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에 도달하기 위한 사다리 

거짓말의 거짓말: 사진에 관하여 전 (4.23—6.21, 토탈미술관)

  

이선영(미술평론가)

  

18명의 작가가 사진 및 사진에 기반 한 조형 예술작품을 보여주는 '거짓말의 거짓말: 사진에 관하여' 전은 사실을 담는 것으로 알려진 사진이 거짓말을 하는지를 묻는 전시이다. 사진 뿐 아니라 영상, 설치 등으로 다양하게 구현된 작품들은 대체로 사진이 거짓말을 한다고 말한다. '거짓말의 거짓말'이라는 전시부제는 부정에 부정을 거쳐, 거짓이 진실임을 미리 말해주는 듯하다. ‘거짓말의 거짓말’이라는 전시제목은 ‘나는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다’라는, 참과 거짓이 모호한 진술처럼, ‘거짓말쟁이의 역설(liar paradox)’을 생각나게 하는 제목이다. 스펙터클의 사회가 펼쳐진 후, 이미지의 조작 술이 정치적, 경제적 전략을 넘어서 거의 오락화 된 차원에서 이러한 질문은 다소간 싱거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전시의 작품들은 사진을 매개로 하여 현실 및 현실을 구성하는 (예술적)언어의 역할은 무엇인가, 이에 따라 인간, 사물, 역사 등등은 어떻게 해석 될 수 있는가에 대한, 간단치 않은 질문으로 이어간다. 그러한 질문들을 단순화시키면 결국 리얼리즘의 문제라고 할 수 있겠다. 

  

피사체와 그림자처럼 얽혀있는 사진은 다른 조형예술과 달리, 과학적 관찰과 증명력을 내재한 리얼리즘의 모델이라 할 만한 형식이다. 스마트 폰이 일반화된 이후 사진은 더 흔해졌는데, 거울처럼 현실을 되비추는 사진은 일상을 현실과 중첩시킨다. 퍼트리샤 워는 [메타 픽션]에서 대부분의 사람에게 일상세계란 단순히 ‘현실’ 세계를 의미하며, 리얼리즘은 이러한 일상세계 속의 계속이거나 확장이라고 본다. 질서정연한 리얼리티는 존재의 과학적 법칙에 부합되는 형식들이다. 예술과 기술 모두에 걸쳐있으며, 어느 매체보다도 빠르고 간편하며 보편적인 사진은 이러한 상식을 고정시키는데 큰 역할을 해왔다. 현대예술에서는 이미 극복된 것으로 믿어진 19세기적인 리얼리즘의 망령이 되살아나는 것도 갈수록 첨단화되는 사진기술과 관련되고 있음은 역설적이다. 그러나 우리들이 선조적으로 흐르는 사건들의 연속으로 체험하는 것에는 도처에 틈과 간극이 있다. 이 틈과 간극을 상식적 세계관은 무시하지만, 예술은 이 틈과 간극을 주시하면서 이를 더욱 벌리고, 이를 통해 당연시된 '현실'을 상대화한다. 

   

사진은 현실의 연속성만큼이나 그 불연속성을 드러낸다. 현실과 그것을 반영하는 예술은 차이가 있다. 예술은 언어적 관습의 문제이다. 언어는 그것이 관습인 한 결코 투명하지 않다. 리얼리즘에서는 언어의 투명성이 전제되지만, 또 다른 방식, 즉 모더니즘에서는 언어의 투명성 보다는 자기지시성이 중시된다. 그러나 이러한 자기지시성은 예술만의 해방구이자 고립의 증후이다. 예술의 가능성이자 막다른 절벽이다. 현실은 그대로 베껴낼 수 있다고 믿어지지만, 사진을 포함한 모든 예술은 구성이다. 현실은 올가미를 놓지 않고서는 결코 포획되지 않는 것이다. 어떤 소설가나 화가가 현실을 사진처럼 묘사했을 때 사람들은 그 기술이나 노고에 찬탄하곤 한다. 반대로 그것은 현실의 복사에 불과하기에 무가치하다고 평가된다. 그러나 예술은 다른 무엇도 아닌 현실 그자체가 되고자 하며, 현실과 가장 근접해지고자 할 때조차 현실 그자체가 아닌 현실에 대한 무엇일 수밖에 없다. 예술은 현실과 유사한 또 다른 현실이며, 이러한 메타적 차원을 통해 다양한 형식적 유희와 의미 있는 메시지가 가능해진다. 

  

거시공간에서 미시공간까지

 




황규태_uranology(천상열차분야지도),280x250cm,Latex print,2005

 

김도균_w.ttm-11 90 x 70 cm C-print Mounted on Plexiglas iron framed 2015




먼저 황규태, 김도균, 김태동, 하태범의 작품은 사진이 미시공간부터 거시공간까지 아우를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매체임을 보여준다. 사진은 차원의 급격한 변주를 통해 현실의 환상적 이면을 들춰낸다. 또는 환상을 현실처럼 그럴듯하게 대면시킨다. [천상열차 분야지도]라는 낯선 제목을 가지는 황규태의 작품은 검은 우주적 배경 위에 황금색의 둥근 환을 배치했다. 마치 전 우주를 관장하는 순환의 원리를 표현하는 듯, 다이얼을 돌리는 금고처럼 숫자를 잘 맞추면 비밀의 문이 스르르 열릴 것 같은 환상적 비전이다. 김도균은 건축의 일부를 찍은 단편들을 전시장 곳곳에 걸어놓았다. 시멘트 바닥에 하얀 벽면을 가지는 구석(모퉁이)들로, 전형적인 전시공간을 떠올리는 그러한 구조는 전시가 열리는 장소와 비슷하다. 그것은 현실공간의 일부이겠지만, 미시적이기에 정확하게 이 전시 장소를 찍은 것인지 확인하기 힘들다. 유기적 관련성을 잃어버린 부분 사진은 현실성 역시 잃어버리는 것이다. 

  

김태동은 도시의 거대한 구조물과 그에 비교해서 그 위상이 낮아 보이는 인간을 대조하여, 마치 걸리버 여행기에 나오는 환상적인 세계 같다. 작가는 인간들을 구조의 일부로 만들거나 구조 바깥으로 몰아내는 보이지 않는 구조를 보이는 구조를 통해 비유했다. 그 보이는/보이지 않는 구조들 역시 인간이 만들었겠지만, 사진은 구조의 단면을 공시적으로 제시하면서 그것이 생겨나고 사라질 역사적 문맥을 제거하고, 그렇게 함으로서 주체의 위상 또한 희미하게 한다. 하태범의 작품은 저녁 뉴스에 자주 나오는 지구촌 곳곳의 재난 현장을 찍은 사진처럼 어수선하다. 그러나 색채가 제거되어 있는 사건 현장은 장면을 비현실적으로 보이게 한다. 하태범의 작품은 색채뿐 아니라 소리, 움직임, 사건의 주인공들 모두 생략된 창백한 세트이다. 그것은 현대사회에서 어디선가 일어난 현실로서의 재난이 뉴스라는 정보로 소비되는 방식이기도 하다. 그의 작품은 피 튀기는 현실을 이렇게 감축하는 것이 폭력적인 현실에 둔감하게 만들고 폭력을 지속, 확대시킴을 알려준다.    

 




  하태범_New York 911-1_120x180_pigmentprint and facemount_2009

 

 

인간과 사물

 

인물이 등장하는 권오상, 김진희, 한경은의 작품은 세계 속 인간의 모습을 예시한다. 그들 작품 속의 인간은 진짜 같고 내면의 진실을 토로하고 있기도 하며, 무엇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현실인 몸뚱이를 가지지만, 곳곳에서 균열을 드러낸다. 퍼트리샤 워는 [메타픽션]에서  리얼리티의 조건으로 ‘권위를 가진 전지적 작가, 등장인물의 행위와 그들의 존재 양상 사이의 이성적 관계, 표면적인 묘사와 심층 사이의 인과관계’ 등에 부합되는 형식들을 제시한 바 있다. 그러나 이들의 사진에 등장하는 인물에서 안과 겉 사이의 괴리는 심각하다. 권오상은 스티로폼 같은 가벼운 재료로 형태를 조각하고 사진을 그 표면에 덧입히는 ‘데오도란트 타입(Deo-dorant Type)’ 시리즈를 선보였다. 작업실에서 직접 찍거나 구글링 (Googling)을 통해 수집된 사진들이 재료이다. 조각이란 것이 원래 그렇지만, 3차원을 짜깁기 식으로 뒤덮는 2차원의 평면은 속이 텅텅 비어있는 현실, 또는 표면으로서의 현실을 강조한다. 인물 위에 문장을 배치한 김진희의 초상사진들은 말과 인물의 어울림, 또는 어긋남을 통해 내면과 외면 사이의 틈을 암시한다. 데카르트를 위시하여 근대를 개시했던 철학자들이 자신했던 존재와 사고 사이의 일치는 사라진다. 이러한 일치를 교란한 것이 무의식과 몸의 발견, 또는 복귀였다. 벤야민과 바르트는 사진에 내재된 무의식과 몸의 힘을 일깨운 바 있다. 실제가 아니라 사진과 함께하는 인물을 찍은 한경은의 작품은 관객이 눈속임을 알아채려는 즈음 창속에 또 하나의 창이 있음을 예시한다. 그들은 관객 앞에 던져졌을 뿐 서사를 이끄는 주인공으로서의 면모는 없다. 작가 역시 그러한 주인공을 낳는 전능한 창조주 같은 역할을 포기한다. 

  

박진영, 노순택, 구본창, 문형민은 고정시키기 쉬워 무엇보다도 확실해 보이는 사물을 전면에 내세운다. 인간 눈이 일일이 그 세부를 포착하기에는 너무나 자세하고 정확하게 찍혀 있고 크게 확대되어 걸려있는 사진은 사물과 사진을 등치시키는 동어 반복적 어법을 구사한다. 야구 글러브들을 찍은 사진에 [야구 글러브들]이란 제목을, 사진기들을 찍은 사진에 [카메라들]이라는 제목을 붙이 박진영의 작품이 그렇다. 파이프를 그린 그림에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문구를 써넣은 르네 마그리트가 말과 사물 사이에 드리워진 거대한 심연을 문제 삼았다면, 사진가는 화가 보다 더 자신 있게 현실과 그 반영을 등치시킨다. 그것은 모든 것이 하나의 차원으로 수렴되는 시뮬라크르의 세계에서 사진이 맡은 주요한 역할을 상기시킨다. 미끄러져 전복된 듯한 차의 바닥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노순택의 작품 제목은 [전복된 차]가 아니라, [잃어버린 보온병을 찾아서]이다. 몇이 죽었을지도 모를 사고현장에서 잃어버린 보온병이나 찾는 것은 썰렁한 유머감각이다. 핵심이 아니라 부차적인 것에만 관심을 쏟는 것은 리얼리즘이 아니라 자연주의적인 태도이다. 

    

권오상_Metabo,2009,C-print,mixed media,130x80x105cm

 

구본창_soap 03, 80x66cm,Archival Pigment Print Edition of 10, 2004






리얼리즘의 총체적 비전이 사라졌다고 말해지는 시대에, 사진은 조각난 현실들을 그러모으는 수단이 될 수 있다. 그것은 사진이 먼저 현실을 조각조각 해체했기 때문이다. 통상적으로는 잘 볼 수 없는 현실의 이면을 제시하면서도 피사체를 세 토막으로 잘라 놓는 구도는 상식적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증하려는 경향이 있는 관성적 사고에 대한 문제제기이다. 구본창은 다 닳아빠진 하찮은 소재를 사진으로 담아낸다. 멀리서 보면 한국의 추상 화가들이 빈 화면에 즐겨 찍던 화룡점정 같은 붓자국처럼 보이기도 한다. 백자를 찍었던 그의 또 다른 시리즈를 생각하면, 이 비누 쪼가리들은 거의 백자 같은 위상을 가진다. 하기야 진지한 과학자를 닮은 예술가에게 개미를 연구하든 매미를 연구하든 그 방법은 달라질 수 없는 것이다. 구본창의 작품은 보잘 것 없는 사물이 기념비적인 위상을 가질 수 있는 사진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문형민은 여러 종류의 약이 질서 있게 배열된 진열장에서 도시의 모습을 본다. 우리나라 약국들을 보면 유리창 전면에 약, 약, 약...이라고 큰 글자로 반복적으로 써 있는 것은 흔히 발견할 수 있다. 간판 글씨에 발견될 수 있는 과도한 현실이 환각적 느낌을 자아낸다면, 문형민은 반대로 한다. 진열된 상품에서 글자를 모조리 지움으로서 어떤 기능을 지시하는 또는 광고하는 특정 상품들은 그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 알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사물로 변신한다. [unknown city]라 붙여진 장면들은 병든 도시를 보여주는 것일까, 아니면 위생학적으로 재처리된 도시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일까.         

  

환상과 서사

 

정연두, 장보윤, 원성원, 윤병주의 작품은 사진으로부터 출발할 수 있는 환상적 가능성에 적극적이다. 정연두는 작품 [drive in theater]에서 지하전시장에 실제 택시를 세워놓았다. 관객이 운전석에 올라타면 주변의 여러 장치가 작동하면서 도시를 드라이브하는 것 같은 환상을 제공한다. 차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사진들이 움직이면서 이동의 환영을 연출한다. 차창 밖으로 멋진 풍경이 스쳐지나가며, 차 안에서 신기해하는 관객의 모습이 전면에 비춘다. 그의 작품은 자극의 원인과 그 결과가 옆과 앞에서 동시에 상연되는 극장이다. 총체적 가상으로 완성될 미래 사회는 굳이 실제로 움직일 필요가 없을지 모른다. 군사기술로부터 발전된 가상현실의 모델은 어떤 대상에 대해 빠르게 접근하는 방식을 가지고 있는데, 운전자의 시야에 보이는 광경이 그와 유사하다. 거대한 장난감같이 보이는 그의 작품은 어떤 시공간 축을 따라 전개되는 가상적 체험을 야기한다. 여기에서 사진은 대상에 접근하는 자동차와도 같은 위상을 가진다. 그의 자동차는 사진과 마찬가지로 환상여행을 이끄는 것이다.

 




정연두_Drive in Theater Installation, 2015

 




장보윤_천년고도35 A Thousands Years 35 Archival digital C print 80x53cm 2012

 

장보윤의 작품에도 택시가 나온다. 지난 70-80년대 수학여행이나 신혼여행지로 줄기차게 각광받았던 경주에서 들뜬 여행자들을 실어 나르며 사진사 역할까지 했던 이들이 바로 택시 기사다. 그렇게 찍혀진 기념사진, 그런 사진을 찍으며 사업의 전성기를 보냈을 택시기사의 인터뷰 등이 전시되어 있다. 그러나 작업의 출발이 되고 작가에게 영감을 준 그 사진들은 버려진 것이다. 그 소중한 추억의 사진들이 버려진 것은 해외여행의 자유화로 '천년고도' 경주가 더 이상 가보고 싶은 여행지가 아니게 된 즈음이다. 사진이 퇴색하듯이 기억도 퇴색한다. 그것은 원래의 참조 대상의 퇴색과 함께 한다. 그림자나 분신은 원본과 공동운명체인 것이다. 현재의 가상현실 기술은 지난 시대의 퇴색한 필름들도 총천연색으로 복구하기도 한다. 장보윤의 작품에서 여행자들의 로망과 운전사의 직업의식이 담긴 버려진 사진들은 예술가에게 다시 발견되어 텍스트들과 함께 재맥락화 된다. 한때 누군가의 추억이었던 것은 아카이브가 되어 또 다른 맥락으로 소비된다. 

  

라이트 박스에 담겨 어두운 전시장에서 환하게 밝혀진 원성원의 사진은 꿈의 공간을 연출한다. 각 개인마다 이상적인 공간이 있는데, 작가는 사진 속에서 숲속의 나무그늘 아래서 시원한 음료수를 마시며 쉬고 있고, 그 옆 사진에서 누군가는 푸른 바다 속에서 스킨 스쿠버를 즐긴다. 원성원의 작품은 억압되고 결핍된 욕망을 대리성취 할 수 있는 사진의 기능이 발휘된다. 그 언어를 최대한 발전시킨 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광고이다. 원성원이 선택한 라이트박스라는 장치는 광고에서 자주 활용되곤 한다. 그것은 밝게 연출된 현실을 더욱 빛나게 하기 때문이다. 귀퉁이가 뚫린 벽으로 들어갈 수 있는 동굴 같은 공간 속에 병풍처럼 설치된 윤병주의 작품 앞에 서면, 주변에서 들려오는 잘 알아들을 수 없는 어지러운 통신 음과 함께 외계의 행성에 온 듯 한 낯선 느낌이 엄습한다. 산등성이에 일정 간격으로 기계들이 박혀있는 붉은 풍경은 제목처럼 화성(Hwaseong) 탐사이다. 그런데 화성은 관객이 상상할 수 있는 화성(Mars,火星)이 아니라, 작가가 살기도 했던 경기도 화성(華城)을 기록한 풍경이다. 그의 작품에서는 난개발로 이어지는 (재)개발이 사람이 살수 없는 척박한 외계의 풍경과 겹쳐진다. 작가는 사실적 광경에서 환상을 본다.     

     




원성원_Dreamroom-Seoungwon,lambdaprint,160x100cm,2003

 




윤병주 설치전경

 

정희승, 백승우, 권순관의 작품은 한 장으로 똑 떨어지는 사진이 가질 수 있는 서사의 가능성을 예시한다. 장면들 간의 인과관계를 파악하기 힘들게 배치된 정희승의 작품은 사진들 자체가 그런 속성을 가지고 있음을 말한다. 작가는 테이블 위에 여기저기서 찍거나 발췌한 사진들을 영화 필름처럼 긴 두루마리로 현상했다. [unfinished sentence]라는 작품 제목처럼, 조합의 방식에 따른 이야기의 전개는 무한대로 열려있다. 총으로 뭔가 겨냥하는 남자나 쌍안경으로 뭔가를 바라보는 남자를 포착한 듯한 백승우의 작품은 카메라가 훔쳐보기부터 공격적 주시에 이르는 사진의 역할을 보여준다. 그의 사진은 여기에 또한번의 포획과 엿보기를 추가한다. 이때 사진은 보기에 대한 보기라는 메타적 차원을 획득한다. 차원의 변주는 현실에서 발췌한 요소들 간의 문맥을 놀이처럼 재조정하면서 다양한 이야기를 이끌어낼 수 있다. 퍼트리샤 워는 [메타픽션]에서 모든 놀이와 픽션이 한 문맥으로부터 다른 문맥으로의 전이를 설명하고 문맥들과 의미들의 계층을 수립하는 메타 단계를 요구한다고 본다. 사진 역시 놀이의 형식으로 다층의 리얼리티를 창조할 수 있다. 

  




백승우_KBDBs choice, 30x218cm, Digital pigment print, 2015

 




권순관_어둠의 계곡(The valley of darkness_Digital),C-Print,225X180,2014,The Description without Place

 

[메타픽션]에 의하면, 픽션과 놀이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중요한 자질은 메시지로서의 기호들의 집합(언어적이든 비언어적이든)과 문맥 또는 메시지의 틀 사이의 관계를 교묘하게 조작함으로서 하나의 대안적인 리얼리티를 구성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사진 역시 일상 문맥으로부터 해방되어 유희적으로 재 맥락화 될 수 있다. 이러한 문맥의 놀이에 반드시 여러 장의 사진들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분명한 것을 명증하게 찍은 한 장의 사진 자체가 모호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액자가 끼워진 어두운 숲 사진 한 장을 걸어놓은 권순관의 작품 [어둠의 계곡]은 가뜩이나 어두컴컴한 사진에다 유리 액자까지 가세한다. 어둠과 반사가 합세하여 시야를 방해하는 그의 작품은, 정교하게 재현되었지만 평범한 풀숲사진에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읽어야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맥락이 감춰진 이 한 장의 사진에서 관객은 눈뜬장님이 될 수밖에 없다. 그에게 현실은 출발지점이 아니라, 도착지점에 있다. 현실은 자명한 것이 아니라, 어떤 매개나 맥락을 통해서 도달해야 하는 미지의 장으로 물러나는 것이다. 허구는 현실에 도달하는 사다리이다. 현실에 가닿을 수 있는 그 사다리는 인공적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때때로 그 사다리는 치워질 수도 있다. 현실에 가닿기 위한 여정에서 인과적 연속성의 논리만큼이나 도약과 비약은 빈번하게 일어난다. 현실이 그렇고 사진이 그렇다. 그의 작품은 사진이 진실도 거짓도 아닌, 그 사이를 수도 없이 넘나드는 게임임을 보여준다.  

      

출전; 국립현대미술관 웹진 ART:M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