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들과 떠나는 여행
이선영(미술평론가)
신창용의 최근 작품에는 홀로 미지의 장소를 여행하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함께하는 친구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그동안 그의 작품에 많이 등장했던 이소룡을 비롯하여, 대중매체의 캐릭터들이다. 그림으로 그린 여행(trip)이 실제 여행(journey)이 아니듯이 친구들도 가상의 존재들이다. 작품 속 친구들은 중학생 시절부터 그렸다는 이소룡은 물론이고, 아이언 맨, 슈퍼맨 등, 남자라면 동일시하고 싶은 ‘절대무적’(2005년, 쌈지 스페이스)과 ‘강한 것, 멋진 것 그리고 아름다운 것’(2007년, 선 컨템포러리)들이다. 어디선가 나타나 위기에 빠진 지구를 구한 다음 홀연히 사라지는 그들에게 비행능력은 필수적이다. 비행은 신속한 접근과 이탈을 가능하게 하며 빠른 속도와 초월적 시점을 가진다. 이는 능력 뿐 아니라 쾌락을 준다. 비행하는 시점은 전쟁기술의 응용인 게임에서 흔히 발견되며, 신창용의 작품에도 편재한다.

people. acrylic on canvas. 117 x 80. 2013
작품 [people](2013)은 서로 죽고 죽이는 난장판에서 집으로 도망가는 작가의 뒷모습을 그린 것이다. 공중에는 슈퍼맨이 신처럼 떠 있다. 작가가 보는 세상의 축약도에서, 이 어지러운 상황의 종료는 인간의 오성과 이성에 의한 것은 아니다. 타자들로부터의 도망이라는 개인주의적 사고는 대중에게도 보편적이다. 도망의 가장 고전적인 유형은 홀로 여행을 가는 것이다. 작품 [alone](2015)은 ‘혼자 있고 싶다’는 대중개인주의의 대표적인 희망사항을 그림으로 실현한다. 그러한 여행지는 나를 혼란과 피해의식에 빠지게 하는 사회를 절대로 닮아서는 안 된다. 토성이 떠 있고 야자수 열매도 주렁주렁 매달린 미지의 대륙에서 작가는 고기를 구우며, 입에는 수상쩍은 흡입도구를 대고 있다. 예술은 그것처럼 정신적인 여행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 중독을 야기하는 환각 없이도 지금 여기를 떠날 수 있는 것이다. 그림은 정신적 육체적 수련만으로 다른 세상을 꿈꾸게 해줬던 이소룡만큼이나 탁월하다.
그래서 그는 주로 이소룡을 회화적 필치로 그려왔다. 회화는 가상적인 것을 실재계로 불러들인다. 이소룡은 여러 상황 속에서 나타나 서사를 이끈다. 이미 작가는 살아생전의 이소룡보다 나이가 많기에, 장면의 연출은 상상적 시나리오에 의한다. 작품 [give me water](2015)와 [We should take this water](2015)는 물 부족 국가 어린이 돕기라는 목적을 가진 전시에 출품한 것으로, 대중에게 기억된 이소룡의 특징을 지금 당면한 상황에 맞춰 유머러스하게 각색한다. 상상으로의 여행은 미술사적 전거를 가진 작품에도 이어진다. 작품 [into the Arnold Bocklin](2013)에서 작가는 이소룡과 환상의 섬으로 여행한다. 죽음의 섬으로 알려진 그곳은 낭만적 도피심리를 상징한다. 이 작품에서 그는 이소룡 뒤에서 노를 젓고 있지만, [skill of flying](2011)같은 비행 시리즈에서 작가는 복잡한 교차로 위를 여러 영웅들과 함께 날고 있다.
교차로로 나타나는 회색빛 문명은 우리가 가야할 길을 촘촘한 기호의 망으로 재현하지만, 색색의 영웅들은 문명이 그어놓은 선들을 초월한다. 그러나 그의 초월은 같은 비전을 공유했던 한국적 모더니즘과 달리, ‘시장통의 색깔’(신창용)로 칠해진다. 인간적 한계를 넘어서는 존재에 대한 선망은 그림의 주인공을 영웅들로 채웠다. 이 중 70%를 차지하는 것이 이소룡이다. 신창용에게 이소룡은 강한 남자의 전형이다. 어릴 때는 아버지같은 존재였고, 성인이 돼서는 자신과 동일시하는 인물이다. 작품 [bruce lee and car](2011)는 동양적 풍경 앞에 놓인 멋진 차, 그리고 관객에게 웃음 지으며 다가오는 이소룡을 그린다. 실제로 이소룡은 단순한 액션 배우가 아니라 미국에서 철학을 전공하였으며, 주류사회의 백인 뿐 아니라 여러나라 출신의 제자를 둔 평화주의자였다고 한다. 게다가 일찍 죽었으니 영웅으로서의 조건은 두루 갖춘 셈이다.

정신적 깊이를 상징하는 동양적인 배경, 현대사회에서 성공을 알리는 멋진 차, 그리고 준수한 외모로 웃음 지으며 다가오는 이소룡의 모습은 이상형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소룡이 친근한 미소를 지으며 상대에게 다가온다는 점이다. 현대사회와 더불어 복잡해지고 관념화된 현대미술과 달리, 자신의 작품 또한 대중에게 친근하게 다가가고 싶다는 바램이다. 그러나 이소룡이 정작 자신의 주 무대인 영화계—그는 대중들과 드라마와 영화로 만났다—에서는 현실논리로부터 크게 자유롭지 못했다. 그 점 또한, 그림을 세상과 만나는 유일한 수단이자 목적으로 삼았으나, 현실적으로는 그러기 힘든 작가가 공감하는 대목일 것이다. 이소룡이 동서양을 통틀어 대단한 스타이긴 했지만, 그 이후에도 영웅들은 수없이 탄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70년대에 죽은 영웅에 대한 집착, 그에 따른 영웅의 지속적인 호출은 그 시대의 문화에 대한 향수가 동반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신창용이 이소룡만큼이나 좋아하는 인물들은 존 레논, 밥 딜런, 지미 헨드릭스 등이다. 그들은 인디언섬머(indiansummer)처럼, 곧 다가올 차가운 시기 이전에 잠깐 봄빛이 만연했던 문화의 시대를 대표했던 이들이다. 잠깐 피다지는 꽃이 그 시대의 상징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들은 이전시대에 소수의 예술가들이 누렸던 행운과 저주를 대중적 차원에서 구현—그래서 1960년대의 문화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시초가 된다--했다. 모더니즘부터 개화하기 시작된 어떤 흐름들이 그 때가 돼서야 진정 대중이라 할 만한 거대 집단들과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시대가 그들을 문화적 영웅으로 더욱 빛나게 했던 것이다. 60-70년대의 문화적 영웅들은 그 이전과 달리 대중매체를 통해서 관객을 만났고, 수많은 젊은 관객들(소비자들이자 잠재적 생산자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국내외적으로 시스템화가 훨씬 강력하게 진행된 현재에는 사회가 그러한 일시적 무정부주의적 상태를 방치하지 않는다.
샘솟는 문화의 주체이자 객체가 될 젊은이들은 지배적 체계에 무력화되었고, 그래서 ‘좋았던 그 시절’에 대한 향수가 더욱 강한지 모른다. 물론 신창용은 77년생이니까 당시의 현실과는 직접적 관련이 없다. 그러나 문화를 통해 그 시대를 다시 매핑해 볼 때, 예술가로서의 상상력까지 더해진다면 전무후무한 유토피아로 생각될 법하다. 현실보다 상상은 늘 더 그럴듯하기 마련이니까. 회화는 그가 깊이 몰입해온 게임같은 매체보다는 보편적이지 않다. 그러나 작업을 열심히 할수록 아웃사이더가 될 수밖에 없는 기이한 현실의 미술계로 한정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미술대학과 화랑이라는 좁은 연계망으로 구축된 미술계가 강요하는 현실원칙은 예술가의 쾌락원칙과 공존하기 힘들다. 그래서 재능은 있지만 의지가 없는 많은 작가들이 절이 싫은 중의 마음으로 미술계를 떠난다. 제도예술과 대중문화 사이의 중간 단계는 없는 것일까.

alone. acrylic on canvas. 73 X 60. 2015
회화처럼 개인의 상상력과 자율성이 보장되어 밀도가 강한 형식을 구현할 수 있고, 바로 그 산물로 대중과 행복하게 만나는 차원 말이다. 신창용도 한때 많이 불려 다녔던 ‘코리안 팝’을 비롯해서 많은 노력이 있어왔지만, 역부족이다. 제도예술이 대중문화처럼 체계가 갇혀 있다면 영원히 불가능하며, 양자가 굳이 만날 필요도 없다. 그 시기가 오기 전까지 회화는 상처받은 주체를 치유하고, 예술에 적대적인 사회에 대처하기 위한 정신 수양의 단계에 머무를 것이다. 예술이 불만스러운 현실에 대한 대리만족이나 희망사항, 그리고 현실도피라도 제공 할 수 있는 것은 어쩌면 대단한 일인지도 모른다. 이소룡을 비롯한 대중문화의 영웅들과 도피의 여정에 오른 작가에게 회화는 출구이다. 신창용이 그리워하는 그 시대에 지배계급들은 현실을 돌파하기 위해서 원자핵을 연구했지만, 또 다른 평화주의자들은 ‘정신을 드러내는, 또는 정신을 들춰내는 물질’(헉슬리)를 연구했다. 물론 회화는 한 시대와 세대들이 집단적으로 탐닉했던 화학적 해결책은 아니다.
그러면서도 ‘멋진 신세계’(헉슬리)에 도달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헉슬리가 소설로 그려낸 바 있는 [멋진 신세계](1932)에는 몸에 해가 전혀 없고 모든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전능한 약이 등장한다. 헉슬리는 이후에 환각체험을 하면서 ‘싸이키델릭’으로 대표되는 1960년대 하위문화의 고전이 된 [인식의 문]과 [천국과 지옥]을 발표 한 바 있다. 예술은 의식의 변화를 통해 새로운 ‘인식의 문’을 여는 것이며, 이를 통해 진부한 현실은 ‘무한하고 신성한 존재로 나타날 것’(블레이크)이다. 헉슬리의 서신집인 [모크샤]에 의하면, 인간은 개인의 의식으로 이루어진 구세계와 그 반대편 대양에 있는 신세계로 구성되어 있다. 이 잠재의식의 신세계는 결코 식민지가 되지 않으며, 탐험되는 경우도 지극히 드물고 대개의 경우 발견되지 조차 않고 있다고 한다. 신창용에게 회화는 이 광대한 미지의 영역으로 여행하는 수단이자, 그렇게 도달한 영역의 진면모를 보여줄 수 있는 강력한 방식이다.
출전; 미술과 비평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