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과 자연, 그 유기적 총체성이 해체된 현대의 산수화

  

이선영(미술평론가)


비슷하게 보이는 산수화 또한 시대별로 조금씩 변해왔다. 산수화는 자연이 변하는 만큼 변했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그 변화의 폭은 더욱 커져서 그것이 과연 산수화의 계보에 놓을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한 의구심이 드는 작품도 많다. 이러한 변모의 근본적인 동인은 현대인이 전통과 자연으로부터 멀어진 것에 있다. 특히 짧은 시간 동안 압축적인 성장을 해온 한국사회에서 전통과 역사에 대한 망각은 강력했으며, 자연 또한 물질적 진보를 위한 도구였을 뿐이다. 인구 대다수가 대도시와 그 인근에 살며, 대표적인 주거 형태는 아파트이고 그 갱신주기 또한 매우 빠른 시점에서, 모든 오래된 가치들은 역사의 뒷켠에 남게 되었고 산수화 또한 박제화 된 상태를 면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작가들에게 이러한 단절과 불연속성은 도약을 위한 계기가 될 수도 있다. 한편 이러한 급격한 삶의 양식 변화는 옛 그림을 신선하게 보이게도 한다. 그러나 정보화 시대에 옛 모델 또한 무한 복제가 가능해진 시점에서, 단순한 문화소비를 넘어서는 새로운 생성이 필요하다. 


김종구, 쇳가루 6000자 독백, 가변설치, 쇳가루 광목 PV접착제, 2014  (부분)


새로운 세대는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내야 하는 과제가 있다. 전래된 관념이 아니라, 변모하는 현실이 반영되어 있는 동시대적 작품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급격한 변화만이 선은 아니다. 예술은 억압된 것들이 회귀하는 무대이기도 하다. 산수화의 정신을 살리면서 어떻게 당대의 정신과 물질적 조건을 충만하게 담을 것인가. 현대의 작가들은 그러한 이중적 조건을 풀기위해 고심한다. 새로운 ‘산수화’는 우리 삶을 전면적으로 규정짓는 파편화 속에서 자연과 인간은 어떻게 복구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있다. 그들은 자연과 인간, 예술이 하나 되는 총체적 우주를 손쉽게 가정하는 관념론적인 해결책을 피하고, 현재의 분리된 상황 그 자체로부터 시작한다.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떨어져 나옴으로서 생겨난 이 분리는 그 최초의 지배적 형태인 인간중심주의를 넘어선다. 이때 언어와 욕망의 중요성은 커지며, 이러한 중심 이동은 현대의 ‘산수화가’들의 작품에도 깊이 스며든다. 인간 대신에 중심이 된 구조적 사유에서 언어는 전면을 차지하며, 언어적 현실 이면에는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김종구, 물질적 두께를 가지는 자연-언어   



김종구, 하얀공간, 가변설치, 쇳가루 광목 PV접착제 Projector CCTV카메라, 2014  (부분)


예술은 자연을 닮고자 하지만 결국은 인공적인 언어이다. 자연이 인간과 멀어졌을 때 자연 못지않은 근본요소인 언어적 측면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효과적인 미학적 전략이다. 김종구는 원래 통 쇠를 깍아 형상을 만들던 조각가였으나, 계획된 형태로 깍인 덩어리보다는 무엇인가를 깍고 남은 부스러기에 더 관심을 갖게 되면서 쇳가루로 산수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붓글씨 쓰듯 쇳가루를 바닥에 뿌려 글자를 만드는데, 그것을 측면에서 영상으로 찍어 평면에 투사하면 너른 표면에 펼쳐진 산과 물 같은 형상으로 보인다. 위에서 보면 글자지만, 옆에서 보면 산수풍경이다. 미디어의 개입을 통해 관객은 산수화의 여백에 해당되는 공간에 직접 들어갈 수 있다. 김종구의 쇳가루 산수화는 글과 그림이 함께 있는 시서화 일체라는 전통을 살리면서, 영상매체를 활용하여 움직이는 관객의 신체를 작품의 과정에 개입시키는 현대적인 산수화이다. 이러한 변형에 의해 자연은 언어화되어 읽히고, 언어는 물질적 두께를 획득한다. 자연의 풍경을 포함한 모든 종류의 스펙터클이 의미 없이 소비되는 현대에 대상과 기호 모두를 풍부하게 하는 방식이다. 최근에는 수성접착제에 적신 광목 위에 쇳가루를 흘려서 풍경이자 글자인 이미지를 보여준다. 반복되어 흘러내리는 녹물이 만들어내는 고색창연한 풍경은 중력과 산화라는 자연적 과정을 작품에 끌어들인다. 자연을 대상화하는 것이 아니라, 원소적 차원에서 재구성하고 그 변화 과정을 수용하며, 이를 자연, 인간, 역사에 대한 비유적 메시지로 확장한다. 

  


차소림, 언어로 이루어진 상징적 우주 바깥에서  



차소림, 일상의_저편___227.3x181.8cm____sticker__oil_on_canvas___2015


바람, 구름, 물, 또는 붓질처럼 보이는 유동적 흐름들 사이사이에 사람들이 작게 박혀있는 차소림의 작품은 여백이 풍부한 산수화를 떠오르게 하는 구도를 가진다. 3차원, 또는 2차원 상에서 드문드문 박혀있는 하얀 것은 언어의 파편이다. 작가는 언어로 이루어진 상징적 우주로서의 현실에 자연스럽게 동화될 수 없었으며, 그러한 거리감이 이러한 이질적인 풍경을 낳았다. 불연속적 차이는 일련의 흐름을 만드는데, 언어가 기후적 현상으로 나타날 만큼 총체적인 환경이 된 그곳에서 주체의 위상은 미소하다. 작가는 작품 속에 삽입한 사람들의 시선을 통해 일상, 또는 언어의 저편을 바라보게 한다. 일상과 언어 저편에는 신비와 무한이 있다. 유동적인 배경은 광활해 보이며 상대적으로 작은 인간들은 산수 여기저기에서 완보하는 것처럼 보인다. 차소림의 작품에서 인간과의 관계망을 통해 붓질의 우연적 흐름은 산이 되고 강이 되고 바다가 된다. 이건가 싶으면 저것 같다. 그리고 간극들 사이에서 잠재적 공간이 계속 생겨난다. 거기에는 한 번의 생성이 아니라, 연속적인 생성이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막힘없는 생성을 요구한다. 작가는 산을 그리려 하면 산이 안 그려지고 바람을 그리려 하면 바람이 안 그려지기 때문에, 산이나 바다를 생각하면서 붓을 놀리고, 궁극적으로 산이나 바람이라는 생각조차도 놓고 가려한다. 산을 알지도 못하고 산을 규정하려 드는 언어적 횡포에 맞서, 산을 알기위해 스스로 산이 되려 한다. 이러한 ‘되기’의 정신은 산수화가의 필요조건이다. 존재를 감싸는 불확실한 운무들로 이루어진 야생적 바탕, 불확정적이고 표류하는 공간 속의 생멸하는 것들은 새로운 것을 말하고 그릴 수 있는 가능성에 열려있다.  


   

이정배, 가학피학적인 욕망의 풍경 



이정배,설악스튜디오 267(h)x100x170 F.R.P,Resin, 2012년.

이정배의 산수풍경은 전형적인 동양화에서 지배적인 물아일체나 무아지경 등, 관조적인 미학에서 멀리 벗어나 있다. 입체로 구현된 산수는 전통의 바탕인 자연의 현 상황을 드러낸다. 여기에서 자연은 깊은 뿌리를 가지는 온전한 전체, 또는 본질이 아니라, 단편의 조합이다. 사진이나 플라스틱 모형으로 축소된 자연은 탈색되어 있고 잘려나갔으며, 인간이라는 이물질에 의해 오염되고 잠식된다. 어수선하게 가지를 뻗는 식물로 대변되는 빈약한 토양의 산물, 그리고 포획을 위해 걸쳐놓은 막과 망들은 자연을 착취하고 소유하려는 인간의 과도한 욕망을 알려준다. 부분이 전체와 유기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고 뚝 떨어져 나와 있는 그의 자연은, 자연을 있는 그대로 향유하지 못하고 손 안에 소유하려는 인간 욕망을 표현한다. 이리저리 잘려지고, 수없이 뚫려지고, 밧줄이나 그물망으로 포획된 자연은 포르노그래피 속의 파트너처럼 잔인한 쾌락의 대상으로 변모한다. 산수풍경에 배치된 성적 하위문화의 코드는 자르고 묶고 갈아내고 구멍을 뚫는 식의 거친 방법론이 관철되어 있으며, 이러한 산수풍경은 먹을 담뿍 머금은 붓이 미끄러지듯 나아가며 자연스럽게 형상이 만들어지는 방식과 큰 차이가 있다. 권력과 욕망이 게임의 형태로 얽혀 있는 가학피학적인 관계는 지배적인 가부장제 문명이 어머니인 자연을 다루는 방식을 압축한다. 인간의 쾌락적이고도 폭력적인 규칙은 자연의 한계를 벗어나려는 위반의 충동으로 가득하다. 풍경은 폭력과 위반의 장이 되고, 결코 만족됨 없이 무한정 늘어난 욕망의 흐름은 마찬가지로 공포와 연관된 쾌락인 숭고(sublime)와 연결된다. 이정배의 산수풍경에서 욕망의 질주는 거대한 폭력과 권력으로 점철된 또 다른 자연을 향한다. 

 

출전; 설화수 매거진 3-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