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놀아야 할 예술

 

이선영(미술평론가)

  

예술가 아닌 사람에게 예술은 노동 이후의 시간에나 누릴 수 있는 사치이다. 소수의 성공한 전업 작가를 제외하곤 대부분의 예술가 역시 하루의 일을 마치고 예술을 향유하거나 창조할 수 있다. 예술가든 아니든 하루의 주요 시간대를 일로 보내고 이후의 시공간이 충만하게 채워지길 기대하긴 힘들다. 그래서 예술은 다수가 참여하는 보편적인 놀이가 아니라, 재능과 운을 겸비한 소수에 의해 명맥이 이어지곤 한다. 그러나 객관적 조건이 그래서든 의지가 약해서든, 결과적으로 현재처럼 예술이 사회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지 못할 때, 낭만주의 시대 풍의 ‘저주받은 예술가’를 한탄하면서 예술가의 특권을 주장하는 것도 설득력 없다. 노동 이외의 시간대를 늘리고 그 시간대가 충만할 수 있도록 사회적 조건을 만드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지만, 정치경제학이 문화예술에, 문화예술이 정치경제학에 신경 쓰기에는 서로가 너무 다른 부류가 된 듯하다. 예술과 사회를 연결 지으려는, 그동안에 시도된 대화는 생산적이었나. 

 

그래도 예술적 삶을 살고자 하는 이들이 세상에 남아있는 이상, 이상을 포기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 이상이 실현되어 지금보다 더 많은 이들이 예술을 즐기거나 창조할 수 있다면, 예술적 질은 물론이고 사회적 가치도 높아질 것이다. 문제는 생산-소비의 그물망으로 더욱 촘촘해진 현대적 삶에서 노동 이후의 이 ‘나머지’ 시간들이 점차 줄어들고 있다는 점이다. 노는 사람 역시 더 좋은 일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일 비슷한 것에 몰두하고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더욱 그렇다. 즉각적인 이해타산만이 남은 세계 속에서 사는데 바쁜 사람의 안중에 예술이 끼어들 자리는 없으며, 소비 활동으로나 소외된 노동의 삶을 달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지불능력 외에, 상상력을 비롯한 어떤 자질도 필요 없는 소비는 곧 이어질 권태를 낳는다. 그래서 현대는 ‘채울 수 없는 욕망’이라는 화두가 그렇게도 공감을 얻는지 모른다. 

 

상업주의는 이 권태를 또 다른 소비로 유인하면서, 부조리한 체계를 유지 확대한다. 문화나 예술 역시도 정보의 형태로 피상적으로 소비한다. 스스로 재미나게 놀기 보다는 누군가 놓는 것을 보는(소비하는) 것이 노는 것이 된다. 한국인들이 하루에 스마트폰을 평균 4시간 넘게 한다는 통계가 얼마 전에 나왔는데, 그렇게 인터페이스에 몰두하는 시간이 놀이하는 시간인지 남들 노는 것을 구경하는 시간인지는 불확실하다. 실재는 사라지고 소문만 무성한 계에서 제도만이 강화된다. 생산이 불황인데 재생산은 호황인 기이한 역전 속에서 예술가들 역시 ‘현대화’되기 위해 노력한다. 예술 또한 ‘합리적’ 선택을 요구받는 것이다. 대중들은 그렇게 ‘살아남은’ ‘예술가’들에게 직업적 특수성 외에 어떤 차이도 느낄 수 없을 것이다. 현대의 관료화된 사회는 재미있게 노는 예술가보다 관료형 예술가들을 생산하려 한다. 그러나 작업보다는 경력관리에 힘쓰는 이들의 존재는 예술이 사회에 행복하게(또는 필연적으로) 속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사회에서의 예술의 소외를 말하고 있을 뿐이다. 

 

소수의 기득권자를 위한 체계는 보다 많은 다수를 주변화 시키고, 공중 보건과 의학의 발달로 인간의 생애는 늘어나고 있으며, 본격적인 사회적 노동에 진입하기 위한 준비기간도 길어졌다. 젊은이고 늙은이고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놀고 있다는 것은 꼭 한탄할 만한 현상도 아니다. 인간의 역사에서 지속적으로 생산력의 혁명이 이루어지고 있는 마당에, 노동=삶이라는 등식으로 누구나 아침부터 저녁까지 녹초가 될 때까지 일을 해야만 한다는 것은 금욕주의에 바탕 한 근대적 노동 윤리를 강요하는 것이다. 기왕에 놀 수밖에 없는 구조, 그 시공간을 문화로 예술로 승화시킬 수는 없을까. 노동의 삶을 위한 준비 및 전 단계를 넘어서, 노동자체도 놀이처럼 행해지는 이상적 단계에서 예술은 자신의 역할과 영역을 따로 주장할 수 없을 것이다. 이때 근대 이후 수없이 외쳐져 왔던 ‘예술은 종언’은 비극이 아니라, 해피엔드로 다가올 것이다. 

 

문화나 예술은 소극적 의미의 휴식—현대에 널리 받아들여지는 놀이의 형식인 휴가는 ‘빈자리(vacance)’, 즉 모든 적극적 사회 활동이 배제된 상태를 말한다—이라기보다는 놀이의 전범이다. 그것은 놀이 규칙의 습득은 물론 그것을 넘어서는 새로운 규칙의 창안까지 포함하기 때문이다. 창안의 단계로의 고양은 놀이 뿐 아니라, 노동의 세계에서도 큰 가치를 가진다. 확립된 질서의 단순한 재현에 불과한 노동 이외의 모든 영역을 놀이로 본다면, 일보다는 놀이가 더 보편적이다. 일 조차도 놀이의 일부—가령 경쟁(agon) 놀이같이—에 해당될 수 있다. 좋은 일자리 또는 일거리는 행복의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은 아님을 생각할 때, 놀이에 중심을 둔 사회-예술적 담론이 필요하다. 놀이는 노동 이후의 부가적인 무엇이 아니라, 노동만큼이나 인간 삶의 한가운데 있다는 주장이 생물학에서도 발견된다. 동물학자 클라이브 브롬홀은 [영원한 어린아이, 인간]에서, 인간이 인간으로 진화한 것은 어린 시절이 점점 더 연장되고, 어린이 같은 속성을 가지게 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 책에 의하면 인간의 유아기, 아동기, 청소년기는 모든 생물들 중에서 가장 길다. 

 

성장기는 인간 수명 중 거의 30퍼센트를 차지한다. 부국과 빈국으로 계층화된 국가별 어린이의 상태를 볼 때, 저발전의 단계일수록 아이에서 어른으로의 진입은 더욱 빨라진다. 필립 아리에스는 [아동의 탄생]에서 아동기가 역사적임을 주장했다. 그러나 보다 긴 시간주기를 다루는 생물학에서 아동기는 다른 동물과 다른 인간의 진화를 이끈 힘으로 간주된다. 브름홀에 의하면 인간에게만 독특하게 나타난다는 모든 특징들은 인류가 유인원 유아와 비슷하게 변화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에 불과하다. 인간이 성숙한 침팬지의 특징을 모두 나타내지 못하도록 발달과정이 중간에서 멈춰버린 것, 즉 인간은 유아화 된 동물인 셈이다. 인간의 조상들은 영원한 유아상태로 퇴행한 이유는 사회적 협동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유아적이고 비공격적인 행동을 평생 동안 유지함으로서 인간의 조상들은 더 성숙한 사촌인 침팬지들보다 훨씬 커다란 규모의 무리를 지어 더 평화로운 삶을 살 수 있었다. 브름홀에 의하면 미성숙한 동물들, 특히 영장류 새끼들에게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바로 호기심과 놀이를 즐기는 본성이다. 

 

우리 조상들은 또한 놀이를 좋아하던 어린 시절의 특징을 성숙한 후에도 잃어버리지 않는 덕분에 기술을 가다듬고 발전시키는데 훨씬 더 많은 시간을 쏟을 수 있었고, 평생 동안 자신들의 창조적인 솜씨를 더욱 발전시킬 수 있었다는 것이다. 놀이하는 정신과 몸에 내재된 유연성은 경직된 구조를 변화시키는 원동력이 된다. 예술가들은 성인이 돼서도 어린이같은 속성을 유지하며, 그 속성으로 이전의 재미없는 규칙을 좀 더 재미있는 규칙으로 변화시키려 한다. 삶은 위험해질 수도 있는 놀이의 세계를 위협하기도 한다. 그래서 놀이의 규칙을 어기는 자보다 더 사악한 행위는 놀이의 판 자체를 엎는 행위라고 말해진다. 어떤 특정한 기능도 없어 보이는 놀이는 보다 빨리 어른이 되는 동물과는 다른 인간의 특징으로 간주된다. 그래서 장 뒤비뇨는 [축제와 문명]에서 ‘무상으로 얻어지는 것 같은 목적 없는 궁극성’의 행위가 없다면 인류는 다시 동물적인 상태로 떨어져 버릴 것’이라고까지 말한다. 

 

놀이의 규칙은 자연의 법칙에 대항할 수 있는 지극히 인간적인 영역인 것이다. 자연과 직접 대면하게 하지 않는 영역의 기원도 아이와 어머니의 관계에서 왔다는 정신분석학적 가설이 있다. 피터 풀러는 [모더니즘 이후의 미학]에서 정신분석학자 도널드 위니코트의 가설을 빌어, 아이와 어머니 사이에 있는 ‘잠재적 공간’에서 놀이, 문화, 예술의 씨앗이 발아한다고 주장한다. 잠재적 공간은 객관세계로부터 도전받지 않는 중간영역이며, 인간에게는 이 영역이 지속적으로 필요하다. 위니코트는 이 중간의 영역을 현실의 원칙이 가하는 쓰라림으로부터 구원받도록 하는 ‘문화적인 체험의 장’이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현실 원칙의 쓰라림은 완화되고 인간의 창조력은 풀어헤쳐 진다. 이 잠재적 영역은 ‘현존하는 현실 내의 다른 현실’(마르쿠제)과 비슷한 성격을 가진다. 

 

심리학자들은 성인, 또는 발전된 문명을 설명하기 위해 유아기나 원시문명에 관심을 둔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어린아이가 가장 애착을 느끼고 몰두하는 것은 놀이이다. 놀고 있는 아이야 말로 자기만의 세계를 창조하고 있다는 면에서, 즉 그 세계의 사물들을 새로운 질서에 맞추어 자신의 취향에 따라 배치하고 있다는 면에서, 마치 예술가처럼 행동한다. 놀이는 유용성을 목적으로 하는 노동과는 달리 그자체가 목적이 된다. 인류학자나 문화사가들도 문화에 있어 놀이가 가지는 보편성을 강조해 왔다. 인간을 호모 사피엔스나 호모 파베르이기 보다는 호모 루덴스라고 정의하는 문화사가 호이징가는 [호모 루덴스]에서 놀이는 한정된 시공간 속에서 행해진다는 것, 여러 규칙에 따르는 일련의 질서 속에서 진행되는 행동이라는 것, 그것은 일상적 세계 한가운데 있는 일시적 세계들이며, 그 자체 속에 목표를 갖고 있는 행위를 완수한다는 것을 말한다. 자연이나 삶과는 구별되는 이렇게 따로 잡아둔 시공간 속에서 무한대의 몰입이 가능해 진다. 

 

‘닫혀지고 보호받고 따로 잡아둔 세계, 즉 순수 공간’(카이유와), 그리고 ‘일정한 규칙이 지켜지고 있는 신성하고 분리된 영역’(호이징가)으로서의 놀이는 일상의 세계의 한복판에 있는 일시적인 세계이다. 카이유와는 [놀이와 인간]에서 놀이 속에서 모든 사태들은 사람들이 그것에 부여하는 중요성만 가질 뿐이며, 사람들은 자신이 동의한 만큼만 연루된다고 본다. 놀이는 위험조차도 선택된 것이다. 놀이란 현실과 거리를 두면서도 세계를 실험해 보는, 그래서 어떤 실제적이고도 치명적인 결과를 피해 가는 것이다. 자율적인 시공간 속의 규칙이라는 놀이의 정의는 예술의 그것과 유사하다. 특히 어떤 사회적, 경제적 기능을 요구하기보다는 자율적인 예술에 대한 담론과 연결된다. 자율적인 예술은 단지 무익한 것이 아니다. 예술의 자율성을 옹호해왔던 이들은 자율성을 통해서 오히려 사회에 기여한다고 강조하곤 한다. 특히 순수를 고집하면서 사회와 고립되었던 모더니즘의 항변이 강했다. 기술적 진보를 이끌었던 과학 역시 자율을 통해서 가능하지 않았나. 물론 과학은 보다 강력한 공통의 언어를 전제하고 사회적 생산망과 연결되어있다는 차이가 있지만 말이다. 

 

따로 잡아둔 시공간 속에서, 규칙을 만들거나 규칙을 변화시키며 노는 아이의 모습과 예술가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중첩된다. 귄터 볼파르트는 [놀이하는 아이, 예술의 신 니이체]에서 놀이와 예술을 신적인 차원으로까지 고양시켰다. 호이징가도 성(聖)-속(俗)-유희라는 서열을 제시한바 있는데, 그것은 성(聖)과 유희가 둘 다 실제적인 삶에 대립된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니이체는 [즐거운 학문]에서 ‘도덕과 무관하게 변함없고 영원한 순진무구 속에서 생성하고 사멸하는 것, 형성하고 파괴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예술가와 아이들만의 특권이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심미적 세계관에서 놀이는 아이로의 후퇴가 아니라, ‘고차원적 형태의 예술’(니이체)가 된다. 그것은 동물적 퇴행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의미 있는 역행인 것이다. 노동하듯이 놀거나 소비 이외의 방식으로는 놀 수 없는 타락한 놀이/예술이 만연하고 있는 즈음, 예술가들은 현실원칙이 아닌 쾌락원칙에 가까운 놀이/예술의 규칙을 창안하는데 몰입함으로서 소외된 삶을 구원해야 할 것이다. 

 

 

 


세비스치앙 살가두, 2009년.  

다큐멘타리 사진작가 세바스치앙 살가두의 2009년 사진 작품. (세바스치앙 살가두 사진전 ‘GENESIS’ 전에 출품) ; 브라질의 토와리이피 마을의 여인들이 열대 잎으로 치장된 집 안에서 열매의 즙으로 몸에 붉은 칠을 하고 있다. 원시부족들의 야생의 삶은 양식상의 관례에 참여함으로서 자연에서 문화로 고양된다.

  

 


제임스 앙소르, [1889년 브뒤셀에 입성하는 그리스도, 유화, 1888년, 폴 게티 미술관

축제나 혁명은 놀이의 규칙이 급격하게 변화하는 시공간이다. 

  

 


신창용, [guitar attack], 2007년

젊은 작가들의 작품은 영화, 음악, 만화, 게임과 친숙하다.

  

출전; 국립현대미술관 웹진 ART:M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