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동하는 생명
윤정희 전 (3.4—3.10, 갤러리 도스)
이선영(미술평론가)
‘유기적 레이어’라는 전시부제로 열린 윤정희의 개인전에는 실처럼 가느다란 동선으로 성글 게 짠 둥그스름한 구조물들이 편재한다. 전시장 바닥에 벽에 그리고 귀퉁이에 듬성듬성 놓인 것들에는 새봄을 맞아 생명이 부글거리며 발생하는 느낌으로 가득하다. 빵이 효모균에 의해 부풀어 오르듯이, 팽팽하게 부풀다 못해 그 위에 또 다른 촉수를 뻗는 움직임에는 생명력이 느껴진다. 인디안 핑크의 온기를 품은 색선들은 한 아름, 또는 한바구니 정도 부피로 한정되어 있지만, 거기에는 에너지와 움직임이 내재해 있다. 페이지를 넘기며 볼 수 있는 전시도록에는 덩어리들이 하나 둘 증가하는 방향을 지시한다. 공간상의 한 자리를 차지하는 윤정희의 작품에는 시간성이 포함되어 있다. 여러 겹으로 이루어진 덩어리 뿐 아니라, 동질이상을 이루는 일련의 것들은 증식하는 것 같은 환영을 만든다. 하나의 세포로부터 출발하여 인간을 포함한 얼마나 다양한 생명체들이 번성했는가를 생각하면, 세포들의 증식 이미지에는 시원의 풍경을 목도하는 것 같은 감흥이 있다.


세포 같은 모습을 한 덩어리들은 생명의 축소판으로, 생명의 먼 기원을 알려주는 원시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들은 거대 유기체보다 환경변화에 더욱 유연하게 반응한다. 윤정희의 작품 속에 있는 무성생식의 이미지는 죽음마저도 불사하는 생명의 한 양상이다. 도미니크 바뱅은 [포스트휴먼과의 만남]에서 무성생물을 완벽한 불멸의 생명체로 본다. 이들에게 생식은 세포 분열만으로 이루어지고 분열을 통해 생겨난 두 개체는 완전히 똑같으므로 하나의 개체가 성장과 번식을 거듭하면서 여러 세대에 걸쳐 생존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클론은 인공생명에도 해당된다. 물론 그것은 발전된 생명공학을 통해서 체액 한 방울로 정체성과 운명이 결정되는 음울한 SF적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장황한 기계장치 등이 동원되곤 하는 현실적 움직임보다는 잠재적 움직임이 더욱 효과적이고 풍요롭다. 미술의 가장 큰 장점인 가시성이 어떤 한계로 작용할 수 있듯이, 미술의 단점이라 할 수 있는 부동성은 그 반대로 전화될 수도 있을 것이다.
부동성은 전후좌우의 함축성을 직관, 또는 상상할 수 있게 한다. 금속선으로 이루어진 덩어리들은 숨 쉬고 꿈틀대는 느낌이지만, 덩어리들이 놓인 방식은 자연스럽지 않다. 전시장 바닥에는 30개의 덩어리가 5x6열로 배치되어 있다. 하얀 바닥과 구별되는 또 하나의 하얀 좌대들은 핑크색 덩어리를 어디선가 떼어온 샘플같은, 가령 분석을 위해 유리판에 한 방울 떨어뜨린 점액질 같은 모습이다. 유기체 특유의 전체와 부분의 관계 대신에, 기계적인 나열이 두드러진다. 그것들은 각자 자족적인 단자(monad)들이다. 윤정희의 작품은 여성의 섬세한 솜씨로 재현된 유기체적 자연을 넘어서, 유기체가 처해있는 새로운 상황을 포함한다. 이 새로운 유기체는 부분 속에 전체가 담겨있으며, 전체는 한정되어 있지 않다. 중심/주변의 관계에 바탕 하는 유기적 전체는 억압적일 수 있다. 억압을 낳는 위계적 관계를 해체하고 ‘자연은 재발명’(다나 해러웨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자연의 재발명을 위해서 다나 해러웨이처럼 사이보그까지 갈 필요는 없지만, 이러한 비전이 경계의 문제를 다루고 있음은 중요하다. 경계의 침범이나 와해라는 사이보그 담론의 주제가 자연이라는 ‘생명의 그물’(프리초프 카프라)처럼, 수직적 계층에서 수평적 연결망으로의 전환이라는 패러다임까지 가지고 있는지는 미지수이지만 말이다. 윤정희의 작품에서 발견되는 수평적 배열은 세대에서 세대에 걸쳐 유전자를 교환하는 수직적 방식이 아니라 같은 세대 내에서 옆에 있는 것들과 직접 유전자를 교환하는 방식으로 번식하는 무성생식의 이미지이다. 그것은 같은 규칙에 따라 얼마든지 확장될 수 있는 열린 구조로, 유기적 총체성이라는 전통적 개념을 해체한다. 어디에도 강조점이 찍혀있지 않은 무관계성, 즉 미니멀리즘적 나열방식이 보여주는 것 또한 그것이다. (가상적)움직임은 한 방향으로 유도되는 것이 아니라 관객의 시선 방향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중심도 텅 비어 있다. 또는 각 층들의 궤도의 중심은 각기 다르다. 거기에는 핵심과 주변의 관계가 아니라, 점차 커지는 층들의 계열만이 있다. 여러 겹의 층을 이루는 표면들은 선으로 엮여있는 망들이다. 선으로 엮인 망들의 구조에는 안으로 접혀지거나 밖으로 펼쳐지는 쌍방향의 움직임이 있다. 최소의 부피에 최대의 표면을 함축하는 구조이다. 마실 물을 구하기 위해 몇 시간을 걸어야하는 아프리카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재능을 기부하기로 어떤 훌륭한 건축가는 일교차가 큰 아프리카 기후를 이용하여 복잡한 망에 물이 맺히는 구조물을 발명하기도 했다. 망은 최대한 펼쳐진 표면을 의미하며, 생명과도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이다. 망으로 이루어진 껍질들은 가운데를 반투명하게 보여줄 뿐이며 층이 더해질수록 불투명성을 더욱 커질 것이다. 그것은 극도의 투명성을 견지해왔던 과학조차도 불투명해지면서 예술을 닮아가는 현실을 반영한다.

이러한 경향은 단지 인식론상의 무정부주의라기보다는 새로운 실재에 대응하는 겸허한 자세라고 할 수 있다. 수제비 떼어내듯 덩어리진 것들은 동일한 규칙 속에서도 다양한 형상을 만들어내며, 안팎의 공간관계를 명확히 파악할 수 없는 덩어리들은 그 무엇으로도 자라날 수 있는 만능세포같은 잠재력을 가진다. 비어있음이 가변성을 극대화한다. 비어있지 않으면 변화할 수 없다. 빈 중심으로부터, 또는 여러 개의 중심으로부터 다양한 유희가 가능하다. 질서 정연하게 바닥에 놓인 것들은 엔트로피의 측면에서 보자면 최대한의 잠재력을 가진다. 생명은 엔트로피의 증대에 대항하며 자기 보존과 조절을 위한 구조를 유지하려 한다. 그러면서도 미세한 변화를 축적시켜 진화한다. 그것들은 어떤 구조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주변과 상호작용하면서 변화한다. 다양한 곡면을 형성하면서 복잡다단하게 출렁이는 망들이 보여주는 것이 그것이다.
덩어리들은 2012년의 전시 ‘씨앗으로부터’처럼 씨앗과 같은 속성을 가진다. 그 밖에 ‘되어가다’(2011), ‘불완전함의 연속’(2009) 같은 근 몇 년 동안의 전시부제에는 작가가 현실성보다는 잠재성에, 완결보다는 과정에, 존재보다는 되기에 방점을 찍어왔음을 알려준다. 이번 ‘유기적 레이어’ 전에서도, 공기만을 품고 있는 듯한 망구조물은 본질보다 관계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준다. 과정 중에 있는 것은 완전하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불완전성은 결핍이기 보다는 미지의 가능성으로 열려있다. 바닥에 놓인 것들이 중력에 몸을 싣고 옆으로, 위로의 미세한 움직임을 보여준다면 선반위에 죽 올려놓은 것들은 바닥에서 일어나 좀 더 역동적인 방향성을 가진다. 그 역시 바닥에 설치한 작품들처럼 시간을 공간화, 또는 공간을 시간화 한다. 그것들은 시공간의 축을 따라 확장하는 생명력을 보여준다. 새로운 환경에 직면하여 적응, 또는 변화하는 생명체처럼, 이런저런 방식으로 반응하는 덩어리들은 보이지 않는 주변까지 포함한다. 덩어리들은 잔잔한 진동으로부터 울뚝불뚝한 움직임까지 다양한 진폭을 가진다. 그것은 긴 겨울이 지나고 만물에서 진행 중인 생명의 움직임처럼 보인다.


이러한 움직임은 물질 뿐 아니라 정신 속에서도 발생한다. 상상력 또한 발아하고 자라고 번성하며 때로 열매를 맺는 것이다. 맞은편에는 선적으로 증식하는 작업 스타일이 드로잉으로 표현되어 있다. 거기에는 형태와 더불어 의미가 생성되는 방식이 도해된다. 형태변화를 야기하는 새로운 결합규칙들은 의미가 변화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것들은 몇 안 되는 요소의 조합으로 최대한 다양하게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언어적이다. 단순함이 단지 단순함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내포적 다양성과 외연의 확장으로 이어진다. 선반과 바닥에 놓인 덩어리들은 3차원 상에 구현된 드로잉이라 할 수 있다. 3차원 상에서 여러 번 중첩된 곳은 진하게 보인다. 형상은 매번 중층 결정(overdetermination) 된다. 처음과 끝은 불확실하지만 자체의 동력에 의해 하염없이 나아가는 선들은 그 자체가 생성의 이미지이다. 윤정희의 작업에서 생성의 이미지는 구조와 밀접하다. 일련의 패턴이 감지되는 덩어리들은 움직이는 체계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손을 뜨개바늘로 삼아 엮은 망들은 반복 속에서 결합의 규칙을 조금씩 변화시킨다. 여기에서 여성의 몸이라는 매개는 기계적인 것을 포함한다. 여성은 자연적으로 간주되어 왔지만, 자연은 기계적이기도 한 것이다. 자연이 수많은 실험을 진행해왔듯이, ‘욕망하는 기계’(들뢰즈)의 단면들은 횡단적 접속을 극대화한다. 금속으로 짜여 진 망이라는 작품의 본질적인 형태는 예술 또한 자연이 아니라 인공적인 것임을 알려준다. 안팎의 구별이 모호하고 뼈이면서도 살처럼 보이는 덩어리들은 경계의 문제를 제기한다. 덩어리들은 위아래를 바꾸거나 안팎을 까도 항상성을 유지할 만큼 유연하다. 펠릭스 가타리가 [카오스모제]에서, 과학기술, 생물학, 컴퓨터 기술, 정보통신, 매체의 세계는 매일 우리의 정신적 좌표들을 한층 더 불안정하게 만든다고 말했듯이, 오늘날 경계의 문제를 제기하는 가장 큰 동인은 과학기술이다.


인간이나 주체성은 더 이상 자연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제는 ‘어떻게 주체성을 생산하고 포획하고 풍부화 하고, 이제 돌연변이적인 가치 세계와 양립할 수 있는 방식으로 끊임없이 재발명해 가는가’(가타리)가 중요하다. 촉촉하면서도 따스해 보이는 덩어리들은 두개골과 가슴 속에 자리한 기관 뿐 아니라, 세포에서 어머니-지구까지 생명으로서의 자연이라는 은유로 확장된다. 윤정희의 작업은 기본적으로 여성들의 오랜 노동이자 예술이기도 했던 뜨개질 같은 방식으로 진행되지만, 생명 및 인공생명을 포괄하는 네트워크의 비유 또한 강력하다. 기술은 과거의 딱딱한 외관을 버리고 생명과 보다 ‘자연스럽게’ 접속할 수 있는 인터페이스를 갖추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음을 염두에 둘 때, 윤정희의 작품을 여성, 자연, 전통, 공예 등으로 묶어 놓을 이유는 없어 보인다. 그 반대로, 그녀의 작품은 첨단적인 것일수록 근본적인 것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려준다.
출전; 국립현대미술관 웹진 ART;M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