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춤을 통한 드러냄

최승희 전 (6.4--7.17, UNC 갤러리)

    

이선영(미술평론가)

    

깊은 밤을 떠올리는 블랙은 하나의 색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여러 색을 품고 있다. 그것은 동양의 묵도 마찬가지다. 에바 헬러는 [마법의 색]에서 검정은 모두 50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모든 색의 총합인 빨강과 파랑, 노랑을 섞으면 거의 검정이 나오는 것을 보면, 검정에는 많은 색들이 잠재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침묵 속에 수많은 말이 포함되어 있는 것과도 비교될 수 있다. 에바 헬러는 색이 홀로 존재하지 않으며, 늘 다른 색들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색의 영향도 여러 가지 색 즉 색채 배색을 전제로 하는데, 색은 하얀 배경 위에서보다 검은 배경 위에서 더 빛을 발한다고 말한다. 최승희는 이 전시에서 블랙의 뉘앙스를 최대한 펼치면서 블랙과 역학관계에 놓인 색들을 새롭게 보여준다. 다른 색들은 블랙에 의해 더욱 빛나기도 하지만 블랙에 의해 억제되기도 한다. 미디움에 따라서 색감은 더욱 다양해진다. 최승희는 돌가루를 아크릴과 섞어서 점도 있게 사용하고, 붓 뿐 아니라 나이프와 흙손 등을 이용하여 두터운 질감을 낸다. 


창(Window)_mixed media on canvas, knives_24x24cm_2015

마치 검은 흙이나 흙덩이처럼 보이기도 하는 거칠거칠한 바탕 면은 코스모스를 낳는 원초적 카오스처럼 잠재적 움직임으로 가득하다. 작가는 이러한 수많은 잠재성에서 어떤 가닥을 현실화할 것인지를 결정한다. 이 전시의 24개 작품 중에서 순수한 블랙은 단 두 점이다. 그 외의 작품에서 블랙은 바탕에 깔려 있거나 다른 색이 깔린 화면을 뒤덮는다. 블랙이 등장하지 않는 작품도 감추기와 드러내기라는 방식은 비슷하다. 여러 색으로 층을 만들어 놓은 화면에 액션이 가해지면 깔아놓았던 색들이 형태로, 또는 빛으로 가시화된다. 이 전시에서 블랙은 다른 색과의 길항관계 속에서 심리적, 육체적, 물리적, 사회적 차원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대부분 30호로 가로, 세로 비율만 다른 캔버스 크기, 작은 작품의 경우 두툼한 정사각형 형태의 캔버스는 단순하면서도 집중도를 높인다. 작가는 단순한 구성요소로 최대한의 조합을 꾀한다. 그것은 무의미한 반복을 자제함과 동시에 단조로움을 피하는 방식이다. 


이 전시의 주조색인 블랙은 작가가 대학원 때 상담심리를 전공한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듯하다. 최승희는 블랙을 억압이나 억제를 낳는 ‘방어 기제’라고 설명한다. ‘자기만의 색’을 감추는 것이 억압이다. 블랙이 때로 무난하고 세련되며 고급스러운 색으로 간주되듯이, 억압은 승화로 보이기도 한다. 블랙은 이러한 억압/승화의 메커니즘 때문인지 가장 공식적인 색으로 사용되곤 한다. 상복을 비롯한 예복은 거의 블랙이다. 승화는 크고 작은 자기 이익에 관련된 것이기에 다소간 번거롭고 힘들더라도 지켜진다. 그것은 합리적인 것이라 간주된다. 사회가 합리화되었기 때문에, 주체 또한 그리고 예술도 그렇게 되기를 요구받는다. 그러나 합리성이란 당대의 지배적 규범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강제가 내면화되어 스스로 조율하는 단계에 이르면, 원래의 자기 것인 양 된다. 본질처럼 된다. 이 보이는/보이지 않는 기준에 의해 수시로 자신의 면모가 재편집되곤 한다. 


 感_mixed media on canvas, sand paper, knives_91x73cm_2015

보고 보이는 관계가 일상화된 현대, 자신의 시선과 타인의 시선을 일치시키기 위한 그 수많은 노력들이 일어나는 나르시시즘의 공간에서 억압이 내면화되었다는 말은 실감이 난다. 그러나 억압이나 승화는 완전히 성공하지 못한다. 섬으로 친다면, 꼭대기 일부에 해당되는 초자아를 자신의 전부인 척하는 것은 손으로 하늘을 가리는 양상이기 때문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매끄러운 연속성에는 모순과 균열이 잠재해 있으며, 결국은 드러난다. 특히 시간은 이러한 드러남을 촉진시키는 주요한 변수이다. 시간 속에 놓아보면 불확실했던 것도 확실해진다. 반대로 확실했던 것도 불확실해진다. 최승희의 작품에서 블랙과 상관관계에 놓인 여러 색들은 감추고 싶은 것, 그러나 감추려 해도 드러나는 것을 상징한다. 같은 크기의 캔버스 5개가 한 줄로 늘어선 [感] 시리즈는 이 전시의 부제와 같은 제목의 작품으로, 언뜻 하나의 색으로 보이는 화면들이 얼마나 다양한 뉘앙스를 가질 수 있는지 알려준다.  


어떤 것은 사포를 사용하여 화면을 가다듬어 바깥의 빛을 최대한 받아들이고, 어떤 것은 주위의 모든 빛을 흡수하는 것 같은 무광이다. 어떤 것은 흐름과 균열을, 어떤 것은 캔버스의 네 귀퉁이를 강조한다. 블랙이 주조를 이루는 가운데 붉은 속살이 언뜻언뜻 비춰진다. 산화된 붉은 빛은 블랙에 내재된 비극이나 우울이라는 코드와 상호작용한다. 작가는 개인적으로 힘들었던 시기에 그려졌던 이 그림에 사회적 비극, 가령 수몰된 배의 깜깜한 곳에 갇혀 죽어갔을 어린 생명들을 중첩시킨다. 블랙이 죽음의 색으로 간주되는 것은 어둠 속에서 시작된 모든 것이 결국 어둠 속으로 되돌아가기 때문이다. 에바 헬러는 [색의 마법]에서 모든 것은 검정으로 끝난다고 말한다. 부패한 고기는 검게 변한다. 식물이나 치아가 썩어도 검게 된다. 시간의 신인 크로노스는 검정 옷을 입고 있다.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을 때도 ‘blackout’ 이라고 한다. 


 켜(Ply)_mixed media on canvas, knives_24x24cm_2015_1

저자는 ‘검정의 내적 음향은 가능성이 없는 허무, 태양이 꺼진 뒤의 죽은 허무, 미래도 희망도 없는 영원한 침묵과 같다’는 칸딘스키의 말을 인용한다. 죽음을 배태하는 또는 죽음을 향하는 블랙은 깊은 우울을 자아낸다. 죽음을 향한 여정 속에 있는 인생의 기조는 멜랑콜리이다. 죽음은 빛이 어둠을 몰아내듯, 삶에서 몰아내야할 억압적 요소로 남아있다. 우리, 특히 현대인은 죽음을 애써 잊고 살고자 한다. 현대만큼이나 죽음이 편재하는 위험사회도 없는데도 말이다. 블랙은 죽음처럼 모든 부박한 것들에 무게감(또는 심오함)을 주는 요소로 작용한다. 최승희의 작품에서 바닥에 깔리는 색은 감추고 싶은 것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때로 명백하게 드러났으면 하는 것이다. 같은 크기의 캔버스가 한 쌍을 이루는 작품 [아리랑]과 [아라리오]는 말소하의 흔적으로서의 색, 그리고 검은 사각형 안에서 환히 빛나는 색 스펙트럼을 나란히 배열한다. 한국인의 한과 흥이 녹아있는 색동 띠는 제일 밑에 깔아 놓았고 그 위로 블랙이 얇게 지나갔다. 덮이거나 드러나 있는 두 화면은 일련의 서사를 만든다. 


마치 ‘before/ after’의 논법과 같이, 구별되는 두 화면을 나란히 놓는 것으로 무엇인가 극적으로 말하는 화법이다. 이 전시에서 나란히 배치된 작품들은 모두 비슷한 화법으로 말한다. 작품 [아리랑]과 [아라리오]에서, 한국인의 원형적 색감이라 할 만한 것은 덮여있거나, 드러나야 할 것으로 제시된다. 민족의, 그리고 개인의 오래된 과거는 덮여있다가도 언뜻언뜻 드러나며, 의도적으로 활짝 열어 놓기도 한다. 우리사회에서 전통은 억압된 것에 속한다. 전후의 폐허 속에서 거의 원점으로부터 출발하다시피 한 한국은 스스로가 누구인지를 애써 잊고 싶어 했다. 서구를 모델로 해서 물질적 성장만을 향해 달려오다가 어느 날 우리의 것은 무엇인가 하는 반성에 서둘러 복구시키려고 하는 전통이 여전히 생활로부터 유리되어 있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예술은 개인적으로, 집단적으로 억압된 것들을 회귀시키는 장이다. 작가는 어릴 때 입었던 색동저고리 뿐 아니라, 열려진 할머니의 장롱 속 이불을 기억해 냈다. 


전습법 No.2(Whole learning method No.2)_mixed media on canvas, 흙손(Trowel)_73x91cm_2015

정사각형 캔버스에 그려진 [켜] 역시, 무채색으로 처리된 층 사이로 유채색이 언뜻언뜻 비춰진다. 가린 것을 드러내는 것은 화면에 가해지는 행위이다. 은폐와 드러냄의 행위를 위한 바탕 화면은 매우 두툼하다. 모노톤의 작품은 행위의 흔적을 강조한다. 무엇이 드러난 것인지 무엇이 감추어진 것인지가 늘 확실하지는 않다. 만들어지고 있는 중인지 해체되고 있는지 모호한 과도기적인 구조처럼 말이다. 작품 [형태론]은 게슈탈트 이론(Gestalt theory)처럼, 무엇이 바탕이고 무엇이 형태인지를 작가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보는 이의 심리상태에 맡겼다. 전경을 뒤로 물리고, 후경을 당기는 방식은 예술가 뿐 아니라, 정신분석가나 범죄 수사관, 역사가나 비평가들의 주된 기법일 것이다. [전습법(Whole learning method)] 시리즈는 블랙과 화이트의 밀고 당김이다. 나이프로는 성이 안차서 미장공들이 쓰는 흙손을 이용하여 속도감 있게 그은 화면들에는 어떤 것은 검은 것이, 어떤 것은 흰 것이 화면의 전면을 차지한다. 화면에서 블랙과 화이트는 상보적 관계이며, 하나가 빛이면 다른 하나는 어둠으로, 하나가 형태면 다른 하나는 흔적이 된다. 


블랙/화이트의 역학관계는 색을 넘어 빛의 차원으로 고양되어, 마치 어둠이 빛을, 빛이 어둠을 몰아내는 듯한 느낌이다. 빛과 어둠이 갈라지는 태초에 무엇보다도 그 둘을 구별하는 행위가 있음을 알려주는 숭고한 장면이다. 행위가 있고 그 이후 관념이 있다. 사건이 있고 그 이후 해석이 있다. 이 관계가 역전될 경우, 예술은 자신의 장점을 잃는다. 관념과 해석에 질질 끌려 다니는 2류 철학, 2류 문학, 2류 사회학 등으로 강등된다. 시대의 유행어나 지배적 코드에 맞춰 현재 뿐 아니라, 자신의 과거조차도 ‘재 맥락화’ 하려는 작가들이 종종 있다. 특히 예술을 자기를 포장하는 수단으로 삼는 ‘척하는’ 부류들이 그렇다. 작품제목도 주제도 현재의 지배적 추세에 따라 바꾸는 경우도 봤다. 마치 어떠한 낭비나 방황도 없이, 어떠한 슬럼프나 공백기도 없이 하나의 필연적 목적을 향해 매우 일관된 과정을 차근차근 밟아온 이처럼 말이다. 디지털 시대가 돼서 아무리 바꿔 써넣기가 쉽다 해도 그건 아니라고 본다. 그들의 앞 뒷말은 꽤나 안 맞지만, 그러한 변조도 그들의 의지이고 그들의 일부이긴 할 것이다. 


 사월(April)_mixed media on canvas, knives_31.5x31.5cm_2015

자기 조절과 조율을 넘어서 조작의 단계에 이르는 과정을 미래의 미술사가들이 밝혀낼 수 있을지 자못 흥미롭다. 색의 심리-생리적 속성을 활용하는 최승희의 작품은 드러내기가 감춤의 일환일 수도, 감춤이 드러냄의 일환일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들숨날숨] 시리즈는 국내외의 여행지에서 받은 색감을 이용하여 드러남과 감춤의 관계를 표현한다. 각 작품들에는 산토리니부터 부산 감포 마을까지 각 지역의 지방색이 드러나 있다. 최승희의 작품은 화가들이 영감을 받기위해 떠나는 그 수많은 여행들은 모든 자잘한 형태와 이야기를 건너뛰고 하나의 색감으로 남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행은 무엇보다 무뎌진 색감을 충전하고 돌아오는 기회이다. 최소한 그러한 시공간적 간격을 통하여 지금여기를 다시 보게끔 한다. 작은 작품들은 전시장 기둥이나 자투리 공간에 군데군데 설치했다. 그것은 그림처럼 걸려졌다기 보다는 공간과의 관계 속에서 설치되었다. 정사각형 모양새이며 두께가 두꺼워서 그림이라기보다 오브제같은 느낌이다. 특히 오래된 벽을 떠올린다. 


사물은 그림보다 더 불투명하다. 불투명한 사물은 그림만큼 중성적인 공간, 즉 화이트 큐브를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작품 [네모]는 바깥 가장자리의 질감을 달리한 사각형이며, 작품 [프레임]은 가로 세로 선을 넣어서 16개의 사각형으로 나눈 모양새다. 네모나 프레임이라는 제목은 작품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보라고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 자체를 지시한다. 즉 그것은 사각형 틀로 만들어진 회화 그자체인 것이다. 작품 [창]도 무엇인가를 바라보는 창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하지 않다. 정사각형 벽에서 어두운 창이 보이지만, 그 ‘창’은 주변의 검은 벽과 마찬가지로 어둡고 두텁고 닫혀있다. 그러나 질감을 달리한 물감의 흔적들은 보는 이에 따라서 풍경을 연상할 수 있다. 작품 [풍경]이 그렇다. 작품 [사월]은 녹색 사각형 안에 7개 색의 시퀀스가 점점이 연결되어 있는데, 그것은 마치 초파일에 녹색 자연을 배경으로 주르륵 걸린 연등처럼도 보이고, 말없음 표 같은 기호로도 보인다. 작품 [사월]에서 재현과 추상과 기호는 중첩된다. 최승희는 여러 층을 가진 두터운 화면, 색의 감춤과 드러남을 이끄는 액션을 통해 말없는 회화에서 서사를 끌어낸다. 

  

출전; 미술평단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