식
이선영(미술평론가)
인천문화재단의 ‘지역공동체 문화 만들기’는 올해 3년차를 맞아 민간기업과 함께하는 민관협력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현대제철의 ‘주택 에너지효율화 사업’과 함께 한 재단 기획사업의 확장을 계기로, 인천지역에서 공공문화예술 사업에 참여해왔던 팀들과 작가가 인천시 동구 송림동 지역에 함께 모였다. 오랫동안 인천지역에 살면서 공공문화예술을 펼쳐왔던 ‘퍼포먼스 반지하’를 주축으로, 공공 프로젝트에 진입한지 얼마 안 되는 청년작가들인 ‘틈만 나면’, 그리고 개인 작업 때로는 공동 작업에 몰두해온 작가 고영택이 각기 자신들만의 장기를 살려 ‘따로 또 같이’ 한 이 사업은 지역과 공동체와 문화가 만나는 다변화된 실험에 해당한다. 숙련됨, 신선함, 실험성 등, 각자의 특기가 무엇이든 그들의 수렴점은 공공성이다. 공동의 목표는 역설적으로 각자의 차이를 두드러지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차이는 극복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보완적 가치로 인정 돼야 할 것이다.
공공성이란 획일적인 가치가 아니라, 차이의 공존에 방점이 찍힌 것이기 때문이다. 독특한 차이란 아틀리에에 칩거한 개별 작가의 전유물처럼 여겨지지만, 예술의 근본적인 특징일 진정한 다원주의, 그리고 그것과 연관될 차이가 명목상으로만 아니라 실질적으로 가능하기 위해서는 그 조건을 만들려는 사회 문화적 운동 또한 요구된다. 이 프로젝트에 모인 세 부류의 공공예술가들은 그 근본적 조건을 위한 작업을 최종적인 작품만큼이나 중시한다. 그래서 그들은 바람 부는 허허벌판 같은 곳에서 시작한다. 그곳에 거주하며 작업하는 땅에 떨어진 하나의 밀알과도 같은 작가의 역할은 따로 논의할 필요가 없을 만큼 기본이다. 그러면서도 새로운 구성원이 계속 유입되지 않는 운동은 정체 및 단절의 위험이 있으며, 개인 작업이라는 맥락을 가진 작가는 당면한 현장을 넘어서도 공공과 함께 한 체험을 또 다른 방면으로 증폭시킬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기에, 세 부류의 ‘이질적’ 만남은 의미가 있다.
공공성은 정치경제학 뿐 아니라 문화예술에도 빠질 수 없는 핵심적 요소지만, 현대의 극단적인 분업화는 지금 여기의 내가 아닌, 언젠가 어디서 누군가가 대신 할 숙제처럼 미뤄져 있다. 공공성은 누구나 필요하지만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그런 ‘알 수 없는 영역’이 된 것이다. 그래서 공공성이라는 목적의식을 가지고 헌신하는 소수의 노력은 그만큼 소중하다. 소수들끼리 서로를 알아보고 유대하고 연대하는 방식은 더욱 소중하다. 여러 장소에서 공공문화예술에 대한 경험을 쌓아온 그들이 작업을 위해 짐을 푼 이곳은 이런 사업이 흔히 벌어지곤 하는 재개발지역은 아니다. 80% 이상의 주민이 노인이고, 30% 정도가 빈집으로 방치된 이곳은 재개발 지역들 못지않게 취약해 보였지만, 무너지는 것들과 생성되는 것들은 겉으로만 유사할 뿐이다. 흔히들 ‘달동네’라 부르는 가파른 언덕배기의 마을은 오랫동안 재개발을 기다리면서 방치되어 있다가, 대규모 재개발만이 답이 아니라는 사회적 인식의 전환 덕분에 다시금 이전처럼 사람 사는 분위기가 있는 곳으로 변화를 꾀하고 있다.
송림동은 인천 최초의 상수도 시설이 설치될 만큼 20세기 초기에는 앞서간 마을이었지만, 이제야 도시가스 시설이 시작되고 있을 만큼 다른 시간대를 살고 있는 곳이다. 그동안 대세가 되어온 획일적인 개발방식, 즉 모든 것을 허물고 고층 아파트로 다시 짓자가 아니라, 고쳐가며 살자는 대안의 ‘개발’은 ‘문화’나 ‘예술’ 만으로는 버거운 측면이 있다. 오랫동안 방치된 집들은 먼저 수리를 해야 했다. 그것은 그 방면에도 일가견이 있는 퍼포먼스 반지하의 몫이었다. 필자가 동네를 방문한 그날도 이집 저집에서 뭔가 수리하는 소리들로 한동안 적막했을 마을이 활기를 띄었다. 다시금 마을이 서서히 죽어가는 사태를 피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기능 개선을 넘어서 상징적 의미가 부여돼야 했으며, 작가들이 맡은 부분은 바로 후자였다. 상징이 기능을 대신하지는 못하지만, 상징이 강해지면 상징 자체가 기능이 될 수도 있다. 상징적 의미 부여가 된 곳은 물리적으로 취약해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작가들이 맡은 것은 상징부문이었지만, 그들의 작업은 이미 있는 구조 위에 덧입힌 장식에 머무르지 않았다.
거기에는 집수리 못지않은 범위와 강도의 밑 작업이 필요했고, 이러한 밑 작업에는 갈라진 벽을 메우는 물리적 작업만큼이나 지역 주민과의 원활한 소통 또한 포함된다. 마을 외곽에 보이는 아파트들은 지금여기가 나아가야할 미래의 모습일까. 대자본이 투입되는 대개발은 오랫동안 형성되어온 삶의 굴곡 면을 폭력적으로 갈아내고, 모든 것을 수직 수평의 축으로 재편한다. 이러한 재편이 일어나고 나면, 겉보기의 동질성과 달리, 계층적 차이는 더욱 강화되곤 한다. 능률적이거나 기능적이라 함은 대량생산과 소비라는 기준에 부합될 뿐이며, 타자의 억압을 바탕으로 한 지속가능하지 않은 삶에 조응할 뿐이다. 획일적인 시공간으로의 재편을 통해 자본은 그 회전속도를 빨리하지만, 그것은 상호적인 이익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지리학자 데이비드 하비가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에서, ‘시공간의 압축’으로 표현하는 이러한 ‘창조적 파괴’의 과정은 삶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기억을 사라지게 하고, 자본이라는 비인격적 기획을 대신 끼워 넣는다.
이 마을 만 해도 1970-80년대에 한국의 경제성장을 견인했던 지역의 노동자들이 많이 모여 살던 곳이었을 테지만, 그곳이 공동화되고 쇠락의 길을 걷게 된 것은 세계화를 통한 국제적 분업이 국민 모두에게 혜택이 돌아가지 않았음을 반증한다. 아시아나 아프리카 등에서도 뒤따를지 모를 성장에 필수적인 빈곤화의 과정은 ‘유체역학의 법칙들이 세계의 어느 강에서든 한결같이 적용되듯, 자본순환의 법칙들 또한 그렇다’(데이비드 하비)는 말을 실감케 한다. 자본순환의 논리에 얽매인 개발을 위한 개발, 또는 소수를 위한 개발의 폐해가 추상적 관료주의, 중앙 집중화, 부동산 자본주의 등이 추동하는 것임을 뒤늦게나마 사회가 각성한 것은 다행이다. 그리고 이러한 각성이 자연스럽게 어떤 문화를 요구하는 것은 더욱 바람직하다. 문화와 예술이 현실의 잉여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 문화와 예술을 호출한 것이다. 이러한 호출에 제대로 답할 수 있는 작가가 몇이나 될까. 문화예술이라는 특수한 영역은 지역적 특수성을 부각시키면서, 보편적 대세에 대항하는 상징적 가치를 추구한다.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작가 중 이 부문의 경험이 가장 풍부한 퍼포먼스 반지하는 이미 10여 년 전에도 기업의 사회공헌 사업에 참여한 바 있다. 2002년 이전에는 자비로 공공문화예술 작업을 해 오다가, 우리 사회 자체가 공공성의 몫이 커지는 어느 시점부터 외롭지 않게 작업을 해올 수 있었다. 그 당시 생각했던 대안적 재개발, 즉 낡은 주택을 2층 정도로 다시 짓고, 그렇게 생겨난 여유 공간에 공원과 텃밭, 주민들과의 공동 작업공간을 만든다는 꿈은 아직 이루지 못했지만, 이번 사업이 펼쳐지는 송림동의 낡은 집으로 아예 이사를 온 그는 그 중 몇 가지는 장기과제로 추구할 수 있을 것이다. 퍼포먼스 반지하는 섬 같은 다른 지역에서의 공공문화예술 작업을 해오기도 했지만, 작업이 이루어지는 그곳에 살면서 주민들과 일상을 공유한다--작가는 밤과 새벽을 주민과 함께 보내 본 적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는 원칙을 고수한다.

퍼포먼스 반지하의 '골목미술', 송림2동의 재활용화단 '꽃밭에서', '서시', 2014년
퍼포먼스 반지하가 ‘골목 미술’이라 이름붙인 작업들은 길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가늠이 안 되는 좁은 골목을 무대로 한다. 이를 위해서 그들은 사람이 살고 있는 집 30채 이상을 도색했고, 빈집의 벽에는 벽화도 그렸다. 그 마을엔 빈집으로 방치된 집이 많기에 다소 우중충하고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화사하게 만드는 도색작업은 무너질 수도 있는 벽을 보강하는 작업부터 시작해야했다. 현장에서 미술가와 기능공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해야 하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이러한 작업은 그곳에 살고 있는 주민과 협업하기에 그자체가 소통의 계기가 된다. 주민들 외에 청소년과 아줌마 자원봉사자들의 도움도 끌어내면서 진행했다. 그들이 ‘집수리 미술’이라고 이름 지은 것의 예는 거동이 불편하신 어르신을 위한 방부 목 계단 제작이나 계단 미장작업 등이다. 오랜 현장 경험으로 인해 기술자 못지않은 기능을 익힌 그들의 작업은 현실적 기반 없이 날기만을 원하지 않으며, 나무처럼 현실에 뿌리내리고 자립적으로 서있으면서도 비상하려 한다.
그렇게 작업된 골목은 마치 한복을 화사하게 차려입으신 어르신 같은 모습으로 재탄생했다. 거미줄 같이 얽인 골목들 사이를 움직이는 이의 시야에 갑자기 등장하는 추상적 색 면들의 계열들은 심미적 체험을 야기한다. 한눈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시시각각 변화무쌍하게 이어지는 지각의 체험은 실제 공간에서 움직이는 몸을 통해 근대의 관념적 시각중심주의를 극복하려 했던 현대미술의 전략과도 통한다. 빨리 통과하기 위한 통로가 아니라, 천천히 걷다가 마주치는 이들과 이야기하게 되는 골목길은 그자체가 살아있는 미디어라고 할 수 있다. 퍼포먼스 반지하의 골목 작업은 미디어로서의 골목을 다시금 활성화하고, 공공예술 작업을 살아있는 맥락과 접속하게 한다. 골목길 곳곳에 숨은 그림처럼 박혀있거나 환하게 펼쳐져 있는 이러한 작품들은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지만, 몇몇 잘못 방향을 잡은 공공미술이 그러하듯이, 피상적 구경거리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거주민이 없는 관광지, 실체가 서서히 비워지면서 시뮬라크르가 대신 자리한 ‘도심활성화’를 우리는 홍대 앞, 북촌, 서촌, 이태원 등지에서 발견하게 된다. 모든 것을 자본의 이익을 위한 구경거리로 환원시키는 스펙터클의 문화 속에 삶의 터까지 저당 잡는 행태에 대안의 공공예술이 같이 춤출 이유는 없을 것이다. 화려한 상업 지구로 재탄생했지만, 부동산 소유권을 가진 외지인들만 있고, 정작 거주자는 부재한 주인 없는 마을은 또 다른 소외를 야기한다. 그래서 작가가 마을에 거주하면서 지속적인 맥락을 가지고 작업하는 일은 중요하다. 퍼포먼스 반지하 같은 거주형 작가들에 의해서 이전시대의 기념비가 그러했듯이, 그 작품이 거기에 있어야할 이유가 확실한 작업이 탄생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퍼포먼스 반지하의 옛 작업중에는 이편 달동네에서 본 앞 달동네 풍경과 저편 달동네에서 본 이편 달동네의 풍경이 그려진 벽화들이 있는데, 그것은 구체적 장소성을 잃고 추상적인 장소성--흔히들 ‘장소특정성’이라 불리우는--을 연출하는 것으로 자족하는 현대미술이 상실한 것이 무엇인지 일깨운다.
작년에 인천 구월동 지역에서 공공문화예술 작업을 했던 청년 작가 팀 ‘틈만 나면’은 이번에 자신의 거주지역이 아닌 낯선 동네를 개척했다. 이러한 개척지가 쌓이다 보면, 거주형 작가처럼 어딘가에 머물러 작업할 때가 오리라. 사실 유목이란 탐욕스런 시각적 전유를 목표로 하거나 떠나면 그만 일 뿐인 관광같은 가벼운 기분전환처럼 여겨지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전존재를 끌고 이동해야 하는 무거운 과업이다. 여기에서 무거움이란 물질적인 것을 말하지 않는다. 자크 아탈리가 [미로]에서 말하듯이, 유목민은 정착민같은 풍부한 물질이 아니라 오로지 생각과 경험, 지식이나 관계만을 축적하기 때문이다. 또한 저자는 유목민이 땅을 지키려고 목숨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떠날 수 있는 권리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다고 하면서 유목의 치열한 의미를 환기한다. 자크 아탈리는 유목민이라는 단어(nomade)는 그리스어로 ‘함께 나눈다’는 의미가 있음을 강조한다. 다른 부족과 방랑의 장소를 공유해아만 유목민은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이다. 유목을 강조한 현대의 철학자 질 들뢰즈 또한 진짜 유목민이란 죽을 때가 돼서야 자기가 살던 곳을 떠나는 존재라고 하면서 그들의 묵직한 실존적 상황을 강조한다.
한 달에 몇 번씩 송림동에 방문하여 3호까지 발행된 마을신문을 제작, 배포하고 동네주민들이 담소를 나눌 수 있는 평상을 제작하는 것이 틈만 나면의 주된 작업이었다. 마을사람들의 동선을 충분히 연구하지 않은 채 설치한 평상은 겨울이 되자 다소간 방치된 면이 있었지만, 마을의 집과 마을에서 피는 꽃을 새겨 넣은 평상을 주민 및 대안학교의 학생들과 함께 평상을 함께 제작함으로서, 일시적인 공동체--지속적인 공동체가 힘들어진 현대사회에서 가능할 수 있는 공동체의 한 양태로서--를 이룰 수 있었다. 평상은 관료나 개발업자들, 도시설계자들의 머릿속에 있는 추상적인 공간(space)이 아니라 삶의 구체적인 자리(place)에 가깝다. 이해관계의 대차대조표에 의해 빈 공간이 된 곳과 사람이 살고 있는 자리는 큰 차이가 있다. 틈만 나면의 작업은 구체적인 자리들이 추상적인 공간을 밀어낼 수 있는 작은 출발점이 되어줄 것이다. 마을에 남아있는 자들의 끈끈한 유대는 떠남의 가속을 유예하고, 떠난 자들을 되돌아오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관리 주체의 문제 때문에 공원의 한 부지에 살짝 걸쳐있는 청년작가들의 작품은 현재로서는 그러한 자리들을 위한 작은 초석에 불과하지만, 모든 문화예술이 그러하듯이 그것은 상징성으로 그 가치를 가진다. 평상 외에 신문이라는 아날로그 형식으로 주민 간, 세대 간, 지역 간의 소통을 꾀한 청년작가들의 공공문화예술 작업은 유대의 장을 하나씩 확장해 가는데 의미가 있다. 맥락 없는 장식적 기념비를 비판하고 출발한 대안의 공공예술은 현실적 맥락 속에 있기에 눈에 잘 안 띌 수도 있다. 그들의 작품은 바탕을 평평하고 하얗게 고르고 때로는 진공상태로까지 만들어서 예술작품만 돋보이게 하려 하지 않고, 현실 속에 슬쩍 끼워져 있거나 짜여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기계복제 시대에 단절된 기억과 소통을 다시 잇기 위해 가상이 아닌 실재와 부딪힌다. 가상이 지배하는 현대에 실재는 불가능하다고 말해진다. 그러나 대안의 삶을 위해 지금 필요한 것은 더 많은 가상이 아니라 실재라는 점, 만약에 실재가 사라졌다면 그것을 다시 기억해내고 구축하는 일이 예술가들의 과제이다.
섬 지역 같은 외딴 곳에서 공동 작업을 하기도 했던 작가 고영택은 이번 프로젝트에서 진행한 [메아리 라디오 극장]에서 주민들의 이야기를 수집하고, 수집된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든 콘텐츠로 소출력 라디오 방송을 진행했다. 3km 반경 내에서 들을 수 있는 골목 안 방송국 주변, 평상과 벤치 등에 모인 주민들은 그곳에 걸린 라디오로 이웃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과거를 떠올려 본다. 라디오 방송 외에 [미워도 다시한번]이나 [벙어리 삼룡이]같은 옛 영화를 함께 보고 주민들과 영화도 찍었다. [송림동, 미워도 다시한번]은 옛 영화의 한 부분을 어르신들의 연기로 번역한 것이다. 보다 익명화된 현대사회에서 인간 간의 직접적인 접촉을 대신해온 것이 미디어다. 그러나 주민들이 삼삼오오 모여 함께 본 옛 영화는 공동의 기억과 추억의 저장고로, 어르신들의 기억을 다시 잇고 생성하는 작업에 활용되었고, 단지 보는 것을 넘어서 함께 또 다른 영화를 만듦으로서 미디어에 대한 수동적 소비자의 역할을 벗어나려 한다.
특히 라디오는 청각성과 공동체의 연관성을 활용한 실험적 매체로 재탄생했다. 그것을 추상적으로 보고 읽기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말하고 듣기에 관련된 것으로 원시적 구술성의 문화, 그리고 전자 미디어에 의해 다시 활성화된 현대의 새로운 구술적 문화의 가능성을 타진한다. 고영택의 라디오 방송국 작업은 청각성이 공동체를 복원하기 위해 필수적인 기억과 관련됨을 말한다. 말하고 듣기에 관련된 구술성은 구체적 맥락과 기억을 요구하고 활성화하기 때문이다. 미디어 이론가 마샬 맥루한은 [구텐베르크 은하계]에서 전자 혁명이라는 대변혁으로 문자와 시각편향성은 지양된다고 말한다. 맥루한에 의하면 전자혁명은 통합된 장(場)적 지각이며, 가장 원시적이었던 사회는 현대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청각적 공간(acoustic space)이 동시적 관계의 장으로 작동한다. 음향적, 혹은 청각적이라고 할 수 있는 다(多) 방향적 공간성은 하나의 시점을 강요하는 근대적 감각과 차이가 있다. 맥루한은 시각성과 청각성을 대조한다.
이러한 대조에 의하면 시각적인 것은 명시성, 획일성, 연속성을 만들지만, 말하기와 듣기에 기반 하는 비문자적 양식은 함축성, 동시성, 불연속성을 만든다. 청각적 양식은 시각적 양식이 가지는 분명함--그것은 단일 감각을 확장하여 높은 정세도(high definition)를 가지는 핫(hot) 미디어와 관련된다--이 아니라, 풍부함을 지향한다. 보기와 달리 듣기는 하나의 관점을 고수하는 개인과 그 내면이 아니라, 사방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편재하는 장과 그 안에서 생명들만이 낼 수 있는 음에 민감하게 한다. 그러나 인과적 연속성과 선형성, 분업적이고 분석적인 전문가주의와 밀접한 근대적 감각 또한 시대착오적인 것이 되고 있다. 현시대가 전자매체에 의한 동시성을 특징으로 하기 때문이다. 맥루한의 분류법으로는 쿨(cool) 미디어에 속하는 라디오로 실험한, 고영택의 구어적이고 청각적인 양식은 단순한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라, 미지의 가능성에 열려 있다. 인간 경험에 있어서 청각성은 같은 공간에 공존하는 육체들의 현존을 일깨우는 점에서, 공동체 지향의 예술실험과 어울린다. 그것은 다양성들의 공존과 공명을 요구하는 것이다.
출전; 인천문화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