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풍경으로서의 얼굴
얼굴展-<WHO ARE YOU> (4.10—5.10, 천안 예술의 전당 미술관)
이선영(미술평론가)
미술의 소재 중 가장 의미 있다고 간주되어 왔던 것이 인간이라면 얼굴은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부위라고 할 수 있다. 얼굴은 미미한 변화도 알아챌 수 있는 가장 민감한 영역이다. 이런저런 구멍새들이 자리한 손바닥 크기의 굴곡진 공간은 본능적으로 직감할 수 있는 미묘한 파장의 진원지가 되어 변화무쌍하게 물결친다. 얼굴은 무한히 접어 넣었다가 다시 무한히 펼쳐질 수 있는 광대한 영역으로, 현대의 작가들은 이 작은 공간에 인간의 희로애락 뿐 아니라 풍경과 우주를 집어넣기도 한다. 5명의 작가가 참여한 ‘얼굴’ 전은 동시대 작가들이 인간의 얼굴을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가를 알려준다. 얼굴이라는 중요한 소재이니만큼 대부분 중요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나와 너, 그리고 문화적, 사회적으로 중요한 인물들의 얼굴들이다. 각자의 독특한 기법은 가까운 사람은 물론, 멀리 있는 사람까지 구체성을 부여한다. 형식은 낱낱이 흩어지려고 하는 것을 붙잡아 둔다. 또는 움직임이 고정된 조형 언어의 한계 속에서 얼굴의 가변성을 강조한다. 이 전시의 작품 속 얼굴들의 공통적인 면모는 단단한 실체감을 가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얼굴들은 헤쳐 모일 수 있는 입자들로 구성된다. 글자조각, 빨대, 금속 체인들로 이루어진 얼굴은 일견 비인간적이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인간은 가장 문제시되는 관념 중의 하나임을 염두에 둘 때, 비인간은 부정적인 의미를 벗고 탈인간(post human)이라는 범주로 확장되어야 할 것이다. 인간이 인간 아닌 수많은 것들과 접합되어 있다는 사실은 생명을 비롯한 모든 것들이 정보로 간주된 사회가 되고서야 실감난다. 이 전시의 작품들은 열린 존재태로서의 인간을 표현한다. 물질적 입자로 구성된 작품이 아닌 경우에도, 얼굴은 깊이보다는 표면을 강조한다. 극사실주의 기법으로 얼굴표피의 물질성을 강조하거나, 종잇장처럼 얇게 만들어서 찢어버리는 식이다. 얼굴은 몸 위에 솟아있는 머리의 앞면을 넘어서 가변적인 표면과 입자로 구성/해체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해체에서 부정이나 비극적 분위기는 감지되지 않는다. 그것은 이전의 인간 실체가 이제는 텅 비워져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현대의 얼굴은 이 빈 공간으로부터 다시 시작되어야 함을 알려주는 것이다.

김원용, moment83, 200x450x55cm, 화이버글래스, 겔코트,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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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재,Icon_Oldboy,112x183cm,Acrylic, resin object on canvas,2011
레진이나 화이버글래스로 만들어진 김원용의 얼굴은 구겨지고 찢어진 형상이다. 노트나 스케치북 같은 바탕에서 찢겨져 나온 면에 얼굴이 자리하는데, 작품 [mask]처럼 거의 종잇장처럼 사정없이 구겨진 얼굴도 있다. 그가 형상화한 얼굴은 아무 것도 없는 하얀 표면이 주는 설렘과 벗겨진 진실이 주는 충격 같은 드라마가 펼쳐지는 곳이다. 찢어진 종이 안쪽으로 도드라져 나오는 얼굴은 인간관계에서 야기될 수 있는 기대와 실망을 표현하는 듯하다. 바깥의 바로 안쪽에 있는 얼굴들은 손으로 가려져 있거나 쿨 한 표정이다. 색깔이 없는 그들의 얼굴은 육체적 깊이 뿐 아니라 심리적 깊이를 숨기고(또는 제거하고) 있다. 그것은 거듭되는 충격과 상처에 대한 육체적, 심리적 방어막일수도 있다.
이동재는 유명한 팝스타나 영화배우들의 초상을 아크릴로 그린 후 인물을 실체화할 수 있는 명암 부분을 글자들로 붙였다. 그들은 먼 곳에 있지만 매스미디어 덕분에 옆집 사람보다 더 친근한 인물들이 되곤 한다. 글자들은 단순한 무늬가 아니라 노래나 영화와 관련된 것이지만 가독성은 없다. 중요한 점은 실제이자 가상의 인물들이 텍스트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작품이 텍스트로 변한 것처럼, 인물 역시 텍스트가 된다. 텍스트는 보다 가변적인 개념이다. 작품이나 인물이 어떤 굳건한 의미의 기원이 된다면, 그 모두를 수렴하는 텍스트는 단지 선행하는 텍스트들로 짜여 졌을 뿐이다. 글자들로 이루어진 얼굴들은 단지 의미가 있는 곳을 가리키고 있으며, 의미는 언어자체가 그러하듯이 투명하지 않다.

홍상식, Five eyes 32X160X15 cm straw 2009

서영덕,Maditation #16 Stainless chain 130 x 70 x 200 cm 2014
홍상식의 작품에도 달라이 라마, 안철수, 김제동, 김어준 등, 대중들이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인물이 등장한다. 이들을 구성하는 입자는 플라스틱 빨대이다. 속이 빈 가는 원통의 집적이 만들어내는 마술적 형태는 어릴 때 국수다발을 가지고 놀던 것에서 왔다. 전형적인 초상화가 화폭위에 물감을 쌓아서 만든다면, 이 기발한 형식에서는 뒤에서 밀어서 그리는 것이다. 대중매체를 통해 재현된 유명 인사들은 빨대로 흡입할 수 있는 음료수처럼 정보 소비자들에게 먹혀들 것이다. 작품 속 아이콘들은 누구보다도 많이 먹혀든 이들이다. 그들의 실체는 텅 빈 빨대와 같다. 그러나 텅 빈 구조도 반복되면 모종의 실체를 만든다. 빨대의 집적으로 만들어진 인물들이나 신체의 부위들은 만물을 코드로 소비하는 현대인을 예시한다.
서영덕은 쇠나 스테인레스 스틸같은 금속 체인을 용접하여 얼굴을 만든다. 외관은 주물로 뜬 것 못지않게 일체감을 이루고 있지만, 어떤 기성의 단위들이 접합되어 있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구성 요소가 무엇인가에 따라 얼굴의 빈 공간의 모습도 달라진다. 어떤 것은 구멍이 송송 뚫린 모습으로, 어떤 것은 기다란 틈들로 재료에 따라 다양한 양상이다. 인물들은 대부분 명상적 자세와 표정이다. 그 얼굴들이 사유를 담는 그릇이라면 그것은 물샐틈없는 단일한 실체가 아니라 관계로 역인 망일 것이다. 망의 조밀도는 생각이 깊어짐에 따라, 그리고 작업의 강도가 높아짐에 따라 긴밀해질 것이다. 하나의 덩어리가 아니라 관계망이라는 비유는 명상이라는 고풍스러운 주제를 현대 정보사회와 연결시킨다.

한영욱, [face], oil on aluminum, scratch, 232x146cm, 2013년.
한영욱은 알루미늄 판 위에 유화로 인물을 그린다. 그려진 표면에 가해진 스크래치는 인물의 광물질적 표면을 강조한다. 작품이 발하는 빛은 인물에 독특한 아우라를 부여한다. 그들은 대부분 얼굴선이 굵어서 더욱 표현적인 서양인이며, 주름, 땀구멍, 수염 등으로 가득하여 작품 표면은 질감이 풍부하다. 잘 연마된 평면 위에 고도의 유화기술로 구현된 초상들에는 왜곡이나 단순화가 없지만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화가에게 평면과 물감이라는 재료는 일반인에게 종이와 연필만큼이나 중성적이고 투명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얼굴 또는 사진을 정밀하게 재현한 초상들에서 얼굴의 일체감은 발견되지 않는다. 어디에도 중심을 두지 않는 극사실주의적 방식은 모든 것을 표면에 떠 있는 시뮬라크르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 전시에서 인간의 얼굴은 거울처럼 비춰지지만 그 거울은 산산이 조각나 있다. 조각난 것들은 재구성된다. 보는 주체와 보여 지는 주체 사이의 간격에는 이미 분열이 예시되어 있다. 사빈 멜쉬오르 보네는 [거울의 역사]에서 양립 불가능한 시선들은 표상을 작은 조각으로 분할하며, 그로서 주체의 결집대신 흩어진 상들의 집합을 택한다고 말한다. 인간은 조각난 채로 파악되며 자기 자신의 특별한 체험의 단편들을 알 뿐이다. 그리고 흩어진 모자이크를 이루던 한 조각 혹은 축소상이 되면서 인간은 특별한 중심의 위치를 상실한다. 세계의 중심을 반영하는 신인(神人)적 주체의 중심은 흔들린다. 반사상들을 잇는 사슬이 끊어지고 그 균열은 인간에게 모순 속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형벌을 내린 것이다. 거울에 비춰진 얼굴이라는 맥락으로 이 전시를 보자면, 여러 입자로 재구성된 이 전시의 얼굴들은 최초의 단일성이 깨졌다는 것을 말한다.

김원용,mask, 175x120x23cm, 화이버글래스, 겔코트, 2011년.
[거울의 역사]가 말하듯이, 이러한 깨짐을 통해 얼굴은 일반성보다는 특수성을, 불변의 요소보다는 일시적이고 우연적인 요소를, 균형보다는 불규칙성, 영속성보다는 유동성을 우위에 둔다. 그들은 조각과 기워놓은 부분들로 만들어지고 경험과 기회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해가는 특별한 존재들이다. 여기에서 자신의 모습을 비춰 볼 수 있는 믿을만한 거울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상이 만들어지고 또 해체되는 불안정한 거울이 있을 뿐이다. 주체는 일시적인 것, 흩어져 산재하는 시점들, 잠재성에 몸을 맡기고 결국 본질을 포착하기를 포기하는 반짝거리는 표면의 신기루 안에 만족하게 된다. 이를 통해 견고해 보이는 자기 동일성으로부터 다름(dissemblance)이 분출될 가능성이 열린다. 보네가 말하듯이, 인간은 언제나 수없이 많은 얼굴을 가진 동일자이면서 타자이며 닮았으면서도 다르다. 전시장의 작품들은 거울 앞에 선 것처럼 알지 못하는 얼굴의 이타성이 솟아나는 극적인 자리가 된다.
안정적이고 유사한 상을 추구함으로서 인간에 대한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특성을 밝히기 보다는 주체의 가변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상이 무겁고 부동이며 고집스러운 것은 자아의 천박한 포장, 의식의 완전한 자유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속박’일 뿐이기에, ‘외면화된 상이 존재한다는 생각만으로도 두렵다’고 토로한 바르트처럼, 이상적 주체를 지탱하는 틀은 해체될 필요가 있다. 이 전시의 부제—얼굴展 ; <WHO ARE YOU>--얼굴을 통해 당신은 누구인가를 묻는다. 작가들은 여기에 ‘누군지 알 수 없는 낯선 타인의 얼굴, 그 안에서 여럿이 된, 다시는 화합할 수 없는’(보네) 얼굴을 보여준다. 얼굴은 해부학적 지식이나 사회적 존재의 산물이 아닌 가변적인 것이다. 이 전시의 작품들은 얼굴의 고정되지 않고 변하는 투사, 그 불안정성을 강조한다. 그래서 그 얼굴들은 비인간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이러한 비인간성은 기존의 인간중심적 사고를 기준으로 우려할 사태는 아니다.

서영덕,Meditation #10, Iron chain, 140x100x30cm, 2013
현대 철학자 들뢰즈와 가타리는 [천개의 고원]에서, 얼굴은 선행하는 기표나 주체를 상정하지 않는다고 본다. 얼굴의 해체를 권하는 저자들에게 얼굴은 강력한 조직체이기 보다는 풍경처럼 다양하다. 해체된 얼굴은 단지 부분 대상들의 모음이 아니라 살아있는 블록, 줄기들의 연결접속이다. 이러한 관점에 선 현대의 초상작가들은 기원적 모델의 모방으로 부터 모델이 없는 최초의 미메시스로 대신한다. 얼굴은 원형으로 대표되는 상징적 질서의 구성을 넘어서 생성된다. [천개의 고원]이 말하듯이 모든 생성은 분자적이다. 이 분자들의 새로운 배치물 속에서 단순한 주체이기를 그치고, 사건이 되는 것이다. 사건으로서의 주체란 자본주의 사회에서 설교되고 인정되고 있는 보편적인 자유의지를 가진 합리적 주체가 아니다. 그것은 펠릭스 가타리가 [기계적 무의식]에 다시 썼듯이, 욕망의 예속화가 아니라 욕망의 자유화(해방)에 몰두한다.
출전; 천안 예술의 전당 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