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 비평, 그리고 역사의 기본이 되는 아카이브

 

이선영(미술평론가)


들어가며; 자료와 재료

  

자료, 그리고 자료의 수집과 정리는 아키비스트만의 과제가 아니다. 그것은 창작과 이론에 있어서 결코 부차적인 문제가 아니라 몸통이다. 태양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진리를 받아들인다면 더욱 그렇다. 만약 누군가 새로운 것을 제시했다하더라도 그 역시 새롭지 않은 무엇과의 비교를 통해 새롭다고 평가되는 것이며, 그 새로움도 곧 수집과 정리의 대상이 된다. 그 무엇도 시간의 시험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작품 자체가 시대를 반영하는 자료가 되기도 하고, 미술사나 미학, 그리고 비평은 그 자신이 자료 및 작품이 되면서  또 하나의 텍스트를 추가한다. 자료에 성실한 책 아래와 뒤에 붙어있는 수많은 각주들과 참고문헌들은 텍스트에서 텍스트가 생산되는 과정을 알려주며, 그 역시 다른 텍스트의 각주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끝없는 대화 및 상호반영의 관계는 창작의 과정에서도 마찬가지다. 예술사 자체가 이전작품과의 대화의 연속이며 이해와 오독 속에서 그 계보가 이어진다. 작품은 자료가 잘 소화된 작품부터 날 것 그대로 나타나는 작품까지 다양한 계열을 가진다. 날 것은 말할 것도 없겠지만, 잘 소화된 자료 역시 흔적을 남기며 끝없이 이어질 해석의 단서가 된다. 그래서 아예 아카이브 스타일의 전시까지 생겨난다. 


여기에서 자료와 재료의 관계는 더욱 직접적이다. 잘못하면 소재주의, 재 구성능력의 부족이라는 평가를 받지만, 어떤 자료는 어떤 후속 조치를 취하는 것 자체가 부당할 정도로 압도적인 경우도 있다. 어떤 자료들은 가공 없이도 관객의 상상력을 활성화하기 위한 계기가 된다. 그래서 예술사에서는 예술 뿐 아니라 사물도 주요한 역사적 대목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 이상적인 맥락에서 자료들은 자신들끼리 새로운 연결망을 이루면서 또 다른 의미를 파생시킨다. 무의미한 자료더미에 생명을 부여할 수 있는 능력은 무에서 유가 창조된다는 기적만큼이나 극적인 사건이다. 아카이브에 관련된 이 강연에서 필자는 이미 확립되어 있는 무엇을 그러모으는 성실한 작업을 넘어서, 세상의 수없이 떠도는 정보들 속에서 자료를 자료이게 하는 기준, 자료의 창조적인 구성방식에 집중하고 싶다. 무엇이 자료이고 무엇이 자료가 아닌가에 대한 선험적인 기준은 없기 때문이다. 또한 같은 자료를 가지고 재구성하는 방식은 다양하다. 수집가의 길만큼이나 예술가 및 학자의 길은 무한대로 열려있으며 그것이 그 분야의 매력이다.


  ‘책은 하나의 세계이고 세계는 한 권의 책’

    

정보혁명이 일어나기 전, 가장 보편적인 자료의 형태는 책이나 문서였다. 필사되거나 인쇄된 책은 구술에 의존하던 희미한 기억을 정확하게 재현하면서 인류의 소통체계에 커다란 혁명을 낳았다. 중세 말에 탄생한 인쇄술은 청각/구술성의 시대를 시각/문자성의 시대로 진입하게 하면서 근대를 열었다. 커뮤니케이션의 역사를 서술했던 월터 옹이나 마샬 맥루한의 논지에 따르면, 창조성과 진보, 그리고 개인의 탄생도 인쇄문화의 산물이다. 기억은 구술적 반복에 의거하지만, 기록은 문자적 차이에 의거한다. 기억은 기록을 통해 더욱 확실해진다. 기록은 보관되어 보다 보편적으로 공유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알라이다 아스만은 [기억의 공간]에서 아카이브를 문화 속에서 주어진 시점에 한번을 새롭게 평가되어야 할 모든 것의 비축장소로 정의한다. 여기에서는 옛것과 새것이 변증법적으로 서로 연관된다. ‘모든 새로운 사건은 그때까지 아무것과도 비교되지 않았던 것의 새로운 비교의 실행이다. 문화적 기억은 이러한 비교에 대한 기억’(그로이스)이다. 


그로이스가 보는 기록물보관소는 예술의 기억인데, 이때 예술이란 새로운 작품들을 말하고, 새로운 작품들의 혁신적인 내용이 혁신적 작품의 기준이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아카이브는 새로운 것의 차별성을 위한 비교의 토대가 된다. 책은 자료 수집의 창조적 산물이면서, 그자체가 수집의 대상이다. 필립 블롬은 [수집]에서, 책은 그냥 물건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책은 유물인 동시에 전성기의 매력을 영원히 유지하는 물건이다. 세상의 어떤 일이라도 책으로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책은 가장 매력적인 수집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천정까지 가득 쌓아둔 많은 장서들이 반드시 유의미한 결과를 낳지는 않는다. 역사상의 유명한 수집가들은 물신숭배적 관점에서 수집 자체에 열을 올렸을 뿐, 그 의미들을 판독하는 과제는 수집가의 역량을 넘어서는 문제였다. 수집가에 의해서든 학자에 의해서든, 그것들이 얼마큼 잘 정리되고 소화되었는가에 따라 새로운 자료를 창조하는 것이 가능해질 것이다. 자료들은 자료 이상이 될 수 있어야 새로운 자료로 추가될 수 있는 것이다. 

 


Pieter_Bruegel_the_Elder_The_Tower_of_Babel_1563년,  빈 미술사 박물관



소설가 보르헤스는 [허구들]에서 도서관으로서의 세계를 말하며, 거기에서 자신이 만든 의미체계를 발견할 수 있었다. [바벨의 도서관](보르헤스)이란 작품이 있듯이, 필립 블롬은 바벨탑이 도서관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바벨탑의 기본정신은 공통 언어였다. 그 상형문자들은 세계의 진정한 질서가 무엇인지 알려주는 비밀지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자들이 전부 파괴해버렸고, 그래서 지금 남아있는 것은 폐허뿐이다. 너무 정확하여 온 제국을 다 덮는 지도의 비유처럼, 완벽한 상징적 우주를 꿈꾸었던 보르헤스에게 폐허의 이미지는 강력하다. 보르헤스는 변화 없이 일정하게 끝없이 이어지는 육각 진열실 안에 무수한 책이 들어있는 하나의 우주, 바벨의 도서관을 상상했다. 바벨탑은 수많은 학자들이 그들은 우연과 임의성의 혼돈 속에서 부여잡을 무언가를 찾아서 의미의 조각이라도 찾아보겠다고 헤매고 돌아다녔던 허구세계의 원형이다. ‘글쓴다는 것은 존재의 가장 커다란 이유이며, 최고의 가치는 책’이라고 말한 보르헤스에게 책은 하나의 세계이고 세계는 한 권의 책이다. 


블랑쇼는 보르헤스가 말한 이 동어반복에서 무서운 결과가 생겨난다고 본다. 우선 기준의 한계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세계와 책은 영원히 그리고 무한히 그들의 반사된 이미지를 서로에게 보낸다. 무한하고 반짝이는 번식을 낳는 빛의 미로 속에서 하나의 자료는 또 다른 자료를 지시하며 그것은 사전에서 한 낱말을 찾을 때 꼬리를 무는 연쇄적 찾기의 과정과 유사하다. 자료 수집에 끝은 있을 수 없다. 동시에 자료의 색다른 배열은 또 다른 무한을 낳는다. 블랑쇼는 [문학의 공간]에서 이러한 유희를 ‘박물관들의 박물관’이라고 비유한다. 그 속에서 유희가 한번 씩 행해질 때마다 모든 작품들, 예술들, 지식들이 그 무한한 다양성, 변화하는 관계들, 순간적인 통일성 속에서 활기를 띠고 깨어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유희란 ‘살아있는 통일성 속으로 모든 시대의 작품들과 창조들의 집합을 모아들이는 지고한 창조’를 말한다. 자료가 무한할수록 분명한 게임의 규칙이 필요하다. 


자료를 분류, 정리할 기획에 의해 규칙이 만들어 졌을 테지만, 규칙을 위한 규칙이 생겨날 가능성도 있다. 어쨌든 규칙은 (자연의)법칙만큼 필연적인 것은 아니어도, 인간사회의 모든 부문에서 필수적이다. 퍼트리샤 워는 [메타 픽션]에서 픽션과 놀이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중요한 자질은 메시지로서의 기호들의 집합(언어적이든 비언어적이든)과 문맥 또는 메시지의 틀 사이의 관계를 교묘하게 조작함으로서 하나의 대안적인 리얼리티를 구성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모든 예술은 또 다른 상징적인 세계들을 창조한다는 면에서 놀이이다. 자료의 재배열은 새로운 문맥, 즉 새로운 의사소통의 가능성을 낳는다. 자료들은 그냥 덩어리가 아니라, 어떤 질서에 따른 정렬을 기다린다. 자료의 수집은 끝이 없는 과정이지만 무차별적이지는 않다. 독자가 그렇듯이 수집가는 세계에는 어떤 구조가 있다고, 세상을 그런 구조 안에 가지런히 정렬하고 이해할 수 있다고 믿고 싶어 한다. 


많은 책을 무작정 되는대로 쌓아놓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방식으로 분류하여 정리한 서재는 그 나름으로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 적어도 그 안에서는 세계가 구조 안에 정렬되어 있다는 것이다. ‘구슬도 꿰어야 보배’라는 속담도 있듯이 말이다. 혼돈과 질서, 무의미와 의미 사이의 차이는 큰 만큼이나 한끝 차이이다. 독일의 철학자이자 장서광이었던 벤야민은 ‘열정이란 혼돈과 접하고 있게 마련이지만, 수집가의 열정은 기억의 혼돈과 접하고 있다’ 질서란 ‘혼돈 위에 떠있는 일시 정지 상태’일 뿐이라고 말했다. 우연 속에서 필연을 건져내려는 자료수집가들에게 잘 정리된 책들은 세계질서를 축약하는 하나의 이상적인 요약본이 될 수 있다. 필립 블롬은 아무린 대단한 수집가라도 수집선의 목록서가 없는 한 수집품들이 뿔뿔이 흩어져 평생의 업적을 날려버릴 수 있다고 경고한다. 목록서는 대규모 수집선의 부록물이 아니라 바로 그것의 정점이다. 

  

역사적 자료와 그것의 구성

  

세상의 그 무엇도 수집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아카이브란 보존될 만한 더 중요한 자료, 즉 역사적 자료(사료)라는데 의미가 있다. 그러나 헤이든 화이트가 [19세기의 역사적 상상력]에서 말하듯이, 역사적 자료로 간주되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동의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그에 의하면, 역사가들은 자료는 무엇인가라는 물음뿐 아니라, 이러한 자료를 문제로서 구성하고, 그런 다음 그 문제를 설명과 결합시킴으로서 해결하는 이론 형식에 대해서도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 역사적 자료의 문제는 실제와 허구의 관계를 생각하게 한다. 권력/담론의 핵심부에 있는 이들만이 공유할 수 있는 사료, 반대로 허구이지만 당대를 잘 반영하고 많은 이들에게 공유된 창조물이 있을 수 있다. 자료 저장소에 남겨지는 것을 넘어서, 많은 이들의 머릿속에 남겨지는 자료들이 있을 수 있다. 가령 박경리 선생의 [토지]같은 소설은 우리 역사의 일단락을 어느 사료보다도 더 잘 담아냈을 것이며, 그자체가 문화사의 자료이자, 더 시간이 지난다면 소장본, 희귀본으로 남아 수집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역사가 부르크하르트는 모든 문명에 대한 가장 유익한 기록들, 문명의 진정한 내면의 본질을 가장 잘 드러내 주는 기록은 바로 시적 기록이라고 말했다. 자료이자 예술작품을 다루는 문화사나 예술사는 역사 연구의 절정에 있는 듯하다. 위안부나 독도 문제처럼 국가적으로 첨예한 관심사로 대두된 문제에 한해서는 새롭게 발견된 작은 종이 쪽지 하나도 중요한 자료로 부각될 수 있다. 먼지 쌓인 자료더미에서 결정적인 1차 사료를 찾아내는 역사가의 끈질김, 이제는 아무도 읽지 못하는 죽은 언어들을 해독할 수 있는 특수한 전문가는 역사적 설명에 불연속적인 부분을 이어준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사실’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비어있는 부분이 더 많은 상황에서, 의미의 구축은 상상이나 이데올로기를 비롯한 사실 이외의 요소들이 끼어든다. [19세기 역사적 상상력]에 의하면, ‘역사가는 설명과 메꾸기와 직접적인 관찰의 결과로  얻어낸 동떨어진 사실의 조각들을 결합시킴으로서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데, 그의 상상력을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예술가와 달리 역사가는 순수한 환상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그 대신 결합능력이 필요하다’(훔볼트). 


같은 자료에 바탕 한 같은 줄거리도 공감대를 자아낼 수 있는 울림의 정도는 다양하다. 그것은 역사가가 예술가적 역량을 발휘한 경우이다. 그래서 헤이든 화이트는 특정한 역사 서술형식들, 가령 오직 사실만이 존재할 뿐이라는 생각, 외재적 현상으로서만 사건을 다루려는 것, 그리고 연속적인 질서의 작용이라는 해석을 상대화한다. 가령 랑케는 역사가 궁극적으로는 일종의 예술형식이라고 파악한다. 즉 그것은 ‘실제로’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서 나타난 사실에 대한 설명에 관심을 갖는 일종의 미메시스적인 예술형식이라는 것이다. 사실 자체가 아니라 사실을 파악하는 형식이 중요하다. 그래서 부르크하르트는 ‘역사가가 창안하는 것은 그림의 구성요소에 내포된 형식적 관계’라고 말했다. 자료가 최종적으로 취하고 있는 형식에는 상상과 직관의 요소가 필수다. 자료가 그자체로 말하듯이 배열하는 것은 역사가이자 예술가의 과제이자 능력이다. 실체만큼이나 관계가, 사건만큼이나 모델이 중요하다. 


계몽주의시대 이후, 사료를 다루거나 역사를 서술하는데 있어서 지배적이었던 것은 과학적 모델이다. 그러나 과학 역시 우주의 숨은 본질이나 의미를 알아내는 수단이라는 점에서, 과학이 몰아내고자 했던 종교와 이어지는 면이 있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아이작 뉴턴 같은 인물이 대표적이다. 완벽한 과학자풍의 인물이 인생 후반기에서 신비주의적 면모를 띄곤 하는 것은 과학적이라고 간주된 세계의 한계까지 가봤던 이들이 공통적으로 가닿은 무한한 세계였을 것이다. 그들이 얼핏 본 또 다른 세계는 신비적 차원에 있다. 엄격하기 그지없는 논리실증주의의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언명은 명백함과 비밀스러움, 또는 말하기와 침묵이 한 차원의 이면이라는 점을 알려준다. 그러나 과학이든 역사든 학문이 학문으로 성립되기 위해, 무의미에서 의미를, 우연에서 필연을 건져내기 위해 분류와 질서에 대한 요구 또한 커진다. 박물학자들의 잡탕찌개 식의 무질서한 자료들을 넘어서 일목요연한 목록서를 요구했던 프란시스 베이컨의 합리주의가 득세했다. 합리적 설명을 가능케 하는 합리적 분류, 전문화와 검증가능성은 중요한 잣대였다. 


그렇게 해서 이전시대의 무원칙적인 수집은 대중교육을 위한 객관적이고도 투명한 창으로 거듭났다. 필립 블롬은 수집의 대상은 인간 지식 바깥의 그 무엇이 아니라, 인간의 지식이 정복한 것이 되었다고 본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체계였다. 수집품 자체는 합리적 사고의 탁월함을 보여주는 실례일 뿐이다. 유럽에 민족학 및 자연사 박물관이 생겨났을 때, 중요했던 것은 역사의 진보를 알려주는 전형적 표본들의 시대적, 지역적 나열이었다. 필립 블롬은 19세기에 일었던 박물관 열풍을 분석한다. 그에 의하면 대영박물관을 소유했던 유서 깊은 제국 뿐 아니라, 신생국가들의 꿈이기도 했다. 19세기 유럽에 새로 생겨난 민족국가들에서는 수집선이 세계를 상징적으로 축약했다. 국가의 통치자들은 박물관이 이러한 믿음을 구현해줄 매개가 되었다. 수집선은 민족의 역사와 신화를 구성하는 유효한 방법이었던 것이다. 전시물들은 유력한 정설에 맞추어 얼마든지 재배치할 수 있었다. 


그들은 박물관을 신전처럼 짓고 성소처럼 꾸밈으로서, 제국주의적 야심에 들 뜬 지배자 혹은 민족사에 정당성과 합법성을 부여했다. 박물관은 국가의 사업이었으며, 국가를 구성하고 완성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야했다. 여기에서 최고의 예술작품들은 되도록 과학적으로 진열했다. 박물관은 완결성과 보편성이라는 도달하기 힘든 목표를 성취하고자했다. 대중교육이라는 새로운 기능을 부여받은 박물관에는 제국주의가 세계 구석구석까지 팽창해가면서 새롭게 발견한, 약탈물의 위력이 두드러졌다. 제국들은 박물관을 문명의 진보와 다양한 인간 유형을 보여주는 전시장으로 삼았다. 식물에 대한 체계적 분류학을 시작했던 린네를 비롯하여 다윈에 이르기까지, 진화론을 낳은 세계관은 자연의 섭리에 따라 천지만물을 포괄할 수 있는 총체적 체계 안에서 합당한 자리에 각각의 종을 배치하는 문제였다. 이러한 사고와 지고한 역사의 목적을 설정하는 역사주의는 지척에 있었다. 


진화론과 역사주의의 시대의 총체적 사유는 과학 자연의 질서를 알고 지배한다는 사유로 슬쩍 넘어간다. 이 세계의 존재들을 일련의 선으로 기하학적 형태로 배치하는 사유는 담론과 권력의 밀접한 관련을 알려준다. 비슷한 시기에 성립된 미술관 역시 같은 인식 틀을 공유했다. 미술관은 그자체로 유파와 사조가 분류되고 양식의 역사가 전개되는 장이다. 여기에서 미술사는 서술되는 것이 아니라, 배치된 작품들로 보여 지고 읽혀진다. 작품과 작품 사이에 가로 놓인 불연속성은 깊고 깊지만 매끈한 설명 속에 결정적인 자료들로 자리매김된다. 그것이 미술사적 평가였을 것이다. 유파를 비롯하여 무엇가를 명명하는 것은 창조에 버금가는 행위가 된다. 이런 의미에서 과학자는 ‘이름 짓기를 권력의 양식으로 향유했으며, 주문을 자연제어의 방식으로 지녔던 마법사나 샤먼의 계승자’(캐서린 흄)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구조화란 구조화되지 않은 것 또한 전제한다. ‘의식은 우리의 언어처럼 구조화할 수가 있으나 세계와 무의식은 구조화할 수가 없다’(알랭 로브그리예). 

 

작품이 자료들을 구성하는 두 가지 방식

  

자료로부터 작품이 나올 수 있고, 작품 역시 자료가 될 수 있다. 생산 주체가 자료/작품을 재구성해야하는 방식은 역사와 과학, 그리고 예술에 공통된다. 작품이 자료들을 구성하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모든 것을 필연의 한 조각으로 삼아 정교한 퍼즐 맞추기를 시도하거는 방식, 보다 열린 방식으로 파편을 파편으로 남겨두는 방식이 그것이다. 리얼리즘적인 태도는 유기체를 연상시키는 총체적 질서를 중시한다면, 자연주의적 태도는 보다 느슨한 집합을 이룬다. 전자에게서 가설적 질서에 위배되는 자료는 무시되지만, 후자에서는 어떤 질서로도 포획되지 않는 이질적 자료에 열광한다. 리얼리즘보다는 자연주의적 태도가 예술가의 영혼에 더 호소력이 있는 듯하다. 리얼리즘이 보편적인 의사소통이라는 실용적 기능을 중시한다. A. 아이스테인손은 [모더니즘 문학론]에서 19세기 리얼리즘을 높이 평가하는 미학자 루카치는 이 사조가 모순으로 가득 찬 사회를 총체적으로 반영하는 재현방식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반면 모더니즘의 미학적인 경향은 서사성, 서술적인 전개과정, 혹은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스토리텔링과 같은 개념 자체에 저항한다. 모더니즘을 정의하는 한 가지 방식은 스토리로서 복원되거나 혹은 사회-실용적인 용어로 쉽사리 재구성될 수 있는 실재-엮어 짜기를 거부한다는 것이다. 리얼리즘은 ‘당대의 사회적 실재에 대한 객관적인 재현’(웰렉)으로 간주된다. 리얼리즘의 ‘총체적인 형식은 연속성이라는 방식을 통해 우리의 기대를 충족시키고 윤택하게 만든다’(스턴) 자료를 다루는 리얼리즘적인 방식은 총괄적 서사를 겨냥하며, 가장 전형적인 자료가 있을 수 있고, 발전이나 성장이라는 패러다임에 충실하다. 그렇게 발견, 선택, 평가, 재구성된 자료는 인간이나 시대를 투명하게 재현한다고 간주된다. [모더니즘 문학론]에 의하면 공유된 실재의 리얼리즘적인 묘사는 공유된 언어를 통해 매개될 것을 요구한다. 이러한 방식에서는 예술적 텍스트와 비예술적 텍스트 간의 차이가 없다. 


그저 현실을 충실하고 투명하게 전달하는 것이 사명이다. 리얼리즘은 문학과 일상적인 사회적인 담론 사이의 상대적 경계를 최소화하거나 혹은 그 경계를 지우려고 한다. 문학에서 리얼리즘 담론은 각각의 사회에서 지배적인 문화적 재현양식에 의해 동기화되고 끊임없이 자양분을 공급받는다. 언어를 통해, 따라서 바로 그 언어의 형식으로 인해 리얼리즘은 문화를 통합된 영역으로 암시하고 충분히 민주적이고 평등한 사회를 과장되게 반영한다. 말하자면 의미가 균등하게 공유되는 그런 사회를 제시한다는 것이다. 리얼리즘은 주체와 객체가 사이좋게 지내는 글쓰기 양식이다. 이런 글쓰기 양식 속에서 개인은 공통된 이해에 토대하고 있는 사회를 납득한다. 리얼리즘 담론은 하버마스가 의사소통적 합리성이라고 부른 가장 이상적(관념적인)형태로, 공공영역을 채운다. 그리고 리얼리즘은 19세기를 거치는 동안에 문학 전통의 핵심적인 공간이 된다. 한편으로는 체계화되고 합리적인 모방주의를 통해, 다른 한편으로는 총체적인 문화적 함의를 통해 리얼리즘 담론은 다른 전통, 그 중에서도 특히 서사시의 모방 재현에 의존하는 전통을 포섭한다. 


그것은 모순 없는 연속성과 의사소통에 있어 의미의 투명성을 지향한다. 리얼리즘은 ‘공유된 실재의 세계’(스턴)에 대한 관심사를 보여준다. 그러나 그것은 자료에 대한 고도의 선별적 태도와 이미 짜여 진 방식으로 자료를 배열하는 선택의 결과이다. 자료는 생산은 물론 보존에 있어서도 권력을 반영한다. 현실에서는 양지 쪽에 있으면서 각종 기득권을 챙긴 이들의 자료가 남아있을 가능성이 크다. 작품보다 자료가 더 많을 수도 있다. 그러나 작품이 받쳐주지 않는 담론은 모래성이며, 무의미에 무의미를 추가할 따름이다. 그러한 작품과 자료가 영원히, 아니 적어도 상당기간 동안 남아있을 수밖에 없다면 그만큼의 공해가 없는 것이다. 유력한 위치에 있는 작가들은 많은 자료를 남기고, 그렇지 못한 자는 빈약한 자료를 남기거나 아예 어떤 흔적도 없이 사라질 기능성을 생각해 본다면, 실증주의적 사고는 남아있는 것만을 객관적인 것으로 인정하면서 빈익빈 부익부 현상을 고착시킨다. 


그것은 인정받은 것만 인정한다는 현상 유지적 동어반복의 담론이다. 그러나 예정된 이야기를 배반하는 자료는 계속해서 튀어나올 수 있다. 새로운 자료는 논리의 전개의 순서와 경중을 다시금 배치한다. 이러한 배치의 과정은 끝없이 계속될 수 있다. 수집의 역사를 되돌아볼 때 기존의 세계관으로 설명할 수 없었던 새로운 것들은 무한히 추가된다. 탐험의 시대였던 르네상스 시대가 기존 교회에 의존하지 않는 지식의 박물지를 발전시켰던 것이 대표적이다. 필립 블롬은 르네상스 시대에 새로이 떠오른 탐구정신은 학자들과 애호가들이 주도한 것으로 사제 층이나 고대 철학자들 사이에서는 무시되었던 사조라고 전한다. 그들이 수집했던 것은 어떤 라틴어 문헌이 제공하는 것보다 훌륭하다고 보았다. 아름답고 상징적인 것이 아니라, 신기하고 불가해한 것을 찾아다니게 하는 호기심이, 자기네 지혜와 지식을 고대 학자들의 지혜와 박식과 경쟁하게끔 만드는 호기심으로 발전했다. 


‘도서관이 아니라 시장에서’ 수집한 그것들은 한 시대에 사실과 진리로 간주된 패러다임에 균열을 내는 이질적 파편들이다. 그것은 이질적인 파편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자연주의적이라 할 만 한 방식은 모순 없이 짜여 진 특정한 틀을 거부하기 위해 이러한 파편들을 적극 수용한다. 세계를 더욱 자세히 보면 리얼리즘적 필연성보다는 자연주의적 우연성이 더 사실에 가까울 수 있다. 자연주의자들은 이러한 우연적 파편에서 더 흥미로운 요소를 발견한다. [모더니즘 문학론]에 의하면, 19세기의 리얼리즘을 옹호한 루카치는 자연주의가 사회생활의 다양한 세부묘사를 지나치게 강조한다고 비판한다. 그의 기준에 의하면 자연주의는 배격할만한 반 리얼리즘적 태도, 즉 모더니즘이다. 루카치는 이 모더니즘이 리얼리즘 텍스트라는 완벽한 피륙에서부터 세부 묘사만을 찢어내는 수법을 주도했다고 본다. 이러한 파편성은 기존 세계의 모순을 그대로 방치하기에 반동적이라고 평가절하 된다. 


리얼리즘은 사회적 실재를 완전한 ‘전체’로 묘사하는 것이며 궁극적으로 사회적인 실재를 ‘공통의 기반’으로 묘사하는 것이다. 이렇게 이해된 리얼리즘은 일상적인 판단기준이 되며, 본격 예술뿐 아니라 대중문화에서 전형적이다. 불편한 현실을 다룰 때조차도 언어적 측면에서는 세상과의 화해로 가득한 리얼리즘의 방식에서 일탈하는 자료들은 모더니즘에서 적극 수용된다. 그것은 현실을 재현하는 예술이 아니라, 현실과 경쟁하는 불가해한 사물이다. 이런 사물은 초현실주의나 누보 로망같은 중요한 현대 예술사조의 지향점이기도 했다. 자료에 대한 반(反) 리얼리즘적 태도는 자료의 불연속성, 불투명성을 의식하며, 더 나아가 자료에 대한 접근성의 문제도 제기한다. 기록물 보관소는 ‘근본적으로 정치적인 범주’(데리다)이다. 


체계를 뒤집는 이질적 파편


알라이다 아스만은 [기억의 공간]에서 기록물보관소(archive)가 그리스어 ‘arché’에서 유래한 것으로, 시작, 기원, 통치권이라는 뜻 외에도 관공서나 관청을 의미하기도 한다고 지적한다. 데리다는 ‘arché’라는 말이 지닌, 일치하지 않는 두 가지 의미를 강조한 바 있다. 그가 정의한 기록물보관소의 개념에는 토대와 주거라는 의미구성요소들 뿐 아니라, 법률을 보호하고 그것을 상기하여 해석하는 제도 파수꾼이라는 의미가 있다. 문자기록물은 사용이 다 된 후에도 자연적인 산물처럼 썩지 않기에 특히 수집되고 보관될 수 있는 잔여물이 된다. 이처럼 관리와 경영을 위한 기억으로서의 기록물보관소에서 과거의 증거물로서의 기록물 보관소가 생겨난다. 알라이다 아스만에 의하면 기록물보관소는 처음부터 문자, 관료주의, 서류, 관리와 관련된 개념이다. 기억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고 그런 기억을 살아있는 기억 보유자들과 무관하게 고정시키는 문자의 기술이다. ‘기록물보관소는 우선 말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의 법칙이자 개개 사건들로서의 진술의 발현을 지배하는 체계’이며, 기록물보관소는 ‘처음부터 진술 가능성의 체계를 정의한다’(푸코) 


푸코가 보기에 기록물보관소는 사회적 삶에서 풀려나온 자료의 창고가 아니라, 사고와 표현의 범위를 제한하는 하나의 강압적인 도구이다. 방법론이 대상을 미리 규정하고 결론까지도 유도할 수 있다. 그래서 잠재성을 현실성으로 전화시킬 수 있는 방법론이 자료만큼이나 중요하다. ‘말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의 법칙’으로서의 기록물보관소는 정적인 문화적 기억에서 문화적 진술의 담론으로 새롭게 해석된다. 그러나 완벽한 저장장치나 먼 후세에도 완벽히 해독될 수 있는 기록 언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알라이다 아스만은 파피루스에 쓰여 진 문서들은 그 자료가 건조한 황야지역의 무덤이나 동굴 속에 보관된 경우에만 고대에서 현재로 구출되었음을 상기시킨다. 그에 의하면 문화적 기억을 지우기 위해 그것을 불태울 사람을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자료들은 저절로 퇴색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보존되어야 하는 자료들은 이제 더 이상 정지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변화의 길을 떠나서 마치 윤회의 노정에 있는 영혼처럼 항상 새로운 자료 담지체로 체현된다. 


시간의 기호가 새겨진 오래된 자료들은 ‘해체’라는 동시대 철학의 키워드와 만난다. 자크 데리다는 지속과 파괴, 그리고 소실과 잔재의 문제들을 연구했다. 아스만은 데리다의 해체의 개념과 해체의 과정이 비슷하다고 평가한다. 유기적인 수사학을 신뢰하지 않았던 데리다는 ‘생물 분해성’의 개념을 끌어들이면서, ‘텍스트는 살아있는 문화, 기억, 전통을 살리기 위해 분해될 수 있어야한다....텍스트는 그러한 문화의 유기적 토양을 풍부하게 하기 위해서는 이해만으로 끝나지 않는 의미를 창조하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심지어 그는 불멸성을 꿈꾸며 사라지지 않는 자료나 작품을 핵폐기물과 비교한다. 특히나 물질적 자료를 전자매체의 글자로 바뀌면서, 공간적으로 폐쇄된 문화적 기억 장소로서의 기록물 보관소의 이미지는 해체된다. 그것들은 이제 더 이상 고정된 자료 저장소로 이해되지 않고, 자료들을 자동적으로 체계화하는 유동적인 시스템이 되었다. 수사학이나 방법론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명목보다는 실재가 중요한 것이다. 체계화가 공고해 질수록 틈의 역할은 커진다. 날로 가속화되는 정보화는 틀만큼이나 틈의 영향력을 키운다. 이때 기성의 인식론을 뒤흔들고  재배치할 수 있는 이질적인 자료의 역할은 더욱 커질 것이다. 

  

출전; <밖으로 나선 아트아카이브: 아트아카이브와 공론장>(한국아트아카이브협회) 강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