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로부터의 탈주
이선영(미술평론가)
작품 제작 날짜인듯한 숫자로 건조하게 붙여진 제목의 추상적 그림들은 관객에게 풍부하게 펼쳐진 색채의 배열 외에 관객에게 의미를 전달하는 최소한의 정보도 제공하지 않는다. 그림에서 정보, 의미, 메시지를 읽는 것은 얼마나 비효율적이고 폭력적인가. 그림을 보고 ‘이것은 무엇인가’, ‘무슨 의미인가’에 대해 류현숙의 작품은 딴청을 피운다. 추상미술은 참조대상과 의미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창안되었지만, 그 역시도 (재)영토화를 벗어날 수 없다. 새로운 것의 역사를 다루는 예술의 역사는 예술가가 영원히 도망쳐야 하는 운명을 가질 수밖에 없음을 알려준다. 추상미술에 대한 역사와 의미는 현대미술사 책에 자세히 서술되어 있고, 이러한 의미론적 맥락을 통해 또다시 ‘의미 없는’ 그림들에게 의미를 부여한다. ‘무기교의 기교’라는 말이 있듯이, 무의미에도 장황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현대예술론이나 현대미학 자체가 바로 무의미의 의미에 대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지 않을까.

류현숙, [040415-060815],145.5x336cm, 2015년
추상미술은 교양과 지식으로 무장되어 있지 않은 관객을 극도로 위축시킨다. 이러한 위축은 예술을 앎의 대상으로 영토화 하는 경향에서 비롯된 것이다. 의미라는 하나의 차원으로의 환원은 앎으로서 소유하기라는 전유의 방식을 취한다. 작품을 앎으로서 온전히 소유하려는 욕망은 예술 제도의 비대화와 맞물려 나날이 번성한다. 앎자체가 불필요한 것이 아니라, 알기 전에 작품이 먼저 있어야 하는데, 다른 일로 바빠 정작 작품을 할(또는, 접할) 시간도 태도도 갖추지 않고 앎이 앞서는 것이 문제다. 앎이란 밑도 끝도 없는 예술을 다루는 손쉬운 방식이다. 앎에의 의지의 상당부분은 이해함으로서 소유하고, 소유함으로서 지배할 수 있다는 욕망에 의해 추동된다. 그러나 근대에 개인의 자율과 자유를 소유라는 기준으로 정의해 온 ‘자유주의’ 사회는 그다지 자유롭지 못한 사회로 귀결된 역설이 있다. 띄어쓰기조차 안 된 류현숙의 작품제목은 의미에 대한 작가의 맹렬한 거부감을 표현하는 듯하다.
분절화는 의미를 읽고 이해하기 위한 전제조건이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언어의 분절화는 신호나 코드처럼 즉각적인 소통을 요구한다. 거의 반사작용과도 같은 권력의 자동적 실행은 모든 체계화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바이다. 작가가 요구하는 우회적 의미, 또는 의미의 확장, 더 나아가 의미로부터 자유로울 권리는 심술이나 횡포이기 보다는 지배적 사회와의 의미 있는 길항 작용이다. 울산 문화예술회관에 전시된 작품 [040415]는 시리즈 작품 중의 하나이며, 전시장에는 3개가 나란히 걸려있다. 그림은 손가락만한 일련의 단위에 미세하게 변화하는 색채의 계열을 적용함으로서, 마치 밀도의 차이에 의해 물질이 번져나가는 듯한 모양새다. 그녀에게 작품의 의미는 전달되기 보다는 전염된다. 여기에 있는 의미가 저리로 이동되는 것이 아니라, 밀도와 강도의 차이에 의해 스며든다. 미묘하게 변화하는 색채의 계열은 이러한 전이의 과정을 형상화하는 듯하다.

류현숙, [041515], 145.5x112cm, 캔버스에 아크릴, 2015년.

류현숙, [041710], 117x91cm, 캔버스에 오일, 2010년.
전이는 서서히 그리고 지속적으로 일어난다. 작품 제작날짜로 제목을 붙인 것은 마치 일기처럼 작업이 생활화되었음을 말한다. 여기에서의 일상이란 작업하는 삶으로서의 일상을 말한다. 예술가는 사회로부터 소외될지언정 예술로부터 소외되지 않기 위해 치열한 삶을 산다. 평범한 삶도 힘든 마당에 예술 하는 삶은 최소한 두 배 이상 힘들다. 그래서 작가란 천재까지는 아니어도 남다른 자질과 의지를 요구한다. 관객에게는 암호처럼 다가오는 날짜와 그날의 흔적인 작품에서 작가는 그날의 크고 작은 사건 뿐 아니라 날씨와 기분까지도 다시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분명한 의미로 귀결될 수 있는 서술이나 묘사가 아니라, 명명할 수 없는 하나의 느낌으로 남고자 한다. 류현숙이 형태보다 색채를 중시하는 것에는 회화의 의미에 대한, 그 의미의 소통에 대한 소수자의 의견을 반영한다. 형태에 비해 색채는 쉽게 의미화 되지 않는다. ‘이름붙일 수 있는 색은 색이 아니다’라는 말처럼 말이다.
어느 색채학자에 의하면, 눈에 민감한 에스키모 인에게 화이트는 수 십 가지로 구별될 수 있다. 블루나 블랙 또한 어마어마한 차이의 계열을 가진다. 그러한 차이의 감식은 온전히 화가의 몫이다. 형태-의미에 대해서는 누구나 쉽게 말할 수 있지만, 색채-뉘앙스에 대해서는 함부로 말 못한다. 류현숙이 구사하는 색채는 형태가 아닌 텍스추어로 귀결되며, 색채는 촉감과의 결합을 통해 더 많은 뉘앙스를 가진다. 모노톤이지만 농도를 달리하여 단조로운 느낌을 벗어난다. 작가가 집중하는 색채의 실험은 그 무엇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회화의 영역을 위한 선택이다. 작가는 화면과 고독하게 마주하면서 했던 작품과의 대화가 관객에게도 일어나기를 바란다. 작품은 아는 만큼 보이기보다는, 물어보는 만큼 대답해 줄 것이다. 작가 또한 대답을 내놓는 자이기 보다는 정곡을 찌른 문제제기를 통해 가능한 대답들을 유도하는 자이다. 작가에게는 모든 지식에 대한 통달이 아니라 예감이 있으며, 그 예감을 구체화할 수 있는 나름의 방식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류현숙, [110108], 30.5x30.5x8.8cm,플렉시글래스 위에 지우개, 2008년

류현숙, [070211], 30.5x30.5x8.8cm, 플렉시글래스 위에 지우개, 2011년
화가처럼 색채에 대한 감식안을 가질 수 있는 이는 소수일 것이다. 그러나 예술은 분명 다수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들뢰즈가 말했듯이, 소수자의 예술은 어느 순간 다수가 될 수 있는 잠재성을 가진다. 소통의 고통을 겪던 예술가들의 운명은 어느덧 모두의 문제가 되지 않았는가. 소외를 먼저 겪던 그들의 운명은 다수의 문제가 되지 않았는가. 55x55cm의 정사각형 박스에 색색의 지우개를 꽂아 마치 기하추상처럼 보이게 만든 작품들은 색채에 대한 실험이 놀이적 차원으로 변주된 것이다. 그것은 게임처럼 엄격하게 주어진 공간이 있으며, 선택된 구성요소를 가지고 조합한다. 조합의 수는 다양하며 그 때마다 다른 색채의 배열이 가능할 것이다. 색색의 지우개는 피아노 건반처럼 무수한 선율과 멜로디를 가능케 할 것이다. 또는 색 모래로 그려지는 만다라처럼 구성과 해체를 반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은 거울의 방 같은 장치와 결합하여 무한 반사의 공간을 만들고, 그 안을 들여다보는 관객의 얼굴을 사진으로 찍어 상호작용하는 놀이적 요소를 극대화하기도 했다.
유희적 요소가 없다면 노동보다도 더 강도 높은 작업에 몰입하기 힘들다. 몰입은 육체와 무의식을 포함한 전 요소의 총력전이며, 몰입을 통해서 예술 특유의 도약과 비약이 가능하다. 개념이 있고 그 개념에 따른 매뉴얼로 기계적으로 제작되는 작품들은 놀이보다는 제작과 노동과정에 충실하다. 그러한 과정은 예술적 아이디어에 문화적 확장성을 줄 수는 있지만, 자본이나 기술, 노동력 등 예술 외적인 요소에 많이 의지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최초의 신선한 영감과 놀이의 기쁨은 축소되는 대가를 치루게 된다. 이러한 생산 시스템과 달리, 처음에는 작가 혼자 논다. 그러나 곧 그 전염력에 의해 같이 놀게 한다. 작품 [in and out]은 피씨(pc) 필름 위에 데칼코마니로 작업한 것으로 최소한의 형태마저도 뭉글거리는 색채의 흔적들로 녹아버린 것 같다. 같은 크기의 판을 여러 겹 걸쳐서 설치했기에 2차원은 3차원으로 확장된다. 투명한 플라스틱이라는 바탕 면은 각 면에 구현된 색채의 층위들을 3차원 상에서 직접 섞을 수 있게 해준다.

류현숙, [the arcabe 2], 2014년.

류현숙, [in and out 054], 146x190x120cm, 펫필름 위에 아크릴, 2013년
종이나 캔버스와 달리 뒤에서도 볼 수 있다. 데칼코마니 기법이기에 필름 위의 색채 자체도 즉석에서 조합된다. 선택된 물감을 짜서 접어서 손으로 밀면 무정형적 형태가 나오고 색 역시 우연히 섞여진다. 지우개 작품처럼 판과 재료를 일정하게 정해놓고 하는 게임이며, 작품은 같은 게임원칙이 적용된 시리즈로 남는다. 표면이 미끄럽기 때문에 흔적은 더욱 미묘하다. 블랙, 블루, 그린 등의 물감이 부어진 후 가해진 힘에 의해 뭉개져 만들어진 우연적 형상은 자연이나 풍경을 떠오르게 한다. 초록별 지구나 진경산수 같은 느낌이다. 거기에는 조밀하게 짜여 지는 작품에서 불가능한 자유로운 활주의 세계이자, 모든 경계가 사라지거나 즉석에서 새로운 경계들이 생겨나는 질펀한 놀이의 세계이다. 시작은 작가가 하지만 결과는 완전히 제어될 수 없다. 가필은 없다. 색채의 자동기술이라 할 만 한 류현숙의 작업은 꿈과 무의식의 세계를 향한다.
출전; 울산북구 예술창작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