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백한 독백의 문화
이선영(미술평론가)
크리스토퍼 라쉬를 비롯한 사회학자들은 현대사회가 나르시시즘을 부추킨다고 말한다. 극심한 경쟁 속에 홀로 내던져진 개인에게 최적화된 이데올로기라고 할 수 있는 개인주의는 각자의 유아론적 세계를 확장한다. 그 유아론적 세계들이 부딪힐 때 어떤 식으로 해결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승자독식의 논리 외에 내세울 것이 없다. 미디어의 힘에 의해 더욱 확장되는 유아론적 환상은 실재이기 보다는 상상계의 차원에 머문다. 현대의 정신분석학이 말하듯이, 스스로를 향한 시선에 타자의 시선이 끼어드는 순간 주체는 그 간극을 느끼게 된다. 주체와 타자 간에 벌어져 있는 시선의 간극은 갈등과 소외, 그리고 극히 드물게는 소아병적 자아를 벗어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도구 없이 자신의 전체를 볼 수 없는 인간에게 고전적인 가시적 매체는 거울이었고, 이는 자화상의 전통에서 흔히 발견된다. 자신을 바라보는 거울이라는 고전적 매체는 작은 손거울을 닮은 스마트폰으로 옮겨갔다.

카라밧지오, [나르키소스],1573-1610년.
현대사회에서 정보는 공기처럼 편재하며, 호흡하듯이 들이마셔지고 뱉어진다. 정보사회는 자신과 관련된 것이라면 아무리 소소한 것일지라도 관심을 쏟는 대중 심리를 상품으로 개발하여 소비를 무형의 것으로까지 무한확대 시켰다. 이러한 정보 소비자(그리고 잠재적 생산자)들은 특정 물건을 사지 않을 때조차 단위당 가격이 매겨진 정보를 소비한다.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대기업인 통신회사들이 얼마 전부터 음성 통화는 공짜이고 데이터 사용량에만 가격을 매기는 선심성 정책은 소통양식의 변화를 반영한다. 그것은 인간 간의 소통이 더욱 간접적이며, 그 매개체(구조와 기계)는 더욱 직접적으로 변화함을 알려준다. 정보소비자는 주체이기 보다는 ‘빅 데이터’의 생산자로, 통신회사에 차곡차곡 쌓여진 데이터는 개인을 규정짓는 권력으로 변모할 것이다. 사물과 사물을 포함하여 만물을 연결 지으려는 정보사회의 야망은 이전시대의 물활론이나 종교를 물질적으로 구현할 태세이다.
그러나 액정화면에 매순간 눈과 손을 뗄 수 없게 된 현재의 소통지상주의가 진정 스스로를 변화시킬 수 있는 타자와의 대화인지는 의심해볼 만하다. ‘SNS는 인생의 낭비다’라는 어떤 유명인의 말이 공감을 얻기도 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자랑거리 늘어놓을 일 없으면 언제든지 쓱 빠질 수 있고, 자기 듣고 싶은 말만 듣고 하고 싶은 할 뿐인 대화가 대화일 수 있을까. 자신의 크고 작은 이익에만 촉각을 곤두세우는 이들에게 진정한 대화란 있을 수 없다. 거울 앞에서 홀로 말하는, 대화를 가장한 독백의 문화는 스마트 기기를 통해 대중에게 일반화되기 이전에도 예술가들에게 보편적인 상황이었다. 가난으로 이어지는 고독과 소통 부재는 일상의 삶에서 주변인으로서 살아가는 그들의 존재 조건이었으며, 정보사회가 개막되어 누구나 모든 것이 말해질 수 있는 듯한 유토피아가 펼쳐진 지금도 상황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예술가들은 표현에의 의지가 강한 이들인 만큼 소통에 더욱 목마를 것이다.
일반화된 조건으로서의 소외
예술가는 소통의 양만큼이나 질을 중시한다. 겉도는 수다보다는 본질적인 것을 소통하고 싶어 한다. 그들이 몰두하는 작업이 겉도는 수다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리 재능 없는 작가라도 스스로 본질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몰두한다. 다만 사회가 예술을 본질적인 것으로 간주하지 않는 것이 통탄스러울 따름이다. 예술이 사회로부터 고립되기 시작한 근대 이후의 작가들은 자아에 칩거하게 되는 존재의 조건자체를 예술의 주된 주제로 삼았다. 소소한 불평불만부터 비명에 가까운 근대예술가들의 작품을 통해, 타자와의 소통이 사회인으로서의 자명한 조건이 아니라 가닿기 힘든 목표임을 깨닫게 된다. 예술가의 자폭 테러와도 같은 극단적인 메시지 전달방식은 근대 예술사를 장식하는 전설로 회자되곤 했다. 예술가들은 그 어떤 부류들보다 소외를 먼저 겪어왔던 것이다. 소외는 일반화된 조건이 되었기 때문에 보편적 주제가 될 수 있었다.

벨라스케스, [비너스의 화장],1647-1651년.
그러나 근대 낭만주의의 전형적인 해법이 현대에도 적절한지는 의문이다. 그들의 전형적인 해법 중의 하나는 자기중심주의를 극대화하는 것이다. 그것은 부정적 조건을 긍정화 하는 전략이다. 이러한 방식에 의하면 예술가의 강한 자아로부터 밀도가 흐린 빈 공간으로 물질이 이동하듯 의미가 자연스럽게 전이될 것이다. 그러나 더욱 강한 유일무이의 주체가 되는 것이 가능한 것이며 바람직한 목표가 될 수 있을까. 신만이 가능할 수 있는 주체에 대한 그러한 발상에는 예술이 자의식이 강한 개인의 반영이며 표현이라는 근대적 가설이 깔려 있다. 개인은 이미 있는 것이고 반영과 표현은 단지 뒤따를 뿐이라는 생각은 개인 그 자체를 구성 또는 해체하는 언어의 힘을 간과한다. 그러나 현대의 (후기)구조주의는 언어적 구조에 선재하는 개인의 통일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퇴행이든 승화이든 전치, 응축, 억압의 과정을 통해서 메시지는 변형된다.
현대사상에서 인간을 중심에 놓는 사유를 결정적으로 위협한 것은 구조중심의 사유이다. 다이엔 맥도넬은 [담론이란 무엇인가]에서 구조주의는 예술을 우리가 예술적이라 읽도록 배우는 자의적인 관습이나 구조의 묶음으로 구성된다고 생각하며, 후기구조주의는 예술을 무의식의 욕망의 살포로, 기존의 자의적인 관습을 전복하는 특권화 된 장소로 생각한다. 어떤 쪽이든 이런 개념들은 예술이 직접적인 인간경험을 표현하거나 반영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부정한다. 그러나 다이엔 맥도넬은 언어학, 특히 모든 시대에 걸쳐 분명하게 드러나는 공통 구조를 내러티브나 신화에서 찾으려는 구조주의는 역사와 변화를 도외시했고, 그 결과 영원불변의 인간본성이 있다는 휴머니즘적 통념에 대해 별다른 위협이 되지 못했다고 평가한다. 전능한 신을 닮은 창조적 자아라는 낭만주의적 전설은 사회로부터 고립에 처해진 근대예술가들의 자기방어 논리이자, 성취적 개인을 높이 평가하는 경쟁사회의 논리이다.

쿠르베, [파이프를 문 남자-자화상], 1846년
그 밑바탕에는 치유불능의 자기애가 깔려있다. 자기애는 개인주의나 이기주의와 때로 구별할 수 없으며, 어려운 조건 속에서 작업해야 하는 이들의 방어적이며 공격적인 논리이다. 대중들은 소소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면서도 도처에 편재하는 이기적 논리에 몸서리친다. 우리사회에서 유행하는 ‘착한 가격’, ‘착한 몸매’, 더 나아가 ‘착한 예술’에 이르는 말들은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경향에 대한 풍자같이 들려온다. 몇몇에게 몰아준 예술가의 사회적 성공은 대중 개인주의에 깔려 있는 자기애에 호소할 것이다. 비평가 해럴드 블룸은 [영향에 대한 불안]에서 낭만주의 전체를 망라한 계몽주의 이후의 모든 ‘추구 로맨스’는 자기 자신을 다시 낳고 자기 자신의 위대한 독창자가 되려는 추구라고 지적한다. 이러한 추구로 정신적 공간은 자신의 비전으로 가득 채워질 것이었다. ‘자기만의 비전’은 예술가적 개인에게 기대되는 바이기도 하다.
‘나는 나다’는 자기동일성의 논리
개인주의를 부추키며 그러한 욕망을 바탕으로 성장해 왔지만, 정작 개인의 입지가 더욱 좁아지는 현대사회에서 예술은 진정한 개인을 위한 해방구가 될 수도 있다. 더 나아가 예술가의 자기애적인 태도는 타인들에게 피해가 아니라, 도움을 줄 수도 있다. 그래서 해럴드 블룸은 자기중심성 자체가 상상력의 주된 훈련이라고까지 평가한다. 그러나 ‘나는 나다’로 요약될 수 있는 동일성의 논리, 그에 선명한 자아의 경계는 동시에 한계이기도 하다. 문학비평가인 해럴드 블룸은 문학사에서 발췌한 풍부한 예를 들고 있다. [영향에 대한 불안]에 의하면 워즈워스부터 스티븐스까지 근대 시인의 입장이 그러했다. 그들은 자신의 존재 자체로 ‘내가 보고 듣는 것은 나 자신으로부터 나온다’, ‘나는 나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고, 나이기 때문에 나다’(윌리스 스티븐스)고 말한다. 해럴드 블룸이 인용하는 시인의 말은 점입가경이다;

로트렉, [거울 앞에 선 자화상], 1880년
‘내가 지금의 내가 아니었던 때를 알지 못한다’, ‘나의 밖에는 아무런 대상도 없는데, 이는 내가 나 자신의 생명과 동일한 그 대상들의 생명을 꿰뚫어보기 때문이며, 그래서 나는 나다. 다시 말하면 이는 나는 어디에서나 언제나 내가 존재하기를 선택하기만 하면 존재할 것임을 의미한다....내가 나 자신의 동굴만을 탐구한다 해도 적어도 나는 탐구하고 있다....’(윌리스 스티븐스) 이러한 독백의 논리가 근대예술에 전형적인 자기지시성을 특징지었을 것이다. 자기지시성과 주체중심주의는 같은 것은 아니어도, 비슷한 논리를 공유한다. 그 심리적 바탕은 자기애이다. 프로이트는 [나르시시즘에 관하여]에서 자기애가 ‘자기보존 본능’과 ‘자기 본위주의’의 산물이라고 말한다. 프로이트는 성적 에너지가 대상으로 향하기 이전에 자아에 있었다고 본다. 자신을 극복하는 체험이라고 믿어지는 사랑 역시 자기애의 발로이다. 인간은 ‘다른 사람의 모습 속에서 자신들이 그 사람에게 빌려준 것, 즉 자기 자신들, 자신들이 해석한 그의 모습만 사랑할 뿐’(괴테)이다.
증오 또한 마찬가지다. 인간은 다른 이들 속의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이나, 그들 속 자신을 증오하는 것이다. 그러나 괴테는 ‘우리 자신에 대해, 그리고 무엇이 우리를 해치고 돕는지에 대해 과도하게 집중하는 것은 분명 지루하고 때로 우울한 일’이라고 하면서, ‘에너지, 힘, 의지를 제외하면 실제로 무엇을 우리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라고 묻는다. 사회 속의 개인에게 가장 큰 소통의 매개인 언어가 타자로부터 온다. 인간은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부터 대화를 통해 인간이 된다. 자아가 타자를 품는 모성의 체험은 아버지로 대변되는 사회의 언어에 이질적인 언어를 가능하게 하는 근원적 모태가 된다. 의식과 정신 이전에 무의식과 육체의 소통이 있는 것이다. 이를 통해 동일자의 언어 틈 사이에서 타자의 언어가 발설될 기회가 생성된다. 예술가는 ‘개별적 타인을 넘어서는 언어와 법의 질서인 상징계(the Symbolic)’(자크 라캉)를 파열하려는 위반자이다.

피카소, [거울을 보는 여인],1932년
그러나 현실은 이러한 위반적인 파열보다는, 상징계의 법을 재현하는 역할을 자임하는 사회적 성취 지향의 ‘예술가들’이 더 늘어간다. 예술가 및 그 관계자들도 법관처럼 말하며 모두가 따라야할 법전을 편찬하고 자신이 통과한 고되고 지루한 과정을 타자에게도 강요한다. 재현주의는 재현대상만큼이나 재현 주체를 생산하는 것이다. 재현의 논리는 법적 질서의 근간을 이룬다. 재현의 중심에 주체가 있다. 신적 주체를 닮은 인간주체는 따지고 보면 근거가 빈약한 법적 질서의 재현의 편에서 자유로운 생성을 감시 감독한다. 지배적 사회는 이러한 재현주의적 재생산의 과정에 온통 집중하며 그 외의 과정을 주변화 한다. 그래서 예술 역시 이러한 중심의 논리에 끼어들기 위해 노력한다. 지배적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한 개인에게 재현주의와 나르시시즘은 모순 없이 공존할 수 있다. 이때 자기애적 태도는 타인을 대화 상대자가 아니라 독백의 도구, 즉 타인을 징검다리 삼아 ‘나아가는’ 이기적 도구로 간주한다.
이러한 방식에서 타자는 자신의 연장이거나 기껏해야 상보적인 반쪽으로 간주된다. 그래서 ‘합일’에 관련된 생각들이 평화보다는 투쟁에 더 가까워지곤 한다. 그러나 타자는 이질적이다. 이러한 이질적 타자와의 만남은 자신과 타자를 동시에 변화시킬 수 있다. 예술은 그러한 만남이 이루어지는 가장 이상적인 장이다. 거기에 예술의 존재의미가 있다. 타자에게 개방되는 주체는 더 이상 공동사회의 대극 점에서 갈등하지 않을 것이다. 독백에 깔려있는 우울은 깊이로 오해되기도 한다. 대화의 축제적인 유쾌함은 가벼운 것으로 치부되곤 하였다. 타자의 억압에 바탕 하는 근대적 위계질서는 해체되고 있다. 해럴드 블룸에 의하면 자기동일성에의 함몰은 밀턴이 [실락원]에서 말한 ‘죽음의 우주’인데, 예술은 이 우주와 살 수 없다. 왜냐하면 예술은 ‘도약해야 하고’, ‘불연속적 우주 속에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불연속성이 바로 자유로움이다. 타자와의 대화, 즉 진정한 예술은 자신의 고수가 아니라, ‘자신의 전존재를 거는 도약’(가라타니 고진)이다.
(* 이 원고는 가창창작스튜디오에서의 강연에도 사용되었습니다)
출전; 국립현대미술관 웹진 ART:M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