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으면서도 없는, 없으면서도 있는 풍경
이선영(미술평론가)
올해 초 이랜드 스페이스에서 열린 ‘위대한 껍데기’(2015) 전에서 유럽의 유명한 성당들을 그렸던 이여운은 갤러리 구에서 열리는 ‘원더랜드’ 전에서 우리나라의 절을 그린다. 성당이나 절은 단순히 소재라고 하기에는 강력한 상징을 가진 존재지만, 작가가 소재의 상징적 의미를 깊이 파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소재주의가 될 것이며, 그림이 아니고서도 또 작가 이여운이 아니고서도 얼마든지 자체적으로 존재 의미를 가질 것이다. 한편으로 소재에 묻어가기 싫다면서 온갖 지엽단말적인 것에 매몰되는 경향도 있다. 중심의 이동, 또는 해체라는 측면에서 사소함도 중요할 수 있겠지만, 사소함을 위한 사소함이 정말 예술을 사소하게 만들 수도 있다. ‘예술을 위한 예술’이 예술을 정말 위대하게 하기보다 지엽적인 것으로 만들었듯이 말이다. 이러한 사소함, 지엽성 같은 부분들은 대중들이 현대미술에 대해 가장 의구심을 가지는 대목일 것이다.

동학사 대웅전, 65.2x100cm, 캔버스천에 수묵, 2015
그 중간은 없을까. 보편적 소재이면서도 나만의 방식으로 그릴 수 있는 것, 나만의 방식에 의해 그 소재의 중심적 의미가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 성당이나 절을 그린 이여운의 최근 작품들에는 그러한 지점이 있다. 그녀의 작업 태도나 방식은 특이하다. 작가는 한 시대 또는 지역의 총체적인 상징이 구현되어 있는 소우주라고 할 수 있는 기념비적인 건축물의 외관에 집중한다. ‘껍데기’라는 단어가 강조했던 바가 그것이다. 소재가 되는 건축의 상징과 의미를 완전히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상징이든 의미든 강한 존재감을 주는 형태--작가는 성당 그림에 ‘위엄의 형태’라는 제목들을 붙였다--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자기 눈만 믿고 가겠다는 것인데, 그것은 어찌 보면 가장 화가다운 생각이다. 기성의 그림과 완전히 다른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화가 모네가 꿈꾸었던 것처럼, 맹인이었던 이가 갑자기 개안(開眼) 한 듯 주위의 모든 것을 처음 보듯이 생경하게 그려보고 싶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어떤 전제도 없는 순수한 시각은 있을 수 없기에, 그것은 소소한 욕망이 아니라 과도한 야망일 것이다. 우리 눈앞에는 먼저 와있는 도식들로 가득하다. 이러한 도식이 없다면, 또는 도식을 배울 수 없다면 인간은 자연에 머물 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상징적 우주에 태어난 인간의 운명이다. 물론 화가도 기존의 도식을 흡수하고 새로운 도식을 만드는 이에 속한다. 고정된 시각적 도식을 걷어내고 다른 어떤 것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그림의 가능성을 탐색하고 그림으로 가능한 독특한 이질성을 찾아내는 것이 화가의 과제인 것이다. 전통을 비롯한 모든 무게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던 작가는 익숙함과 낯설음이 교차하는 독특한 풍경을 만들었다. 이번 전시의 ‘원더랜드’라는 부제는 양감정의 교차지점을 강조한다. 절은 동양인에게 친숙하면서도 낯선 영역에 속해있다. 절대적 타자의 영역인 성스러움은 낯설게 다가온다. 공간을 통해 체험되는 성스러움은 소소한 신기함부터 깊은 영혼의 충격까지 다양한 강도가 있을 수 있다.

신흥사 극락보전, 65.2x100cm, 캔버스천에 수묵, 2015
그러나 그것이 세속적 일상과는 차이가 있음은 분명하다. 세계의 모든 종교는 성/속의 구별에 의지하며, 그것은 인간 사회의 초석적 질서를 만들었다. 사찰은 건축의 배치 하나하나가 성스러움의 원리에 의해 구축된다. 세속(낯익음)과 성스러움(낯섦)의 구별에 가세하는 것은, 우리처럼 전통이 단절된 나라의 특수한 상황이다. 이번 전시의 절 그림도 성당 그림처럼 건축의 전면에 집중되어 있기는 하지만 차이가 있다. 작가에 의하면 성당은 건물 하나로도 자족적이지만, 절은 산세나 가람의 배치 등 많은 요소가 작용한다. 정면구도 하나로만은 뭔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건축 전면은 한눈에 파악되는 조형미로 여전히 자리하지만, 이 전시에는 한 화면에 여러 시점이 복합되어 있는 중층적 구조의 그림들도 포함되어 있다. 중층적으로 산재하는 이미지는 각도에 따라 달라지는 이미지가 서로 보충한다. 작품 제목이 절 이름이라서, 관객들은 불교도도 아닌 작가가 얼마나 많은 절을 찾아다녔는지 알 수 있다.
기본형식은 비슷하지만 미묘한 차이를 가지는 절의 외관이 마치 초상화처럼 화면 한 가운데 자리한다. 그 주변은 텅 비어 있다. 형태라는 알맹이에만 집중함으로서 공간성이 강조되고 시간성은 생략된다. 시간성은 겹쳐진 그림들 속에 그 흔적으로 남아있다. 이여운은 작업 초창기에 도시풍경에서 시작했지만 작품의 설명적 요소를 배제하면서 형태에만 집중하게 되었다. 최근작품은 맞딱뜨린 한 장면만으로도 힘 있는 구조, 기(氣)가 느껴지는 구조에 대한 관심이 있다. 그래서 참조대상에 대한 큰 변형은 없다. 그러나 있는 그대로 따라가면서 생겨나는 변화는 남아있다. 서사의 가능성을 줄만한 인간이나 풍경적 요소는 배제한다. 건축이 등장하면서도 풍경의 요소는 삭제되어 있기에, 형태들은 마치 무중력적 공간에 둥 떠 있는 듯 하다. 건축 설계도면 같은 명확함을 고수하는 것도 아니다. 형태 묘사에 집중되어 있기에 선적 요소가 두드러지지만, 형태를 결정짓는 하나의 선은 없다.

봉은사 지장전, 130x2000cm, 캔버스천에 수묵, 2014

월정사 수광전, 97x130cm, 캔버스천에 수묵, 2014
그런 선만 있다면 회화라기보다는 과학적 일러스트레이션이라 해야 할 것이다. 과학과 비슷한 부분이 있다면 여백으로 남아있는 중성적인 공간이다. 그것은 건축이 놓인 현실적 맥락을 제거하고, 자신 있게/또는 없게 그어진 수많은 선의 흔적들을 감추지 않고 낱낱이 보여준다. 수년간 작품 소재를 계속 바꿔왔기 때문에 안보고도 그을 수 있을 만한 자동적인 선을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이여운의 그림에는 있음직함, 또는 자리 잡음을 향한 수많은 흔적이 있다. 공간 속에 남은 시간의 흔적이다. 이여운의 작품에서 시간은 공간 속에 포함되어 있다. 건축, 특히 오래된 건축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짧은 시간을 살고 사라지는 인간의 흔적을 담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동양화 하면 떠오르는 일필휘지가 아니라, 흐린 먹으로 드로잉 하듯이 진하게 쌓는 방식으로 작업이 진행된다. 이러한 자연스러운 축적에 의해 그림에는 ‘잘못 그린’ 선들도 남아있다.
반응이 즉각 즉각 오는 종이가 아니라, 아교를 바른 캔버스 위에 그리는 점도 전통적인 동양화와는 다른 방식이다. 바탕에서 스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위로 쌓이는 것은 서양화(유화)와 비슷하지만, 모필에 묻힌 동양화 물감은 두껍지 않아서 얇게 계속 올려 쌓는 방식으로 깊이 감을 준다. 얇으면서도 깊이 감이 있는 화면은 묵직한 소재가 가지는 존재감을 살린다. 세필로 그리는 선은 숨을 곳이 없다. 그리는 대상의 구조를 명확히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작가는 건물의 얼굴을 초상화처럼 그린다. 건축은 초창기 작업부터 계속 등장해 왔었지만, 한국 건축에 대한 관심이 생긴 것은 2011년 전주 한옥마을에서 레지던시를 하면서 부터다. 한옥은 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선으로 채워진 틀이 캔버스 위에 서 있다. 관객 앞에 서있는 절 그림은 확실하면서도 비현실적이다. 어릴 때부터 그림을 그려, 눈과 손이 바로 연동되는 숙련된 화가가 그린 대상은 현실로부터 왔지만, 현실과 나란히 존재하는 세계에 그렇게 서 있다.

금산사 미륵전, 130x162cm, 캔버스천에 수묵, 2014
작품 [월정사 수광전], [봉은사 지장전], [금산사 미륵전]에는 마치 티 없이 맑은 수면에 떠있는 듯 아래로 반영상이 드리워져 있다. 작품 [전등사 극락보전]처럼 반영상이 없는 경우에는 마치 그림자 없는 영혼처럼 그나마의 현실적 맥락이 완전히 사라진다. 정면을 넘어 대상을 종합적으로 파악하고 싶은 작가의 욕망은 여러 시점이 복합된 채색화에서 발견 된다. 아래에서 올려다본 단청, 추녀와 용머리는 부분적 시점이지만, 부분이라는 생각을 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이미지들로 바글거린다. 그것은 도상들의 상징적 의미를 시시콜콜하게 모르는 이들에게도 충만한 자족적 소우주로 다가온다. 이여운의 작품에는 공기 속에 잠겨있는 색 덩어리로서의 참조대상을 선적 언어로 일일이 번역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기이함이 있다. 절 그림에서 선에서 선으로의 이동은 성당의 부조적 표면을 선으로 옮기는 작업과는 다른 어려움을 주었다. 보통사람은 실제와 그림을 일치시키기도 하지만, 그림을 그리는 사람에게 양자는 혼동될 수 없다. 현실에서 가상이라는 차원으로의 변주에는 많은 후속 과정이 따르기 마련이다.
성당그림도 마찬가지이다. 성당의 전면을 완벽하게 전사해놓은 듯한 그림은 여러 시점에서 관찰되거나 찍은 사진을 조합하여 만든 상상의 풍경이다. 전체적인 시야가 확보될 수 없는 위치에 있는 성당도 이여운의 작품에서는 쫙 펴져 있는 정면으로 재탄생될 수 있었다. 건물 정면은 얼굴과도 같은 존재지만, 실제로는 부재할 수도 있는 장면이다. 그것은 실제 대상에 충실한 듯 매우 꼼꼼하지만, 그것은 실제의 전사이기 보다는 있으면서도 없는, 없으면서도 있는 묘한 풍경이다. 그것은 단순히 시야확보의 문제라기보다는 종교적 건축의 실재감 자체가 허구를 바탕으로 구축된 것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성당이든 절이든 그것이 창건되었을 때는 세계의 중심으로 설정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모든 기념비들의 조건이다. 성/속의 위계질서에 바탕 해서 구축된 종교적 건물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문화 상대론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동서양의 대표적인 건축의 경우 뿐 아니라, 세상에 존재했던 수많은 문명들은 각자 신성시했던 중심들이 있었다.

추녀와 용머리, 58×73cm, 한지에 수묵, 2015
하나의 중심이 아니라, 각자의 중심으로 구조화된 질서일 뿐이다. 명백한 물리적 실재감으로 서 있는 눈앞의 기념비들은 상상적 차원에서만 중심의 상징이 될 수 있다. 실재와 부재의 역설적 관계는 평균의 개념과도 비교될 수 있다. 수학적 통계에 따라 평균은 정량적으로 산출될 수 있지만, 정확히 그 평균에 딱 들어맞는 실제를 찾기는 힘들다. 발품을 팔아 유럽과 한국의 수많은 종교건물을 찾아다니면서 작가는 반복만큼이나 차이를 감지했을 것이다. 반복과 차이는 삶과 예술 모두에 관철되는 진리로 나타난다. 하나의 중심이 아니라, 조금씩 변경되는 수많은 중심을 도는 원환을 통해 작가는 원본의 재현이 아닌, 수많은 시뮬라크르를 제시한다. 복사에 복사를 거듭하면서 변형은 의도치 않게 일어난다. 물 흐르는 듯한 전형적인 동양화의 자연스러움과 거리가 먼 이여운의 작품은 또 다른 차원에서 자연의 법칙을 충실히 따른다. 그런데 자연의 법칙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통계적일 뿐이라는 것이 현대 물리학이나 생물학에서 강조되고 있다.
필립 볼은 [물리학으로 보는 사회-임계질량에서 이어지는 사건들]에서, 통계는 확률의 개념을 사용한다고 지적한다. 풍선이 팽팽하게 부푼 상태로 있는 것은 입자들이 그런 상태로 배열될 가능성이 다른 경우보다 압도적으로 크기 때문이다. 물에 떨어진 잉크 방울이 확산되어 번지는 것은, 잉크 입자들이 함께 움직여서 잉크방울이 모여드는 것보다는 무작위적으로 움직여서 모든 방향으로 퍼져나가는 가능성이 훨씬 크기 때문이다. 생물학적 진화론에서 자연 선택의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물리학이나 생물학 뿐 아니라 사회현상도 통계적이다. [물리학으로 보는 사회]에 의하면, ‘사회적 수에 대한 연구’가 ‘사회의 자연적 상태를 취급하는 것’이라는 뜻에서 ‘통계학(Statistik)’이라고 정의되었다. 상징주의로 겹겹이 쌓인 대상을 바라보는 이여운의 냉정한 자연주의적 시점은 오래 묵은 관념적 중심을 흔들어 놓는다. 각 시대의 상징적 우주의 중심이 되었을 종교적 건축은 잘 변화하지 않는 보수적 양식의 전형이다. 그러나 작가는 시공간을 압축하는 가운데 변이의 지점들을 드러낸다.

용머리, 30x30cm, 캔버스천에 수묵, 2015

봉황머리, 30x30cm, 캔버스천에 수묵, 2015
즉 매끈한 하나의 선이 아니라 밧줄처럼 길고 짧은 수많은 선들로 이어진 흔들리는 외곽선들은 변이의 지점들, 그리고 변모 이후 자리를 잡아가는 과정들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것은 종교적 건물의 실재감을 부여해왔던 관념적 중심의 재현이 아니라, 매번 재구축되는 중심화의 과정이다. 작가는 그 원형적인 건축들에서 성스러운 중심이 아니라 ‘위대한 껍데기’를 본다. 변화는 껍데기로부터 부지부식 간에 일어난다. 그것은 중심이 깊숙한 내부가 아니라, 껍데기에 산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여운의 작업에는 중심보다는 표면이, 고정보다는 변화에 방점이 찍힌다. 현대적 사고에 의하면 중심은 없거나 철저히 주변에 의지하는 상관적 개념이다. 종교학자 조너선 스미스는 [자리잡기(to take place)]에서 이데올로기로 작동하는 건축에 있어서의 중심의 상징체계를 해체하고자 했다. 그에 의하면 중심이라는 언어는 정치적이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왕권과 왕의 기능이라는 고대 이데올로기에서 유래한다. 지금도 '현대미술의 중심지 OO'같은 헤게모니적 관념이 있으며, 이 플라토닉 한 중심의 논리에 의해 주변부 문화는 구축되곤 한다.
그러나 중심 유형은 분명 보편적인(하물며 지배적인) 상징화 유형은 아니라는 것이 조너선 스미스의 주장이다. [자리잡기]는 이데올로기로 작용하는 ‘성스러운 공간(sacred space)’ 보다는 ‘자리(plce)’에 대한 사회적이고 동사적인 이해를 담고 있다. 이 맥락에서 보자면, 어떠한 견고한 토대도 없이 끝없이 흔들리면서 자리를 잡아주는(to take place) 이여운의 선들은 변이라는 사건을 증거 한다. 그것은 원형을 물리적 공간에 만드는(making) 것이 아니라, 기억 속에서 지속적으로 표시(marking)하는 것을 말한다. 조너선 스미스에 의하면 이러한 방식은 ‘건축의 언어가 아니라 경로, 길, 자취, 표시 그리고 발자국의 언어’이다. 이러한 관점은 공간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의 투사에 의해 창조되는 것임을, 자리가 수동적인 용기(容器)가 아니라, 능동적 인식의 산물임을 강조한다. 즉 인간이 위치 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리를 존재하게 한다. 조너선 스미스에 의하면 의례에 관한 기본적인 이해와 자리와의 관계는 사원과 같이 고도로 다듬어진 구조물의 경우를 통해서 가장 잘 예시된다.

백담사, 91☓116cm, 한지에 수간채색, 2015

현등사, 91.8x121.2cm, 한지에 수간채색, 2015

백련사와 심마니, 73x97cm, 한지에 수간채색, 2015
인간이 위치하는 자리에 대한 탐구에서 종교 건축만한 것이 없다. 그러나 그러한 소재들이 관념적으로 가정된 상징적 중심을 재현하는 것에 머문다면 시대착오적일 뿐 아니라 기성의 질서를 옹호한다는 점에서 이데올로기적일 것이다. 본질적으로 성스럽거나 속된 것은 없다. 성과 속은 실체적(substantial) 범주가 아니라 상황적(situational) 범주이다. 성스러움은 무엇보다도 자리잡기의 범주이다. 종교적 의례, 그리고 그것의 현대적 계승자인 예술은 낯설기만 한 추상적 공간은 의미로 가득 찬 구체적인 자리로 변화시킨다. 단순한 형식 속에 차이의 표지들을 최대한 드러내는 이여운의 그림이 강조하는 바는 추상적 공간에 떠있는 현대인에게 자리 잡기의 근본적 의미이다. 자리 잡기란 역으로 자리의 상실을 전제하는 미지의 과제를 말한다. 자신감 있게 서있는 존재들을 지지하는 것은 흐릿하게 흔들리는 선들이다. 이여운의 작품에서 시공간의 축을 따라 자리를 잡아가는 선들은 합일이 아니라, 상실을 전제한다. 현대 예술은 종교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분리와 불일치의 상황에 대해 숙고한다.
출전; 갤러리 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