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럽혀진 순수함
최선 전 (2.13—3. 28, 송은 아트 스페이스)
이선영(미술평론가)
최선의 ‘메아리’ 전에는 똥, 피, 침, 폐유, 오수, 재 등 더럽다고 간주된 재료나 소재가 대거 등장한다. 전시장은 도착과 독창을 구별 지을 수 없는 다채로운 분뇨의식(Scatologic Rites)의 장처럼 보인다. 그가 이번 전시에서 활용하는 각종 불순한 재료들의 면면에는 분뇨선호증(coprophilie)이나 분식성향(coprophagie) 마저도 감지된다. 현대미술에서 이러한 비체(the abject)적 재료나 소재는 그에 걸 맞는 방식으로 지저분하고 선정적인 모습으로 배열, 또는 배설되곤 하는데, 그의 전시장은 어느 모더니즘적 추상 못지않게 깔끔하다는 점이 다르다. 캔버스 위에 칠해진 물감을 긁어 고상한 추상 회화처럼 내건 첫 개인전의 작품 [Naked Painting](2004)부터 예시되어 있듯이, 그에게 모더니즘적 추상은 극복의 대상으로 깔려있는 듯하다. 예술에 포함되어 있던 다양한 요소들을 하나하나 제거하고, 소위 말하는 작가의 순수한 정신세계나 회화의 물질적 본질만을 남겨두려는 환원주의적 경향은 몇몇 대학이나 화랑 등 지배적 미술 제도가 지지해주지 않았다면 제대로 서있을 수도 없는 창백한 공예품들을 대거 양산했을 따름이다.

필자에게도 그러한 부류의 예술은 면벽수도(面壁修道)를 위한 세련된 벽지 이미지로 남아있다. 자기만을 지시하고 있을 뿐인 그런 단조로운 미학이 자기동일적 만족에 머무르지 않고 어떤 이상적인 전범으로 나타나면서 부조리한 권위에 부당한 권력까지 실려질 때, 이를 위반하고픈 충동을 낳는다. 실제보다 과대평가된 한국의 모더니즘적 추상의 어법을 위반하려는 세력들이 미술계에 없지는 않았지만, 제풀에 지쳐 사라지거나, 목청껏 반대하다가 서로 닮아가는 경로를 밟아오곤 했다. 아니면 그들의 권력에의 의지와 현실적 전략에 못 미치든가. 최선은 큰 상의 수상에 따라 제공된 기회를 활용하여 그들의 어법을 내부로부터 뒤집고자 한다. 이미 시간(역사)의 시험에 붙여진 그러한 미학들을 문제 삼는 것이 생산적인가에 대한 의문은 있지만, 예술이라는 것이 진공이 아니라 대화라는 맥락을 통해 진행된다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메아리’라는 전시부제 자체가 내포하고 있는 것도 그러한 대화가 아닐까. 모더니즘은 독백에 머물렀지만, 이 후의 세대들은 대화하고자 하는 것이다. 최선의 작품에서 더러운 것들은 알루미늄 판, 하얀 캔버스와 벽, 카메라 렌즈 같이 깨끗한 것에 붙어서 자신의 본질을 숨기고 있다. 작가의 고매한 정신세계와 독창적 필치가 작품에 그대로 드러나야 한다는 생각도 더럽혀진다. 작품들에서 발견되는 특이한 형상들은 피똥이나 구정물을 확대한 이미지로부터 나온 것이며, 타인들의 숨이나 손으로 그려진 회화나 벽화 또한 작가의 영혼과 손재주가 그대로 드러나야 한다는 창조의 신화를 더럽힌다. 이 전시의 작품들에서 비체들은 더러운 것이자 신성한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깨끗한 척하지만 실제로는 더러운 것들의 본질을 드러나게 한다는 점에서 진실하며, 또한 더럽다고 간주하면서 배척해온 타자들을 예술 속에 끌어들인다는 점에서 신성하다.

3층 A 전시전경_나비(좌), 내 숨이 멈춘 그 점의 너의 숨은 시작되고(우)

근대화를 거치면서 사라져간 성스러움을 대신 떠맡은 영역은 바로 예술이며, 새로움의 신화를 주장한 현대예술에서도 성/속의 변증법은 선명하다. 현대미술사는 가장 속된 주제를 통해 스타가 된 작가가 성스럽게 포장되는 예를 수없이 보여준다. 성스러운 이념을 재현했던 작가들이 이념의 몰락에 의해 시대의 단순한 부산물로 격하 되는 예도 있다. 이러한 와중에 현대예술은 사드나 바타이유 같은 소수의 위반적 예술가의 계보를 만들어왔다. 성스러움은 위반을 통해 드러나며, 위반이 성스럽게 느껴질 만큼 금기는 억압적일 수 있다. 최선의 작품에서 더러움과 깨끗함은 각자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수시로 자리를 바꾸면서 위반적 충동을 발산한다. 흑과 백으로 나뉘어진 어느 한편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와 대상 모두에 관철되는 불안정한 가변성(decentered subject 또는 transitional object) 자체가 불경하다. 전시장 들어서자 맞은편에 보이는 작품 [적분의 그림]은 우레탄 페인트를 칠한 알루미늄 판들이 마치 미니멀한 설치물처럼 배열되어 있다.
수평으로 바닥에 쫙 깔려있는 구도는 죽음을 연상시킨다. 모더니즘의 정점에서 반(反) 모더니즘의 물꼬를 튼 미니멀리즘이 현대미술에 끈질기게 따라붙은 신인동성동형론(anthropomorphism)을 거부하기 위해서 비(非)관계적인 구성, 즉 해체를 시도한 것처럼 말이다. 자동차를 비롯한 온갖 미끈한 상품들의 포장방식 위에 재현된 것은 제목그대로 피똥이다. 외부적 오염을 방지하려는 몇 겹의 물리적 조치는 정작 그 표면을 가로지르는 수상한 무늬에 의해 무색해진다. 그러나 예술이 무엇에 대한 반대로만 서있을 수는 없다. 단순한 반대는 그가 반대하는 것들과 함께 무력화되거나 사라지곤 한다. 최선의 작품은 비판적이며 풍자적이지만, 그 또한 예술에 대한 열정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여기에 있는 것을 저기에 옮겨놓은 것일 뿐인 평범함이 아닌, 피똥처럼 더 이상 나올 것이 없을 때까지 짜내야 하는 한계의 게임이 바로 예술이며, 그것은 작가 최선에게도 면제되지 않는다.

내 숨이 멈춘 그 점에 너의 숨은 시작되고_숨, 종이, 먹_218x314cm_2011

비체적 소재가 아닌 물감 역시 몸에서 분비된 무엇으로 간주되며, 원시인이나 아이들처럼 예술가들 또한 이러한 부적절한 부산물로 분탕질을 즐겨했음을 알려준다. 매끈하게 도장된 알루미늄 판에 떠도는 이미지들은 몸에 외재적인 찌꺼기를 넘어서, 이미 몸의 일부가 된 것들이기에 그 고통이 더 진하게 전달된다. 3층 전시장에 숨을 형상화한 회화들은 숨이라는 내용에 걸맞게 나비처럼 가볍지만, 외국인 노동자나 한센인의 숨결로 이루어진 작품들 역시 피똥만큼이나 처절하다. 소수자의 팍팍한 삶은 특수잉크를 가로지르는 숨길을 팔랑거리는 나비 떼의 이미지로 변모한다. 요코하마 트리엔날레에서 관객 참여 프로젝트로 진행했던 작품 [내 숨이 멈춘 그 점에 너의 숨은 시작되고]는 불특정 다수의 숨의 이미지가 예상 외로 다채롭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렇게 서로 다른 숨과 숨이 끝없이 이어지는 살아있는 과정이 바로 예술일 것이다.
작품에 깊이 끌어들여진 소수자를 포함한 타자들은 고정된 주체나 예술의 경계를 파열한다. 이러한 과정은 위험한 만큼이나 매혹적일 수 있다. 비체들에 실려 오는 이질성은 동질성을 교란하기도 하지만 풍부하게도 하는 것이다. 몸 안에 있는 것이 밖으로 배출되거나, 그 반대의 과정은 성/속의 경계와 무관치 않은 순수/오염의 경계 선 위에서 동역학적으로 작용한다. 숨에는 부정적인 의미가 포함되어 있지는 않지만, 감염병 시대에 타인의 숨은 그렇지만도 않다. 그래서 현대과학 기술은 실제의 접촉 대신에 가상의 접촉으로 대신하려는 기술을 개발하는데 집중하곤 한다. 스크린을 포함한 다양한 인터페이스를 통한 가상적 접촉은 화려한 스펙터클 저편에 관념적으로만 급진적인 초라한 몸뚱이를 남겨 두었을 뿐이다. 하얀 벽면과 상호작용하는 청색의 상큼한 물결무늬 작품 [오수회화(적분의 그림)]는 난지 하수처리장에 모인 오수 위에 생긴 거품의 형태에서 추출한 패턴으로, 작가가 제시한 매뉴얼에 따라 다른 사람들이 제작한 벽화이다.

메아리_벽면에 개, 고양이, 사람 털을 태워 만든 재_가변크기_2015

그것은 의미 있는 대상도 아니고 작가의 개인기가 농축된 산물도 아니다. 또한 벽면을 끝까지 채우며 환경의 차원으로 확장된 이미지는 관객을 구정물 속에 빠뜨린 것 같은 효과를 준다. 침수의 개념 전체가 거대한 경계소멸과 관련된다. 경계 소멸의 한 양상이 바로 죽음이다. 작년에 우리나라를 강타한 세월호 사건은 우리 사회 전체가 구정물 속에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지 않았는가. 4층 전시장의 또 다른 벽화 [메아리]는 개와 고양이, 사람의 털을 태워 만든 재로 전시장 벽면 전체를 칠한 것으로 만지면 재가 묻어난다. 마치 경악스런 대화재 현장처럼 재가 발라진 흔적은 죽음의 이미지로 가득하다. 재가 벽에 칠해졌다기 보다는 벽이 더렵혀졌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사람과 짐승의 몸에서 나온 부산물에 내포된 부정한 느낌은 재로 얼룩덜룩해진 벽이 더렵혀진 화이트 큐브라는 느낌과 연결된다. 그 위에 걸린 하얀 그림들인 [쓴 침]과 [소금회화]는 순수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는 백색 모노크롬처럼 보이지만, 그 내용물은 말라붙은 침들과 소금물에 절어 결정화된 표면이다.
값비싼 그림을 채우는 값비싼 물감대신에 활용된 이상한 재료들은 뭔가 재수 없는 대상을 향해 내뱉거나 뿌려지는 물질을 닮았다. 재로 뒤덮인 방에서의 왠지 으스스한 느낌은 신체 부산물들이 종종 저주나 액땜으로 활용되기도 했던 주술적 물질이기도 했다는 점을 깨닫게 한다. 그 옆방에 하얀 벽면 위에 걸린 [검은 그림] 역시 만지면 더러운 기름이 묻어나는 작품으로, 고정되지 않고 과정 중에 있다는 것 자체가 불결하게 다가온다. 지금은 현대미술을 시작한 성화로 추앙받는, 검은 사각형을 연상시키는 이 그림은 하얀 벽면을 유지하기 되기 위해 바깥으로 내뱉어진 모든 오염물질을 뒤집어쓰고 있는 듯하다. 또 다른 기준에 의하면, 하얀 벽면 보다는 그림의 틀을 빌은 사각형 속에 농축된 이 검은 찌꺼기들이 더욱 순수하고 아름다울 수 있을 것이다. 비디오카메라 렌즈에 발린 자신의 붉은 피가 산화되면서 검게 변하는 과정이 ‘단색’의 변화로 ‘미니멀하게’ 드러나는 작품 [꽃]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간다.

검은 그림_캔버스 위에 폐유_193.9x130.3cm_2015

태양을 연상시키는 가득한 붉은 빛이 한치 앞도 안 보이는 암흑으로 변화되는 드라마를 연출한 것은 변질 중인 체액이다. 마지막 방에서 강한 태풍에 돌멩이로 눌러놓은 책장이 절로 넘겨지는 영상은 정신, 물질, 자연 등 모더니즘적 추상에 자주 등장하는 형이상학적이고도 물신적 소재들을 풍자하는 듯하다. 돌멩이는 저마다의 묵직함을 자랑하는 관념적 아름다움을 표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반대로 그것들은 돌멩이라도 달아놓지 않으면 안 될 만큼 가볍디가벼운 것일지도 모른다. 태풍으로 현시된 강한 자연력은 한때의 주인공들을 광막한 우주로 흩어질 먼지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물감은 물감 통에 있어야 적격이다’라고 말한 어느 개념미술가 만큼이나 물감을 배척해온 최선의 ‘그림’은 단지 물감이라는 값비싼 재료에 대한 경제적 대응만은 아닐 것이다. 그는 미술계의 부조리한 관례 등을 많이 생각해왔지만 관념에 집착하지는 않는다.
미술의 관념화는 자잘한 손재주에 매몰되는 것만큼이나 부정적이다. 잠시 두뇌를 활성화시킬 수 있는 논리 게임보다는, 경계 위의 게임을 활성화시킬 수 있는 적절한 계기들을 미술 언어 속에서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경계에서 몸은 기본이 된다. 최선이 이 전시에서 활용하는 물감 대용의 재료들이 거의 몸을 연상시키는 것임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그는 순수예술에 적절치 않다고 간주되어온 재료들을 통해 예술, 또는 예술적 주체라는 순화된 몸체를 교란시킨다. 이러한 불경한 위반에 의해 모더니즘의 미학적 이데올로기에 따라 경계를 둘러치게 된 ‘순수’ 회화는 더렵혀진다. 순수는 순수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염이나 위반에 의해서 반증된다는 것은 희생양의 신화와 종교를 비롯한 여러 인류학적 사례에서 보편적으로 발견되며, 정신분석학을 비롯하여 억압된 것의 회귀를 촉구하는 현대의 담론은 이를 새로운 미학의 원리로까지 부각시켰다. 최선이 활용하는 똥이나 피같은 각종 비체적 재료와 소재들은 손상된 몸의 경계를 연상시킨다.

전시전경_꽃_2015_카메라 렌즈 위에 피_1분 5초

그것은 죽음과도 연결될 수 있는 병적인 양상일지 모른다. 그러나 안팎의 소통이 막혀있는 것이야말로 병적이다. 그러한 막힘은 미술계가 사회로부터 고립될 때 더욱 횡행하곤 한다. 기존의 지배적 질서가 축소화된 방식으로만 사회에 속하는 것은 고립보다도 더 최악의 상황이다. 최선의 작품에서 안과 밖을 구별하는 가장 기본적인 질서로서의 몸의 경계는 침범 또는 와해된다. 축제는 이러한 경계가 위반되는 장으로, 예술의 본질과 닿아있다. 그러한 축제에는 왕과 성직자들을 흉내 내면서 기존의 질서를 거꾸로 세우는 반(反)영웅들이 등장하곤 한다. 비체들은 반영웅과 함께 해온 전복적인 물질로, 여기에서 도착과 유희는 분간할 수 없다. 동시에 그것들은 새로움과 실험의 이면이기도 했다. 금기의 위반에서 야기되는 성스러움은 정(正)으로서의 성스러움과도 다르다. 더러움을 승화하는 문제도 아니다. 최선의 작품은 모더니즘적 추상의 허약한 경계를 무너뜨리는 질펀한 축제의 흔적들로 나가온다.
출전; 국립현대미술관 웹진 ART;M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