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 깊이를 주는 죽음

 

이선영(미술평론가)

 

심점환의 ‘막막’ 전에서 인형이나 개, 늑대, 새 같은 사물이나 동물은 인간보다 더 생기 있게 나타난다. 그것들은 죽음에 이르는 갖가지 고난과 역경에 처한 인간과 달리, 생산자, 또는 조물주가 입력해 놓은 자신만의 생을 충실히 또는 충만하게 살고 있다. 작품 [나의 화려한 고독](2010)과 [불안한 대화](2011)에서, 햇빛이 들이치는 책장위에 홀로, 또는 여럿이 앉아있는 인형들의 푸슬거리는 노랑 머리칼의 반짝거림은 인간의 욕망이 성공적으로 투사된 상품의 완벽함을 뽐낸다. 인형은 자신의 온 매력을 표면 위에 띄워 놓으며, 작가는 실내에 깃들인 햇살을 통해 잘 빠진 상품의 표면 효과를 극대화한다. 유사 인간인 인형에게 비치는 햇빛은 따사롭지 않고 차갑다. 그것들은 인문 정신의 총아인 책들을 무대 배경으로 삼아 독백하거나 대화한다. 작가의 정신세계를 형성하는데 일조했을 책들과 인형은 그림의 앞자리를 두고 경쟁한다. 완벽한 비례를 갖춘 몸통의 관절 부분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는 인형들에게 정신이 스며들 공간은 한 치도 없어 보인다. 

 


나의 화려한 고독 162.1x130.3 Oil on Canvas 2010



불안한대화 162.1x130.3Acrylic On Canvas 2011

 

그러나 굳이 정신(그리고 그 연장이라 할 수 있는 대화)로부터 소외되었다고 해서 기죽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것들이 무슨 소용인가 하는 표정이다. 한 결 같이 무표정에 가까운 엷은 미소를 띄고 있는 그것들에 정신이 깃들어 있다면, 그것은 성과 상품 등에 공통적인 물신주의일 것이다. 물신주의는 깨어있는 이성이 아닌, 유혹과 마술에 호소한다. 원시시대만큼이나 물신주의가 판을 치는 현대에 물건들이 발산하는 매력은 ‘인간적인 것’을 넘어선다. 작가는 대상을 선택, 연출하는 방식을 통해 정신과 육체의 괴리, 그리고 소통 불가능성을 암시한다. 전시장 안쪽 깊숙이에 걸린 개의 머리는 화면 밖으로 튀어나올 듯하며, 코 부분을 만지면 촉촉한 기운이 그대로 전달될 듯하다. 작품 [불안](2009)은 털끝 하나하나 정교하게 그려진 개의 머리가 아니라, 개의 ‘얼굴’을 볼 때 비로소 불안이 전달되며 촉촉한 눈에 시선이 옮겨 간다. 작가는 이 그림을 자신의 초상이라고 밝힌다. 

 

모델이 된 개는 맹견이지만 야생의 늑대 같은 존재는 아니다. 작가에 의하면, 개와 늑대가 처한 어려움은 동일하지 않다. 반쯤은 인간의 영역에 속한 동물(가축)은 야생과 달리, 인간적 불안을 공유한다. 자연이 아닌 인간의 사랑에 기대는 존재가 누리는 안정이란 견고하지 않은 것이다. 코만큼이나 화면 밖으로 튀어나온 분홍 혀는 그러한 존재에게 애정과 생존이 어떤 상관관계를 가지는지 알려준다. 한편 개로 투사된 인간의 모습은 세계에서의 위치를 암시한다. 개는 인간과 자연의 경계에 존재하면서 인간에게 자연의 힘을, 자연에게 인간적 의미를 전달해주는 전령사다. 다른 작품들에서 작가 자신을 포함한 인간은 야생 동물에게 뜯겨지고 있거나 추락하거나 형해 화 되어 있다, 그의 작품에서 인간은 망가진 사물이나 약한 동물로서의 면모가 확연하다. 인간보다 하위에 있다고 간주된 사물이나 동물과의 이러한 역전이 전시부제처럼 ‘막막’함을 낳았을 것이다. 인간은 사물처럼 쓸모 있지도, 동물처럼 강인하지도 못하다. 

 



불안 (uneasiness) 162.1x130.3
Oil on Canvas 2009



 의식(Consciousness) 130.3×162.1 Oil on Canvas 2015


불완전하게 태어나는 동물이 사회적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사물화 되어야 하고, 때로 억압되어있던 동물성을 복귀시키기도 해야 하지만, 궁극적으로 인간은 사물도 동물도 아닌 것이다. ‘막막’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상태와도 관련된다. 물론 이러한 환원 불가능성은 인간의 가능성이기도 하다. 늑대가 살점을 뜯고 있는 작품 [의식](2015)은 뒤에 피어난 아름다운 꽃들처럼 자연스러운 모습이지만, 공격적으로 전방을 주시하는 포식자의 눈이 인간을 닮았다. 또한 그것은 먹는 입과 말하는 입 사이의 유사성도 보여준다. 즉 야생의 포식자는 문명과 이성 등으로 가려졌던 인간 의식의 본질을 보여준다. ‘의식’은 중립적인 공간이 아니라 생존에 얽힌 이해관계라는 맥락에서 탄생하는 것이다. 작품 [나의 껍질을 뜯어먹는 폐허](2015)는 늑대가 다른 먹이가 아닌 작가의 몸을 뜯는다. 살덩어리가 아니라 종잇장처럼 표현된 껍질이 뜯겨지는 과정은 공포만큼이나 쾌락으로 다가온다. 

 

가학적 본능과 피학적 본능은 방향만 다를 뿐이다. 피부 아래는 바로 뼈다. 방해가 되는 살을 헤치고 뼈로서 대변되는 본질이 바로 드러났으면 하는 욕망이다. ‘내 의식이 살쪄서 뜯기고 싶다’고 말하는 작가는 늑대로 대변되는 황폐함(폐허)으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그가 말하는 ‘의식의 살찜’은 ‘내 자신을 기만하는 것’, ‘의식의 허위’, ‘예리하게 살지 못하고’, ‘편안함에 길들여지는 것’ 등이다. 전시장 한가운데 움푹 파인 곳에 설치된 작품 [상황의 부조리](2015)는 비만한 남자가 풍선처럼 붕 떠 있는 모습인데,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살찜’에 대한 작가의 생각이 어떠한지 알려준다. 아늑하고 만족스러울 수도 있는 자기만의 감옥에 갇힌 ‘살찐’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통풍이다. 바깥의 바람은 엉성하게 붙어있는 것들을 날려버릴 것이다. 사방이 뻥뻥 뚫린 실내로 침입 하는 늑대가 그러한 바깥의 힘을 은유한다. 정체된 내부를 환기시켜줄 수 있는 바깥은 동시에 자기동일성을 위협하는 위험요소이기도 하다. 

 


나의껍질을 뜯어먹는 폐허(Eatingruins tear my skin)

130.3×162.1Oil on Canvas 2015


상황의 부조리(The absurdity of the situations) 90.9×60.6(cm) Canvas on oil. 2015

 

자연전체는 풍요롭지만, 대체로 자연을 구성하는 모든 개체들은 근근이 살아가고 있다. 작가는 꼭 필요한 것만을 행하는 자연의 필연성에 따르려 한다. 생존본능으로 눈을 번뜩이는 늑대는 인간들처럼 비만하지 않으며, 노년을 비롯한 미래의 시간에 대해서도 불안해하지 않는다. 과거와 미래가 아닌, 생생한 현재만이 있는 자연은 아름답다. 동물에게는 기억(과거)과 기대(미래), 그리고 그러한 단선적 시간성에 기초하는 언어가 부재하다. 그러나 그렇게 아름다운 만큼이나 잔혹하다. 아름다움과 잔인함의 관계는 사드부터 아르토까지 이어지는 잔혹의 미학을 낳기도 했다. 바타이유에 의해 집약된 잔혹의 미학은 금기를 위반하는 경악스러운 불경을 통해서 성스러움을 환기시키곤 한다. 자연의 순리에 따르는 예술은 자연만큼 필연적일 것이다. 그러나 보다 좁혀진 자연이라 할 수 있는 일상적 현실 속에서 예술은 필연적인 것인가. 니체는 영원회귀의 반복 속에서 필연적인 것만이 되돌아온다고 말한 바 있는데, 기계적 반복이 아닌 차이를 가진 반복인 예술은 그러한 필연의 고리를 가지고 있는가. 

 

‘막막’ 전은 그것에 대한 확답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자기 살을 뜯는 냉혹한 자회상은 ‘붓놀림은 열정적이지만 생각은 회의적인’ 작가의 이중적 면모를 드러낸다. 생각과 붓질의 괴리가 완성된 작품을 스스로 파괴하는 자학적 습관도 낳았다. 작품 파괴는 ‘충분히 생각하지 못하고 그린 그림에 대한 후회’의 결과다. 그러나 생각은 쉽게 철회될 수 있지만, 감각이나 행위는 그렇지 못함을 염두에 둔다면, 지금까지처럼 작가의 생각을 투명하게 드러내는 창만이 유효한지 생각할 필요가 있다. 한편으로 자신의 안팎에서 일어나는 현실과 환상이 정교하게 투사된 작품은 소통의 측면에서 커다란 이점이 있다. 삶과 죽음, 성과 속 사이에 걸쳐있는 존재의 이중성은 다양한 도상으로 나타난다. 천사는 지상과 천상 사이를 오가는 이중적 존재지만, 그의 작품 [양지](2014)와 [일몰](2014)에서 그것들은 지상에 처박혀있다. 뼈만 남은 미라같은 몰골을 보니 죽은지도 꽤 오래되었다. 그들이 되돌아갈 천상은 부재하다.

 



양지(Sunnyplace) 91.0×116.7 Oil on Canvas 2014



일몰(Sunset)130.3×162.1 Oil on Canvas 2014

 

신과 인간의 동반 추락을 알려주는 심점환의 묵시록적 도상들은 햇빛 가득한 장소나 창밖의 아름다운 풍경을 배경으로 한다는 점이 역설적이다. 자연의 찬란한 아름다움은 세상의 한 귀퉁이에서 벌어진 사건에 무심하다. 그의 작가노트에는 많은 부재들이 언급되지만, 이러한 부재에는 신의 부재 또한 포함될 것이다. 재현 불가능한 그 숭고한 존재의 부재는 인간의 전락을 통해 간접적으로 제시될 수 있을 뿐이다. 배경이 실내라는 점은 태양에 보다 가까이 가려는 영웅적 도전 때문에 죽은 이카루스 식의 추락은 아님을 알려준다. 작가는 날개라는 도상에 대해, ‘회의 적인 자기애’라고 말한다, 특히 예술가라는 존재는 ‘자기에 대한 절망적인 애정’을 가진다. 이러한 과도한 기대 속에서 ‘날개는 희망이 아니다’ 그것은 ‘날 수 없는 날개’이며, ‘날 수 없지만 날개를 달고 싶은’ 인간의 욕망을 표현한다. 예술이란 자신의 전 존재를 거는 것이기에 자기애를 피할 수는 없지만, 그에 매몰되어서도 안 된다는 메시지이다. 축축한 자기연민으로부터 헤어나지 못하는 미성숙한 작품들이 미술계에 얼마나 널려있는지 상기할 필요가 있다. 

 

양지바른 무덤이나 사납게 파도치는 바다 등, 여러 은유적 맥락 속에 배치된 마을 풍경은 세상에 대한 축약도이다. 어릴 적 기억으로부터 길어 올린 양지바른 산동네, 이 따뜻한 풍경을 덮친 거대한 동물의 두개골이 그려진 작품 [양지마을](2015)은 햇빛가득한 지상적 삶에 도사리고 있는 죽음의 그림자를 전면화한다. 작품 [세상의 끝](2015)에서 인간의 공동체는 날카로운 부리를 가진 바닷새들 사이에 위태롭게 놓여있다. 작가는 ‘게딱지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는 저 집들처럼 우리들의 삶도 밀려오는 파도에 잠겼다 보였다를 반복하는 위태로운 것 아니겠는가’라고 묻는다. 문명에 비해 자연은 더 거대하게 표현된 풍경에서, 문명은 자연의 극복이나 복속이 아니라 자연의 일부임을 알 수 있다. 작가는 생멸을 거듭하는 거대한 자연의 주기에 인생을 끼워 넣으면서 그것을 상대화한다. 유리 진열장 안에 안치된 박제 새를 그린 [고요한 숲](2015)은 살아있는 듯한 죽음을 통해서 생과 사를 교차시키는 이 전시의 주제를 압축한다. 

 


양지마을(Sunnyvillage) 91.0×116.7(cm) Oil on Canvas 2015



세상의끝2(Endof the World2) 97.0×130.3 Oil on Canvas 2015

 

작가는 자신의 그림에 ‘죽음의 그림자’가 있음을 고백한다. 죽음은 이 전시의 부제를 낳은 ‘막막’함 뿐 아니라, 부박한 삶에 깊이를 부여할 수 있는 어둠이기도 하다. 기묘한 생기가 감돌지만 살아있지 않은 인형, 추락한 천사, 자연과 인간의 세계에 위태롭게 걸쳐있는 동물, 온 몸에 생존이라는 절박한 키워드를 새기고 있는 야생동물, 죽음이 해일처럼 덮쳐오는 공동체, 그리고 작가 자신의 죽음 등 심점환의 모든 작품에는 죽음에 이르는 공포와 불안이 깔려있다. 정신분석학에서는 모든 것이 완벽하게 충족된 모체로부터 세상 밖으로 나왔다는 사실자체로부터 인간의 불안을 설명--프로이트를 따라서 크리스테바가 말하듯이, ‘모성으로 인해 충동이 온전한 균형을 이루고 있었던 상태를 갑작스레 단절시키는 것. 공포란 한마디로 균형을 이루던 생물학적 충동의 단절이라는 것. 그러나 비롯된 곳으로의 회귀 또한 죽음 아닌가--하는 만큼, 불안은 사회적이기 이전에 존재론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러한 존재론적이고 운명론적인 해석은 상처와 불안, 공포에 대한 사회적 기원을 무시함으로서 모순을 확대재생산한다. 

 

그것은 탐닉으로부터 세상과의 화해에 이르는 기회주의적 성향을 낳는다. 무감각부터 비열함에 이르는 경향은 예술 한 켠에 내재한 기만을 설명해준다. 그러나 그러한 모순이 낳은 갖가지 기괴함과 그로테스크함은 ‘낯설어진 혹은 소외된 세계의 표현’(볼프강 카이저)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심점환의 작품에서 인간과 상호작용하면서 살고 있는 동물 또한 그러한 불안을 각인한다. 자연을 장악한 인간은 지상의 다른 모든 생물체의 가장 강력한 적대자이며, 인간 또한 다시금 동물의 상태로 추락하지 않을지에 대한 걱정이 있다. 작품은 그러한 불안을 가시화함으로서 불안을 견딜만하게 만든다. 공포와 달리, 보이지 않는 대상에 대한 불안은 그것을 가시화하는 것 자체가 긍정적 효과를 줄 수 있다. 작가는 광인처럼 ‘명명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공포를 새로운 은유들로 전환시키는 놀이’(크리스테바)에 몰두한다. 크리스테바의 [공포의 권력]에 의하면 공포증은 대상과의 관계에 있어 불안정함을 연출한다. 심점환의 작품에서도 공포의 대상은 불확실하다. 

 


고요한숲(Sereneforest) 130.3×162.1 Oil on Canvas 2015



(참고도판) 과정(process) 259.1×193.9(cm) Oil onCanvas 2005

 

작품에 암시된 공포의 대상은 ‘무에 대한 환각’(크리스테바)이다. 즉 작품 속에 나타나는 은유란 ‘무의 반복’(크리스테바)인 것이다. ‘위험에 대한 반응’(프로이트)인 불안은 반복을 통해 극복, 아니 적어도 피할 수 없는 불안과 소통하는 매개 고리를 마련하는 것이다. 그래서 흔히들 예술은 치유라고도 말해진다. 그러나 심점환에게 치유는 봉합이 아니라, 터뜨리기에 가깝다. 그의 작품에는 적정선에서 되돌아오기가 아닌 한계까지 밀어붙이기가 있다. 그것은 40대에 그려진 이전 작품들에 더욱 강력해서, 개고기가 가득한 풍경이나 포르노 이미지 등 비체(abject)적 이미지가 넘실대곤 했다. 적절한 자리를 벗어나 경계를 넘나드는 체액들이 현대예술을 설명하는 키워드로 부상한 비체이다. 심점환의 작품은 기법적으로는 현실과 조응하지만, 내용적으로는 현실과의 괴리가 있다. 괴리적 현실을 재현하는 환상적 작품이다. 문예사조사에서 모더니즘은 온통 그러한 부재와 괴리에 골몰했다. 

 

로즈메리 잭슨은 [환상성]에서 18세기에 일어난 질서와 비이성에 대한 관념의 거대한 변화를 언급하면서, 전해져오던 의미의 패턴을 상실한 것도, 그 결과 실재와 인간본성, 총체성의 개념이 분해된 것도 근대라는 시기임을 강조한다. 저자에 의하면 근대에 와서 예술의 기호는 초월적인 의미를 갖지 않으며, 의미론적 공허함과 더불어 현대예술을 특징짓는 불온할 정도도 텅 빈 충만함의 출현을 보여준다. 로즈메리 잭슨에 의하면 모더니스트들은 불안을 자아내는 부재 속에서 불가능한 현현(epiphany)--제임스 조이스에 의해 ‘갑작스러운 정신의 표현’이라고 정의 된다--을 끝없이 기다린다. 심점환의 작품 역시 이러한 근대적 세계관과 밀접하다. 거기에는 명료함 뒤에 존재가 아닌 부재가 있다는 것, 죽음을 표현하기 위해서만 생명을 끌어들인 다는 것, 끝없이 침해되는 금기가 이전 사회처럼 성스러움을 회복시키는 것도 아니라는 것, 감도는 불안 뒤에는 실체가 없다는 것, 무엇인가를 말하고자 하면서도 침묵의 서사를 구사한다는 특징이 있다. 

 

출전; 오픈스페이스 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