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을 소비하는 문화 vs 사건을 생산하는 예술
이선영(미술평론가)
개인에게 있어서나 사회에 있어서나 사건과 기억은 돌고 도는 관계이다. 우선 어떤 사건이 있고 추후에 기억이 있는 것이지만, 기억을 통하여 사건은 사건으로서의 위상을 확립한다. 사건의 위상은 단번에 확립되는 것이 아니라, 매번 재확립된다. 사실관계의 확인을 비롯하여, 끝없이 변화하는 맥락은 같은 사건도 다른 강도로 다가오게 하는 것이다. 소소한 사건이 중요한 사건으로 재평가되기도 하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을 수 있다. 매해 연말이 되면 '올해의 사건'들이 추려져 기억되곤 하지만, 후세의 역사가들은 그 순위를 달리 매길 수도 있을 것이다. 먼지 쌓인 낡은 문서를 뒤적거리며 연구되는, 언제 결실을 볼지 모를 역사가들의 연구는 아무도 모르는 어떤 과거의 사건을 재 맥락화 하면서 현재와 미래에 영향을 준다. 기억되지 않는 사건은 일어나지도 않았던 것 인양 희미해진다. 시간의 시험을 이기지 못하고 점차 퇴색해가는 사건이 있는가하면, 시간이라는 주요 변수가 사건의 전모를 점차 분명히 하는 경우도 있다.
사건 역시 엔트로피의 법칙처럼 최초의 응집력이 느슨해진다. 사건을 기억하던 사람들이 하나둘 사라지는 것과 함께 말이다. 반면 반복되면서 조금씩 변화 확장되는 기억의 경우, 최초 사건의 진실이 그 무엇이었든 간에 사건 자체는 소소한 출발점에 지나지 않는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사건이 기억에 의해 촉발되기도 한다. 아득한 때 발생했던 원초적 트라우마부터 최근에 있었던 악연에 이르기까지 여러 갈래로 꼬인 인과 고리는 또 다른 사건의 발생 원인이다. 많은 희생을 낳는 민족 간 종교간 갈등이 그렇게 벌어진다. 기념행사는 정치적 행사가 되어 사건을 기억하는 행위가 또 다른 사건을 발생시키는 것이다. 사건에 대한 기억은 교훈적 차원에서 강조된다. 누군가 역사는 한번은 비극으로 또한번은 희극으로 반복된다고 말했듯이, 역사를 잊고 사는 개인이나 민족은 동일한 상황에 의해 고통 받는다. 요즘 들어 광복 70주년을 맞아 열리는 수많은 기념 행위들은 식민 지배를 받았던 약소국의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발로일 것이다.
그런데 사건을 다루는 미디어의 방식을 보면, 기억이라는 행위가 망각을 위한 방편이 아닌가하는 의혹이 든다. 세월호 침몰처럼 한국 사회를 강타한 큰 사건의 경우, 사건 당시 근 한 달여 동안 9시 뉴스는 거의 세월호 사건밖에 다루지 않았다. 그 때 마치 그 사건만 있었던 것인 양 말이다. 여전히 많이 남아있는 의혹을 생각해 보건데, 한 사건만 떠든다고 그 사건의 진실이 낱낱이 밝혀지는 것도 아니다. 사건과 관련된 시시콜콜한 사안까지 포함된 정보가 패키지 상품처럼 소비된다. 그러한 방식은 대개 동어 반복적으로 충격을 재생산할 뿐이다. 쏠림현상이 강한 대중 매체의 성향을 이용해서 각종 공작 정치가 횡행하기도 했다. 가령 선거 때 자주 발생하는 북한관련 공안 사건들은 우리사회의 금기와 무의식을 자극하면서 어떤 정치적 집단에 유리한 풍향을 조성하기도 하는 것이다. 전 사회가 한 사건을 집단적으로 소비하고 난 후, 다시 그 사건을 언급하는 것은 뜬금없는 일이 되고 만다. 물론 사건 ‘OO주년’ 하는 식의 주기가 돌아오면 형식적으로나마 한번쯤 들춰지기는 하겠지만 말이다.
사건의 집단적인 소비는 진실을 공유하는 중요한 과정이 아니라, 앞으로 더 이상 그 사건이 사건으로 다뤄지지 않을 것이라는 불길한 예고이다. 사건의 전모를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이미 지겨워지고 식상해지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자면 어떤 사건을 숨기기보다 맹렬하게 소비하는 것이 사건을 무효화시키는 첩경이다. 어느 나라 보다 정보의 공유가 활발한 나라 한국은 사건이 정보로서 소비되는 현상이 많이 관찰된다. 관찰 행위가 관찰 대상의 변화에 영향을 주듯, 동시적인 정보의 공유자체가 사건의 추이에 영향을 준다. 매스 미디어가 망각을 위한 집단적 통과 의례를 통해 사건에 대한 기억을 소비한다면, 역사가와 예술가가 사건을 기억하는 방식은 달라야 할 것이다. 미디어가 사건을 소비하면서 궁극적으로는 사건을 무화시킨다면, 역사가와 예술가는 사건을 색다르게 바라보고 기억함으로서 기억 자체를 사건화 한다. 여기에서 사건은 소비되는 것이 아니라, 생산된다. 소비와 달리 생산은 주어진 것을 단지 읽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의 행간을 벌리고 그 위에 겹쳐 쓴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건에 내재된 균열은 채워지기 보다는 더 벌어지고 끝내 어떤 의미화의 그물에도 포획되지 못할 만큼 부스러진다. 그러나 역사나 예술은 이 균열과 간극 속에서 작업하며, 사건의 몸통을 해체 구성한다. 몇 조각 안남아 있는 희미한 사건의 잔재들을 상상력으로 조합하여 원래 사건보다 더 생생한 모습으로 서있게 할 수도 있다. 이때 기억은 사건 이후에 오는 부차적 과정이 아니라, 그자체가 사건화 될 수 있다. 재사건화란 예술이 묻혔던 사건을 소재로 삼아 다시 그 사건에 대한 사회의 관심을 끌어냈다든가 하는 차원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런 경우에도 사건 자체의 힘보다는 사건화 하는 예술의 힘이 강조돼야 할 것이다. 예술은 같은 사건도 색다르게 말함으로서 인상 깊은 것으로 만든다. 이를 통해 다시금 사건에 대한 기억을 촉발시켜 현실의 수면에 떠오르게 한다. 오스카 와일드가 ‘런던의 안개를 우리 눈에 띄게 한 것이 바로 터너의 풍경화’라고 말했듯이, 예술은 평범한 대상도 기억될만한 것으로 만들 수 있다. 현대예술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부터 출발하면 소소한 대상 또는 현상, 인물을 작품의 주인공으로 부각시키곤 한다.
보이지 않는 작은 점으로부터 출발한 선들이 점차 증식하여 전대미문의 소우주가 구축되는 그림이나 'K'처럼 특정화되지 않는 익명적 인물들이 주인공인 소설 등이 그러하다. 신화나 종교, 역사 같은 대서사가 아닌 평범한 일상도 예술의 주 무대로 오를 수 있는 것은 소소한 사건도 큰 사건처럼 일으켜 세울 수 있는 형식의 힘 때문이다. 바로크 시대의 정물화부터 현대의 팝아트까지 예술사에서는 일상을 기념비화 하는 사건들이 종종 발생했다. 물론 보이지 않았던 것을 보이게 할 만큼의 위력을 가졌던 형식도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닫혀져 형식주의로 퇴화할 무렵, 형식에 대한 형식밖에 말할게 남아있지 않을 만큼 텅 빈 껍데기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세련되지만 매너리즘에 빠진 형식에 비해 현실 그자체가 생생하게 다가오는 순간이 온다. 그 때 작가들은 모두 생생한 현실을 외친다. ‘리얼리즘’의 시대가 도래 한다. 그러나 현실을 새롭게 보게 하는 것 또한 형식이라는 점, 더 나아가 현실이 현실로 다가오게 하는 것 또한 형식이라는 점도 간과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인생의 의미와 마찬가지로, 사건은 그 자체로 뒤죽박죽인 채 모호한 상태에 머물러 있다. 그것이 의미화 되는 것은 기억이다. 기억은 서사이다. 엉킨 실을 풀어 무의미의 실 꾸러미를 의미의 천으로 짜 나간다. 기억은 이야기를 통해 사건을 의미화 한다. 이야기를 하는 방식을 무한히 다양하며, 이야기가 닫혀있고 열려있는 정도의 차이도 크다. 의미를 향해 꽉 짜여 진 선적 방식으로 나아가는 경향이 있는가하면, 시점과 종점이 불확실한 채 느슨하게 병렬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전자는 명확하지만 닫혀있고(또는 닫혀있기 때문에 명확하고), 후자는 열려 있지만 모호하다. 명확한 의미에서 자유를 보는 사람과 모호함에서 자유를 느끼는 사람의 세계관은 다를 것이다. 전자는 필연의 인식이 자유겠지만, 후자에게 필연은 달갑지 않은 운명이거나 족쇄일 것이다. 전자에게 우연과 임의성은 조속히 해결되어야할 과제이지만, 후자에게는 자유와 신비를 가능케 할 것이다. 전자에게 사건과 기억은 혼동될 정도로 중첩되어 있지만, 후자에게 양자는 무관해 보일 만큼 멀리 떨어져 있다. 전자가 산문적이라면 후자는 시적이다. 전자가 과학에 가깝다면 후자는 예술에 더욱 가깝다.
시점과 종점이 분명한 직선을 따라서 기억이 구축되고, 그 빈칸을 메우기 위해 때로는 조작도 서슴치 않는 의도적 방식이 있는가하면, 어느 방향으로도 튕겨나갈 수 있는 지점들이 드문드문 나열되어 있는 방식이 대조될 수 있다. 19세기 리얼리즘의 시대(또 그 이후 그 명칭을 단 이즘에서)에 ‘리얼’이라는 단어가 무색할 만큼, 틀 지워진 기억들이 사건을 명명되고 의미화 되곤 했다. 인간이나 역사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완성되는 대서사들은 주인공이나 시대가 어떠하든 비슷한 서사를 가진다. 지배자와 피지배자, 억압을 극복하려는 투쟁과 해방을 향한 여정, 승리와 패배의 이야기이다. 가사는 비슷하고 곡조는 단조롭다. 그래서 쉽게 이해된다. 소비시대가 개막된 이후에는 쉽게 소비된다. 여기에는 임박한 승리를 앞당겨야 할 지름길이 전제된다. 전진, 또는 진보의 여정에서 우회나 낭비는 죄악이다. 사건은 흔적들로 남아있을 수밖에 없는데, 이미 사건에 대한 기억은 완성되어 있는 셈이다. 그 시점에서 리얼리즘은 자신들이 반대하는 형식주의와 다를 바 없다. 그것이 모든 ‘이즘’의 운명일 것이다.
다른 한편에 필연 대신 우연을 전경에 배치하는 자연주의적 태도가 있을 수 있다. 의미와 연결된 전체가 아닌 시시콜콜한 세부에 더욱 신경을 쓰며, 파편을 유기적 전체의 한 부분으로 복속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자체로 방치한다. 이때 사물은 닫힌 예술을 탈피하는 매개가 된다. 상품과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 ‘아카이브’라는 방식으로 수집된 사물들을 전시장으로 대거 밀려 들어왔다. 각각의 사물은 어떤 기억을 촉발하지만 이야기로 성립될 수 있을 만큼의 맥락은 부재하다. 여전히 기능과 쓸모, 의미와 목적이 강요되는 시대에 명확한 시공간의 좌표에서 스르르 벗어나 있는 사물들은 매력적이다. 어디로부턴가 떨어져 나와 수수께끼처럼 현존하는 사물들은 단조로운 하나의 이야기의 부분이 아니라, 수많은 이야기를 매개하는 결절점이 되어줄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방식이 너무 많다는 것. 사물을 동원하고 나열하는 방식도 패턴화 되는 것이다. 변별점이 없고 동어 반복적이다.
진열장을 짜고 거기에 뭔가를 가득 채워 넣는 직접적 방식이 아니더라도, 수집이라는 방법론을 가지는 작품의 예는 많다. 사물들로 제시된, 제각각의 방향타를 가지고 있는 과포화 된 기억들은 기억이 아니라 심미적인 대상으로 다가온다. 거기에는 소소한 장식부터 소유를 통한 앎에의 의지 같은 것이 깔려있다. 정보에 비해서 사물은 너무 큰 자리를 차지하고 말하는 바도 분명치 않지만, 어떤 기억(또는 서사)를 위해 동원된 사물들은 쇄도하는 정보처럼 결국 사건이 가졌던 본래의 힘을 무마하는 미디어의 방식과 유사하게 작동된다. 그것은 사건을 둥글리거나 희석시켜 현실과 화해시킨다. 그러한 방식의 기억은 망각과 가까운 거리에 있다. 하기야 망각은 시적 상상력만큼이나 발전에 도움을 줄 수 있다. 우리의 근대사를 기억해 본다면 말이다. 무질서한, 또는 각자의 질서를 가지는 사물들의 쇄도는 미디어가 사건을 소비하는 방식에 상응하는 예술의 방식으로 다가온다. 상상력은 관객으로 하여금 빈 칸을 채우도록 유도하는 배치의 방식을 통해 무의미할 정도로 열려있는 작품을 의미 있는 열림으로 변화시킨다. 그것이 예술이 사건을 기억하고, 더 나아가 그자체가 사건화 되는 방식일 것이다.
출전; 퍼블릭 아트 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