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움의 신화에서 신화의 새로움으로
이선영(미술평론가)
새로운 한해가 시작되었다. 지난 해 끝에서 그해에 마무리해야할 일을 눈 코 뜰 새 없이 끝내고 갑자기 텅 비어버린 듯한 시점. 고장 난 시계를 맞출 객관적인 시간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시간은 결코 동일한 리듬으로 흐르는 것 같지 않다. 내게 시간이 동일하게 흐르지 않는다는 점을 처음 일깨워 준 것이 예술이었기에, 시간의 갱신에 예술이 맡을 역할에 대한 기대는 여전하다. 반세기를 살아온 내 인생의 근 10여년만 되돌아봐도, 한해는 서서히 시작되었다가 가을 겨울로 접어들수록 가속도가 붙고, 연말은 마치 모든 시간을 종료시키기라도 할 듯이 거세게 흘러갔다. 끝에 가까운 시간들이 더 빠르게 흐른다는 점은 인생 전체에 걸쳐서도 해당될 듯하다. 매해 12월에 감내해왔던 그런 강도를 견딜 수 있는 것은 다시 시작될 여유로운 시간의 도래라는 기대 때문이다. 새로운 시작이 있을 수 있다는 것, 마침 그러한 시작들을 진정 가능케 해주는 것이 예술이라는 점이 다행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예술을 시작으로, 끊임없는 시작으로, 그리고 시작하는 자유로 정의하기도 했다.
예술을 통하여 스스로 갱신될 수 없다면, 우리는 소모적 일상에 더해진 예술의 과도한 ‘낭비’를 버거워 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갱신의 효과에 대해 치유, 기적, 각성, 성스러움, 신비 등, 여러 의미부여가 있을 수 있겠지만, 어쨌든 예술도 어떤 기능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하나씩 수를 덧붙여 가지만, 한해는 다시 반복되고, 한 달과 하루 또한 반복된다. 이러한 반복에서 기계적 일상의 지루함과 무의미, 또는 노쇠함과 죽음에 점차 가까워진다는 두려움도 있지만, 매일 아침, 월초, 연초에 지난 시간들을 한번 털어내고 다시 뭔가를 시작할 수 있음에 위로 받는다. 물론 생물학적 쇠퇴를 동반하는 선적 시간의 흐름 자체를 무시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이러한 일상적 느낌을 역사적인 차원까지 확장한다면, 근대 이전에는 순환적 주기를 기념하는 시공간, 즉 축제나 제의가 있었다. 예술 또한 이와 긴밀하게 공명했지만, 역사가 발명된 근대부터는 미지의 유토피아, 또는 종말을 향해 덧없이 흘러가는 선적 시간이 지배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근대와 더불어 탄생한 순수 예술이 진보와 새로움만을 자기 것으로 취한 채 전진해왔다고 믿었던 시간들이 무조건 칭송받을 만한 가치였는가. 보편적인 삶과 동떨어진 채 자기만의 나르시시즘에 빠져서, 알고 보면 새로울 것도 없는 모더니즘의 가속화된 시간들은 주기적으로 털어내야 할 필요를 느낀다. 어차피 그들만이 알아보고 그들만이 누리는 유희는 시간의 시험을 극복할 수 없다. 이러한 털어냄, 즉 시간의 갱신 역시 새로움과 진보라고 간주될 수도 있을 것이다. 성마른 모더니즘에 대항한 나른한 포스트모더니즘이 그렇게 받아들여졌듯이 말이다. 이전시대를 끝내고 자신으로부터 새로운 것이 시작된다는 믿음이 강했던 모더니즘에서 종말론적인 비전을 적지 않게 발견할 수 있음은 우연이 아니다. 그러한 비전이 자본주의의 퇴폐성을 알리는 징후라고 매도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자본주의 반대 진영도 진보적 전망을 향한 선적 시간을 공유하기는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양자는 근대의 쌍둥이 분체였다. 그 둘은 서로 비슷하기에 그렇게도 아웅다웅했다.
그래서 실제로, 또는 명분상으로 누가 승리했던 간에 근본적인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예술은 가속화된 시간을 더 앞서가려는 근대적 비전이 아니라, 가속화된 시간에서 간과되었고, 또 시간과 함께 더해가는 성장의 불균형과 불평등이 가속되는 사회적 게임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근본적인 시간이 되어야하지 않을까. 그것은 보편적 삶으로부터 멀리 떠나버린 현대 예술이 사회에서 맡아야할 진정한 몫이다. 제도로 연명하는 예술이란 현대사회의 모순이 만들어내는 자그마한 반사 이익에 동승하고 있을 뿐, 삶에 진정한 활력을 불어넣어주는 예술의 근본적 역할을 수행할 수 없다. 근본적 역할을 생각하는 예술은 현대 자체를 상대화시킬 수 있는 보다 큰 시간의 주기 또한 생각한다. 이러한 거대한 시간의 폭은 예술보다 앞서 존재했었던 신화나 종교적인 사유에서 발견된다. 새해를 맞이하여 다시 읽은 종교학자 미르치아 엘리아데의 [영원회귀의 시간]은 예술이 되찾아야할 근원적 시간에 대한 비전을 알려준다.

앙리 마티스, [삶의 기쁨], 1906년

앙리 마티스, [춤], 1909년
; 마티스의 [삶의 기쁨]과 [춤]은 빙글빙글 도는 축제의 춤과 근원적 낙원으로의 회귀 사이의 연결점을 보여준다.
‘원형과 반복’이라는 부제가 붙은 그 책은 단선적 역사가 지배하는 현대의 세계관과 다른 어떤 시간관을 예시한다. ‘역사적인 인간’, 즉 역사 안에서 스스로를 만들어나가는 한에서만 존재하는 인간이 등장한 것은 근대에 이르러서이다. 초역사적 모델을 갖는 원시적, 고대적 시간관은 동양에서도 친숙한 순환적 시간관이다. 엘리아데는 역사적인 시간에 대한 전통 사회의 저항, 달리 말하면 기원의 신화적인 시간, 위대한 시간으로 주기적으로 회귀하려는 전통사회의 향수를 말한다. 원형을 반복하려는 그러한 경향을 익숙한 옛것에 연연하는 보수주의로만 볼 수는 없다. 저자는 초역사적인 모델을 갖지 않는 사건들에 대한 가치 절하에서, 그리고 세속의 지속적인 시간에 대한 거부에서 인간 실존에 대한 일종의 형이상학적 가치 부여를 읽는다. 이러한 세계관에서 어떤 사물이나 행위가 가치를 획득하고, 그럼으로써 실재적으로 되는 것은 그 사물이나 행위가 그것들을 초월하는 어떤 실재에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초월적인 실재에 참여하고 있는 한에서만 자기동일성과 실재성을 획득하며, 모든 행위에는 어떤 원초적인 행위를 반복하는 한에서만 의미와 실재성을 갖는다는 것은 세속적인 삶의 하찮음에 매몰되어 영락하는 것에 대한 공포의 표현이며, 실재에 대한 갈증의 표현이다. 동시에 존재와의 접촉을 잃지 않으려는 절망적인 노력이다. 그런 맥락에서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이러한 원형관념의 가장 정교하고도 최종적인 판본이다. 가령 지상의 모든 현상은 천상의 비가시적이고 초월적인 항목이라고 믿어지는 것은 플라톤적인 의미에서의 이데아에 상응한다. 플라톤의 이상 국가는 천상적인 원형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세계관에 충실한 예술이란 우주의 보다 높은 차원에 존재하는 것의 복사본에 해당될 것이다. 인간의 행위 역시 원초적인 행위의 재현이며 신화적인 전범의 반복으로 간주될 것이다. 그것들이 반복되는 것은 태초에 신들, 조상들, 영웅들에 의해 그 행위들이 축성(祝聖)되었기 때문이다.
원시인 혹은 고대의 인간에게는 의식적인 행동의 아주 작은 부분까지도 그 이전에 이미 인간이 아닌 어떤 타자에 의해서 행해지고 경험되지 않는 행위란 없다. 어떤 사물이나 행위는 하나의 원형을 모방하거나 반복하고 있는 한에서만 실재적이 된다는 관념이 원시나 고대예술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신성한 원형을 모방한다는 것, 제의를 통한 반복적 재현은 신화와 종교의 시대를 넘어 근대의 리얼리즘적 사고에서도 발견된다. 리얼리즘이 현실이 아닌 전형에 충실했다는 점은 비판되곤 했지만, 각도를 달리해 보면 긍정적인 면이 있다. 원형적인 모델에 관여하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인간사를 이루는 전쟁, 농사, 결혼, 집짓기, 치유 등이 포괄되며, 예술은 그에 대한 가장 정교한 예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원형의 반복에 근거한 예술이 판에 박힌 작품을 지지하는데 머물 수는 없다. 시간의 소진이 아닌 갱신을 추구하는 순환적 시간관에서 더 주목해야 할 점은 그것이 우리를 근원으로 되돌려준다는 점이다.
엘레아데에 의하면, 그 모든 재생의 수단들이 지향하는 목표는 동일하다. 그것은 우주 창조행위의 반복, 아득한 때로의 끊임없는 회귀를 통하여 지나간 시간을 무효화시키는 것, 즉 역사를 폐기하는 것이다. 삶이 위협받을 때마다, 그리고 자신들이 보기에 우주가 소진되어 텅 빌 때마다 원시와 고대의 인간들은 근원으로 회귀할 필요성을 느꼈던 것이다. 신화나 제의에서는 시작, 기원적인 것, 원초적인 것을 의미하는 모든 것들이 본질적인 중요성을 부여한다. 무한의 관점에서 볼 때 사물들의 생성은 끊임없이 동일한 상태로 되돌아간다. 모든 것은 매순간 그 처음에서부터 다시 시작한다. 범례적인 행위들의 반복과 원형의 모방에 의한 시간의 폐기는 세속적인 시간, 즉 지속과 역사의 암묵적인 폐기를 말한다. 특히 한해의 시작은 폐기와 갱신이 이루어지기 적당하다. 대부분 새해를 맞는 축제는 지난해 끝자락의 가장 혼란스러운 상황과 이어져 있다. 연말은 코스모스 직전의 카오스의 시기이며, 부활을 위한 죽음의 시기인 것이다.

지오르지오 데 기리코, [nostalgia of the infinite], 1913년
; 드 기리코는 철학자들에게서 인생의 무의미함이 예술로 승화될 수 있음을 배웠다. 이탈리아의 기하학적 광장 너머로 무한한 것에 대한 향수를 읽었던 니이체처럼, 드 기리코의 형이상학적 회화는 일상적 순간이 영원으로 고양되는 신비, 또는 계시의 순간을 포착한다.
한해의 시작은 지역과 시대에 따라 달랐지만, 모든 지방에서 한 시기의 끝과 새로운 시기의 시작이 지녔던 중요성에는 변함이 없다. 엘리아데는 한 시기의 끝과 시작에 대한 관념이 도처에 존재한다는 사실, 그리고 그 관심이 생명 우주적인 리듬의 관찰에 근거해 있으며, 좀 더 폭넓은 하나의 체계, 즉 삶의 주기적인 정화와 재생의 체계에 맞추어져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러한 주기적인 재생의 필요성, 시간의 주기적(순환적)인 갱신이라는 관념은 역사의 폐기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한해라고 하는 시간의 분절을 통하여 새로운 탄생이 이루어진다. 그래서 모든 새해는 시간을 그 시초에서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우주창조의 반복이다. 우주창조 행위의 반복에 의한 재생이라는 요소는 반(反) 역사적 목표를 가진다. 신비주의자처럼, 일반적인 종교인처럼 원시인은 끊임없는 현재 속에 산다. 원초적인 것을 지향하는 예술가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타자의 행위를 반복하며, 그 반복을 통하여 끊임없이 비시간적인 현재 속에 산다.
우주의 근본리듬의 영원한 반복, 즉 우주의 주기적인 파괴와 재창조이다. 영원한 반복의 신화는 시간의 비가역성을 무화시키려는 시도이다. 이러한 회귀적 사고는 보수적 퇴행이라기보다는, 역사를 만들어가는 인간이라는 근대적 비전이 그다지 자유롭지도 창조적이지도 못했다는 근본적인 반성으로부터 비롯된다. 역사 대신 호출되는 신화적 사고는 현재와 미래의 원형을 과거에 두고 있는데, 그것은 최근의 과거가 아니라 모든 과거를 뛰어넘는 태초의 시작을 말한다. 표본적 모델의 모방과 신화적 사건의 재현에 의한 세속적 시간의 폐기가 모든 전통사회 특성이다. 엘리아데는 이 특성 한가지만으로 원시사회와 현대사회는 구별될 수 있다고 말한다. 옥타비오 파스는 이러한 사고에서 초월의 장소, 즉 시간이 시간 그 자체와 화해할 수 있는 장소가 상상되었음을 강조한다. 엘리아데에 의하면, 거룩하고 강력한 시간은 곧 근원의 시간이며, 실재가 창조되고 처음으로 완전히 표현된 평정의 순간이므로, 인간은 주기적으로 그 근원적인 시간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영원에 대한 향수는 신화나 종교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현대예술 또한 그러하다.
옥타비오 파스는 [낭만주의에서 아방가르드까지의 현대시론]에서, ‘역사’는 최초의 시간에 대한 격하이며 죽음으로 끝나는 과정이어서, 원시인들이 태초의 시간으로 주기적으로 회귀하는 것은 역사의 변화와 소멸을 치료하는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 인간적 삶이 영위되는 일상적, 세속적 시간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바로 거룩한 시간 덕분이다. 현대에 와서 이러한 근원적 시간에 가장 가까운 것은 축제와 혁명이다. 근대에 지배적인 직선적 시간은 타자의 억압을 낳는 축적을 야기한다. 순환적 시간은 그것을 무화하며, 그래서 불경하거나 아니면 반대로 신성하게 여겨진다. 예술 또한 소소한 감수성이나 형식상의 문제를 넘어 이와 같은 근본적 문화의 반열에 올라야 하지 않겠는가. 이러한 축제적 세계에서는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 카오스로의 일시적 퇴각이 일어난다. 신화로 기억되는 역사의 관점에서 혁명 또한 마찬가지이다. 혁명을 뜻하는 단어는 되돌아온다는 것을 뜻하는 라틴어 ‘revolvere’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한다. 천체의 순환적인 움직임 속에서 주기적인 복귀를 나타내는 혁명이란 단어는, 단절이라는 말이 되어 영원한 전진 속에 미래를 열어 주었다.
옥타비오 파스는 근대에 처음으로 변화가 고무되었다고 지적하면서, 차별성, 분리, 타자성, 복수성, 신기성, 진화, 혁명, 역사 이 모든 어휘는 ‘미래’라는 한 가지 어휘로 응축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아방가르드에게 있어서 이상적인 사회는 역사의 밖--그것은 원시인들의 세계이거나, 미래의 도시, 또는 기록 없는 과거이거나, 공산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이상향이다--에 있었다. 옥타비오 파스에 의하면, 역사를 진보로 파악하는 아이디어의 기원은 종교적이며, 아이디어 그 자체는 초종교적이다. 그것은 대자연이 하나의 장치를 가지고 있다는 믿음 및 이러한 장치를 역사와 사회의 전진 운동에 일치시키는 추론의 결과이다. 이와 같은 역사주의(historicism)는 근대세계에 그 모습을 드러냈고, 19세기에 원숙기를 맞이한다. 그러나 근대의 역사주의는 그자신의 숨겨진 전제인 신학적인 색채를 지우고, 초역사적이고 구제적인 의도를 부정함으로서, 역사적 사건 그 자체만을 인정하게 된다. 근대적 시간은 결정적으로 탈신성화 됨으로서, 죽음을 향하는 덧없는 지속으로 파편화된다. 이 시점에서 현대 예술은 우리의 ‘잃어버린 시간들’을 찾는 모험을 시도하며 순환적 시간관, 즉 신화와 조우하게 된다.
출전; 국립현대미술관 웹진 ART;M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