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과 바깥 사이의 통풍

  

이선영(미술평론가)

  

강귀화의 [바람의 이미지] 시리즈는 제목 그대로 바람의 이미지이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바람을 어떻게 이미지화할 수 있는가. 보이는 것을 보이게 하는 것, 또는 보이지 않는 것을 마찬가지로 보이지 않는 형이상학적 언어로 논하는 것은 쉬울 것이다. 그것은 재현이나 개념을 통해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동어반복은 매력적이지 않다. 우리는 이것에서 이것이 아니라, 이것에서 저것이 나올 때 흥미로움을 느낀다. 재현과 개념은 노동과 이성에 기대며, 반드시 미술이 아니어도 충족될 수 있다. 노동과 이성은 발전된 기술과 연동되면서 이미지가 해왔던 역할을 상당부분 해소하고 있으며, 스펙터클의 사회가 예시하듯이 이미 초과하고 있다. 보이는 것을 보이지 않게 하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눈만 감으면 된다. 또는 자연의 법칙과는 상관없는 자신만의 임의적인 규칙으로 환원시켜버려 말 그대로 무엇인지 알아볼 수 없게 하는 방식도 있을 수 있다. 물론 그것은 보이는 것에 대해 철저히 회의하는 화가의 치열한 자기 반성적 작업을 이끌 수도 있다. 


한편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것은 어렵다. 강귀화는 이 막막한 과제를 자신의 작업 한가운데로 끌어들인다. 보이지 않는 것을 이미지화하는 가장 흔한 방식은 상징화를 통해서 고정하는 것이다. 그 예로 이미지의 오랜 역사를 차지해왔던 알레고리 풍의 회화를 생각하면 될 것이다. 가령 거친 풍랑이 이는 바다를 헤치고 어딘가로 나아가는 배는 신자들을 구원으로 이끄는 교회를 상징하는 식이다. 알레고리는 한 시대와 지역, 그리고 공동체가 공유하는 것으로, 어렵지 않게 읽혀질 수 있었다. 그러나 특정한 시공이 지나고 나면 학자들 외에는 읽을 수 없는 수수께끼가 된다. 공동의 상징적 우주가 해체되어가는 근현대에 공동의 상징은 개인의 상징으로 전용된다. 위에 예를 든 배로 계속 이야기 하자면, 배는 삶이라는 거친 물살 속에 고립된 자아 같은 것을 상징하게 될 것이며, 따라서 그 배는 자신이 비롯된 신성한 중심을 향한 항해를 시작할 것이다. 대체로 공동의 상징은 그러한 상징이 될 만 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에, 개인이 공동의 상징적 우주에서 어떤 이미지와 의미를 길어오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것은 보다 보편적인 소통을 위한 방편일 수 있다.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으며, 신이 아닌 인간이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인류 공통의 정신적 자원에서 취해온 것을 자기만의 상징으로 만들어 그것들로 상징적 우주를 만든다. 그리고 그 상징적 우주에 칩거한다. 그러한 스타일은 나름의 자족성은 있으나, 트임과 소통에 취약하다. 자기만의 세계란 정작 그 자신을 이루는 타자들을 거부함으로서 협소한 유아론에 빠지곤 한다. 축축한 자기연민에 빠져 있는 그 배타적 세계에서 우리는 이기주의에 의해 단절된 공적 사회 못지않은 답답함을 느낀다. 사실은 두 소외된 세계가 연동하고 있다. 현대 사회의 지배적 규칙은 공적/사적 세계를 갈라놓고 그럼 으로서 두 세계를 동시에 피폐화시키는 것이다. 소외된 노동이 소외된 여가를 낳듯이, 소외된 삶이 소외된 예술을 낳는다. 강귀화는 이 보이지 않는 격막을 무화시키려 한다. 이러한 무화의 과정에서 바람이 가지는 의미는 크다. 그녀는 보이지 않는 것을 다루는 그림이 빠지기 쉬운 눅눅한 세계에 바람을 불러들인다. 또는 일으킨다.


바람은 멈춰있고 고여 있는 것을 흩어트리고, 모든 것을 과정 속으로 쓸어 넣는다. 거기에는 생성과 소멸, 그리고 그 사이를 채우는 흐름이 있을 뿐이다. 작가가 끌어들이는 바람은 무엇보다도 고착화하려는 경향에 대한 거부이다. 나만의 것이라고 간주된 아집들을 깨는 것이다. 이러한 아집 중에는 현대미술이 추상으로 귀결 돼야함을 요구하는 미학적 이데올로기도 포함될 것이다. 화면 안에서 부는 바람은 바깥으로도 연장될 듯이 강하다. 캔버스는 자족적 우주를 위한 닫힌 프레임이 아니라, 임의적으로 잘린 것 같은 모양새이다. 안으로 모아주는 구조가 아니라, 바깥으로 발산한다. 오늘날 상상적 자아라는 유폐된 세계, 자신의 독백만이 무한히 되울려 오는 거울의 방속에서 칩거하고 있는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바깥과 안 사이의 통풍이다. 캔버스에 혼합매체로 이미지화한 바람 또한 여러 모양새를 가진다. 바람은 바람 아닌 것 또한 암시한다. 바람은 바람 아닌 것을 통해서 바람으로 드러난다. 즉 타자를 통해 자신을 드러낸다. 그것이 바람이라는 존재태의 가장 큰 미덕이 아닐까. 


물감 뿐 아니라 ‘종이끈을 풀어서 붙였다 다시 떼어낸 흔적위에 또다시 덧대고 때로는 문질러내는 반복된 작업의 결과’로 나타난 화면은 복잡한 층위를 가진다. 바람은 허공만을 휘도는 것이 아니라, 이 복잡한 층들 사이로 분다. 대체로 빽빽한 또는 듬성듬성한 나무 숲 같은 배경이 떠오르고 때로 수직 수평의 구조들이 언뜻언뜻 비추기도 한다. 바람이 시작되는 곳과 경로가 사선이나 소용돌이 같은 구도를 통해 나타나는가 하면, 바람의 강도는 색과 형태를 통해 암시된다. 가령 색채는 나름의 온도감이 있기 때문에 색채의 대조는 온도차에 따른 공기의 이동, 즉 바람을 느끼게 한다. 밀도의 차이도 마찬가지이다. 면들이 보다 크게 움직이는 형태에서는 좀 더 강한 바람을 느껴진다. 바람은 힘이나 기, 에너지, 호흡 같은 것도 떠올린다. 에너지가 물질과 호환될 수 있는 것임을 염두에 둘 때, 작품 속 바람들은 세계를 구성하고 움직이는 힘에 대한 비유이다. 


보이지 않는 바람을 가시화하는 작업에는 마찬가지로 움직이지 않는 회화가 움직임의 느낌을 주기위해 요구되는 형식적 장치들이 있다. 작가는 반복을 통해 움직임의 환영을 창출한다. 단순 반복은 아니고 차이를 둔 반복인데, 이때 붓질의 차이 뿐 아니라 종이끈을 활용하여 화면에 불연속적 간극을 준다. 이 간극은 흐름을 야기한다. 그것은 연속적 흐름이 아니라, 차이를 통한 연결이다. 강귀화의 작품은 추상적이지만, 추상이라고 해서 자연과 단절된 것은 아니다. 강귀화가 그리는 바람은 자연이라기보다는 자연적 요소이다. 고전주의는 자연에 낭만주의는 자연의 과정에 주목하곤 했다. 자연적 요소는 고정된 자연이 아니라 과정 중의 자연이다. 과정중의 자연을 그리면서 자아 또한 과정중의 주체가 된다. 그리기는 무엇보다 자신을 변화시키는 장이다. 과정은 불확실하다. 그러나 표현 불가능한 것을 표현하려는 것, 말해질 수 없는 것을 말하려는 도전 속에 작가의 과제가 있을 것이다.   

  

출전; 미술과 비평 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