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속을 거니는 체험
이선영(미술평론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얼마 전까지 전시된 지니 서(jinnie seo)의 설치작품 [유선사(遊仙詞)]는 작가의 관심이 동양화까지 뻗어있음을 알려준다. 그것은 그림 속의 공간으로 들어가서 그 안에서 소요하고 싶다는 욕망이 3차원 상에서 구현된 것이다. 그림, 특히 동양화의 이상향적 공간은 관객으로 하여금 그림 속의 작은 인물이 되어 상상으로 그 안을 거닐 수 있게 한다. 실경 뿐 아니라 관념에 바탕 하는 동양화는 그 크기가 아무리 작아도 유한 속의 무한을 느끼기에 충분할 만큼의 시공간적 수용성이 있다. 이 잠재적 시공간을 3차원 상에서 현실화하기 위해 설치미술가는 화가와는 또 다른 과정을 거쳐야 한다.

Wandering Still
2015
The National Museum ofModern and Contemporary Art, Seoul
Hand-woven translucentplastic straw structure: 25 x 5m,straws, silicon strings
Hand-made Korean ricepaper: 200 pieces in total: 108 x 86cm, 108 x 57cm,
108 x 29cm

Wandering Still
지니 서에게 그것은 작품의 구성요소를 확정하고 조합, 구축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보통 동양화에서는 움직이는 시점을 이동 중인 등장인물들의 반복적 묘사를 통해 암시하곤 한다. 이편에 있던 사람이 저편에 또 한번 배치되는 공간상의 차이는 시간상의 차이 또한 알려주는 것이다. 그림 속의 산책자는 새벽녘에 그림의 전경에 나타났다가 저녁 무렵에 그림의 후경쯤에서 화면 밖으로 나갈 것이다. 지니 서는 이러한 그림 속 상상의 이동을 실제의 공간 속에서 구현한다. 그것은 단지 벽에 걸려 있을 뿐인 회화에서 자신이 느꼈던 답답함을 해소하기 위해서이다.
아마도 나날이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기술문명은 상상을 더욱 실제 감 있게 재현하기 위해 가상(또는 증강)현실 기기를 활용할 것이다. 현대 미술가들 또한 첨단에 서서 현대의 기술문명이 추동하는 스펙터클과 경쟁한다. 지니 서의 작품은 기본적으로 드로잉에 바탕을 두고 있다. 재현으로부터 벗어난 자유로운 선의 움직임에는 시간성이 개입되어 있다. 끝없이 펼쳐지는 병풍을 닮은 작가의 작은 스케치북들처럼, 어디에서 시작되어 어디를 향하는지 모르는 정처 없는 선들은 기기묘묘한 형상과 공간을 탄생시킨다.

Wandering Still

Wandering Still
가장 보편적인 미술의 형식인 그림이나 조각이 움직이지 않는 공간적 양식임을 염두에 둘 때, 선의 움직임에는 닫혀있는 공간을 열어 놓는 효과를 준다. 게다가 드로잉에 바탕 한 회화는 한 겹이 아니라 여러 겹으로 되어 있어서, 그 사이의 공간 또한 풍부한 잠재성이 있다. 작가는 캔버스라는 평면이 아니라, 공간 전체를 캔버스 삼아 그리게 된다. 화가에서 설치미술가로의 변신이다. 그림 내부에 있었던 잠재적 시공간을 현실화시키려는 의도에서 출발한 지니 서의 설치미술은 관객으로 하여금 그 안을 걸으면서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지각적 체험을 일깨운다.
최근 작품 [유선사]는 한지 장판을 둘둘 말아 산처럼 세우고, 플라스틱 빨대를 투명 실리콘 줄로 하나하나 엮어서 구름처럼 띄워놓았다. 자연, 또는 자연에 바탕 한 예술—작품 [유선사]는 강희안의 산수화와 허난설헌의 시로부터 영감을 받은 것이다—은 일종의 무대 연출로 변형된다. 실제로 지니 서는 자신의 활동무대를 미술계에 한정짓지 않고, 무대 디자인이나 오페라 의상제작 등에도 참여한 바 있다. 그림이 실제의 무대가 되기 위해서는 현장의 공간적 상황과 긴밀하게 대화가 필요하다. 어디선가 완성된 것을 단지 걸면 그만인 그림과 달리, 설치작품은 대개 설치 기간이 충분치 않기 때문에, 현장을 면밀하게 파악한 이후에는 완벽한 도면을 가지고 진행해야 한다. 설치작업은 그림과 달리, 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도면은 필수적이다.

endof the Rainbow
2009
Mongin Art Center,Seoul
Dimension variable
Steel net and steelbands

end of the Rainbow
이번 작품의 경우에는 동양화적인 즉흥성이 살아있다는 점이 이전의 설치작품과 다르다. 빨대로 만들어진 사각형이 확장되어 있는 구름 부분은 12미터 높이의 천정으로부터 관객의 머리 위 공간까지 복잡한 실루엣을 늘어뜨린 채 드리워져 있으며, 둥글게 말아 자석으로 고정시킨 한지 장판 역시 그 단면이 제각각이다. 그림의 요소를 현실 속에 세우기 위해서는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엄격한 구축적 원리가 요구되지만, 계획이 그저 실행된 결과에 머물 때, 훌륭한 예술작품의 필요조건만 충족시킨다고 할 수 있다. 충분조건이 성립되려면, 완벽한 구상에 플러스 알파가 있어야 한다. 훌륭한 예술작품에는 고안과 계획 이외에, 도약과 비약의 부분이 있는 것이다.
최근작에서 구름을 떠올리는 형태 뿐 아니라, ‘storm’(2008), ‘end of rainbow’(2009), ‘wave’(2012) 등과 같은 그동안의 작품 제목을 보면, 기상처럼 예측하기 힘든 현상에 대한 은유와 유동적 구조의 결합 방식이 지속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작품 [유선사]에서, 종이와 빨대 같은 평범한 일상의 재료가 산수의 요소가 되기 위해서 기하학은 유기적 속성을 포함해야 했다. 그렇게 해서 약간의 부피를 가진 직선으로 이루어진 물건은 경계나 모서리가 없는 구름이 되었고, 전통 바닥장식재는 자신의 고유한 향을 공간에 흘리면서 벌떡 일어나 있는 것이다. 한지 장판과 빨대로 그려진 또 다른 산수화는 선택된 구성요소의 조합을 통해 확장성을 가진다.

end of the Rainbow

end of the Rainbow
십 여 년 전에 발표한 작품들(2003년 갤러리 사간, 2004년 브레인팩토리)은 기하학적이거나 유기적인 선들로 이루어진 회화의 층들을 하나하나 떼어내 공간에 걸어 놓은 것 같은 효과를 주었다. 지니 서의 기하학에는 유기성이, 유기성에는 기하학이 내재되어 있다. 그것은 생명과 예술의 공통적 속성이다. 레드 계열이나 블루 계열로 칠해진 종이를 잘라내어 공간에 설치한 것들은 앙리 마티스의 말년 작업인 종이를 잘라 만든 드로잉을 떠오르게 하는 단순하고도 강렬한 작품들이다. 그것이 평면을 넘어 환경의 차원으로 고양된다. 푸른 계열로 이루어진 작품은 서늘한 기하학적 이성이, 붉은 계열로 이루어진 작품은 약동하는 생명의 기운이 느껴진다. 2차원과 3차원 간의 변환은 그리기와 자르기 간의 역동적인 호환성에서 비롯된다.
가령 소마미술관(2006)이나 싱가포르 국립 미술관(2008), 스페이스 공명(2012) 등에서, 시트 지를 이용하여 건물의 피막을 변화무쌍하게 연출하는 작품들은 주어진 공간에 대한 철저한 탐구의 결과이다. 브레인팩토리에서의 작품 [red chamber](2004)의 경우, 그림의 요소들이 3차원 상으로 다 뛰쳐나온 상황이었기에 벽은 특별한 쓸모를 찾지 못해 벽화로 채워졌다. 미술관 내벽은 혈관 속 붉은 세포 같은 것들이 출렁이는 듯하다. 그림도 마찬가지지만, 추상 언어의 힘이 극대화된 작품에서 관객은 서늘하거나 따스한 공간으로 밀어 넣어진다. 최근의 작품에서는 유기적, 또는 기하학적 추상화가 산수화로 바뀌었을 뿐이다. 드로잉의 공간적 변주는 눈만이 아니라 몸으로 느끼는, 정지된 시점이 아니라 움직이면서 다가오는 다양한 시점들을 낳았다.

Red Chamber
2004
Wall drawing: 18m L x 3.7m W x 2.5m H
House paint, charcoal,chalk on wall
Paper - cutinstallation : 5 paper panels
240cm x 131cm each
Acrylic on paper

Red Chamber
1994년에 한국에 정착한 이후에도 자유롭게 세계 곳곳에서 작업을 해왔던 작가에게 머무름보다는 이동, 그것도 끝없는 이동은 작품에도 깊이 스며든다. 이동은 작가의 이력에서도 발견된다. 지니 서는 조형예술을 전공하기 전에 생물학을 전공했다. 생물학적 배경은 작품에서 시간성을 중시하는 것으로 나타났을 것이다. 태어나 자라고 복제하며 죽는 생명은 무엇보다도 시간을 통해서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그것은 설치미술이라는 것이 고정된 시점이 아닌, 시간을 통한 경과를 중시하는 점과 닿아있다. 그것은 기존의 것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매순간 새로이 발생하는 것들에 주목한다. 반면 형식주의는 일순간 고정된 공간적 관계를 물신화한다. 형식주의가 잃어버린 것이 바로 시간성이다. 영원성을 중시하는 관념적 전통들 역시 시간성을 억압했다.
리처드 테일러는 [형이상학]에서 생성되거나 소멸되는 그 무엇으로 감지되는 세계의 시간적 차원을 형이상학자들은 무시했다고 지적한다. 시간은 움직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그들의 비전과 맞아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형이상학자들은 시간을 비실재적이라고 하거나 일종의 환상이라고 공언했다. 특히 저자는 생명과 시간의 관계를 강조한다. 그에 의하면, 세상이 생명 없는 곳으로 변해 버린다면 시간의 경과는 아무 의미도 담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생명이 없는 현실 전체, 즉 삶을 제외한 세계 전체는 역사나 의미가 없는 세계이다. 이 생명이 없는 세계는 시계 바늘이 없는 시계와 닮았다. 시간의 개념은 변화의 개념과 분리될 수 없다.

Red Chamber

Red Chamber
물론 변화는 좋은 것만 포함되지 않는다. 가령, 필자가 인상 깊게 보았던 지니 서의 작품이 전시된 공간들은 모두 사라졌다. [유선사]가 전시된 공간도 얼마 전에야 생겨났다. 현존(現存)이라는 단어가 암시하듯, 시간과 공간은 관련이 있다. 리차드 테일러는 우리의 기본적인 시간개념이 발생하는, 지구와 달, 그리고 태양 사이의 규칙적으로 변화하는 관계로부터 나온 것임을 강조한다. 이러한 관점에 의하면, 모든 시간적 관계들은 단순히 흐르는 강의 이미지가 아니라, 규칙적이고 반복적인 지구, 달, 해의 상대적인 배치인 배경에 비교되어 설정된다. 시간을 타는 공간적 관계를 통해서 오감을 일깨우는 설치미술가들은 고전주의를 특징 지웠던 변치 않는 영원성에 고착되지 않는다. 지니 서는 어릴 적 엄마와 만나고 이별하기를 반복했던 공항 같은 과도적인 공간을 좋아한다. 길을 잃을 정도로 정처 없이 걷는 것도 좋아한다.
2009년 몽인 아트센터에서의 전시 ‘end of the rainbow’는 보이기는 하지만 가닿을 수 없는 끝없는 과정에 대한 비유로 무지개라는 은유를 사용했다. 그것은 직선 또는 곡선의 금속으로 공간을 구획하고 미로처럼 관객을 헤매게 만든 작품이다. 거기에는 목적지에 단번에 도달하는 지름길이 아니라, 과정 그 자체를 향유하려는 태도가 있다. 작품 속에 보이지 않는 길을 내서 그 위를 거닐게 만드는 그녀의 작업은 시간 속에서 움직이는 신체를 억압하는 현대문명에 대한 대안으로 다가온다. 아파트를 비롯한 닫힌 공간 속에서 비슷한 일과 여가를 보내고 있는 현대인, 더구나 정보시대가 펼쳐지면서 눈과 손가락만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감옥 속에 갇혀있는 현대인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육체적 감각의 회복이다. 지니 서의 설치 작품은 이러한 육체적 지각을 활성화한다.
출전; 설화수 매거진 9-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