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세계를 아름답게 그리기
이선영(미술평론가)
문준호의 작품은 예술을 통해서 행복하고 싶다는 욕망이 강하게 드러난다. 반 고흐나 스티브 잡스같은 이상적인 남자, 마랄린 먼로나 오드리 헵번 같은 절세 미인, 아담과 이브같은 신화적 존재, 행복한 연인, 그리고 병에 꽂힌 한 다발의 꽃 같은 화사한 일상 말이다. 그가 그림을 통해 다시 보고 싶은 사람들이 남성이라면 이성과 감성 면에서 절대를 찍었던 경우, 여성이라면 섹시함과 청순함을 가진 이들이다. 인류의 시작을 알린 아담과 이브도 신의 말씀을 어겨 낙원에서 쫒겨 나기 이전 시대인 듯, 산, 나무, 물, 풀, 별, 구름 등이 두루 갖춰진 풍요로운 우주 속에서 전형적인 남성, 또는 여성으로서의 자태를 뽐낸다. 작품 [아담]과 [이브]에서, 모든 것을 다 가진 듯한 금발의 왕자, 태양을 비롯한 온 우주의 사랑을 한데 받는 듯한 매혹적인 여신의 이미지에서, 아담과 이브를 시작으로 하는 원죄의식을 발견되지 않는다. 달과 함께 하는 남성, 태양과 함께 하는 여성이라는 상보적 구도는 불완전한 반쪽의 성이라는 존재론적 한계도 돌파한다.

아담 130x194㎝ oil,acrylic on canvas 2012

이 상징적 우주에서는 뱀조차 어둡고 사악한 기운이 없다. 신화가 아닌 세계라면, 작품 [플라워]에 나타나듯, 다양한 추상적 패턴의 테이블보 위에 놓인 꽃다발같이, 질서와 아름다움이 함께하는 세계, 폭죽이 터지듯이 행복이 터지는 그런 세계를 연상하면 된다. 남자와 여자는 작품 속에서 행복한 연인으로 만난다. 예술이 문명으로부터 비롯된 불만을 달래기에 적합하다는 프로이트적 해석이 나오기 이전에도, 예술은 그러한 역할을 해왔다. 예술의 유토피아적인 역할은 점차 대중문화의 차지가 되어가지만 말이다. 문준호의 작품에 반 고흐가 나오기에, 예술이 가지는 유토피아 의식을 반 고흐의 작품의 예를 들어 설명한 평문을 인용하고 싶다. 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은 [포스트모더니즘-후기자본주의 문화논리]에서 반 고흐의 [농사꾼의 신발]을 본격 모더니즘의 경전적 작품 중의 하나로 보면서, 그가 비판하고 싶은 현대의 포스트모더니즘--새로운 종류의 김빠짐이나 깊이 없음, 문자 그대로 피상성의 출현--과 비교 한 바 있다.
제임슨은 반 고흐의 낡고 헤긴 신발 그림에서, ‘농부의 비참함과 농촌의 가난이라는 전체 대상세계, 등뼈를 휘게 하는 농부의 고난이 있는 초보 단계적 인간세계, 가장 잔인하며 험악하며 원시적이고 주변화 된 상태로 전락한 세계’를 본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반 고흐에서는 ‘사과나무 같은 것들이 환각적인 표면색으로 폭발하고, 시골마을의 상투적 사물들이 갑자기 화려하게 빨강과 초록으로 덧씌워지는 것일까’를 묻는다. 우중충한 농촌의 대상세계를 의도적이고 격렬한 변형에 의해 유화물감의 순수 색으로 찬란하게 구체화한 것은 유토피아적 태도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자본의 몸뚱아리에서 생겨나는 어떤 새로운 분업의 일부이며, 자본주의적 삶의 전문화와 분화를 복제하는 신생감각 기관의 새로운 분열인 동시에, 그러한 분열 가운데서 전문화되고 분화되는 것에 대해 필사적으로 유토피아적인 보상을 추구하는 행위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제임슨은 반 고흐의 작품에서 상처받은 세계가 니체적인 의지의 명령과 행위에 의하여 요란스러운 유토피아적 색채로 바뀌고 있다고 보지만, 그와 대조되는 앤디 와홀의 작품은 반 고흐 식의 유토피아적 몸짓이 전도되어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문준호의 작품 [빈센트 반 고흐]는 어떠한가. 작가는 반 고흐의 초상화를 모델로 그리고, 그 바탕 면을 알록달록 경쾌한 패턴으로 채웠다. 제임슨이 와홀의 [다이아몬드 가루 신발]을 반 고흐의 [농사꾼의 신발]의 대조 항으로 끌어들인 것은, 죽음을 연상시키는 사진적인 표면성과 관객에게 아무 말도 걸어오지 않는 피상성 때문이었다. 사진을 활용한 그리기나 분열증적인 평면 패턴이 화면을 화사하게 장식하고 있는 점은 제임슨이 말한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징이다. 그렇지만 여기에도 본격 모더니즘에서 특유하다는 유토피아적인 보상행위가 있다고 없다고 볼 수는 없다. 앤디 워홀의 표현형식은 상품광고의 전형적인 방식이며, 광고에 유토피아적 요소가 없다면 물건은 소비자를 결코 유혹할 수 없기 때문이다.

빈세트 반고흐 145×112㎝ acrylic on canvas 2014
본격 모더니즘에 전제된 단순한 쾌락을 넘어선 열락과 포스트모더니즘의 ‘히스테리성 숭고’(프레드릭 제임슨)는 어떻게 구분되는 것인가. 반 고흐와 앤디 워홀의 출발은 다르지만 모두 유토피아를 향한다. 문준호의 방향도 다르지 않다. 문준호가 선택한 이 들은 그의 쾌락원리에 충실한 사람들이며, 지금 현존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상상계에 머물러 있다. 주변에 있을 법한 캐릭터의 경우에도 미술사적 전거를 가지는 양식으로 표현하여 가상적 느낌을 준다. 가령 작품 [행복한-연인]은 입체파 스타일로 그려진 다정한 연인으로, 사랑이 가질 수 있는 가상적 성격을 표현한다. 차이점은, 반 고흐의 작품의 몸통을 이루었던 신들린 붓 터치가 문준호의 경우에는 다른 작품에서도 공통적으로 나오는 패턴들로 보충되었다는 점이다. 그 패턴은 얼굴자체가 몸인 사물과 동식물 등, 일종의 괴물들이 일정한 크기로 분절화 되어 뒤죽박죽 섞여 있는 경쾌하고 장난스러운 분위기이다. 여기에서 손바닥, 하트, 물방울, 불, 꽃 등은 이전시대의 동화적 요소에 해당되는 요소들이 화면을 물활론적인 활기로 가득 채우고 있다.
그는 작가노트에서 ‘태양, 달, 별, 구름, 바다, 나무, 등 온갖 생명체가 아름답다 느껴진다’고 말하며, 자연에 대한 낭만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동시에 그 자연은 ‘늘 보던 풍경이 자연과 기하학적 형태들이 조화를 이룬 그림’과도 같다. 그에게 낭만주의적 범신론은 정보사회의 구성요소인 코드들의 조합과 모순되지 않는다. 그 실체가 무엇이든, 색색의 단위로 분절되어 뒤섞인 양상은 산뜻하고 경쾌한 시각적 리듬감을 가진다. 그리고 그 패턴은 등장인물과 무관하지는 않다. 가령 스티브 잡스의 초상에는 컴퓨터 패턴이 많이 발견되고, 꽃병을 그린 작품에서 벌꿀이나 나비 같은 패턴이 발견되며, 행복한 연인을 그린 작품에서는 사랑의 느낌과 관련된 패턴이 발견되는 식이다. 또한 문준호가 선택하는 인물이나 대상은 아무 말도 하지 않기 위해 또는 아무것도 표현하지 않기 위해 내세운 것은 아니다. 그의 작품은, 제임슨의 분류에 따르면 포스트모던 하지만, 작가가 선택한 대상과 패턴에 부여하는 의미는 중성적이지 않다.
문준호의 작품은 반 고흐처럼 심란한 현실적 대상을 유토피아적으로 변화시키거나 앤디 와홀처럼 중성적인 대상을 반짝거리는 무기질적 표면으로 대체한 것이 아니라, 작가에게 의미 있는 대상을 화사하고 즐거운 분위기로 그린 것이다. 앤디 워홀의 작품도 실제로 보면 시선을 완전히 빼앗기게 할 만큼 천재적인 색채감각을 가지고 있다. 그러한 특출 난 형식이 진부한 상표나 신문에서 발췌한 사진 등도 멋진 예술작품으로 보이게 했을 것이다. 문준호처럼 앤디 워홀도 오드리 헵번과 마랄린 먼로를 그렸으며, 일찍 죽지 않았다면 모택동을 그렸듯이 스티브 잡스도 그렸을 것이라 생각되니, 두 작품 경향 간의 미적 태도를 비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문준호의 작품은 반 고흐와 앤디 와홀의 구별 점 보다는 연속 점을 겨냥한다. 이러한 특징을 포스트모던하게 모던한 세계라고 말해야 할까. 어쨌든 문준호의 작품은 모더니즘은 물론 포스트모더니즘조차도 하나의 항목이 되어, 자신의 욕망이 이끄는 대로 부담 없이 선택하고 조합하는 또 다른 세대를 말해준다.
출전; 미술과 비평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