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이 영그는 모태

  

이선영(미술평론가)

 

조혜령의 최근 작품에는 생명을 품었다가 떨군 씨앗주머니가 많이 등장한다. 봄을 알리는 전령사인 목련의 씨앗 주머니인데, 목련나무는 꽃이 피었을 때는 환하게 그 존재감을 발하지만, 꽃이 질 때는 무슨 나무였는지도 모를 만큼 그저 푸른 나무로 있다가 이듬해 봄을 기약한다. 나무는 꽃이 지고 나서 다음의 생명을 준비하느라 분주한데, 그 과정은 자연만의 몫이고 인간의 관심사에서는 멀어진다. 조혜령은 우연히 발견한 목련의 씨앗 주머니에서 생명이 영글고 쇠하는 과정에 대한 은유를 본다. 생명의 절정으로 보이는 꽃 이후의 단계에서도 우리는 씨앗이나 열매만을 보는데, 작가는 콩깍지 같은 껍데기에 주목한다. 작품 [Magnolia Ⅰ](2013)을 보면, 씨앗 주머니들이 모인 형태가 나무 같다. 씨앗 안에서 나무 형태가 발견되듯이 씨앗 주머니 역시 이후의 단계를 선취한다. 여러 작품에 등장하는 씨 주머니는 마치 성기나 자궁같이 뭔가 감싸 안고 품고 보호하는 형태를 가진다. 비슷한 기능을 가지는 비슷한 형태의 기관에서 동식물을 초월한 보편적 구조를 발견한다. 


Magnolia Ⅰ, 116.8x80.3cm, Acrylic, Hemp thread on canvas, 2013


그러나 작가는 기이한 해부학적 구조를 재현하는데 머물지 않는다. 실제의 씨 주머니는 작품에 보이는 것처럼 통통하고 촉촉하며 따뜻한 동물적 기관의 느낌은 없다. 작가는 거기에서 순간에 고정된 한 장면이 아니라 흐름을 본다. 공시적 구조는 통시적 시간성이라는 맥락에 다시 배치되는 것이다. 얼마 전에 있었던 개인전 부제가 ‘생명 에너지의 흐름’전(2015)일 정도로, ‘흐름’은 ‘생명’만큼이나 조혜령의 작품을 아우르는 키워드중의 하나이다. [flow] 시리즈에서 흐르는 것은 시간의 흐름, 더 나아가 삶으로부터 죽음에, 다시 죽음으로부터 삶으로 이어지는 생명이다. 삶과 죽음에 얽힌 생명의 비밀이 완전히 풀리지 않았듯이, 그녀의 작품은 수수께끼에 쌓여있다. 정지된 하나하나의 장면을 병치시킨 화면에서 서사는 부재하거나 열려있게 된다. 씨 주머니처럼 뭔가를 싸안고 있는 형태, 빈 요람, 열리려고 하는 상자, 이상한 기운을 품어내는 빈 그릇, 소라껍질 같은 형태들은 씨 주머니와 동형적 구조를 이룬다. 


그것들은 생명의 신비와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장소를 지시하지만, 그 이상의 것을 알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것들은 ‘태초의 어머니(太母, Great Mother)’에 대한 작가의 관심사와 부응하는 소재이다. 태초의 어머니는 인자하지만은 않다. 그것은 생명을 낳는 존재이니만큼, 그것을 거둬가기도 하는 것이다. 이러한 양면성은 추후에 선/악으로 나뉜 여성에 대한 양면적 인식으로 이어지곤 한다. 과학 도감이나 수집품처럼 하나하나 형태와 상태가 고정된 단계에서 일련의 흐름(서사)을 만들어내는 것은 관객의 몫이다. 배경에 꼴라주 되곤 하는 실의 흐름은 현재의 구조가 생성으로, 소멸로 이어지는 역동적인 과정 속에 형태를 배치한다. 삶과 죽음의 과정에 얽힌 신비를 강조하는 또 다른 방식은, 볼 수 없거나 읽을 수 없는 문자를 배경 곳곳에 심어 놓는 것이다. 씨앗 주머니 뒤에 듬성듬성 깔려있는 기호의 열은 천상병 시인의 ‘귀천(歸天)’이다. 이 세상에서의 삶을 잠시 소풍 온 것으로 간주하는 시인의 비전은 죽음까지도 포괄하는 삶의 비전을 생각하는 작가와 조응한다. 


시는 점자로 되어 있지만 요철은 없다. 정상인은 점자를 읽지 못하고 맹인도 역시 요철이 없기에 읽을 수 없다. 삶의 의미에 대한 메시지를 던져주는 주옥같은 싯귀는 점과 선이라는 기호로만 감지될 뿐이다. 이러한 형식은 생명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표현한 것이다. 분명히 존재하지만 읽을 수 없는 현실과 진실로서의 생명 말이다. 생명에 기입되어 있는 문자, 즉 DNA는 거의 해독되었지만, 이러한 구성 요소의 작동 메커니즘이 완전히 풀린 것은 아니다. 만약 그것이 풀린다면 인간은 신만이 아는 어떤 영역에 진입하게 될 것이다. 작가는 단색조의 바탕에 단서들을 띄엄띄엄 던져 놓을 뿐이다. 작품 [Flow Ⅱ](2015)는 씨 주머니의 여러 단계들이 9개로 나열한 것인데, 그 각각은 마치 전혀 다른 개체들인 양 그렇게 생뚱하니 놓여있다. 그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연결망이 있다. 작품 [Flow III](2015)에서 씨앗주머니들이 흩어져 있는 배경에는 종교적 경전을 필사하는 심정으로 여러 번 반복하여 쓴 기호가 깔려 있다. 


Flow Ⅱ, 130.3x130.3cm, Acrylic, Hemp thread on canvas, 2015

점처럼 보이는 그것들은 씨앗주머니에서 나온 씨앗들로 볼 수도 있다. 텍스트 역시 씨앗처럼 품어지고 흩뿌려지며 자라난다. 자연스럽게 잉태되어 보호받고 자라나 꽃피우고 열매 맺으며, 또 다시 갱신되는 생명의 순환주기는 예술의 과정과 중첩될 수 있다. 그러나 그 흐름이 낱낱이 드러난 것은 아니기에, 곳곳에 도약과 비약이 있다. 형태와 형태 사이에, 기호와 형상 사이에 드리워진 심연을 헤쳐 나가기 위해서는 아리아드네의 실이 필요하다. 심연, 또는 너무 평평해서 오히려 비밀스럽기까지 한 단색조의 배경에 작가는 마사(麻絲)로 콜라주를 한다. 밑 작업만 2주가 걸리는 바탕은 여러 색이 중첩된 밀도 있는 색감을 가지고 있지만, 그 위에 얹히는 형태와의 상호작용 속에서 중성적인 배경을 맡는다. 마로 짜여 진 직물인 삼베는 우리 전통에서 탄생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삶속에서 긴밀하게 활용되었던 소재였다. 


산모가 아이를 낳기 위해 힘을 줄 때부터, 한약재를 짜는 보자기, 그리고 수의에 이르기 까지 한국인의 생사고락에 관련된 대목에 빠지지 않고 등장했던 소재이다. 기호의 열 또한 실같은 역할을 한다. 이 실은 무엇보다도 삶과 죽음의 연결망이다. 생명이라는 주제는 작품을 하나의 생명처럼 간주하곤 하는 예술에서 흔한 것일지도 모른다. 조혜령의 경우, 전직 간호사라는 특이한 이력이 생명이라는 보편적 주제를 색다르게 풀어가게 하는 듯하다. 간호사는 30세가 돼서야 더 늦기 전에 하고 싶은 예술을 위해 포기했던 이전 직업이었다. 작가는 누구나 살면서 자연스럽게 체험하는 사건을 압축적으로 경험했다. 간호사로서 배치되었던 곳들은 삶과 죽음이 매순간 갈라지는 현장들이었다. 그곳에서 체험한 생과 사는 일반인이 막연히 생각하는 생과 사와는 달랐을 것이다. 더 의미 있는 일을 위해 접은 길이었지만, 태도만큼은 몸과 무의식에 깊이 남았을 것이다. 


과학적 관찰은 기본이고, 작품이 풍부한 은유로 열려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 객관적 실재에 대한 믿음이 그것이다. 그러한 태도는 예술 분야에 만연한 막연한 상상이나 수수께끼를 위한 수수께끼가 아니다. 뒤늦게 선택한 예술의 세계에서 발견한 것은 무한한 몰입이었다. 다음 작업이 또 다른 세계로의 개시를 알리는 설레임을 주는 각별한 일이 바로 작업이었다. 하루하루 새로워지는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의 여정은 평범했던 과거 또한 호출한다. 예술이 분업화된 현대사회에서 수많은 직업들 중의 하나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예술은 수많은 이질적인 것들이 한데 모여 화학반응을 하는 도가니와 같은 것이어서, 한 길만을 걸어온 이들이 낭비나 방황이라고 간주하는 모든 것들을 수렴할 수 있는 장이 된다. 예술은 동일자를 유지한 채 타자를 품는 위대한 모성같은 원초적 수용기이자 생명의 기반이라는 점에서, 조혜령이 관심을 쏟는 ‘생명 에너지의 흐름’은 퍼내고 퍼내도 마르지 않는 영감의 원천이 될 것이다.         

  

출전; 미술과 비평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