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이후의 삶
이선영(미술평론가)
꽃누르미(압화)라는 형식을 여러 장식물에 응용하는 백미경의 작품은 아름다움을 영구히 보존하고픈 인간의 욕망에 충실하다. 그녀의 다양한 작품들은 죽음 이후의 화려한 삶을 보여준다. 아무리 예쁜 꽃도 곧 시들어서 볼썽사나운 모습을 보여주기에, 나무에 피었다가 다음해 다시 필 것을 약속하는 꽃이 아닌, 꽃병이나 화분에 있는 꽃들은 그 시각적 쾌락만큼이나 우울함을 준다. 폭죽같이, 샴페인같이 한 번에 터져 낭비되는 그것은 낭비 그 자체를 소통의 계기로 삼는 상징적 교환의 원형적 존재라 할 만하다. 물론 그것은 꽃만의 운명은 아니지만, 꽃은 생애주기를 좀 더 압축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이 그렇다. 어쨌든 꽃은 보편적인 아름다움으로 받아들여진다. 특정 꽃에 대한 알러지나 트라우마가 있는 사람을 빼고는 누구나 좋아한다. 그래서 꽃은 미술과 장식에 두루 등장한다. 한시적으로 그 아름다움을 뽐내는 꽃을 조형적으로 고정 시키는 여러 형식이 있다. 가장 기본적인 것은 사진을 찍거나 그리는 것이다.
시공간을 얇게 저며 내는 사진의 순간 고정의 방식은 압화와도 유사하며, 원하는 이미지로 대상을 조율하는 과정은 회화와도 유사하다. 특히 사진과는 인덱스로서의 특징을 공유한다. 그러나 백미경이 꽃이라는 참조대상을 고정시키는 방식은 좀 더 직접적이다. 그녀는 꽃을 누르거나 특수 약품을 처리하여 2차원, 3차원 상에 고정시킨다. 일종의 꽃의 미라라고나 할까. 미라라고 하면 흉측한 상태만 생각하는데, 잠시 잠들어있는 것처럼 잘 처리되고 관리되는 미라 또한 있다. 그렇게 얻어진 형태를 전통 가구와 소품, 스탠드 형 액자, 브로치, 한지 스탠드, 여러 용기 등과 합체시킨다. 금속과 결합하여 금속공예 작품이 되고, 2차원 평면에 작업하면 회화가 된다. 회화적 평면이 기본이고 그로부터 여러 사물의 표면으로 확장된다. 백미경은 생화의 모양, 색깔, 감촉을 그대로 유지시키는 ‘Preserved Flower’나 꽃의 입체적인 형태와 색, 촉감을 보존하여 장식에 활용하는 ‘Solid Flower’같이 일반인에게는 낯선 기법도 활용한다.
압화라는 방식은 식물채집의 방식과도 유사하여 나에겐 매우 친숙하다. 식물의 채취하여 그 형태를 잘 알아볼 수 있도록 잘 펼쳐서 종이 사이에 넣어 납작하게 말리면 수고로운 스케치 과정을 거치지 않아서 좋았고, 실물이라는 진귀함도 있었다. 생물학과 학생이 아니더라도, 곱게 물든 단풍잎이나 은행 잎, 행운을 가져다주는 네잎 클로버 따위를 일기장이나 비망록에 끼워 말리는 등의 방식도 초보적인 형식의 압화라고 할 수 있다. 백미경의 작품을 보면, 진보된 기술을 활용하는 압화의 방식이 매우 다양함을 알 수 있다. 진공 처리 된 생화를 액자 작품으로 만들어 나리와 토마토를 표현한 [조충도], 포도밭과 꽈리를 표현한 작품은 정교한 필법으로 완성한 동양화같은 느낌을 준다. 그것은 일종의 꼴라주로, 붓으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사물로 그리는 것이다. 그리기와 꼴라주의 방식은 재현과 제시라는 차이를 가진다. 재현에서 제시로의 국면 전환 이후, 회화는 다른 이미지들 뿐 아니라 사물 그 자체와 경쟁해야 했으며, 순수예술의 진정성을 수호하기 위해 애쓰는 비평가들은 예술과 사물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규정하기 위해 골몰해야 했다.
추상미술 이후, 장식과 미술의 관계 또한 그러했다. 그러나 보통사람들이 ‘와! 예술이다!’라고 감탄하는 사물들이 대부분 공예임을 생각할 때, 미학이 그어놓은 경계라는 것이 얼마나 취약한지 알 수 있다. 전자매체의 시대가 도래하고 시뮬라크르의 지배가 이루어지자 재현은 더욱 위기를 맞았고, 실재를 매개하는 방식 또한 진화를 요구했다. 재현을 제시로 전환시킨 꼴라주는 서양미술사에서 입체파에서 발견되어 회화의 어법은 근본적으로 바꾼 것이라 평가되지만, 근대에 탄생한 미술보다 더 긴 연원을 가지는 장식미술에서는 낯선 것이 아니었다. 입체파 화가들이 화면에 붙이기 시작한 것은 신문지같은 당대의 대중문화의 산물이었다. 동서고금의 장식미술이나 대중문화라는, 순수미술이 자신의 정체성을 위해 배제하려 했던 타자들이 조형 혁명의 핵심에 있었음을 꼴라주는 보여준다. 붙여진 꽃은 환영이 아닌 실제이며, 액자 같은 환영의 장치와 결합하여 액자라는 형식 그자체가 뭔가 수집하여 안치시키는 역할을 예시한다.
식물채집의 예와 같이 어떤 계통수를 완성하기 위한 과학적 샘플로 작동하는 것은 아니지만, 참조대상과 언어를 일치시키려고 한다. 그것은 꽃에 대한 2차적 환영이 아니라 실제이기에, 영화 [쥐라기의 공원]의 상상력처럼 후대의 과학자는 환영이 아닌 실제, 또는 실제의 흔적에서 유전자를 채취하여 멸종된 꽃을 복원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백미경의 압화는 꽃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 꽃 그 자체라는 느낌을 주지만, 그 역시 묘사적인 방식만큼이나 많은 가공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것이 수년간 그 모양대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떤 근본적인 변조가 일어나야 한다. 변치 않은 듯이 보이기 위해 변해야 한다. 늘 새로운 듯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은 일상과는 다른 방식이다. 최소한의 물적 흔적만 보유한 채, 전성기의 모습에 근접한 형태로 박제된 꽃은 그 자체가 사물이면서 다른 사물과 결합하여 다양한 파생효과를 낳는다. 꽃이라는 기본적으로 아름다운 형태, 그리고 진보된 기술이 예술이 가져야할 기본적 요건을 만족시켜준다.
그러나 그렇게 고정시킨 아름다움 역시 서서히 변해갈 것이다. 유물이나 유적으로부터 출발한 미술관이나 미술사는 영원한 아름다움에 대한 이상을 고무해왔지만, 미는 물론 영원함이라는 개념 자체도 역사적으로 달라진다는 것 또한 알려줬다. 그래서 현대미술은 변화하는 과정자체를 주된 심미적 요소로 삼기도 했다. 미니멀 이후의 현대미술의 장은 순간적으로만 존재하는 것과 스러져 가는 것들로 경쟁적으로 채워지고, 그것이 마치 소유나 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예술적 진정성의 기준인양 상찬되기도 했다. 그러나 여전히 인간에게는 좀 더 확고한 것에 의지하고픈 욕구와 욕망이 있고, 그것이 압화 같은 기술이자 예술을 낳았을 것이다. 그러나 압화가 만들어지는 과정 또한 역설적이다.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고정시키기 위해 생명으로서의 기능을 더 빨리 중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청춘을 예술과 함께 강렬하게 살다가, 더 긴 침묵 속으로 감겨든 전설적인 예술가들처럼 말이다. 압화는 꽃의 원형이나 전형에 충실한 이데아의 아름다움에 호소하며, 그렇게 ‘영원화’ 된다.
출전; 미술과 비평 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