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과 바다를 담은 칵투스 세라믹(cactus ceramic)

  

이선영(미술평론가)

  

신세영의 ‘화이트 오아시스’ 전에는 황량한 사막이나 고산지대에서 서식하는 선인장들로 이루어진 오아시스가 연출되어 있다. 선인장과 오아시스는 모두 사막과 관련되어 있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선인장에서 언뜻 떠오르는 거칠고 딱딱한 면모가 사막 속의 일시적 천국인 오아시스와는 거리가 있다는 점에서, 선인장들로 이루어진 오아시스는 역설적이다. 그러나 작가는 선인장에서 오아시스를 볼 수 있을 만큼 선인장에 매료되고 몰입되어 왔다. 매료라는 최초의 단계와 몰입이라는 이후의 지속적 상황은, 하나의 소재로 시작된 드넓은 상징적 우주의 구성을 위한 필요충분조건이다. 그 결과물이 펼쳐진 선인장의 우주는 관객에게 오아시스같은 역할을 한다. 꼭 선인장이 아니더라도, 어떤 소재와 주제의 작품이든 간에, 잘 꾸려진 전시장은 특별한 체험을 원하는 이들에게 일종의 오아시스 같은 환경은 아닐까. 작품을 보기 위해 사막을 건너왔는데 사막보다 더 황량한 전시장도 많지만 말이다. 


white oasis,2014,ceramic

거친 것에서 거친 것 밖에 보지 못하는 상상력은 빈약하다. 현실과의 동어반복은 예술에 기대될 법한 또 다른 차원을 무력화한다. 그렇다고 예술이 현실과 정 반대편에 있는 어떤 것은 아닐 것이다. 현실 속에서 현실만 보고 예술 속에서 예술만 보는 시야는 답답하다. 신세영의 작품 속에는 인공 속의 자연, 기능 속의 아름다움, 식물 속의 동(광)물, 사막 속의 바다, 안쪽의 바깥, 현실 속의 환상, 일상 속의 성스러움, 고통 속의 희열, 딱딱함 속의 부드러움 등, 다양한 반전의 계기가 있다. 신세영같은 부류에게 예술이란 사막 같은 현실을 가로지르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다. 그들은 사막 특유의 아름다움을 파악할 것이다. 모래와 바람이 만들어내는 변화무쌍한 풍경은 그 매끈한 대지를 미로로 만들며, 문명이 강요하는 단기적 전망으로부터 탈주하고픈 이들에게 넉넉한 유목의 장을 마련할 것이다. 여기에서 길은 따로 없다. 그들이 지도 없이 간 그 길들이 길이 된다. 


사막은 생명이 시작된 바다의 흔적을 가지고 있다. 로지 브라이도티가 [유목적 주체]에서 말했듯이, 변화 중인 풍경 속에서 자신이 있었던 장소들의 자취를 보여준다. 저자에 의하면 유목민은 바람 속의 모래밭과 돌들 위에, 식물들 속에 쓰인 지도들을 읽을 줄 안다. 사막은 기호들을 읽을 줄 아는 사람들, 황야를 통과하면서 자신의 길을 노래할 수 있는 사람들을 위한 거대한 지도이다. 기호에 민감한 이들이 또 다른 기호를 생성하는데 적극적일 것이다. 사막 속의 오아시스라는 신세영의 토포스에는 차이들 간의 오묘한 역학관계가 있으며, 학부 시절부터 관심을 가져온 선인장이라는 소재는 그 관계망의 중심에 놓여있다. 매우 덥거나 춥고, 생명에 필수적인 산소나 수분이 희박한 환경에서 자라는 선인장은 척박한 환경과 상호작용하면서 적응해온 특이한 형태와 기능이 있다. 물질과 에너지의 흐름이 각인되어 만들어진 자연의 독특한 구조들은 예술의 영원한 영감이 되어왔다. 


cactus ceramic_lighting,2014,ceramic

작가가 선인장이라는 평범한 소재에서 끌어낸 재미와 의미는 다양하다. 다양함과 완성도가 동시에 충족되고 있다는 점이 이 전시의 특징이다. 완성도를 위해 다양성을 희생하거나, 다양성을 위해 완성도를 희생하는 식의 선택은 없다. 신세영의 출발인 자연은 다양성과 완전함이라는 두 가지 코드를 자연스럽게 융합시킬 수 있게 했을 것이다. 자연으로부터 출발한 예술은 자연으로 회귀하려 한다. 자연을 대상화하는 초기의 단계를 넘어서, 예술이 속해야할 궁극적인 단계는 그자체가 자연이 되는 것이다. 신세영이 주로 사용하는 매체인 흙 또한 자연이다. 흙에서부터 모든 것이 나오고 돌아가듯이, 흙으로 만든 기(器)는 많은 것을 담겨지고 거쳐 갈 수 있다. 그려지거나 만들어진 도자기 위에서 자라나는 듯한 신세영의 선인장은 때로 그자체가 그릇이 된다. 선인장 모양의 컵이 그 예이다. 척박한 환경에서 자기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해, 물을 머금고 있는 다육식물은 그 자체가 일종의 수용기 이므로, 작가는 그 빈곳을 주시하여 또 다른 무엇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을 만든다. 


더 나아가 전시장 전체가 하나의 그릇이 된다. 작가는 자연/예술의 언저리가 아니라 자연/예술의 내부로 관객을 끌어들인다. ‘화이트 오아시스’전에서 천정위에 둥둥 떠 있는, 몸통이나 꼬리가 선인장인 물고기들은 관객을 작품 속에 있게 하는 것이다. 한정된 시야 속의 설치가 설치라는 형식을 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으로 만든다면, 다소간 보기 불편한 위치에 걸린 물고기들은 관객을 상징적 공간으로 밀어 넣는다는 점에서 설치의 이유를 분명히 한다. 관객은 바다 또는 오아시스를 단지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상징적 우주 속에 들어가게 된다. 작가가 선인장에 매료되고 몰입되면서 그 내부에 있게 되었듯이, 관객 또한 작품 내부에 있게 한다. 공중을 헤엄치고 있는 선인장/물고기는 벽이나 바닥에 선인장이 지천인 장소인 사막의 원래 모습인 바다로 회귀시킨다. 극과 극을 이루는 이 두 가지 생태환경이 뫼비우스 띠처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사막이나 바다의 풍경 그 자체처럼 경이롭다. 


cactus ceramic ,2014,ceramic

메마른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더욱 거칠어진 외관, 그러나 수분을 압축시킬 수 있는 기능으로 더욱 촉촉한 내부를 가진 선인장의 생태는 예술에 결코 호의적이지 않은 세상 속에서 어렵게 자신의 세계를 구축해야하는 예술적 생태계와 겹쳐진다. 그것은 작가가 선인장에서 오아시스를 연상한 이유일 것이다. 작업은 거친 세상을 버틸 수 있게 하는 것을 넘어서, 대안적 우주를 건설하는 것이고, 그렇게 함으로서 타자들에게도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작가가 직면한 현실은 사막 같은 극한의 조건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현대 사회가 모든 것을 이윤이라는 모래알로 환원시킨다는 점이 그렇다. 그러나 이리저리 들춰보면 사막에는 모래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신세영은 사막 같은 현실을 사막 그자체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사막에서 살아남은 생물체를 모델로 하여 사막 안의 오아시스를 구축한다. 말하자면 얼음천지의 극지방에서 작은 이글루, 이동 중인 초원 속의 천막, 험난한 산악 지형 속의 베이스캠프 같은 장소이다. 


그것은 바깥 그 자체나 안 그자체가 아니라, 바깥에 있는 안쪽이다. 안팎의 경계는 취약해서 안에는 바깥의 현실이 여실히 반영, 또는 변형되어 있다. 오아시스에는 사막이 여전히 현존하는 것이다. 광물질에 가까운 딱딱한 선인장의 외형이 그것을 반증한다. 그러나 그것에만 머문다면 바깥과 역동적으로 상호작용하는 생명의 특성은 발휘되지 않을 것이다. 신세영의 작품에서 안/밖은 차이 속에서 연동된다. 바깥이 척박할수록 안은 상대적으로 더 풍요롭게 다가올 것이다. 바깥과 차단된 안은 현대 도시에서의 환경이 그러하듯, 그 내부를 아무리 그럴듯하게 꾸며놓아도 금 새 권태로움을 낳을 뿐인 사이비 갱신만이 반복될 뿐이다. 물론 바깥과 안이 완전히 하나가 되는 차원은 죽음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생체막으로 둘려 쳐진 모든 생명체들이 그러하듯, 안과 바깥의 긴밀한 소통이다. 신세영이 작품 소재로 선택한 선인장은 바깥과 안이 역설적인 형태로 연결되어 있다. 


cactus ceramic,2014,ceramic

거친 환경에 대항하여 굳건한 방어막을 치고 있는 듯한 선인장의 외관에는 내유외강의 면모가 있다. ‘cactus ceramic’이라고 이름붙인 선인장을 소재로 한 작품들은 거칠고 황량함보다는 따뜻하고 행복한 분위기가 있다. 특히 천정에 걸리거나 바닥에 놓인 조명작품이 그러한 느낌을 준다. 조명작품에는 선인장의 꽃말에도 있는 ‘불타는 마음’이 흙으로 만들어져 구워진 단단한 도자 밖으로 스며 나온다. 원래 빛과 물을 적절히 담기 위해 발달된 구조, 즉 주름이 많은 몸통이나 표면의 가시들은 내부조명에 의해 화려한 실루엣으로 재탄생한다. 조명 작품에는 다른 작품에 많이 배제되어 있는 색깔도 있다. 특히 가시를 표현하기 위해 광섬유를 활용한 점이 특이하다. 유리섬유 끝에서 빛을 발산하는 광섬유는 선인장의 촉각적인 느낌을 잘 살리면서도 조명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 공격 또는 방어 본능에서 발전되었을 가시 부분은 따스한 발산의 느낌으로 변모한다. 


천정에서 내려오는 펜던트 조명에서는 선인장의 기하학적 단면을 활용했다. 흙이라는 두텁고 불투명한 느낌을 주는 재료로 빛을 투과하는 조명을 만들어낸 상상력과 기술이 주목할만하다. 벽면에 붙여진 작품들은 자기토로 만들어진 한 조각의 도판에 다른 표면 질감들을 주는 재료나 회화를 접목시킨 작품이다. 그릇모양의 화분 속 선인장과 그 옆의 새는 한 폭의 동양화같은 느낌이다. 선인장이라는 이국적인 식물은 대나무치기나 또는 국화 꽃송이를 덧붙이는 방식으로 단위들을 늘려나간다. 전사나 그리기를 통해 이미지가 고정된 하얀 판은 마치 화선지나 캔버스같은 역할을 하면서 동시에 내외장재로도 사용될 수 있는 단위가 된다. 사각형의 외곽선을 자유롭게 뜯어냄으로서 작가의 손맛을 남겼다. 벽에는 부조작품도 걸려있는데, 선인장에서 직접 떠낸 3차원 형태와 2차원적 이미지를 결합시킨 이 작품은 여러 장르를 넘나들려는 작가의 의지가 드러나 있다. 


2010년, 칵투스 컵 시리즈



2013년, 가장 긴 오브제 컵

물레를 돌려서 만든 둥근 틀은 선인장 이미지가 그려진 둥근 틀이면서 동시에 선인장들을 담은 그릇같은 모습이다. 화이트 오아시스라는 부제는 작가가 주로 사용하는 백자토와 관련된 것이다. 전시장 안쪽에 둥근 좌대 위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다양한 선인장들은 백자토의 색이 자연색을 대신한 것으로, 색이 빠짐으로서 선인장의 순수한 형태가 강조되었다. 조명속의 하얀 선인장들은 여러 생태환경에 맞춰 진화했을 다양한 굴곡 면을 다양한 음영의 계열로 재현한다. 작가를 매료시켰을 다양한 형태의 선인장들이 마치 하나의 샘플처럼 모여 있다. 각각은 하나의 유닛이 되어 한 개체 속에서, 또는 여러 개체로 헤쳐 모인다. 면과 면이 쉽게 붙는 선인장은 육종기술과 결합하여 본래의 다양성에 또 다른 다양성을 추가했다. 신세영은 여기에 조형적 육종 기술을 덧붙였다. 접목은 생태적, 기술적, 조형적인 차원에서 일어난다. 전시장의 크고 작은 선인장들은 단편들이 또 다른 개체가 될 수 있는 가능성에 열려 있으며, 각기 자유롭게 서있지만 전체는 조화를 이룬다. 


둥근 판에 모인 것들은 여러 부류의 사람들같기도 하고 도시 같기도 하고 숲 같기도 하다. 단순한 형식 속에서 최대한의 다양함이 예찬된다. 뜨거운 사막의 열기를 견뎌내는 식물의 구조는 마찬가지로 고온을 견디고 자기로 변모하는 흙으로 만들어진다. 신세영의 작품들은 상처를 통해 진주를 품어내는 진주조개처럼, 극한의 조건을 그 반대의 결과로 전화시킨다. 벽에도 천정에도 바닥에도 있으며, 다양한 방식과 기법으로 만들어진 다종다양한 작품은 최소의 것에서 최대의 것을 뽑아내는 경제성의 원리가 있다. 그것은 예술 뿐 아니라 공예나 산업 분야에도 걸쳐있는 현대의 도자예술의 갖춰야할 것이기도 하지만, 자연의 근저에 깔려있으며 예술에도 관철되는 것이다. 예술은 남아도는 것을 취해서 남아도는 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예술은 잉여와 장식으로 스스로를 한정지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대안의 우주를 만들 수 있어야 한다. 동물의 털구멍과 비슷하여 소스라치게 놀란 외양을 연상시키는 가시, 그리고 ‘하늘로 뻗는 손’은 극한 조건 속에서 한 개체가 무엇이 필요한지 암시한다. 


2013년, 칵투스 오브제 시리즈


그래서 사막의 유목민들은 어느 민족들 보다 강력한 신앙을 필요로 했다. 선인장은 그 생태에서 끌어낼 수 있는 상징 외에 화학적으로도 또 다른 세계와 연결시켜주는 식물 중의 하나이다. 자크 브로스는 [식물의 역사와 신화]에서 성스러운 식물의 반열에 선인장을 포함시킨다. 저자에 의하면 페요테 선인장은 멕시코의 인디언들로 하여금 영매상태에 들어가게 하고 육체에서 벗어나 신을 만나게 해주는 성스러운 식물이다. 그 책은 살을 에는 듯이 추운 고산지대에서 오래 동안 금식하고 잠도 얼마 못잔 순례여행 중의 인간들이 벌이는 잔치를 묘사한다. 환각성분인 메스칼린이 포함된 페요테 선인장을 먹고 난후에 이들은 무한정으로 샘솟는 사람들처럼 노래하고 온갖 악기를 연주하며 무한한 행복감에 도취되어 밤새도록 춤을 춘다. 어떤 사람들은 몇 시간이고 영매 상태에 빠져 육체를 벗어나 신들을 만나는 여행을 하기도 한다. 여러 차례 이런 경험을 한 사람들은 주술가가 되어 다른 사람들을 안내하고 영적인 세계와의 매개자 역할을 한다. 


페요테 선인장을 숭배하는 인디언들은 우리가 환영이라고 부른 현상을 찰나적이며 눈속임같은 속세와 인접해 있는 심층적인 현실이라고 여겼다. 이러한 집단적 황홀은 단지 인간 조건을 초월하는 경험을 한다는데 방점이 찍혀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생명체들과 함께 살면서 그 모든 생명을 존중하며, 그것들과 의사소통하는 방식을 알고 있었던 고대의 원초적 우주관을 일깨워준다. 자연과의 교감은 인간중심주의라는 협소한 질서를 초월하여 인간을 둘러싼 모든 것과 교류하는 것이다. 그것은 오늘날 선인장이 미용이나 건강기능 식품, 또는 자그마한 장식품이라는 쓸모로 환원되고 있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소통을 예시한다. 오늘날 이러한 원시적이고 초현실적인 경험을 그것도 집단적으로 행할 수 있는 방법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라나 예술이나 종교, 제의와 축제는 아직도 그 통로를 살려두고 있다. 타자와 교류할 수 없다면 어떻게 편협한 동일자의 시선을 벗어날 수 있겠는가. 선인장으로 구축된 상징적 우주 속에서 관객은 작가가 오늘날 타자화된 자연과 소통했던 방식들을 추적할 수 있다. 


2011년, 칵투스 타일 시리즈


2013년, 칵투스 타일 시리즈

스스로 홀리지 않으면 타자도 홀릴 수 없는 것은 무당과 예술가가 공유하는 가치일 것이다. 신세영이 (재)발견한 선인장의 다양한 구조와 기능 중에서 형식적인 면과 연결시켜 주목되는 부분은 접목 스타일로 자신을 확장하는 방식이다. 선인장은 잎 하나를 뚝 떼어서 심어도 온전한 개체로 자라나며, 다른 선인장 종끼리의 접합 또한 용이하다. 전체와 부분간의 유기적 질서에 바탕하기보다는 단편과 단편이 접 붙어서 확장되는 방식이다. 전체와 부분 간의 유기적 관계가 정주적 삶을 예시한다면 단편들의 접합은 유목적 삶을 예시한다. 선인장의 서식처인 사막이 유목민의 땅이라는 것과도 무관치 않아 보인다. 유목민은 분리된 것들 간의 상호연결성과 경계들 간의 이행을 활성화한다, 그들에게서 확장적인 차용과 횡단은 빈번하게 일어난다. 로지 브라이도티는 [유목적 주체]에서 포스트모더니티라는 역사적 시대의 풍경을 정의해주는 수많은 타자들을 긍정적으로 탐색하게 하는 역동적 방식으로 유목적 주체를 내세운다. 


저자에 의하면 유목적 주체는 기존의 범주들과 경험의 층위들을 돌파하고 가로지르며, 정체성에 대한 주관적 관점에 정착하는 것에 저항한다. 포스트모더니티는 초국가적/초민족적이고 유동적인 방식으로 자본축적을 재 조직화하는 것에 상응한다. 유목은 오래된 미래의 가치이기도 하다. 자크 아탈리는 [21세기 사전]에서 만 년 전에 정착된 문명은 머지않아 유목을 중심으로 재건될 것이라 예견한 바 있다. 21세기 유목민들은 많은 것과 접속하려 한다. 학부시절에 도자, 섬유, 금속을 함께 배운 신세영은 다양한 매체를 섭렵하고 대화하는데 익숙하다. 학부시절에 유리섬유를 활용하여 도자조명을 만든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다양한 매체의 결합 덕분에 선인장으로 소재를 한정시켰음에도 불구하고 단조로움이란 없다. ‘화이트 오아시스’ 전의 주축을 이루는 것은 백자토로 만들어진 여러 기물들과 오브제인 것으로 봐서, 작가에게 도자예술은 확장의 보이지 않는 중심이 되고 있다. 그러나 다양한 놀이와 실험을 방해할 수도 있는 중심은 고수되지 않으며, 작업을 할수록 좀 더 많아질 다양한 중심 중의 하나로 상대화될 것이다.       

 

출전; 클레이아크김해미술관 '세라믹 루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