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처럼 펼쳐진 사회적 풍경


잭슨홍(Jackson Hong) 전 (3.19—4.26, 시청각Audio Visual Pavilion)

  

이선영(미술평론가)

    

벚꽃 필 무렵 열린 잭슨홍의 ‘Cherry Blossom’ 전은 한옥을 그대로 전시공간으로 활용한 장소의 특수성을 살린다. 등신대 크기의 인체 상들은 작은 마당을 중심으로 두 개의 방과 문간방, 마루와 장독대 등에 배치되어, 관객이자 방문자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관객은 멈추어진 한 장면에 어떤 맥락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통인시장 근처의 오래된 마을에 자리한 시청각은 비좁은 골목길 끝에 위치하여 그 자체가 독특한 공간체험을 가능케 한다. 이곳은 화이트 큐브로 대변되는 추상적 공간이기 보다 현실의 연장 같은 느낌을 주는 장소이다. 먹거리 관련 명소로 유명해진 근처의 통인시장과 하나의 문화벨트가 되어, 급격히 생활사 박물관 수준으로 변하고 있는 오래된 마을의 볼거리와 들을 거리를 추가한다. 문화에 동승한 예술은 문화에 실체감을 줄 수 있고, 예술은 자기만의 고독을 벗어날 수 있다. 시청각은 재미와 특이함을 준다는 점에서 매력적인 전시 공간이며, 잭슨홍의 전시는 현실의 연장처럼 보이는 연극적 공간에서 우리의 일상을 낯설게 조명한다. 


설치 전경, 사진 김상태



큰 미술관이 아닌 이상 혼자 보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주말에 들른 이곳은 근처의 시장만큼이나 관객들로 북적여서, 사람들 사이에서 등신대 조형물을 보게 되는 진기한 체험을 했다. 인체 상들은 연극을 하듯이 어떤 상황을 연출한다. 분장을 한 듯 과장된 인물들의 표정은 연극적 느낌을 더욱 강조한다. 혼이 나간 듯 막 집으로 들어오는 택배원은 그가 처리해야 할 하루의 배달 물량이 얼마 만큼인지 가늠하게 하며, 마루에서 남자의 다리 한쪽을 잡아당기는 야쿠르트 아줌마는 집에서 구들장이나 지키는 실업자 남편과 실랑이를 벌이는 듯하다. 섹시한 운동복 차림의 젊은 처자와 슈퍼맨 티를 입고 스마트 폰에 푹 빠져 있는 어린이는 가족으로 추정되는 일원들의 심란한 일상사에 무관심하다. 문간방에서 인형 눈깔 붙이는 할아버지는 등장인물들이 매달리고 있는 일들의 하찮음을 압축한다. 줄무늬 팬츠 바람으로 누워서 성인만화를 보는 배 더부룩한 아저씨는 놀고먹으면서 타인들의 잉여노동을 착취하는 악덕 인물일까. 


소비 또한 생산만큼 코드화되어, 곧 지루해지고 점점 더 큰 대가를 치루게 한다. 슈퍼맨 복장의 아이가 소비하고 있는 정보, 한 치의 틈도 없이 상업주의의 식민지가 된 젊은 처자의 몸 또한 그렇다. 뭔가 부분적인 일 하나에만 집중해도 되는 분업화가 이루어졌는데, 그 산물들은 과연 공정하게 교환되고 있는지. 누군가의 피와 땀은 어딘가에 따로 쌓여 있는 것은 아닌지. 단지 쌓여있는 것을 넘어서 그것을 생산한 자를 옥죄이는 부메랑으로 돌아오는 것은 아닌지. 단적으로, 근대의 분업화를 통해 서로 달리 맡은 역할들은 상호보완과 공존공생이라는 가치를 실현하였는지를 물을 수 있다. 일상의 한 장면을 포착한 듯한 모습에서 이러한 사회학적 상상력으로의 확장이 가능한 것은, 이런 저런 상황 속의 등장인물들이 특정 개인이면서 하나의 전형처럼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 전형은 보편성을 말한다. 물론 이 보편성은 모든 것을 코드화시켜 다수를 종속에 빠트리는 그런 보편주의가 아니라, 서로 다름이 동등하게 인정돼야 한다는 진정한 의미의 보편성이다. 





‘택배 아저씨’나 ‘야쿠르트 아줌마’라는, 첫눈에 알아볼 수 있는 직업들이 처음부터 그렇게 초라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지금은 벌써 흉물이 되어 철거되고 있는 ‘시민아파트’들이 그랬듯이 말이다.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것이, 한국에 패스트푸드 가게들이 막 생겨났을 때 예쁜 정복을 입은 알바 여학생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도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자본이 고도로 조직화되면 이윤율은 저하된다. 번듯해 보였던 것도 별 볼일 없어진다. 자본가들이 예술가들만큼이나 창조와 혁신을 외치는 것에는 절박한 이유가 있다. 세계화를 필두로 하는 체계화는 더 많은 생산력을 가능하게 했지만, 풍요만큼이나 빈곤을 생산한다. 자본은 과잉축적의 문제를 낳는다. 체계는 처리 불가능할 정도의 상품만큼이나 잉여를 생산한다. 사회에 꼭 필요하지만, 보잘 것 없는 잉여취급을 받는 직종은 더욱 늘어난다. 소수의 핵심적 관리자와 누구와도 무엇과도 대치될 수 있는 다수의 비정규 노동자로의 재편은 시장만능주의 사회에서 자연에 가까운 법칙이 되었다. 


진보적 지리학자 데이비드 하비는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에서, 자본의 내재화된 작동규칙으로, 자본이 쉴새없이 사회를 변형시키는 역동적이고 혁명적인 사회조직 양식이라는 마르크스의 분석을 따른다. 유체역학의 법칙들이 세계의 어느 강에서든 한결같이 적용되듯, 자본순환의 법칙들 또한 어느 나라 어느 기구에서든 한결같이 관철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팽창적이기 때문에 점점 더 많은 지역에서의 문화적 생활이 화폐관계와 자본순환의 논리에 얽매인다. 자본은 이동 속도가 빨라 한 지역에 새로운 기회를 줌과 동시에 다른 지역을 폐허로 만든다. 때깔 좋은 빈곤 또는 비참한 빈곤 등으로 귀결되는 이 변화무쌍한 과정은 심미화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권력은 문화나 예술을 통해 심미화 되곤 한다. 그러나 권력은 하나만이 아니다. 안토니 네그리는 [혁명의 시간]에서 ‘중앙집권화하고 매개하고 초월적인 명령으로서의 힘과 지역적, 직접적, 활동적, 구성적 힘’을 구별한다. 





‘유연한 자본’ 또는 권력에 의해 에피소드처럼 펼쳐진 이 풍경 속 인물들이나 그들이 놓여있는 ‘시대착오적인’ 공간은 주변화 될 것이다. 이 근대적 한옥은 1947년에 지어졌다고 하는데, 한 인간의 생애보다도 짧은 세월이 지나지 않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가는 유물처럼 보이는 것은 우리나라만의 특수성이라 생각된다. 미래와 과거 사이의 현재가 없는 이 나라에서 문화와 예술이라는 것이 어떤 취급을 받을지는 거의 확실하다. 그래서 한국의 진지한 작가들은 ‘자신도 모르게’ 현실 비판적이 되는 것은 아닐지. 툭툭 가볍게 던져 놓은 듯한 즉물적 인물들을 통해 작가는 보다 많은 다수를 타자화 하는 보이지 않는 체계까지도 암시한다. 그것들은 보여 진 모습 그대로이자 보이지 않는 층들을 줄줄이 호출한다는 점에서 풍부한 뉘앙스를 가진 예술작품이다. 연극적 무대의 비현실적인 캐릭터로서는 장독대 자리에 올라 선 선녀다. 삼원색으로 화려한 의상에 날개까지 단 선녀는 이 모든 추레한 상황들을 초월하고픈 유토피아적 열망의 화신처럼 보인다. 동시에 그녀는 이 동네처럼 기와집 많은 곳에 흔한 선녀보살 점집의 주인일지도 모른다. 


가장 세속적인 키치에서 종교적 도상들이 많이 발견되는 것은 성/속의 관계가 밀접함을 알려준다. 종교는 초월을 말하지만, 이 세상 대다수의 이들에게 초월이란 지고한 정신적 가치가 아니라, 현재의 비루한 물질적 조건으로부터의 초월을 의미한다. 진정한 종교든 흉내만 내는 키치적 종교든, 물질적 풍요 속에 종교의 자리는 없다. 그러나 ‘물질적 풍요를 향해 급격히 나아가고 있는 사회에서 키치는 번성’(아브라함 몰르)하면서, 가장 세속적인 열망을 담아낸다. 속이 텅 비어 있는 키치들은 자신이 가리키는 본질과 다른 것들을 실어 나르기 용이하다. 키치는 예술만큼이나 근대적이다. 등신대 조형물이 아닌 또 하나의 인물이 한옥의 높은 천정에 갓을 쓴 할아버지 초상이다. 전시장은 건물 외에 다른 가구들이 없기 때문에 초상 역시 등장인물로 봐야 할 것이다. 3차원상의 가상적 인물들보다 시공간상으로 더 가상적인 그는 작금 목도된 현실에 혀를 차는 듯한 표정이다. 아마도 작가의 입장을 대변할지 모르는 그는 놓여있는 위치 자체로부터 발산되는 신령한 아우라가 있다. 





장소로부터 벗어난 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 아우라는 사라졌지만, 마지막까지 그 아우라를 보존한 것은 바로 초상이라는 벤야민의 분석이 실감난다. 더구나 한옥의 높은 곳에 모셔진 초상은 단순한 전시가치를 넘어서 제의적 가치까지 보존한다. 여기에는 특정 장소에 속해있는 제의적 도상의 일회적인 나타남이 있다. 이렇듯 선녀보살이나 할아버지 초상은 현실을 자연주의적으로 흉내 낸 다른 상과 이질적이다. 현실과는 다른 차원에 있는 그들은 이질적이며, 변화에 대한 염원이나 그 가능성으로 다가온다. 변화가능성은 다수를 빈곤의 덫에 걸리게 한 합리적 체계에 의한 것은 아니다. 변화는 역사주의가 퍼트렸던 발전에 대한 전망처럼 하나의 원인이나 동력이 아니라, 예측할 수 없는 국면에서 도약과 비약을 통해 일어난다. 척도를 중심으로 하는 동일성이 아니라, 척도로부터 탈주하는 이질성에 의해 일어난다. 그 자체로 그것은 과학보다는 예술을 더 닮은 변화이다. 


그들은 다른 캐릭터들처럼 단순히 동질적 질서의 재현이 아니라, 이질적인 것이 만들어내는 사건의 전령사처럼 다가온다. 조악한 키치 풍으로 만들어진 인물상들은 현실자체의 취약함과 허구성을 예시한다. 작가는 정교하게 만들어진 밀랍 박물관 풍의 환영을 유도하지 않는다. 그러한 사실주의적 환영은 중립적이거나 객관적이기 보다는 변하지 않는, 그리고 변할 수 없는 현실을 선전한다는 점에서 ‘신화이자 이데올로기’(바르트)이다. 잭슨홍은 어디보다도 그럴듯한 현실적 무대에서 작업을 했지만, 현실로 착각하게 하기 보다는 현실과 거리를 둔다. 어수룩하게 만들어진 인체조형물은 그러한 괴리감을 주기에 충분하다. 그의 작품은 발전주의의 환상에 젖어 곳곳에 생활사박물관을 만들어, 얼마 전 삶을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박제화 하는 관광-소비 경향에 대한 풍자처럼 보인다. 그의 작품은 현재 진행형인 일상과 그 일상을 상품화하여 소비하는 어떤 경향을 동시에 언급한다. 낯설게 다가오는 그 곳은 우리 삶의 급격한 변화를 알려준다. 




시청각은 영원한 미의 전당이기 보다는 아마도 재개발을 기다리고 있을 과도기적인 공간일 것이며, 잭슨홍의 작품 역시 일과적 특징을 강조한다. 얼마 전까지도 주거공간으로 사용되었던 한옥 집은 조악한 캐릭터 구조물에 힘입어 더욱 세트처럼 보인다. 이러한 시뮬라크르의 전략은 유효해 보인다. 지배구조를 닮은 영원한 전망을 외칠 것이 아니라 게릴라적인 대안성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과거에 공업디자인을 업으로 삼기도 했던 잭슨홍에게 정교함과는 거리가 먼 솜씨는 이번 전시에서의 미학적 선택일 것이다. 그러한 거친 표현방식은 근대이래 안정감이라고는 없이 늘 상 과도기에 살고 있는 우리 삶을 대변하는데 적격이다. 전시공간으로 진입하는 좁은 골목길은 제3세계에 수출도 하고 있다는 신도시 계획도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수직 수평의 격자구조라는 과도하게 앞당겨진 미래를 살고 있는 젊은이들은 전통시장과 그 인근 풍경을 색다른 문화로 체험한다. 잭슨홍의 전시는 그렇게 추상화된 삶을 각성시키는 가장 구체적인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예술임을 알려준다.        

  

출전; 국립현대미술관 웹진 ART;M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