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하는 전체의 조망

 

이선영(미술평론가)

 

도시, 또는 도시와 산수가 함께하는 권인경의 풍경은 그 다음 대목에서 어떻게 변주될지 모를 음악을 들을 때 같은 기대감과 역동감이 있다. 회오리는 치는 듯한 구도 뿐 아니라, 도시의 기조를 이루는 수직/수평의 구도에 충실한 작품 또한 그렇다. 작가가 한정지은 화면이라는 공간 안에는 다채로운 것들이 빼곡이 들어차 있으며, 그것들은 쉼 없이 움직인다. 큰 폭으로도 움직이지만, 제자리에서도 미동한다. 화면에 들어차 있는 다양한 구성단위들이 펼쳐지는 속도 또한 다양하다. 어느 구간에서는 천천히, 어느 구간에서는 빠르게 흐른다. 어느 부분은 조밀하고 어느 부분은 느슨하다. 한 작품에도 수많은 변곡점이 있으며, 예측할 수 없는 변화가 촉발되는 간극과 틈들이 산재한다. 현대식 빌딩과 깊은 자연 속 기암괴석 등이 근접해 있고 한 하늘에 해와 달이 공존하는 등, 풍경의 구성요소들은 이질적이고 복합적이다. 변화를 야기하는 것은 서로 낯선 것들 간의 공존과 상호작용이다.

 

저장된 파라다이스, 160×130cm, 한지에 고서꼴라쥬 수묵채색, 2013

 


Heart-land2014, 127×158cm, 한지에 수묵꼴라쥬, 아크릴, 2014

 

현기증을 자아낼 만큼의 역동적인 변화가운데도 부분들은 낱낱의 개별로 흩어지지 않는다. 시공간이 빠르게 펼쳐지든 느릿하게 펼쳐지든 헐거운 부분은 없다. 작가는 제각각의 연주자들을 빠짐없이 챙기고 전체를 지휘한다. 관객은 자신의 시선이 닿는 대로 풍경의 부분들을 따라가는 가운데, 작가가 보여주고자 하는 세상, 또는 자신도 모르게 보여지는 세계의 면면을 접하게 된다. 풍경의 보이지 않는 시간의 축을 따라가다 보면 계속 다른 세계들이 등장한다. 한 공간에 머물러 있다면 계속 다른 세계들이 다가온다. 방향감각과 시간감각은 곧잘 혼돈에 빠지게 하는 권인경의 풍경은 그자체가 미로 같다. 기능과 효율의 시대에 미로는 낭비로 생각된다. 그러나 자크 아탈리는 [미로]에서, 미로를 21세기의 키워드 중의 하나로 새로이 자리매김한다. 그에 의하면 미로는 시간을 절약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공략하고 소비하지만, 동시에 미로는 한정된 공간 안에 무수한 길을 만드는 것이다. 

 

아탈리에 의하면, 미로는 또한 여유 있게 보내는 시간을 말한다. 이것은 다른 사람들이 정해놓은 시간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의 시간을 찾는 것이다. 이렇게 미로의 장점을 생각하면, 길을 가다가 길을 잃어도 두렵지는 않다. 어차피 시점과 종점이 불확실한 삶에서 미로를 즐길 필요도 있다. 권인경의 작품에는 극적인 장면 전환이 주는 당혹감과 즐거움이 있다. 작가는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자랐기에, 작품 속 도시적 감각을 원천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아파트공화국’이라고 일컬어지는 한국의 중심지에서 아파트들이 생겨나는 것을 보고자란 세대이기에, 아파트 숲이나 빌딩 숲에 대한 시선은 내부자적이다. 작품 제목 중 ‘정감화된 공간’이 의미하는 바가 그것이다. 도시는 작가에게 제 2의 자연이며 ‘문명비판’의 대상이 되기에는 이미 깊이 개입되어 있는 것이다. 권인경의 작품에는 도시가 주는 활력이 있다. 도시의 매력은 변화이다. 변화가 반드시 바람직하지는 않을 것이다. 통상적으로 볼 때, 도시가 등장하는 현대의 예술작품은 우울하거나 비판적인 기운이 가득하다. 

 


시간의 공존(130, 192), 한지에 고서꼴라쥬 수묵채색, 2007

 


 동시적 공간, (130.3, 194), 한지에 고서꼴라쥬, 수묵채색, 2011

 

개발은 무차별적 파괴와 사회적 약자들의 유랑을 야기하곤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인은 결국 도시를 떠나 살 수 없으며, 지금 여기의 긍정적인 에너지를 취할 필요가 있다. 권인경은 변화를 작품 속에서 더욱 가속화한다. 그 변화가 좋은 것이다/나쁜 것이다는 식의 가치판단은 보류한다. 단지 그 변화를 가속시키고 거기에 몸을 실으며, 궁극적으로 우리가 어디에 도달하든 최종 목적지에 연연하지 않고 이동하는 과정 그 자체를 즐기려 한다. 작가에게 그림이란 그러한 이동 아닌 이동을 가능케 하는 수단이다. 정상적인 시공간 감각에 따른다면 혼란에 가깝지만, 화면이라는 주어진 공간 속 수많은 시공간의 편린들은 롤러코스터와도 같은 즐거운 혼돈을 야기한다. 괴로운 혼돈이 아닌 즐거운 혼돈의 세계, 그래서 몰입을 자아내는 세계는 예술과 놀이에서만 가능하다. 권인경이 화면 속에 많은 요소들을 끌어들이는 기본적인 방식은 꼴라주다. 사실은 도시 자체가 꼴라주다. 현실의 도시는 오래된 마을이 그러하듯이 서서히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단절과 간극, 접합이 비일비재하다. 

 

권인경은 꼴라주된 도시를 꼴라주 식으로 표현한다. 서로 다른 시공간의 단편을 접합시키는 것은 풀과 가위다. 꼴라주의 방식은 균질적 화면에 이질성이 틈입하게 한다. 수집된 고서나 직접 그린 수묵을 오려붙여 화면의 밀도와 강도를 조절한다. 꼴라주의 방식을 통해 무수히 주름 잡힌 자연의 결과 도시적 밀집을 표현한다. 작품 [시간의 공존](2007)과 [순간의 지속](2009)에서 꼴라주는 기존의 것이 허물어지고 전면적으로 새로이 지어지거나, 기존의 것에 덧대는 식의 구조변화를 강조한다. 권인경의 주조색인 푸른색은 하늘 또는 물로 다가오면서 그러한 변화가 일어나는 보다 근본적인 바탕이 되어준다. 무한과 영원을 떠올리는 푸른빛은 지금 여기의 자잘한 변화들을 상대화한다. 푸른색은 물처럼 대기처럼 끝없이 흐르지만 흐른다는 사실은 영원한 것이다. 도시를 이루는 요소들이 한 덩어리로 집합되어 있고, 그 주위를 푸른색이 감싸고 있는 작품 [정감화 된 공간](2010)은 푸른색이 가지는 완충작용을 보여준다. 

 


동시적 공간, 64130, 한지에 수묵채색, 2015

 


펼쳐진 집, 126, 156, 한지에 고서꼴라쥬, 수묵채색, 2013

 

그것은 마치 모태의 양수처럼 그 안에서 발생하는 갖가지 변화들을 정상과 성장으로 이끄는 듯하다. 어떤 작품들에서 변화는 급격하다. 작품 [동시적 공간](2011)을 보면, 그림이 걸려 있으며 스탠드가 켜있고, 책걸상이 있는 실내로부터 변화무쌍하게 뻗어나가는 시공간이 있다. 그림 속의 그림, 밤과 낮, 실내와 실외, 산수와 도시 등이 빠르게 돌아가는 영상처럼 휘몰아친다. 여기에서 푸른빛은 그림과 그림 속 그림을 넘나들면서 이질적 차원을 연결한다. 작품 [펼쳐진 집](2013) 위로 아래로 자라나는 빌딩과 집이 산수풍경과 연결된다. 아래서 올려다 본 풍경들이 가장자리에 배치된 작품 [정감화 된 공간](2010)에서 시점의 변화는 극과 극을 달린다. 작품 [경계의 바깥](2013)에서 육지, 하늘, 물을 가로지르는 길, 또는 다리는 바닥없는 심연 위에서 아찔하게 출렁인다. 복잡한 시점의 병렬은 일상의 요소로부터 온 것들에 환상성을 부여한다. 우리의 중력감각에 부응하여, 있음직한 풍경으로 보이는 작품들에도 또 다른 차원으로 통하는 변화의 문턱들은 강조된다. 

 

작품 [일상으로의 초대](2003)를 보면, 건물들 사이로 펼쳐진 또 다른 건물들이 모습을 드러내는데, 마치 홍해의 기적처럼 미지의 시공간으로 통하는 길이 쩍 열리는 듯하다. 권인경의 작품에서 안과 바깥은 어떠한 예고도 없이 자리를 바꾼다. 아파트나 빌딩처럼 보이는 구조물의 칸칸을 채우고 있는 것은 방들은 안에 해당되지만, 그것은 테두리 지워진 하나의 세계 속에 접혀있는 또 다른 세계들이며, 그림이라는 창은 풍경의 어법을 빌어서 각각의 세계를 병렬시킨다. 고서로 꼴라주 된 아파트의 공간 [공간의 층위들](2011)은 책의 페이지만큼이나 다양할 소우주를 칸막이 쳐진 방의 풍경으로 표현한다. 최근작품 [개인의 방4](2015)은 산의 실루엣 속에 불 밝히고 있는 각각의 방이 마치 밤하늘의 별처럼 빛난다. 개인들의 내면풍경이기도 할법한 각각의 방은 서로를 침해하지 않으며, 서로 다른 것들의 공존과 조화가 있는 다원적 우주를 형성한다. 권인경의 변화무쌍한 작품은 변화하지 않으면 도태되는 도시 체험을 표현하고 있지만, 고풍스러운 산수들 또한 포함되어 있다. 

 


정감화된 공간, 130×162cm, 한지에 고서꼴라쥬 수묵채색, 2010

 

일상으로의 초대, 162, 130, 한지에 수묵, OHP, 2003


근대 건축가들에게 수직수평으로 구획된 도시는 유토피아였고, 고전적 풍류가들에게 산수화 또한 유토피아였을 것이다. 그러나 권인경의 작품에서 이러한 서로 다른 유토피아의 공존은 헤테로피아를 낳는다. ‘어디에도 없는 곳’인 유토피아와 달리, 헤테로피아는 현실과 보다 가깝다. 누군가의 유토피아는 누군가에게는 디스토피아가 될 수 있다. 전 방위적으로 양극화가 가속화되고 있는 ‘자유주의’ 사회에서 모두에게 선하게 다가오는 보편적 가치는 점차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권인경의 작품은 ‘순수주의’—모더니즘이든 ‘정통 동양화’의 원리에 충실한 작품이든 간에—를 벗어나 헤테로피아적인 현실공간과 조우한다. 헤테로피아는 피라네시나 에셔의 작품 속 공간처럼 복잡하게 얽키고 설켜 있다. 역사주의에 바탕 한 근대의 유토피아주의는 근대의 파산과 더불어 상당한 타격을 받았다. 철과 유리, 콘크리트로 지어진 ‘국제양식’의 구조물이 가득한 곳을 아직도 유토피아로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유토피아 대신에 헤테로피아 또는 디스토피아가, 직선으로 뻥 뚫린 길 대신에 미로가 회귀하고 있는 시대가 바로 탈근대이다. 근대적 환상을 깨는데 커다란 기여를 한 철학자 질 들뢰즈는 ‘no where’(어디에도 없는 장소, 즉 상상적 유토피아)를 ‘now-here’로 변형했다. 들뢰즈는 ‘now-here’에 기원을 둔 단어 ‘에레혼(Erewhon)’을 원초적인 부재의 장소로 정의한다. 에레혼은 ‘위치를 바꾸고 위장하며 양상을 달리하고 언제나 새롭게 재창조되는 여기-지금’(들뢰즈)을 의미한다. 권인경의 작품에서 변화는 얼마나 고무되는지, 자연스럽게 흐르는 붓질마저도 꼴라주 되어 공간의 복잡성을 더한다. 광학적 공간은 촉각적으로 변주된다. 매순간 이질적 풍경들을 앞으로 당겨올 극적인 변화는 고취된다. 스펙터클의 사회에서, 도시 또한 물리적 공간이기 보다는 다양한 인터페이스, 극장과도 같은 곳이 되었다. 몽타주는 시공간의 편집에 기반을 둔 영화적 어법이다. 데이비드 노만 로도윅는 영화에 대한 생각을 담은 [질 들뢰즈의 시간기계]에서, 몽타주를 전체 속에서 변화를 표현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공간의 층위들, (88, 60), 한지에 고서꼴라쥬, 수묵채색, 2011.

 


개인의 방4, 18, 13.5, 골판지 위 먹, 아크릴, 2015


 

그것은 변화하는 전체를 조망하게 한다. 편집된 단편들에 압축된 시공간이 담겨있는 권인경의 작품에도 그러한 조망이 있다. 들뢰즈의 어법에서 총체와 전체는 다르다. 그의 철학을 미술과 비교하자면, 총체란 르네상스식의 원근법이나 19세기 리얼리즘의 세계관에 가깝다. 그러나 전체는 그러한 ‘유기적’ 질서를 가정하지 않는다. 전체는 집합되어 있을 뿐이다. 집합은 이접(離接)같은 예외적 접속을 고무한다. 여기에서 상하좌우 사이의 유기적 연결은 기대되지 않는다. 확장된 지금은 과거와 미래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동서고금의 지도를 참조하는 등, 복잡한 지형학적 설계들이 가득한 작품에는 틈과 간격들이 산재한다. 지형학은 물리적 공간에 한정되지 않는다. 슈테판 귄첼은 [토폴로지]에서, 좁은 의미에서의 지형학은 주로 지표면의 형태나 모양 그리고 특징들과 관련되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지리적 고저만이 아니라, 동식물의 서식, 인공물, 역사, 문화까지 포함하는 지역적 세부 내용들과 관련된다고 말한다. 

 

또한 권인경의 작품은 ‘공간적인 실체 혹은 연장 같은 측면 보다는 공간의 구조적인 측면 내지 공간들의 위치 관계들을 우선한다는 점’(슈테판 권첼)에서 위상학적이다. 이러한 공간개념은 공간에 대한 실체적 표상과 단절한다. 권인경의 작품 속 공간 또한 어디선가 조금씩 취해진 것이다. 현실에서 온 것이지만 현실은 아니다. 있음직한 현실로 재탄생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변형이고, 변형이 가능하려면 간격이 요구된다. 시간적 간극에는 기억이 공간적 간극에는 지각이 끼어든다. 이러한 복잡한 공간 속에서 현재와 미래는 물론이거니와 과거 또한 불확실한 것으로 간주된다. 과거-현재-미래가 전제하는 선형적인 인과론은 자리를 잡지 못한다. 직선이 아닌 길에서 앞으로의 진전은 미래를 보장하지 않는다. 다양한 곡률로 이루어진 휘어진 공간 속에서 앞과 뒤, 빠름과 느림이라는 기준은 쓸모가 없다. 미로적 시공간에서 기대는 과거와 결합할 수 있고, 기억은 미래와 결합할 수도 있다. 여기에서는 갑작스러운 조우가 있을 뿐이며, 이렇게 맞딱뜨린 현실에 대한 끝없는 해석이 있을 뿐이다. 

 

출전; OCI미술관 창작스튜디오 비평가 매칭 프로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