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속에 살아있는 부재와 죽음

  

이선영(미술평론가)

  

국내의 대표적 사진작가 18명이 참여한 ‘거짓말의 거짓말; 사진에 관하여’ 전에 권순관이 출품한 것은 225x180cm 크기의 대형 사진 [어둠의 계곡](2013) 한 점이다. 이 작품은 그의 ‘미완성의 변증법적 극장’ 시리즈의 하나로, 우리 근대사에 관련된 한 장면을 보여준다. 그러나 배 지나간 자리처럼 아무 흔적도 남아있지 않은 평범한 야산에서 관객은 뭘 봐야할지 혼란스럽다. 물론 잘 찍힌 풀숲도 흥미로운 볼거리가 될 수 있겠지만, 이 작품은 풀 숲 어디에도 강조점이 없는 밋밋함이 특징이다. 한 장에 2 기가바이트 용량을 가지는 고밀도의 사진에서 정교하게 재현된 잎 새 하나하나를 확인하며 감탄해야할까. 멀리서 보면 그저 울렁거리는 짙은 녹색의 평면으로 보일 법한 장면이 역사의 현장이라니....그 장면은 화려한 스펙터클에 노출되어 무감각해진 평범한 눈에겐 볼 것 없는 사진이 될 것이며, 약간의 미술사적 교양을 가진 이에게는 추상예술과 재현주의가 동일한 반열에 있음을 확인시켜줄 것이다. 


어둠의 계곡, Digital C-print, 225×180cm, 2013
Unfinished dialectical theater series


만약 사전정보를 통해 그것이 수 십 년 전에 일어났던 근대사의 비극 노근리 민간인 학살사건과 관련된 현장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더욱 허탈할 것이다. 역사의 현장은 뭔가 드라마틱해야 하는 것 아닌가. 역사란 무의미한 차가운 일상과는 다른 뜨거운 의미 그 자체 아닌가. 6.25 전쟁당시 피난하던 양민 300여명이 조선인민군의 침공을 막고 있던 미군에 의해 학살돼 암매장되었다고 추정되는 역사의 현장은 그처럼 말이 없다. 그 사건의 생존 피해자들은 20여명, 그들이 살아생전에 사건의 전모가 밝혀질 수 있을까. 입법자, 또는 법의 수호자라고 자처하는 세력들은 정작 그들 스스로는 법을 초월한다. 경악할만한 폭력도 마치 자연력처럼 간주하는 것이 권력의 속성이다. 벤야민과 데리다가 말했듯이, 법과 폭력은 반대되는 것이 아니다. 노근리 사건은 우발적으로 벌어진 개인적 폭력이 아니라, 국가의 폭력이다. 흙과 나무에 베어들었을 시신들의 살과 피처럼, 보이지 않지만 편재하는 권력이다. 권순관은 사진을 시작한  20 여 년 전부터 권력이 만들어내는 형태, 또는 형식을 표현해 왔다. 


그 권력은 거시적이기도 하고 미시적이기도 하며, 지배적이기도 하고 저항적이기도 하며, 억압적이기도 하고 생산적이기도 하다. 역사라는 서사적 주제를 다루면서도 단 한 장의 사진이라는 형식을 선택한 것에는 그자체가 역사의 수수께끼에 사진의 수수께끼를 보탠 셈이다. 역사적 이야기를 한 장의 사진 속에 종결시킨다는 것은 진행 중인 사건의 결정적 한 장면이 아닌 이상, 수수께끼로 나타난다. 한 장의 사진에 담은 이 ‘역사적’ 장면에는 사진의 힘에 대한 자신감, 반대로 결정적 증명수단으로 간주되어온 사진이 사실은 매우 나약한 매체임을 보여준다. 롤랑 바르트가 [카메라 루시다]에서 말하듯이, 사진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하지 않는다. 사진에는 아무런 깊이가 없다. 즉 그것은 존재했음일 뿐이다. 그러나 친절한 사진가라면 약간의 암시나 단서를 심어 놓거나,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의 축을 따라서 여러 장으로 알기 쉽게, 또는 상상하기 쉽게 장면을 배열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공간적으로 정지된 매체로서, 회화나 사진이 영상이나 소설과 다르게 서사를 다루는 방식이기도 했다. 


(참고도판) 늙은 남자의 멱살을 잡고 화를 내는 남자, Archival Pigment Print, 150×189cm, 2007
Configurated in Accumulative Space series


(참고도판) 분수대에 앉아 있는 여자, Archival Pigment Print, 150×189cm,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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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순간 잘려진 공간의 단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맥락이 있어야 하며, 맥락에 따라 단편들은 사실로도 허구로도 보인다. 작품 [어둠의 계곡] 속에 내재한 부재와 죽음은 역사의 속성일 뿐 아니라, 사진의 속성이기도 하다. 이 모호한 장면들은 사진과 역사 모두의 불투명성을 말한다. ‘--극장’으로 이름 붙인 것이 무색하게, 대상에 바짝 당겨진 시점은 불 밝힌 무대가 아니라, 어둡게 드리워진 장막 같다. 키 작은 관객이 자세히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화면 상단, 어느 시간대인지 알 수 없는 공기를 품은 하늘위에 걸쳐있는 잎사귀들은 마치 레이스같은 표면을 강조하는 듯하다. 장면은 사건이 묻혔던 시간의 지층만큼이나 많은 층들을 걷어내야 할 과제로 제시한다. 사실과 그것의 재현이라는 1차적 기능의 담당자로 간주된 사진과 역사는 계몽이전의 어둠 속에 잠겨든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서 어둠은 오히려 또 다른 보기와 읽기를 가능하게 한다. 


사진은 어둡게 찍혀있고 유리까지 끼워져 있어 거의 거울 같다. 어두운 화면을 더듬은 관객의 시선이 어둠에 익숙해질 무렵, 자신의 그림자로 반사조명을 가리면서 차츰 세부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관객은 움직이는 자신의 그림자에 힘입어 부분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화면 좌측 하단이 300명이 암매장 되었다고 추정되는 장소지만, 화면 어디에도 유의미한 증후는 발견되지 않는다. 역사의 진실을 밝힌다는 계몽적 주제라 하기에는 답답한 형식이다. 빨리 밝혀지고 널리 알려졌으면 하는 역사적 이야기에 기대될 법한 일목요연함은 없다. 그것은 단편들이 조합된 것과 다를 바 없이 보여진다. 남아있는 빈약한 증후들로 퍼즐을 맞춰야 하는 역사가들의 방식처럼 말이다. 누구 허락을 받고서, 또는 누구 보라고 피어난 것이 아닌 야생의 풀숲에서 누군가는 그렇게 살아왔고 살아갈 민초라는 상징을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중심이 흐트러져 있는 권순관의 사진은 상징이라는 중심 역시 비켜나간다. 


(참고도판) 풀밭에 쓰러져 있는 여자, Archival Pigment Print, 150×189cm,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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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도판) 쓰러진 남자의 손을 잡은 남자, Archival Pigment Print, 150×189cm,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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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마찬가지로 역사를 상징적으로만 독해할 때 우리는 늘 비슷한 교훈을 얻을 뿐이다. 권순관의 시리즈 제목에 포함되어 있는, 정반합이라는 변증법적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역사의 시대인 19세기의 역사적 담론을 다룬 헤이든 화이트의 [19세기의 역사적 상상력]에 의하면, 역사의 객관성에 대한 소박한 믿음은 역사가가 체택하는 문법 내지 문체로 대체된다. 그 책에 의하면, 헤겔의 변증법은 지나친 상징화와 형식체계에 의해서 모든 사건의 특수성을 무시하고 사건들은 수많은 강, 속, 종으로 분류 한다. 현대의 작가들도 ‘어떤 총괄적 체계 속에 세계를 가두어 두려는 욕망을 품고 있는’(로브 그리예) 철학적 경향을 거부한다. 바르트도 ‘강력한 모든 체계의 참을 수 없는 영토 확장주의’를 튀김과 비교한 바 있다. 요컨대 ‘지나치게 강력한 일관성을 갖는 진리를 말하는 어떤 사고, 그것은 마치 끓는 기름과도 같다. 그래서 당신은 그 속에다 무엇이든지 집어넣을 수 있지만 거기서 나오는 것은 항상 튀김일 뿐’이다. 


마이클 라이언의 [해체론과 변증법]은 변증법과 현대의 해체론을 비교한다. 해체론은 총체화 하려는 관념적 사유에 맞서 차이를 강조한다. 해체론에서 역사는 (변증법적) 종합이기 보다는 차이이다. ‘차이는 역사적이며 역사는 차이적’(데리다)이다. 차이에는 궁극적인 결정이나 확정이 아니라, 차이에 의한 연기(différance)를 말한다. 권순관의 작품 속 잡목과 잡풀들은 차이적 흔적들의 직조물처럼 보인다. 여기에서 ‘흔적(trace)은 현존이 아니라, 현존의 환영(simulacrum)’(데리다)이다. 흔적에는 위치가 없다. 떠도는 유령들은 경계를 넘나든다. 드넓은 화면을 불확실한 시간의 축에 기대어 보고-읽게 하는 권순관의 사진은 역사, 또는 사실이 이해되는 방식을 표현한다. 지극히 표면적인 한 장면이면서 메타적인 차원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이 전시의 작품은 그의 사진적 이력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된, 중요한 역사적 사건을 담은 또 다른 작품과 비교할 수 있다. 


(참고도판) 하늘을 향해 손을 들고 노래 부르는 여자, Archival Pigment Print, 150×189cm,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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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도판) 달아난 남자를 찾는 남자, Archival Pigment Print, 150×189cm,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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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5.18기념재단의 지원 사진작가로 선정된 권순관은 주어진 과제, 즉 1980년 5월 광주의 역사를 담았는데, 그의 방식은 ‘5월 광주’로 대변되는 뜨거운 주제와는 자못 차이가 있었다. 사진을 찍을 당시에는 이미 뜨거운 역사의 현장과는 무관하게 차가운 일상이 지배하던 도로의 차선을 막고 5.18 참가자들 200여명을 동원하여 찍은 작품 중, [늙은 남자의 멱살을 잡고 화를 내는 남자](2007)는 얼핏 교통사고 실랑이를 벌이는 장면같기도 하지만, 5.18을 겪거나 그것을 기억하는 광주시민이라면 기시감을 가질 포즈이다. 사진에는 그러한 비슷한 모습들이 곳곳에 심어져 있다. 그는 ‘내가 서있는 자리에서 불현 듯 다가오는 조각들을 보고 싶었다’고 말한다. 사실처럼 보이는 이 연출사진은 역사적 자료로부터 차용한 것이다. 그는 사진사에서 최초의 사진가가 담긴 초상과 최초의 저널리스트 사진이 조작되거나 국가 이데올로기에 봉사한 사진이었음을 환기하면서, 사진이라는 매체의 투명성을 의심한다. 


역사와 마찬가지로 사진적 대상은 명백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구성된 것이며 구성된 것 인 한 해체될 수 있다. 그는 단단해 보이는 현실이 근저로부터 무너지는 순간을 사진으로 표현한다. 노근리 사건이 어떤 기가 막힌 사실과 진실을 포함하고 있다한들, 수 십 년의 세월이 지나고 더구나 그것을 은폐하고픈 지배적 체계가 있는 한, 한명의 사진가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수많은 가능성 중 선택한 한 장면, 그 어두컴컴한 사진은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 그처럼 아무런 조치도 취해지지 않은 채 오리무중에 빠져 있음을 말한다. 그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여준다. 있는 그대로의 장면을 찍은 사실이지만 무엇인가를 열어 보이는 것이 아니라, 검은 장막처럼 드리워져 있다. 이 장막을 들춰야 하는 것은 자신의 어두운 그림자에 힘입어 부분들을 직시하고 그것을 끝없는 해석으로 이어가야 할 관객의 몫이다. 지워진 흔적들이 남아있는 녹색 칠판 같은 텍스트에 관객들은 또 다른 텍스트를 쓰게 될 것이다. 그것이 사진을 소비하지 않고 생산하게 하는 작가의 방식이다. 권순관의 작품은 어떠한 번잡한 기계장치도 덧붙이지 않은 채 관객의 상호작용을 끌어낸다. 


(참고도판) 모터사이클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남자, Archival Pigment Print, 150×189cm, 2007
Configurated in Accumulative Space series


어느 야산의 풀숲을 찍어도 비슷한 장면이 나올 것 같은 불특정성에 대해 작가는 ‘장소 없는 묘사’(월러스 스티븐스)라고 말한다. 역사의 현장을 찍어 관객에게 말을 거는 그것을 주체 또는 사건 없는 서사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약호 없는 메시지’(바르트)인 사진은 사진으로 마주해 있는 역사적 사건을 하나의 의미로 환원하려는 압력에 저항한다. 역사는 사진만큼이나 빈곳이 많다. 역사, 사진, 그리고 역사와 사진은 연속적인 것이 아니라 불연속적이다. 최근에 노근리 사건과 비슷한 수의 죄 없는 국민이 죽어간 세월호 사건을 생각해보면, 승객들이 산채로 서서히 수몰되는 현장을 전 국민이 생중계로 보고 나서도 아직도 규명이 안 된 진상들이 있는데, 쥐도 새도 모르게 일어난 체계에 의한 폭력을 몇 십 년이 지난 시점에 사진 한 장으로 환기시키겠다니, 그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그러나 예술은 이러한 불가능성으로부터 시작된다. 코드화된 시선을 부정했던 롤랑 바르트는 [카메라 루시다]에서 공공적인 사진의 해독은 언제나 사실상 개인적인 해독이라고 말했다. 


바르트는 역사를 우리가 아직 태어나지 않았던 기간을 가리킨다고 하면서, 역사는 우리가 그것을 바라볼 때에만 구성된다고 본다. 그리고 역사적 사진을 갈등과 억압의 뒤엉킴이라는 일반적인 의미로만 환원시켜서는 안된다고 본다. 기계의 시선과 거의 일치시키다시피 한 권순관의 즉물적 사진은 굴곡 많은 우리 근대사를 다루는 수많은 역사적 작품에 편재한 신파조의 정서를 걷어낸다. ‘미완성의 변증법적 극장’이라 이름 한 시리즈는 변증법을 닫힌 체계로 이해했던 일단의 흐름과 거리를 둔다. 사진을 현실의 모사로 간주하지 않고, 지나간 현실의 발산물로 간주하는 소박한 사실주의자들에 비판한 바르트는, 사진이 확인의 힘을 지니고는 있지만 사진의 증명력은 대상에 대해서가 아니라 시간에 관계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그래서 만일 변증법이라는 것이 부패 가능한 것을 제어하며, 죽음에 대한 거부를 노동의 힘으로 변화시키는 사고라면, 사진은 비변증법적인 것이라고 본다. 시간에 대해 닫힌 약호화 된 사진은 그것이 무엇을 담든 단순한 소비 대상으로 귀결된다. 그것은 사회가 사진의 힘을 거세하고 길들이는 전형적인 방식이다. 


(참고도판) GESTURES OF NEIGHBORHOOD PATROL, Digital C-print, 180×225cm, 2008-2009
A Practice of Behavior 2009 series


(참고도판) 아파트 발코니에 서서 밖을 내다보는 남자와 아무런 말없이 남자를 바라보는 여자,
Digital C-print, 180×225cm, 2007, Purifying the behavior in voluptuous structure series


사진에 대한 아름다운 에세이를 써서 사진가들에게는 가장 친숙한 철학자이기도 한 바르트는 사진과 죽음의 관계를 내재적으로 보는데, 이는 죽음이라는 사건을 다루는 권순관의 작품에 대해서도 참조 점을 준다. 바르트는 모든 사진에 다 같이 존재하는 사자의 귀환을 보며, 죽음은 사진의 본질이라고 말한다. 바르트는 사진이 역사적으로 19세기 후반에 시작되는 죽음의 위기와 관련을 맺고 있다고 지적한다. 바르트에 의하면 근대는 맥 빠진 죽음의 시대이고, 역사와 사진은 우연찮게도 그 때 동시에 태어났다. 의식(儀式)의 사라짐과 동일한 시기에 나타난 사진은 종교와 의식을 벗어난 비(非)상징적인 죽음이 현대사회로 침입한 것과 일치하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물론 사진과 역사는 다른 점도 있다. 바르트에 의하면 역사는 실증적인 처방에 따라 작성된 하나의 의견서, 신화적 시간을 무너뜨리는 순수한 지적 이야기인데 반하여, 사진은 확실하지만 덧없는 증인이다. 권순관의 ‘장소 없는 묘사’가 말하는 것은 모든 사진에 깔려 있는 죽음이라는 재난이다. 거기에는 지금여기에 있는 관자의 미래를 포함하여, 죽음이라는 거역할 수 없는 기호가 내재해 있는 것이다.  

  

출전; 토탈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