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 속의 풍경, 또는 인물 속의 인물

  

이선영(미술평론가)

  

얼마 전 서울 근교에 아담한 작업실과 집을 지은 임춘희의 작품에는 초록빛이 가득하다. 방전된 것이 충전 되면 붉은 빛이 녹색 빛으로 변하듯이, 그녀의 작품들은 도시적 삶이 야기하는 긴장과 피로로부터 벗어나 재생과 치유를 향한다. 자연 속 인간들 역시 초록으로 동화되고 있다. 초록빛 인간은 낯선 우주인처럼 창백해 보이지만, 인간에게 식물과 같은 엽록소가 있다면 최소한의 에너지로도 자생력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술가 역시 최소한의 에너지로 살아가야할 운명을 가진다. 식물은 최소한의 에너지로 버틸 수 있는 자생적 존재지만, 동시에 지구를 살 수 있는 곳으로 만든 근원적 존재이기도 하다. 식물적 삶은 동물의 극적이고 역동적인 삶에 가려져 있지만, 조용하고 지속적으로 이 세계의 삶을 가능하도록 이끄는 원동력이 되어왔다. 그래서 나무는 ‘아낌없이 주는 존재’로 간주되었다. 임춘희의 최근 작품에는 ‘자연’하면 대표 이미지로 떠오르는 나무들이 자주 등장한다. 

 


내게서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oil on canvas, 80.5x80.5cm, 2015


 

그러나 그녀의 초록빛 풍경은 목가적인 풍경과는 거리가 있다. 자연에 대한 목가(牧歌)는 그곳과 멀리 떨어져 사는 사람의 추상적 관념일 뿐이다. 작가는 자연의 든든한 외관을 부여하는 껍질을 들어내고 초록빛 세계로 깊이 침투한다. 여기에서 초록은 한 가지 색(빛)과 의미를 벗어나 무한한 계열로 펼쳐지거나 접혀진다. 특히 그 세계에서 초록을 입은 대표적인 상징인 나무는 인간(나)을 포함한 모든 자연적 과정을 압축하여 재생하는 우주로 다가온다. 25년간 작업해온 작가에게 그림 역시 이 우주에 속한다. 인간이라는 자연이 그림이라는 또 다른 자연에 자연을 담는다. 삼중의 동어반복, 또는 순환은 작가 스스로를 원점에 되돌려놓곤 한다. 인생에서 ‘원점에서 다시 시작함’이란 안 겪으면 좋을 고생을 상징하지만, 예술에서 그것은 매순간 그림을 그리는 이유에 대한 치열한 자문자답의 과정을 상징한다. 그러나 예술에서 명확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임춘희에게 그러한 거듭되는 물음은 붓을 놓은 채가 아니라, 붓을 잡은 채 해왔다는 것이 중요하다. 명확한 결론을 내야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리는 과정 중에 (잠정적)답이 있고 그로인해 파생되는 또 다른 질문이 있다. 개념적이거나 눈에 띄는 한 가지 방법론에 통달하는 ‘전문가적인’ 방식과는 거리가 있는 임춘희의 ‘아마추어적인’ 작업은 아주 빠르거나 아주 더디게 진행된다. 그런 방식으로 보이지 않게 조금씩 움직이는 과정이 담겨있는 것이 살아있는 작품이다. 그러한 작품은 옹이나 나이테처럼 삶의 흔적을 그대로 각인한다. 작가는 작업 속에서 고통스럽게, 또는 기꺼이 길을 잃는다. 그래서 임춘희의 작품 속에는 한 작품에 서너개의 작품이 깔려 있는 경우도 있다. 끝없는 자문자답이라는 예술의 본질적 물음을 생략하는 이들은 사회가 손쉽게 기대하는 바의 계몽이나 장식이라는 기능적 역할에 안주하곤 한다. 대답되기 힘든 질문에 매달리는 것은 생산으로 귀결될 전진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나무 oil on canvas, 181.2x227.3cm, 2015

 

나무그림자 oil on canvas, 91x116.8cm, 2014

 

그러한 태도는 기름기 도는 세련된 작품을 생산할지언정 살아있는 작품을 창조할 수는 없다. 그러나 예술은 다른 분야와 달리, 살아있는 것만 필요하다. 결국 소수자의 문제로 귀결된 예술가의 길은 엘리트주의나 특권의식이 아니라, 예술이 그것을 수행하거나 향유하는 인간에게 필연적 상황을 말한다. 그리고 그 상황은 영구적이지 않고 매번 갱신되어야 한다.  영도(零度)에서 매번 다시 시작해야 하는 예술은 저주이자 축복이다. 임춘희의 작품은 풍경, 또는 풍경이 있는 인물로, 누군가에게 ‘고백’(전시부제)한다. 작년에 제주에서의 레지던시 체험까지 함께 녹아있는 자연과의 협주는 작가로 하여금 자연을 흉내 내게 했는데, 그것은 자연을 있는 그대로 모사하는 것이 아니라,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는 자연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무 많은 것을 담으려다 아무것도 담지 못하는 무거운 그림을 벗어나 끝없이 내려놓고 비우려 한다. 제주와 남양주의 자연의 기운을 담은 임춘희의 최근작은 비움으로서 충만하다. 


그러나 소유와 축적이 욕망되는 시대에 비운다는 선택이나 설정은 불안하다. 물인지 하늘인지 알 수 없는 모호한 공간에 뚝 떨어져 있는 나무가 있는 작품 [내게서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을 보자. 잎 새들은 뭔가에 소스라치듯 놀란 듯 한쪽 방향으로 쭈뼛 서있고, 잎을 받쳐주는 나뭇가지는 인간의 가느다란 종아리가 떠오른다. 지인이 보내준 향나무 사진 한 장은 심연에 거꾸로 박힌 인간의 상황을 떠올리는 실존적 형상으로 변모했다. 그것을 더욱 확대한 듯한 작품 [나무]는 잎 새들 내부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드라마틱하게 표현한다. 어떤 부분은 부풀어 오르고 어떤 부분은 흘러간다. 어떤 부분은 농축되고 어떤 부분은 휘발된다. 나무라는 특정 형태를 넘어서, 보는 이의 상태에 따라 다양한 형상을 찾아낼 수도 있는 심리적 풍경이다. 작가는 소재와 색채를 한정지음으로서 오히려 다양함을 극대화했다. 자연의 이질적 국면이 극대화되어 있는 이 작품에는 자연의 맹렬한 생명력이 느껴지지만, 과도한 생명력은 죽음의 기호이기도 하다. 가령 한정을 모른 채 증식하는 암 세포 같은 것이 그렇다. 

 

고백(계수나무) gouache on canvas, 162x130cm, 2015


 

그러나 병적인 것도 생명의 일부이다. 이상(異常)은 정상보다 생명을 더 민감하게 드러낸다. 임춘희의 작품은 구상이 추상이 될 수 있고, 추상이 또 다른 구상을 떠올릴 수 있는 형상회화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이 같은 변화무쌍한 전이는 나무, 인간, 예술 모두에 관철되는 변신에 기인한다. 그것들은 상이한 여러 요소들의 집합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로베르 뒤마는 [나무의 철학]에서, 나무는 우리들의 눈앞에서 형상적 변이를 실현한다고 말한다. 형태의 가변성에 의해서 나무는 매우 다른 영역 속에서도 적절하게 적응하는 행운을 누린다. 창밖 잎 새들로부터 영감을 받은 작품 [나무그림자]는 동글동글한 형태로 채워져 좀 더 부드러운 느낌이다. 그러나 그것 역시 보이는 대상 내부로 침투한 미시적인 장면으로 다가온다. 그것은 초록 잎을 가능하게 한 투명 세포막 아래의 엽록소 알갱이처럼 보인다. 좀 더 크게는 씨앗이나 열매의 이미지로도 보인다. 식물을 지구상 최초의 생물체로 만든 것은 초록 엽록소이다. 


자크 브로스는 [식물의 역사와 신화]에서, 산소를 배출함으로서 호흡할 수 있는 공기층을 형성하여 지구에 생명체가 살 수 있도록 만든 것은 남조류라고 지적한다. 식물만이 태양광선 그 자체를 에너지원으로 활용한다. 식물은 생명의 에너지가 지상이 아닌 천상에서 오는 것임을 알려준다. 무기물을 유기물로, 무생물을 생물로, 비활성 물질을 생명체로 바꾸는 광합성 덕택에 창조의 모든 기적이 이루어질 수 있다. ‘탄산가스를 들어 마시고 복잡한 물질로 전환하는 동시에 대기를 산소로 재충전하는 생화학적 과정’(로베르 뒤마)은 식물의 엽록소가 모든 생명체의 근원임임을 증명한다. 이 작품은 비슷한 것이 바글대는 형상으로, 성장과 생식을 야기하는 세포분열이나 그 결과물인 열매 같은 풍성함을 떠올린다. 임춘희의 작품에서 지상의 기념비적인 존재인 나무가 완전히 분화된 형태를 갖춘 것은 많지 않다. 대부부분 초록 덩어리로서 나타나는 미분화된 상태이다. 식물의 본질처럼 드러나는 초록 덩어리들은 무엇으로도 변신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다.  

 


세상의 눈 oil on canvas, 130.3x162.2cm, 2015


눈동자 oil on paper, 21x29.7cm, 2013

 

한편 자연 속 인물은 그다지 편안하지 않다. 그것은 풍경에 자연의 이질적 국면이 드러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풍경자체가 표현이라는 맥락에서 본다면, 풍경 속 인물은 풍경 속의 풍경, 또는 인물 속의 인물(그리고 내 안의 나)이라고 할 수 있다. 작품 [눈동자]는 어두운 화면으로 머리가 쓱 올라오는(또는 내려가는) 것 같은 모습이다. 가면처럼 눈구멍이 뚫려있지만, 곤혹스러워하는 듯한 표정이 역력하다. 나무들 사이로 산책하는 여자가 보이는 작품 [고백(계수나무)]은 동글동글한 잎 새들이 완화시켜주기는 하지만 솟구치는 핏줄기같은 나뭇가지들이 그로테스크한 느낌이다. ‘상상은 나무’(바슐라르)라는 비유가 있듯이, 나뭇가지들이 뻗어나가는 방향은 마치 화면 속 인물의 상상이 복잡한 가지를 쳐 나가는 양상이다. 반대로 나뭇가지로 상징되는 상상이 가운데 인물을 찌르는 것 같기도 하다. 외계로 확장되는 상상이든 내면으로 모여드는 상상이든, 상상은 나뭇가지가 뻗어나가는 방식처럼 자연스럽다. 그 방식은 나뭇가지가 자라는 방식과 같은 차이와 반복이다. 


로베르 뒤마에 의하면, 나무는 몇 살을 먹었을지라도 완벽한 발달계획을 갖고 있는 초보적인 작은 식물의 구조를 반복한다. 그에 의하면 나무는 잎사귀를 달고 있는 잔가지의 체계로, 이전의 잔가지 위에 각각의 눈들을 마련하는 성장의 단위이다. 그래서 로베르 뒤마에게 나무는 반복적인 죽음의 원리를 회생의 원리로 변신시킨다고 평가된다. 쌓이는 것 없이 매번 다시 시작하곤 하는 임춘희의 막막한 작업방식과 식물의 성장은 유사한데가 있다. 이 그림은 걷는 인물이 양 옆의 나무처럼 지상의 굳건한 토대와 연결이 생략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붓만 잡고 있다고 그림이 저절로 그려지는 것이 아니듯, 자연에 있다고 해서 자연에 속해지지는 않는다. 불안이나 광기는 작업 도중이 아니라, (주객관적인 이유로)작업을 할 수 없을 때 발생한다. 작품 [세상의 눈]은 얼굴을 화면 앞으로 바짝 당겼다. 바가지탈처럼 생긴 딱딱한 머리에서 커다란 눈동자만이 얼굴의 특성을 남겨둔다. 

 


받아들이다 gouache on paper, 24x34.5cm, 2014


눈물 흘리는 사람 gouache on paper, 24x34.5cm, 2014

 

수풀과 수풀을 반영하는 물에 잠긴 채, 그러나 바깥이 궁금하여 눈을 크게 뜨고 있는 인물은 자신이 속한 환경과 같은 위장 색을 한 채 그 속에 숨어있다. 자연에서 위장색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죽음을 흉내 내는 것이다. 즉 배경과 같아지는 것이다. 살아있음이란 주변과 일정 정도의 경계를 가지는 것이라 할 때, 숨은 그림처럼 찾아내야 하는 인물은 죽음에 가까이 있다. 또는 죽음을 생각하게 할 만큼 약하고 위태롭다. 작품 [위로]는 이 전시의 거의 유일한 붉은 빛을 띠며 경고음처럼 다가온다. 작은 머리를 안고 있는 큰 손만큼이나 큰 눈망울에는 슬픔이 가득하다. 그것은 위험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어떻게 보호받고 위로받을 수 있는가를 절망적으로 묻는다. 길가에 떨어져 뭉개진 제주 동백꽃들로부터 영감을 받은 이 작품은 지난해 겪은 죽음의 경험이 반영됐다. 공격적인 사적 이익추구에 공동체의 공적 견제가 이루어지지 않는 위험사회에서 죽음은 편재한다. 초록빛 우주는 이 죽음을 극복하려는 기운을 대변한다. 


인류의 상상력에서 식물은 재생과 부활을 상징해왔기 때문이다. 조르쥬 나타프는 [상징, 기호, 표지]에서 다시 태어나기 위해 주기적으로 옷을 벗는 나무는 옛사람들에게는 땅과 물과 태양이 끊임없이 다시 태어나게 하는 살아있는 우주가 베푸는 무궁한 생명을 상징했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나무는 땅에서 하늘에 이르는 사다리이며 부활의 이미지로서의 십자가이고, 구세주를 그 열매로 하는 세계축의 이미지다. 땅 위로 드러나 보이는 나무의 부분은 땅과 하늘의 상징적인 연결부호로 생각되었다. 변화와 재생이라는 종교적이기까지 한 관념은 삶과 예술 모두에 관철되어야 하는 식물적 원리로 다가온다. 작품 [숨어있는 사람]은 두 나무가 마주서 있고 그 중 한 나무에 인물이 앉아있다. 나무와 인간 두 존재는 마주보고 있다. ‘나무에 비치는 것은 언제나 인간’(로베르 뒤마)이다. 그리고 신-인간이다. 그러나 임춘희에게 나무와 인간의 비유는 보다 내적이다. 그녀에게 작품은 나무줄기처럼 자신을 통과해야만 가능한 것이다. 작가에게 뿌리와 열매 보다 중요한 것은 줄기라는 매개이다. 

 


위로(분홍빛), oil on canvas, 72.7x60.6cm, 2014


숨어있는 사람 oil on canvas, 72.7x60.6cm, 2015

 

이 작품에서도 위장, 또는 동화는 여전하다. 나무 뒤, 또는 나무 그림자에 숨은 인물의 비율은 만화적이다. 그래서 인지 두 나무 사이에 걸쳐있는 희끄무레한 형상--그것은 두 나무 사이를 채우는 바다 위에 떠있는 구름이다--은 말풍선처럼 보인다. 매번 영도에서 시작하고자 하는 임춘희의 작업 스타일이나 태도를 생각한다면, 말풍선을 채울 말은 말없음표가 아닐까. 작년에 이어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그림으로 고백하려하지만 딱히 고백할게 없다. 작가는 작품 외에 할 말이 없다. 무엇을 표현했는가라고 물으면 그저 작품을 가리킬 수밖에 없다. 그것을 왜 그렸냐고 물으면, 자신도 그것이 왜 그리고 싶었는지 알고 싶어서 그렸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것은 작가가 아무 생각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과정을 통해서만 확실해지는 것이 예술이기 때문이다. 시작은 모호하지만 끝은 확실해질 수 있고, 시작은 분명하지만 끝은 모호해질 수 있는 것이 예술이다. 예술은 서로 다른 극점을 오고간다. 그래서 예술에서는 그토록 다름과 차이가 강조되곤 한다. 늘 그대로이면서 흔들리는 존재인 나무는 임춘희의 작품에서도 예술의 축도로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