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가지를 차고 날아오르는 새 한 마리가 수풀 사이로 하나의 선을 긋는다. 그로 인해 다시 익숙했던 모든 것들은 쉽게 눈에 설다. 하루의 틈을 비집고 다가오는 형용할 수 없는 느낌들이 여러 기억들과 섞이고, 그것은팔레트에서혼색이되고때로는누구의 미소를 닮은 엷은 단색이 된다. 캔버스는 이렇게 다시 다른 세계를 열며 그 하얀색을 포기한다. 그 하얀 빛은 이미 정오의 하늘에 깔리고 쳐다 볼 수 없는 높이에서 사라진다. 그리고 몇 시간이 지났을까, 이젤 앞에 머무는 햇빛의 무게에 오후가 가까이 있음을 알아채고, 작은 휴식을 찾아 의자에서 일어나다 문득 거울을 통해 본 스스로의 모습은 새로 시작한 그림만큼이나 눈에 익숙하지 않다. 캔버스 위를 스치는 붓질 소리만 스튜디오에 남아 있을 때 이미 하늘에 떠있는 구름은 그 색을 달리한다.

우연히 스튜디오 바닥에 떨어져 있는 붓 한 자루를 집어 들고 창가에 걸터 앉아 본다. 투명한 창유리에 생각 없이 빈 붓질을 몇 번 하다 그냥 먼 곳을 쳐다본다. 가끔은 그냥 먼 곳을 보는 것 만으로도 마음이 좋다. 작업실 한쪽 편 벽면에 걸려 있는 자그마한 빈 캔버스가 눈에 든다. 비어있는 평면, 상상의 터이기에 때로는 그것도 아름답다. 꿈이 없는 나라, 어느 때는 그런 나라에 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