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사와 서사, 행위를 한데 합치는 붓질

 

송현숙 전 (11.14--12,31, 학고재 갤러리) 

 

이선영(미술평론가)

 

캔버스 위에 템페라로 그린 송현숙의 그림은 ‘breath and brushstrokes’라는 전시부제처럼, 한 호흡에 그은 거칠 것 없는 붓질로 내면 풍경부터 시대의 풍경까지, 아득한 원형부터 군더더기 없는 현대적 감각까지 아우르는 형상을 뽑아낸다. 자주 등장하지만 반복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송현숙 만의 몇몇 소재인 나무 말뚝, 명주 천, 지붕, 장독 등은 그것이 탄생한 특정 시공간을 연상시킴과 동시에 그것을 초월하는 요소이다. 이 근본적 요소들이 어떻게 조합되는가에 따라 다른 이야기가 파생된다. 이러한 경향은 추상화, 가령 몬드리안 같은 구조적 작품을 떠올리지만, 송현숙의 경우 단순히 구조의 조합이 아니라 힘(기, 에너지) 등이 개입된다. 거기에는 최소한의 획수로 최대한의 효과를 살리며, 절제와 균형 그리고 단순과 풍요가 동시에 성취된 붓질이 있다. 이 붓질은 안료와 캔버스의 성질을 최대한 활용한 추상적 요소이면서도 재현적이다. 몇 번 휘두른 ‘자연스런’ 붓질은 항아리나 천, 나무 말뚝이나 집이 되곤 하였는데, 이번전시에서는 인간도 등장한다. 

 


송현숙, 붓질의 다이어 그램(4월16일 세월호 비극을 생각하며 그림) 

Brushstrokes-Diagram(Painted on the impression of the Sewol-ship tragedy on April the 16th 2014), 

2014, Tempera on canvas

 

몇 년 만에 같은 전시장에서 본 그림은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하얀 천 뒤에 비녀를 꽂는 옛날식의 머리스타일을 한 여인, 즉 할머니나 어머니임에 틀림없는 실루엣을 가진 여인의 뒷모습이 비춰진다. 여인은 나무 지게 같은 굴레를 지고 있는 구부정한 모습으로, 어머니들이 맡아왔던 삶의 무게를 느끼게 한다. 다소간 커 보이는 고무신은 홀로 아픔을 지고 갔던 어머니들의 무거운 족적을 암시한다. 어머니의 슬픔이 느껴지는 이 형상에 작가는 길게 붙여진 작품제목을 통해 그 원인을 직접 밝힌다. 몇 가지 안 되는 기본적 형상으로 은유적 화면을 구사해 왔던 작가에게 얼마 전 우리 사회가 겪었던 비극은 굳이 에둘러갈 필요가 없는 사건이다. 이번 전시에는 작품에 들어간 획수로 붙여진 제목과 달리, 긴 부제가 붙은 작품 [붓질의 다이어그램(4월16일 세월호 비극을 생각하며 그림)]은 옴짝달싹 할 수 없이 묶인 몸체가 한쪽부터 깊은 어둠속으로 잠기는 형상이다. 

 

뼈를 연상시키는 나무 막대와 살을 연상시키는 하얀 천이 조합된 길쭉한 덩어리는 저 세상으로 사라지고 있다. 한쪽 끝에 고무신 코 같은 형태는 가로 누운 덩어리가 인체임을 암시한다. 치유의 붕대라기보다는 생명 없는 사물처럼 수평으로 누운 뻣뻣한 송장을 싸 메고 있는 하얀 천들은 난데없는 죽음에 직면한 비극적 감정이 서려 있다. 작품 [7획 뒤에 인물]이나 [6획 뒤에 인물]에서 할머니 아래로 내려오는 올이 살아있는 반투명한 면들은 우리나라 전통에서 죽음의 의식 때 많이 사용하는 삼베가 떠오른다. 화면이라는 무대에 드리워진 천은 배후의 인물에 반응하여 약간 굽이친다. 아울러 아래로 휙 내려 그은 여러 선들은 슬픔이 중력의 방향을 향하고 있음도 알려준다. 붓질의 마지막 부분에는 흐르는 물감자국이 남아있으며, 아래를 향하는 모든 것들에 내재된 멜랑콜리, 어둠 속에서 생겨났다가 어둠속으로 사라지는 모든 것들에 대한 애도가 있다. 

 


송현숙, 7획 뒤에 인물 7brushstrokes behind figure, 2013, Tempera on canvas, 150x170cm

 


송현숙, 6획 뒤에 인물 Figure behind 6 brushstrokes, 2009, Tempera on canvas, 125x145cm

 

그러나 무기력한 슬픔에 머물러 있지 만은 않다. 송현숙의 붓질은 상처를 살살 어루만져 주는 것을 넘어서, 억울하게 죽은 이들의 원혼을 달래주려는 무당의 몸짓 같은 단호함이 있다. 묘사와 서사, 행위를 한데 합치는 붓질은 단 몇 획으로 많은 것을 동시에 해결한다. 그것은 눈이나 손, 개념이나 감성 등 중에서 한두 가지만 동원된 것이 아니라, 몸과 정신이 하나 된 결과이다. 이러한 예술은 정신적 육체적 수련(수행)과도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을 잘게 쪼개 생산력을 높이려는 현대사회에 거슬러, 예술은 보다 직관적인 방식으로 여러 차원을 결합시킨다. 몸과 정신도 그렇게 분리된 것들 중의 하나이며, 예술이든 종교든 뭐를 통해서라도 ‘다시 연결’(re-ligare)되어야 할 것이다. 이번 전시의 서문을 쓴 로렌스 린더는 [덧없음의 미학]에서 그녀의 붓질을 ‘마치 태극권을 하듯 팔과 다리와 함께 온몸을 조화롭게 움직이면서 생성된 것’이라고 묘사한다. 

 

심연 속에 삼켜지는 생명과 달리, 어머니는 어둠 쪽에서 밝은 쪽으로 향한다. 위에서 내려오는 천 같은 면은 그자체가 쏟아지는 빛줄기 같은 밝음의 원천이다. 여인은 위에서 내려오는 성글게 짜여 진 천보다 더 밝은 옷을 입고 있다. 서예의 일획이 떠오르는 송현숙의 작품은 동양적이며, 그 속에 등장하는 한복 입은 여성 역시 동양적이지만, 음/양의 구분에 기초한 어둡고 수동적인 면모를 가지지 않는다. 그것은 심연을 가르는 빛이고 어둠속에 뿔뿔이 흩어진 것을 묶어주는 힘이며, 보이지 않은 곳에서 당기는 힘이다. 밝은 천과 여러 관계망을 가지는 나무봉은 그러한 힘을 가시화하는 지지대이다. 명과 암이 그렇듯이, 양자는 구분되면서도 연결된다. 가령 무엇인가를 걸거나 매달기 위한 구조에 말려 있는 하얀 천이 있는 작품 [8획]이나, 흰 천이 연결된 두 나무막대가 약간 기울어 있는 작품 [5획]은 각기 다른 연결망과 긴장도를 가진다. 연결망이라는 개념은 나이 스물에 조국을 떠나 있었던 작가에게 가장 절실한 것이 아니었을까. 

 

송현숙, 8획 8brushstrokes, 2014, Tempera on canvas, 170x130cm


 


송현숙, 5획 5brushstrokes, 2013, Tempera on canvas, 150x200cm

 

이 ‘오래된 미래’의 가치는 지금도 유효한 울림을 가진다. 종종 청자 빛으로 등장하는 단색조의 바탕 면은 이러한 공명을 위한 깊은 공간이다. 그것은 동양화의 여백과도 비슷하지만 청자나 청자 빛 하늘처럼 어떤 대상이나 상태가 보다 구체적으로 연상된다. 그것은 진공이 아니라, 공기가 있다. 공기는 오래 묵은 것부터 살랑 이는 바람까지 다양한 계열로 퍼져있다. 나무봉과 천으로 된 끈이라는 구성요소는 옛날에 옷걸이 역할을 했던 구조물인 횃대에서 온 것이다. 이전 작품에서 나무 봉과 천의 조합은 빨래 줄을 지지하는데 사용했던 긴 장대를 떠올린다. 지금은 사라진 일상생활 문화에서 길어 올린 이미지는 먼 이국땅에서 그림을 시작한 작가에게 고향에 대한 원형적 이미지로 다가왔을 것이다. 옷이나 빨래를 걸고 너는데 사용하는 나무봉은 이제 그 기능을 잃고 부드러운 것을 형태화하는 지지대라는 또 다른 상징으로 거듭난다. 천이 말려있으면 나무 봉처럼 되는 것이고, 종이가 그렇듯이 나무가 섬유소로 분해되어 천처럼도 펼쳐질 수 있다. 

 

무엇보다도 여성들에게 친숙했던 천은 나무 봉 같은 곳에 돌돌 말려 있곤 했다. 이전 시대의 여인들에게 천은 지금은 상상할 수도 없는 많은 종류의 것을 만들었던 것으로, 단순히 재료나 소재를 넘어선다. 하얀 천은 전직 파독 간호사라는 짧은 작가의 이력과 연결되어 가장 먼저 찢겨진 상처를 봉합하는 치유가 떠오르고, 그 다음은 모국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이의 향수가 연상된다. 우리도 한 때는 백의민족 아니었나. 치유와 향수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가령 지붕 아래 기둥 옆으로 또 다른 막대기가 있고 양 막대기가 하얀 천으로 묶여있는 작품 [14 획]에서, 천은 어머니의 공간인 집, 모국을 지탱시켜주는 연결망을 이룬다. 그리고 다시금 예술가에게 가장 친숙한 모든 것이 비롯되는 판으로서의 천이다. 작가에게 나무와 천은 무엇보다 캔버스를 구성하는 요소이다. 팽팽하게 당겨진 캔버스를 미끄러지는 안료가 묻은 넓은 붓의 흐름은 형태와 색채, 명암, 화가의 호흡과 행위, 그리고 그 모든 것으로부터 종합되는 의미를 탄생시킨다. 

 


송현숙, 14획 14brushstrokes, 2012, Tempera on canvas, 200x150cm

 


송현숙, 12획 12brushstrokes, 2013, Tempera on canvas, 200x170cm

 

덧붙이자면, 템페라라는 서양의 재료와 귀얄 붓이라는 동양의 그것과의 조합도 생각할 수 있다. 폭이 넓은 붓으로 한 번에 그어 내렸을 선이자 면은 캔버스의 올과 천의 올을 일치시킨다. 그것은 실재와 환영 간의 구조적 일치이지 재현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것이 비롯되고 사라지는 매끄러운 판이다. 송현숙의 작품 속 상징적 우주는 몇 가지 안 되는 단촐한 요소들도 풍부한 은유 및 서사로 거듭난다. 가령 천에 가려진 서있는 무엇은 인간을 떠오르게 한다. 명에서 암으로 서서히 이동하는 작품 [12획]은 중간에 명암의 전이를 알려주는 나무들이 있는데, 작가가 다른 작품에서 언급한 세월호 사건과 연결되어 어둠속으로 사라지는 인간 무리들을 떠올린다. 각자의 이기주의에 단절 된 틈에서 벌어진 어처구니없는 사건은 작품 [28획]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 당겨지는 하얀 끈 같은 구원의 동아줄 같은 것이 부재했지만 말이다. 이러한 끈과 지지대의 이미지는 자연과 전통에 기반 한 오래된 공동체의 연결망부터 현대의 네트워크 사회에 이르는 연상 고리가 있다. 모든 긴밀한 연결망이 그렇듯이 여기에는 무의식과 육체 같은 불투명한 요소도 포함된다. 

 

송현숙의 작품에서 천은 어둠을 가르는 빛의 이미지나 바탕 면과 구분되는 선적 요소이다. 또 하나의 요소는 장독 형태이다. 벌린 입으로 심연을 감추고 있는 항아리 역시 명주 천이나 나무 봉처럼 몇 획으로 쓱쓱 그어 진 것이지만, 보다 입체감이 있다. 청자색 바탕에 벽돌색 항아리가 있는 작품 [6획]은 다른 작품과 달리 여러 번 칠해져 입체감이 두드러진다. 이러한 입체감은 그것이 무엇인가 넣거나 꺼내지는 자리이고, 만약 그것이 비어있다면 공허한 울림을 야기할 공간임을 알려준다. 청자나 벽돌 같은 오래된 사물의 색이면서도, 기우뚱한 형태와 색채의 대조가 활기차다. 항아리는 장대처럼 인간을 연상시킨다. 원시문화에서 항아리는 또 다른 탄생을 위한 최후의 주거지(관)로, 인간은 다시 갓난아이의 자세로 그곳에 들어(돌아)갔다. 항아리 역시 횃대처럼 지금을 사라진 민속적 소재이지만, 송현숙의 작품에서 자궁이나 무덤처럼 인간이 나왔다가 돌아가는 원형적인 그릇(코라)이다. 

 


 송현숙, 28획 28brushstrokes, 2014, Tempera on canvas, 200x150cm

 

코라(Khora)는 플라톤이 사용한 용어로, 신의 조화로운 질서가 개입되기 이전의 무정형이며 무한한 수용체적 물질이나 공허를 말한다. 플라톤으로부터 영감 받아 줄리아 크리스테바가 특화시킨 ‘기호적 코라(semiotic chora)’는 예술의 영역에서 여성적 글쓰기(ecriture feminine)와 관련된다. 화가에게는 그리기로 전치할 수 있으며, 특히 붓글씨 같은 방식으로 ‘써지는’ 송현숙의 작품에서 쓰기와 그리기는 하나가 된다. 손만으로는 하나가 될 수 없고, 몸이 동원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몸인 한 어떤 성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그녀의 작품에서 누구나 분명히 알아볼 수 있는 ‘여성적’ 소재를 넘어서, 남성 화가들이 헤게모니를 잡고 있는 관념적 추상과 결정적으로 갈라지는 지점이다. 기호적 코라는 아버지의 세계에 입성하기 위해 언어를 습득하기 이전의 충동이나 충동들의 율동을 뜻하며, 이는 사회의 지배적 언어라고 할 수 있는 상징적 질서의 배후에 존재하면서 상징적 언어를 파열시키고 변형시키는 원동력이다. 

 

그것은 선험적인 것이지만, 여성이라고 자동적으로 획득될 수 있는 자질은 아니며, 현실화 되어야할 잠재적 차원에 있으면서 모든 예술가들이 공통으로 활용하는 자원이다. 크리스 위든은 [포스트구조주의 페미니즘 비평]에서 코라는 상징계와 상징적 의미의 주체에 대한 끊임없는 도전이 일어나는 부정성의 장소라고 평가한다. 그러나 이러한 원초적 수용기에 굳이 성을 붙인다면 그것은 여성이다. 반쪽 성으로서의 여성이 아닌, 총체성으로서의 모성적 여성이다. 만물이 비롯되고 모든 만물을 담아낼 수 있는 원초적 수용기인 코라는 타자를 자기 몸속에 품는 존재인 모성과 밀접하다. 모성은 코라처럼 상징화할 수 없는 것, 그래서 더욱 ‘시원적이고 불가능한 비장소, 타자인 어머니’(크리스테바)이다. 송현숙의 작품에서 모성이라는 원초적 감성과 탯줄처럼 이어주는 또 하나의 모티브는 명주 천이다. 빨랫줄에 걸린 천처럼 수분을 머금은 듯한 묵직한 명주천은 중력에 의해 평평하게 당겨질 때 선이라기보다는 검은 바탕을 뒤덮는 밝은 면이 된다. 

 


송현숙, 6획 6brushstrokes, 2013, Tempera on canvas, 105x110cm


송현숙, 1획 위에 4획(왼쪽), 8획(오른쪽) 4brushstrokes over 1 brushstroke(on left), and 8brushstrokes(on right), 2012 ,
Tempera on canvas,135x174cm


 밝게 펼쳐져 올 하나하나의 흐름도 확인해볼 수 있는 그것은 그 안을 확인해볼 수 없는 장독과 대조된다. 기울어진 나무막대가 천으로 가려져 있는 밝은 왼쪽 화면, 그리고 어두운 장독이 화면 가득한 오른쪽 면이 맞붙어 있는 작품 [1획 위에 4획(왼쪽),8획(오른쪽)]은 좌우의 명암 대조가 확실하다. 항아리는 어두운 부분을 채우고 있으며, 입구로 더 짙은 구멍을 보여준다. 그것은 카오스의 어원이기도 한 검은 목구멍 저 너머의 검은 허공을 가리킨다. 그것은 단순히 밤의 세계가 아니라, 밤도 나오고 낮도 나올 수 있는 원초적 혼돈의 영역이다. 명과 암의 세계 모두에 걸쳐있는 막대기는 인간이 밤과 낮의 세계 속에서 살아가듯, 반복적으로 교차하는 두 세계와 공존해야함을 알려준다. 어떤 작품에서는 천이 분리된 것들 간의 연결망을 이루지만, 이 작품에서 명과 암의 세계를 연결하는 것은 인간을 연상시키기도 하는 막대이다. 이 나무 막대는 밝은 하늘과 어두운 땅을 연결했던 솟대 같다. 인간은 다양한 연결망으로 되어있음과 동시에, 인간자체가 또 다른 연결망이 된다.

 

출전; 국립현대미술관 웹진 art;m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