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혜적인 작은 총체성
이선영(미술평론가)
인천 부평구 십정동 신덕촌 일대에서 진행된 자바르떼 팀의 공공예술 프로젝트 ‘열우물! 두레박이 필요해’는 1990년대 초부터 (재)개발이 장기간 유예된 상태에서 방치 되다시피 한 마을에서 커뮤니티를 활성화하기 위해 지난 몇 달 간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주민과 함께 하는 마을잔치들을 중심으로, 노래와 악기를 함께 배우고, 생활에 필요한 것을 함께 만들며, 마을어르신들의 삶의 이야기를 듣고 구술을 채록하는 작업 등이 그것이다. 함께하기를 중심으로 한 이러한 문화 활동은 이 장소의 특수성과 긴밀한 관계를 가진다. 그 동네는 개발로 인해 쫒겨온 주민들이 모여 자리를 잡은 인천의 대표적인 빈민촌이었고, 1년 2년 사이가 다를 만큼 급변하는 한국사회의 시간감각을 거스르는 곳이다. 그러나 시간이 멈춰있는 듯한 거기도 한때는 많은 인구들이 번성했으며, 1970-80년대 한국사회의 근대화를 견인했던 공장, 일용직 노동자들의 삶의 터전이었다.

문을 거의 닫은 시장 통을 비롯하여 폐가들이 많이 보이는 지금의 썰렁한 분위기와는 다른 곳이었을 것이다. 이미 일부는 개발의 산물인 고층 아파트로 둘러싸인 섬 같은 마을은 주변의 ‘미래’를 바라보며 ‘과거’를 살고 있는 듯했다. 이곳에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현재이다. 미래와 과거나 정치나 역사의 몫이라면, 지금 여기를 충만하게 채우는 것은 바로 문화예술의 몫이다. 그곳은 개발논의가 나왔던 1990년대 초부터 오락가락하는 공공정책에 대응하여 공동의 이익을 수호하기 위해 주민자치 모임이 결성되어 있었고, 이번 프로젝트는 이러한 오래된 풀뿌리 전통과 접속했다. 자바르테의 활동 중심이 되었던 공간 ‘두레박’의 운영자 최금예에 의하면, 열우물이라는 동네에는 많은 주민들의 모임(새마을부녀회, 자율방범대, 통우회, 통장장율회), 주민센터 해님방, 벽화를 하는 '거리의 미술', 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공동체가 있다. 이 공동체들이 바로 마을의 우물이며, 두레박 또한 문화로 마을 사람들을 잇는 마을의 우물이 되길 바란다.
가령 마을 공부방인 해님방은 그곳에서 펼쳐졌던 교육, 주민 운동의 결과로 성장한 아이가 다시 그곳의 선생님으로 활동하고 있을 정도로, 세대에서 세대를 잇는 공동체의 경험이 축적된 곳이다. 이러한 특수성 때문에 그곳에서의 공공예술은 이전에도 꽤 진행된 흔적이 남아있다. 시장 통 끝자락에 작업실이 있는 마을주민이자 작가 ‘거리의 미술’에 의해 수행된 많은 벽화들이 눈에 띄었지만, 정작 다니는 사람들이 없어서 기이한 느낌을 주기도 했다. 어느 한 해에만 진행된 것이 아닌 작업들은 이곳에서 시행되었던 그간의 문화 활동에 대한 시각적 증거들로 남아있다. 이러한 ‘유산’이 남아있는 터라, 연행예술 출신의 프로젝트 감독(이찬영)은 보이지 않는 부분에 신경을 쓴 듯하다. 시각예술 부문은 9월 마을축제 때 청년 작가들인 ‘아요바’ 팀이 ‘우리를 특별하게 만드는 일상의 재발견’이라는 주제로, 마을 주차장 입구와 연결되는 언덕배기에서 연 사진전이 유일하다.
공동체와의 유대가 강한 팀과 공공예술에 새롭게 진입한 청년 팀이 ‘따로 또 같이’ 한 지역에서 시너지 효과를 주는 행사를 진행한 것이다. 그 전시는 십정 2지구 동네가게 중 30곳을 선정하여 가게 25곳에다 일회용 카메라를 배포해서, 여기에서 수집된 카메라들에서 작품 하나씩을 뽑아 전시한 것이다. 캔버스 천에 출력된 사진은 뒤편에 마을이 보이는 언덕에 철망을 설치하여 그 위에 작품들을 걸고 두어 작품과 마을이 동시에 눈에 들어오게 했다. 마을주민의 꾸밈없는 일상이 드러난 작품들은 지금 여기의 현실을 소박하게 긍정한다. 재개발지의 주민들이 언제 그 터전이 사라질지 모르는 과도기적인 삶을 살고 있기에, 지금 이순간의 삶을 긍정하는 것은 중요하며, 자바르테의 활동과 조응하는 면이 있다. 상충이 아니라 보충의 관계를 이룬 이 사진전 외에, 프로젝트의 중심을 이룬 수차례의 마을잔치는 어떤 기념비도 남기지 않았다. 대신 함께함의 체험 그 자체만을 남기고자 했다.

삶의 이야기 듣기
두레박은 주민의 생활과 문화와 교육이 만나는 공간이자, 주민들의 휴식공간이자 다양한 문화모임이 이루어지는 장소로, 특히 마을에 형성된 동아리들의 활동 공간이 되어주었다. 이 동네에 필요한 문화와 소통이 있는 자리이다. 9월초에 필자가 참관한 마을잔치는 이 마을에서 오랫동안 닦아온 자바르떼 팀의 역량이 잘 드러난 행사였다. 마을공터 주차장과 구 시장골목에서 이루어진 마을축제는 수년째 매해 9월이 되면 열려왔으며, 쇠락해 가는 장소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시끌벅적한 마을잔치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주민들은 물론, 구청장과 시의원, 국회의원 등도 구경하러 온 이 축제에는 참여한 단체들도 많아서, 열우물 주민모임 ‘참새 방앗간’을 포함하여 9개 팀에 이른다. 마을 축제가 열리는 주된 공간인 마을 공터 주차장은, 이제는 거의 문을 닫은 가게들이 줄지어 있는 시장 골목과 연결되어 있고, 저편으로는 새로 지은 아파트가 허름한 채로 방치된 여기와는 대조적 풍경을 연출했다.
그 장소에 있는 것만으로도 이 마을의 상황을 파악할 수 있을 만큼 풍경은 첨예하게 불연속적이다. 한국사회의 급성장은 발전주의라는 대세에 포함되지 못한 사각지대를 만들었고, 이러한 사각지대에서 유예된 삶을 살아가는 주민들 또한 만들었다. 그 마을의 숙원은 재개발이다. 시간이 야기하는 파괴 작용에 거슬러, 조금씩 고쳐가며 살면 좋으련만, 다 무너뜨리고 다시 지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이도저도 아닌 과도기적인 시공간을 만들었던 것이다. 재개발 예정지에서의 공공문화예술에 대한 비판적인 의견이 있지만, 이런 곳이야 말로 사업의 적격지라고 생각한다. 예술 자체가 이곳과 저곳, 지금과 다른 때라는 경계 위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도기적인 시공간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것은 단순히 사라져가는 것들을 애도하는 것이 아니라, 과도적 시공간이라는 공통의 조건을 가진 축제를 여는 것이다. 마을잔치는 흥겨운 만큼이나 서글픈 느낌을 주었다. 잔치는 공동체의 자발적인 결과라기보다는, 잠재적 공동체를 활성화하려는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으며, 자바르떼는 매개자 역할을 했다.

가족 날다, 기타배우기
어쭙잖은 의식으로 어색한 무대를 만들기보다는 확실한 선택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확실함은 동시에 불만스럽다. 대중성에 부여된 몫은 공공성과 예술성을 압도할 만큼 커서, 대중추수주의라는 혐의를 피해갈 수 없다. 다소간 평범했던 무대연출의 단적인 예로, 수많은 축제 참가자들이 몇 시간동안 봐야 했던, 시각적으로 중요한 지점일 수 있는 무대 배경 막을 지적하고 싶다. 이미 시각 이미지가 과잉인 그곳에서 알록달록 예쁘게 꾸민 또 하나의 이미지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무대라는 중요한 지점에서 그 특징과 상징을 발견할 수 없음이 아쉽다. ‘소소한 파티’라고 붙여진 작은 축제는 마을의 구 시장 골목길에서 8월부터 매달 열려 총 6차례 진행되었고, 밴드, 아트뮤직 프로젝트, 극단 덩이줄기, 마을극단 열우물 아낙네, 할머니 뽕짝노래단 등의 출연진이 함께했다. 수동적인 관객이나 소비자의 역할만을 강요하는 스펙터클의 문화에서 초빙된 전문 강사와 주민이 함께하는 문화 활동은 그자체로 의미가 있다.
그들은 함께 노래와 기타를 배워서 마을잔치의 무대에 섰고, 술과 차를 함께 담갔으며, 천연 비누와 퀼트, 미싱으로 옷 만들기 등을 함께 진행 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은 익명적 소비자를 향한 상품이 아니라, 각각 만든 산물과 교환할 수 있는 선물이 되었다. 그리고 그 자체가 소통을 창출하고 이어가는 방식이었다. 자바르테의 활동의 중심에 놓인 마을잔치나 생활공예,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듣는 행위는 수동적 소비자로 살기를 권하는 현대사회에 대한 작은 역행이다. 축제란 일상의 단절을 말하며, 생활공예는 대안의 일상을 말한다. 축제나 손수 만들기에서 내재된 상징적 교환은 스펙터클이나 상품의 소비가 아닌 문화 생산의 주체를 지향한다. 인류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장 뒤비뇨는 [축제와 문명]에서, 문화는 파괴적인 자연에 대항하는 상징적인 힘의 총체를 구성한다고 본다. 그들의 ‘소소한 파티’나 스스로 물건을 만들어 교환하고 소통하는 것은 자연의 법칙처럼 밀려오는 일방적 논리에 대한 대응이라는 점에서 문화적 역할을 수행한다.

옷만들기
이러한 문제와 요구에 대답하려는 자바르테의 문화실천에서 주목 할 만 한 점은 시장만능주의에 대항하는 선물의 경제이다. 현대사회의 소외는 이미 정의 되었듯이, ‘우리 자신이 생산한 것이 우리를 억누르는 외부적 힘으로 자리 잡는 현상’(마르크스)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보편적 현상이라고 볼 수 있는 시장은 지상의 가장 아늑한 거처가 되어야 할 집 또한 상품이 되어, 길고도 괴상한 브랜드명을 기표로 달고, 쌩쌩 돌아가는 자본의 회로에 복속되기를 스스로 욕망하는 시대를 열었다. 이러한 시대에서 뭔가 손수 만들고 만들면서 소통하고 나누는 방식은 현재의 보편적인 상품경제와는 이질적이다. 그것은 사회인류학자인 데이비드 그레이버가 [가치이론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 교환과 가치, 사회의 재구성]에서 상품경제의 대안으로 제시하는 선물경제, 즉 ‘공적으로 무언가를 선물하는 기쁨이나 관대한 예술적 분배의 기쁨, 공적이고 사적인 향연에서 베푸는 호의의 즐거움’(모스)같은 가치아래 수렴되는 그런 사회와 가깝다. 그런 사회는 먼 과거에 있었거나 미래에 있을 것이다.
현재의 시장경제가 가능한 많은 재화를 자신의 것으로 축적하기 위해 노력한다면, ‘오래된 미래’의 가치인 선물에는 언제나 증여자의 자아 일부가 담겨있기 때문에, 선물을 주는 행위는 강력한 사회적 관계를 형성한다. 모스의 논의를 참조하는 그레이버에 의하면, 시장 경제는 사람과 사물이 완전히 분리 가능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으며, 이런 지향으로 말미암아 생산영역과 소비영역의 분리가 초래된다. 마르크스 역시 생산영역과 소비영역의 이러한 분리가 사물과 사람간의 가장 근본적인 연결고리들을 망각시키는 결과로 이어졌음을 주지한바 있다. 시장경제는 모든 종류의 경제활동이 궁극적으로는 모종의 사람을 창조하기 위한 수단, 즉 삶의 진정한 토대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반면 선물을 한다는 것은 즉각적인 답례에 대한 기대 없이 혹은 그런 답례가 있을 것이라는 보장 없이 무언가를 타인에게 주는 것을 의미한다. 축적된 것을 주고받는(선물) 과정 그자체로 낭비하는 관례의 정점에 축제가 있다. 예술은 축제의 후손이다.

비누만들기
모스는 선물경제가 인간사회 어디에서나 존재하는 교환의 양식임을 발견하고, 이를 소외된 현대사회의 대안으로 내세운다. 선물경제는 공동 작업으로 맺어진 관계들, 특히 금전적 이해관계가 아니라, 행위자의 능력 및 상호필요에 의해 맺어진 모든 관계에 자리 잡는다. 이러한 대안의 경제학은 공동체 활동, 문화, 예술의 근간에도 깔려있다. 가령 주민 커뮤니티 공간인 두레박에서 마을사람들이 함께 만든 작은 물건들을 생각해 보자. 그것은 금이나 은만큼이나 통화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했던 조개 혹은 고동 등으로 만든 장식물에 해당된다. 익명적 시장을 위한 익명적 노동자가 아니라, 이웃과 교환할 수 있는 가치의 생산, 서로의 필요를 서로가 만족시켜줄 수 있는 작은 총체적 우주—그레이버는 혼돈의 상태에서 가치를 정립하는 일반적 방식 중의 하나는 일종의 소우주, 구체적 사회 혹은 작은 규모의 총체성(micrototality)을 창조하는 것이라고 본다--의 생성이야말로 다수의 욕망을 만족시켜주는 척하는 추상적 체계와 그 전횡을 거부하는 상징적 행위이다.
이 대목에서 문화나 예술은 잉여나 장식을 넘어서, 사회에 진정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레이버는 어떻게 하면 물질적 부를 최대화할 수 있을까. 혹은 가장 공정한 배분의 방식은 무엇일까 하는 그런 질문들 대신, 이제 새로운 질문들을 제기할 수 있어야만 한다고 강조한다. 예컨대, 삶에서 진정 의미 있고 중요한 것을 스스로 정의할 자유를 누리면서 자율적으로 결정된 삶의 기본적인 물적 조건을 보장받을 수 있는 사회, 이를 추구하기 위해 함께 연대할 수 있는 사회, 우리 모두가 궁극적으로 더 풍요로워지는 그런 사회를 위해 필요한 조치들이 무엇인가 하는 바로 그런 질문들 말이다. 그렇기 위해서는 어떤 관행이나 제도가 더 이상 그런 부정의나 소외, 불평등에 기여하지 않는 상상적 총체성의 공간이 제시되어야 한다. 이 공간 속에서 하나의 비전이 아닌 가능한 많은 대안적 상상이 나와야 한다. 내 앞에만 쌓기보다는 타자에게 더 많이 줌으로서 소통하는 것은 모스가 이상으로 품고 있던 선물경제 뿐 아니라, (공공)예술에도 해당되는 중요한 덕목이자 목적이 될 것이다.
출전; 인천문화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