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론 장으로서의 아카이브 전시
공공미술 술래 책장 개방, ‘공공미술이라 부르는 것들’ 전 (10.31--11.9, 인천 연수구 문화의 집 아트 플러그)
이선영(미술평론가)
‘공공미술 술래책장 개방, 공공미술이라 부르는 것들’이라 다소간 길게 이름이 붙은 행사는 전시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한시적으로 운영되는 작은 도서관 같은 역할도 수행한다. 우리나라 공공미술의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가진 이들은 거기에서 기획자인 이경복이 모아놓은 자료들을 열람할 수 있을 것이다. 전시장 한가운데는 그 모든 자료들을 바탕으로 기획자가 만든 또 다른 자료집들이 배치되어 있어, 관객들은 탁자에 둘러앉아서 자료집을 보고 그에 대해 토론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공공예술 관련 자료들은 누군가에게 또 종합되어 또 다른 책자를 낳게 할 것이고, 이러한 상호적 대화는 계속될 것이다. 이러한 과정들이 예술의 역사를 이루어왔다. 전시장은 1980년부터 2013년까지 30 여 년 간 공공문화예술의 현장에서 생산된 책자들이 시기별로 분류되어 있다. 320권이나 되는 책자는 그가 얼마나 많은 장소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만났을지 상상케 한다.

자료란 엔트로피의 법칙을 따라 산산이 흩어지고 사라진다는 속성이 있다는 점에서, 수집이란 시간을 거스르는 행위이다. 그러나 그렇게 모인 시간의 기호들은 시간의 동결을 꾀하지 않는다. 영원의 기념비가 아니라, 또 다른 이어짐을 원한다. 그것은 완료된 평가나 회고가 아니라, 실천적인 물음에 해당된다. 자료를 모으는 것만큼이나 고통스러웠을 종합의 과정, 이경복은 연대순을 택했다. 실증주의가 흔히 착각하듯이, 시간적 인과관계가 논리적 인과관계를 낳지는 않는다. 그러나 역사적 성격을 띄는 아카이브에서 시간이라는 변수는 가장 중요하다. 작가가 수집한 책자의 배치 흐름을 보면 초창기에 뜸하다가 2005년 무렵부터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모습이 한 눈에 보인다. 현장에서 급하게 만들어 쓰고 버렸을 것 같은 얇은 팜플렛부터 학술 논문 급의 텍스트들로 채워진 두툼한 자료집까지 다양했지만, 전시는 투명한 아크릴 판에 안치된 자료들을 몇 줄로 수평 배열함으로서 어떤 경중을 주기 보다는, 최대한 가치중립적인 태도를 취한다.
전시제목이 ‘공공미술에 대하여’가 아니라, ‘공공미술이라 부르는 것들’이라 붙여진 것도 그렇다. 이경복 자신 또한 직간접적으로 연루되어 있는 영역이지만, 그에게도 공공미술은 자명한 출발점을 가지는 것이 아니다. ‘--라 부르는 것들’이라는 냉소적이면서도 유예된 개념이 선명한 ‘--다’가 되기 위해서 얼마나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투입되어야 할 것인가. 그러나 보물을 찾기 위해서 수없이 땅을 파다보면 보물을 발견하지 못해도 땅이 비옥해져서 보물 못지않은 선물이 된다는 옛 이야기도 있다. 최종 목표는 영원히 유예될지 모르지만, 우리는 과정 그 자체에서 뭔가를 얻는다. 예술이라는 개념이 아직도 만족할만한 정의를 얻지 못했듯이, 공공예술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떤 것이 예술로 불려 질 수 있는 가의 문제는 무엇이 공공이라고 불려 질 수 있는 지의 문제만큼이나 정치적이다. 공공예술에 많은 산물이 있겠지만, 그 중 하나인 책자가 대상이라는 점은 이 전시가 담론의 영역에 속해있음을 강조한다.


공공예술-전시-아카이브 복합체라는 담론은 특히 사회적 맥락을 강조한다. 공공영역에서의 예술인 공공예술이 그 스스로가 공론장이 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위축된 공공영역을 전시의 형태로나마 마련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관련 책자들과 개념어들의 모음은 공공예술을 정의하려는 가장 직접적인 방식이다. 물론 자료만 쌓아놓는다고 개념이 저절로 정리되지는 않는다. 이 전시는 일관되게 자료나 개념어를 수평적으로 나열하는데, 그것은 무책임보다는 고통의 산물이었을 것이다. 한편으로, 실증적 자료 없이 공공예술은 이러저러해야 한다고 관념적으로 늘어놓는 것도 허황되다는 점에서, 이 전시는 적극적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공공예술이 담론의 영역에 속함을 알려준다. 현대예술 역시, 개념화, 제도화되면서 담론적 측면이 강화됐다. 공공이라는 좀 더 정치적인 개념이 붙어있다면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각 시기에 어렵게 생산된 각각의 책자들일 테지만, 산산이 흩어져있던 것들이 어떤 맥락을 가지고 공공영역에 다시 등장한 모습이 반갑다.
무관심과 자연은 그것들을 흩어지게 하지만 의지는 흩어지려는 것을 모아놓는다. 차후에 그것은 잡다한 사료들을 의미 있는 형식으로 엮어야할 역사가들의 과제를 공유할 것이다. 물론 그것은 한 개인의 힘으로 소화할 수 없는 프로젝트라서 도처에 빈곳이 있겠지만, 빈곳이란 이렇듯 한번 총체적인 배치를 함으로서 비로소 인식되는 것이라는 점에서, 최초의 정립은 중요하다. 정(正)이 없다면 반(反)도 합(合)도 있을 수 없다는 변증법적 원리부터, 시작이 반이라는 속담에 이르기까지, 처음은 그만큼 중요하다. 안양공공예술 프로젝트 등, 공공예술 자료를 전문적으로 수집하고 일반에게 공개하는 기관이 있지만, 개인의 차원에서 그러한 열정을 몇 십 년 간 지속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이번 전시 역시 2013년 인천문화재단 기획 사업팀과 함께 진행한 ‘공공미술 술래_1980-2013년 기억의 재구성’이 바탕이 되었다는 점에서, 전적으로 개인의 관심 및 열정으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만, 촉발자가 있지 않고서는 무엇이든 구체적인 결과를 맺기 힘들다.


붓과 물감이 있다고 해서 그림이 자동적으로 그려지지 않듯이, 기관이 있다고 해서 정책이 자동 실행되는 것은 아니다. 구조의 힘은 날로 강화되고 있지만, 구조를 만들며 추동하고 구조를 바꾸기까지 하는 것은 인간의 의지이다. 공공예술 자체가 익명적인 구조를 인간적인 구조로 변형시키고자하는 노력의 하나인 것이다. 이 전시의 기획자인 이경복은 2천 년대 초반 서울의 벽화를 전수 조사한 전시를 기획한 작가이기도 한데, 그 당시에 미술전시에서는 드물었던 아카이브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20여년이 지난 지금도 비슷한 주제에 아카이브 성격을 띄는 전시라니, 상황이 변할 뿐 개인은 변치 않는다는 말이 실감난다. ‘공공미술이라 불리는 것들’이라는 현재의 전시제목과, 연수구 문화의 집만큼이나 드넓었던 인사동의 공평아트센터의 ‘서울거리에 벽화가 있기는 있다’라는 2002년의 전시 제목만 비교해도 그렇다. 열정을 쏟았던 만큼이나 의혹에 가득 찰 수밖에 없었던 공공예술은 거리를 두고 봐야겠다는 태도를 낳은 듯하다.
현장과 멀리에 있었던 이들만이 공공예술을 무조건 찬양하거나 무조건 비판할 수 있을 뿐이다. 투명 아크릴판을 지지대로 한 줄로 죽 세워놓은 자료들은 그 자체로는 무엇을 발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공공예술에 대한 의지와 열정들이 각 시기에 각지에서 있었다는 증거들임은 분명하다. 공공예술의 시작점을 1980년으로 잡는 것 자체가 가치중립적인 것은 아니다. 그 역시 1980년대 진보적인 문화운동에 참여했던 당사자였기에 가능한 시점 설정이다. 그가 수집하여 배열한 자료들의 추이에 의하면, 1980년대 이후 한참을 뜸하다가 2 천 년 대 중반이 돼서야 자료들은 많아지면서 가속도가 붙는다. 그러나 1980년대에 대세였던 현실 참여적 예술은 그자체가 공공성을 띄고 있었기에 큰 무리는 없다고 여겨진다. 1980년대의 진보적 예술 운동의 자연발생적인 움직임은 그 운동이 한켠으로 지녔던 공공성의 진정성을 알려준다.
진열된 자료만으로만 본다면, 2 천 년 대 중반은 80년대 못지않은 중요한 기점이다. 2 천 년 대 중반은 공공예술에 제도적 후원을 본격적으로 시행한 지자체의 문화재단이 생겨났던 시기였다. 2006년 참여정부 시절 문화부에서 직접 시행한 ‘아트 인 시티’를 비롯하여 경기문화재단과 인천문화재단의 사업들이 눈에 띈다. 큰 기관들의 공조로 자료들은 선택이 아닌 필수로 남겨졌을 것이다. 공공의 지원으로 더욱 탄력을 받은 대안의 공공예술은 기존의 반영구적인 ‘장식미술품’을 벗어나려 했기에, 공공예술에 대한 풍부한 담론이 함께하는 자료집 발간은 중요했을 것이다. 전시장 입구에 설치된 [말풍경](2013)은 1980년부터 2013년까지 국내에서 발간된 주요 잡지의 공공 예술관련 기사와 논문(학위, 학술) 제목에서 추출한 말의 풍경이라고 한다. 1%법, 건축미술장식제도, 공공디자인, 공공미술, 도시, 벽화, 수퍼그래픽, 커뮤니티 아트, 프로젝트, 환경조각, 환경 조형물, 횡단적 사고, 행동주의, 소셜 아트, 새 장르공공미술 등의 개념이 눈에 띈다.
자료집들이 꽂힌 책장 위로 개념어들과 그 아래 간단한 풀이를 적어놓은 리플렛을 보면, 인간, 무리, 동물의 무리, 사람의 무리, 국민, 사적 개인, 사물, 근대적 주체, 존재, 공공성, 개인, 국가, 공적 영역, 사적 영역, 노력과 타인, 기본권, 계약된 공공성, 자유주의, 신자유주의, 분배와 전시, 자아, 윤리, 공공의 이익.....이라는 개념어가 떠있다. 개념어들은 사전이 그러한 역할을 하듯이, 차이와 연기를 통한 끝없는 연결망을 형성한다. 여기에는 익숙한 것도 낯선 것도 있지만, 모두 공공예술이라는 몸통을 이루는 원소, 또는 공공예술이라는 별자리를 만드는 별 같은 개념들이며, 누군가에 의해 종합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종합은 어떤 뛰어난 논리분석가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뛰어난 공공예술의 선례에 의해 그 선후와 경중이 헤아려져 관계적 개념으로 구성될 수 있을 것이다. 아직 개념의 혼돈이 있다면 그것은 개념의 보이는/보이지 않는 중심이 되어야 할 공공의 사건이라 할 만한 것이 충분히 축적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또는 어디선가 의미추구는 계속되고 있지만 현장으로 피드백 되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아카이브 성격을 띄는 이러한 공론장이 그러한 단절을 잇는 기회가 되길 바래본다. 벽 아래 바닥까지 길게 인쇄된 단어들은 마치 바코드처럼 보인다. 이 코드를 어떤 의미로 읽어내기 위해서는 지금 여기에 이런저런 형태로 수집된 자료들 이외의 또 다른 차원이 필요할 것이다. 의미에서 의미를 캐내려는 아카데믹한 노력들이 있지만, 의미는 의미에서 파생되는 것이 아니다. 의미의 원천은 실재이며, 공공예술은 무엇보다 그 지점을 강조한다. 투명 아크릴판에 한 줄로 죽 세워놓은 자료집만큼이나 중성적이다. 전체주택의 93%가 아파트인 이 동네의 풍경과 그리 다르지 않다. 기계적인 병렬에 살아있는 세포 특유의 긴밀한 관계망을 구축하는 것이 이 기획의 목표, 즉 ‘주민들의 직접적인 참여를 통해 지역공동체를 활성화시키는 공공미술 시범사업’(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공공미술 2.0’)에 부응하는 것이다.
물론 이 전시를 통해서 ‘공공예술이 뭐다’라는 결론이 당장에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공공예술-담론-아카이브라는 삼각 구도 안에 있는 이 전시는 전시를 이루는 내용물들이 공공영역에서 생산된 것들이며, 아카이브라는 개념 자체가 공공적 성격을 띄고 있다는 점을 알려준다. 작가가 투명하게 그어놓은 시공간적 좌표축 어딘가에 걸쳐있는 자료들은 지금의 공공예술이 있게 한 요소들이었다. 그것들을 다시 기억하고 회고할 때 지금 여기의 좌표 또한 확실해질 것이다. 자료들은 기관에서 나온 것도 있고 풀뿌리 민주주의를 반영하는 자료들도 있었다. 알라이다 아스만은 [기억의 공간]에서 기록물보관소(archive)는 그리스어 ‘arché’에서 유래한 것으로, 시작, 기원, 통치권이라는 뜻 외에도 관공서나 관청을 의미하기도 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시작과 명령이 서로 관련성이 있다고 지적한 데리다를 인용한다. 아카이브는 과거의 증거물로서의 기록물 보관소 일 뿐 아니라, 관리와 경영을 위한 기억으로서의 기록물보관소이기도 하다.
[기억의 공간]에 의하면 데리다는 기록물보관소를 근본적으로 정치적 범주로 이해한다. 보존, 선별, 개방이 특별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독재적이고 전체주의적 국가들에서는 비밀이었고, 민주주의 국가들에서는 개인적으로 이용되고 해석될 수 있는 공적인 공동의 소유물이었다. 기록물보관소 없이는 어떠한 공화제도, 어떠한 공론과 비판도 존재하지 않는다. 아카이브 형식의 공공예술관련 전시는 공공영역을 이중으로 강조하는 것이다. 자료를 이루는 책자들은 사진 뿐 아니라 문자로도 채워진다. 이미지와 문자는 기억과 인식을 추동하고 그것은 모년모일의 현장을 넘어서 제2, 제3의 삶을 살게 된다. 한자리에서 짧은 시간 동안 둘러보는 것은 주마간산 격이지만, 자료들이나 개념어에 비춰진 그동안의 공공예술이 반복된 부분이 많이 있었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명확히 정의되지 않은 채 계속 사용되어온 개념만큼이나 비슷한 이미지들이 넘쳐 남은 한자리에서 수 십 년의 시간을 단축적으로 통과할 수 있게 한 이러한 기회 덕분이다.
기계적 반복도 있지만, 필연적 반복도 있다. 미술계가 아니라 보다 광범위한 보편적 삶에 뿌리를 내리려는 공공예술은 흔히 기괴함에 빠지곤 하는 새로움을 위한 새로움이라는 이데올로기보다는, 필연적으로 반복될 수밖에 없는 것을 주목한다. 이러한 반복 속에서 차이를 끌어내는 전략에 아카이브 전시만큼 필요한 것도 없을 것이다. 기억을 촉구하는 자료전은 무엇이 진정한 새로움인지를 가늠하는 잣대를 제공한다. 평가와 반성이 부재할 때 오류는 반복되고, 공공이라는 유사이래의 핵심적 요소를 예술에서 배제하는 더욱 심각한 오류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한시적 성격을 띄는 이 전시는 이를 계기로 생산된 자료와 더불어 사건처럼 등장했다 사라질 것이다. 그것은 시간을 초월하는 기호를 가질 수 없는 모든 아카이브의 운명이다. 손가락으로 스크롤바만 무심히 이동시키는 전자매체 시대에, 책자라는 물적 자료들은 가상이 아닌 실재의 영역과 씨름하고 있는 공공예술의 성격을 드러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