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욱진의 심플(SIMPLE) 정신”, 그 현대적 변용

  

이선영(미술평론가)

  

장욱진 하면 떠오르는 대표이미지는 집과 길, 나무와 새, 소와 개, 그리고 해와 달, 그리고 그 안팎에 있는 사람들이다. 바탕은 여백같이 펼쳐진 평면이다. 그러한 소재들은 한 둘, 또는 여럿이 조합을 이루면서 단순한 선과 색으로 형상화되었다. 그의 작품에서 풍기는 정서는 솔직함과 소박함, 그리고 따뜻함이다. 그는 아이가 그린 그림이나 낙서와 같이 천진난만한 어법으로 인간을 둘러싼 상징적 우주의 아늑함을 표현했다. 장욱진 화백은 평소에 늘 ‘simple’을 말했다고 전해진다. 그의 예술 정신을 계승하는 현대의 작가를 논구함에 있어 던져진 ‘simple’ 이라는 키워드는 작품 내용이나 형식의 소소한 유사점을 넘어서 삶과 예술의 기조를 자연에 놓는 태도를 생각하게 한다. 복잡다단한 사회생활에 지쳐가는 현대인이 근본으로 돌아가고자 했을 때 ‘자연스럽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이 비롯된 자연일 것이다. 자연에는 자연의 법칙과 과정이 모두 포함된다. 




자연은 인간이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는 진리를 보여준다. 그러한 진리는 허무주의보다는 사회의 규칙이 제공할 수 없는 근본적인 평등의 가치를 생각하게 한다. 예술을 통해서 부와 명성을 비롯한 사회적 인정을 구하고자하는 욕망이 제도라는 인위적 장치를 통해  확대 재생산될수록 삶과 예술의 초심을 견지했던 선구자들이 빛난다. 장욱진의 작품들을 되돌아 보건데 그러한 초심을 평생 지속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동양화처럼 단촐한 선으로 표현된 그의 작품에는 동양화를 설명하는데 가장 많이 인용된다는 노장사상, 무위자연이 있다. 그 어법은 매우 친근하게 다가온다. 그러나 사회는 그의 시대보다 더욱 복잡해졌다. 예술은 복마전같은 사회의 규칙에서 예외여야하지 않을까에 대한 기대치가 있지만, 갈수록 경쟁이 가속화되는 인간사회에서 예외적 영역을 기대한다는 사실 자체가 부자연스럽다. 자연은 다양성과 풍부함의 무한한 원천이 되어 주긴 하지만, 자연의 법칙은 단순하다. 


인간에 의해 (재)발견된 자연의 법칙 역시 단순하게 나타난다. 대개 위대한 발견과 관련된 자연과학 논문의 페이지 수는 얼마 안 된다. 수학이나 물리학은 더 단순하게 표현된 수식일수록 더 고차원적임을 보여준다. 자연법칙에 관한한 단순할수록 더 많은 진리를 포괄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예술은 자연이 아니며, 자연의 법칙은 더더욱 아니다. 예술 역시 일종의 언어이며, 언어는 자연과 대조되는 문화의 영역에 속한다. 예술의 형식이 매우 엄격하게 지켜지는 순간에도, 예술은 인간사회가 창안한 규칙에 불과하다. 자연 그 자체나 자연의 법칙을 통달하는 것은 이미 인간의 영역을 초월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술은 자연으로 대변될 수 있는 원초적 실재에 접근하는 몇 안 되는 인간의 방식이기도 하다. 자연적 실재와 조응하는 예술적 실재 역시 과학이나 종교가 가지고 있는 위상과 필연성이 있다. 장욱진 화백에게 있어 단순함의 실현은 모더니즘에서 전형적으로 발견되듯, 화면의 평면성으로 나타나는 그림의 본질로의 회귀, 또는 환원 같은 방식은 아니었다. 


모더니즘은 후기로 갈수록 실재를 자연과 분리된 조형언어에 한정하는 경향에 기울어졌으며, 그 귀결은 텅 빈 캔버스나 이런저런 질감을 가지는 벽이었다. 특히 환원이라는 방식은 단순함의 부정적 측면이다. 자연과 멀어지는 사이에 미술은 대중과 멀어졌고,  필연성 없는 게임을 보호해줄 제도의 힘을 더욱 기대했다. 제도 속에 안주하고 제도를 통해서만 연명할 수 있는 예술은 단순함과는 거리가 멀다. 단순함의 가치는 단순함 그 자체에 있지는 않다. 단순한 것을 단순하게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복잡한 것을 단순하게 변환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결과는 피상적 단순함이 아닌, 내포적 단순함이다. 훌륭한 예술작품은 더 많은 현실과 진실을 함축하면서도 그 입구나 출구는 단순하다. 뛰어난 시나 격언, 공식에서 발견되는 바와 같은 단순함이다. 특히 자연과학(이전에는 자연철학)의 언어는 대중적으로 쉽게 이해할 수는 없지만, 기술처럼 그것이 적용된 결과는 보편적이다. 자연과학은 그 어떤 분야보다 보편적 진리를 추구한다. 보편적인 것은 단순하다. 가령 고대에 자연은 레고 블록같은 원자나 읽어야할 책으로 은유되곤 하였다. 고대의 원자론자들은 원자와 원자가 운동하는 허공을 자연의 본질로 보았다. 장 살렘은 [고대 원자론]에서 에피쿠로스, 루크레티우스 그리고 그들 이전에 데모크리토스는 존재는 하나이면서 동시에 산재한다는 자연학 위에 그들의 철학을 세웠다고 말한다. 


고대 원자론자들은 놀라우리만치 근대적인 방식으로 미립자의 진리를, 모든 것이 본질적으로 불연속적이라고 직관했다. 원자론자들에 의하면 탄생은 결합이요 죽음은 해체다. 그리고 우리가 지각하는 물체들 사이의 차이는 그것들을 구성하는 원소들의 형태, 배열, 위치의 차이로 귀결된다. [고대 원자론]에 의하면, 자연(physis)을 설명하는 임무를 맡고 있는 것은 철학의 한 부분인 자연학이다. 자연학(물리학)은 적어도 17세기까지 철학의 일부로 간주되었다. 고전역학을 정초한 뉴턴이 쓴 주저의 제목은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들](1682)이었다. 뉴턴이나 갈릴레오 갈릴레이같은 근대 과학자가 읽은 ‘우주라는 완전한 책(grand book)’은 수학의 언어로 씌여 있었다. 수학의 언어인 이유는 그들이 물리학자였기 때문일 것이다. 기하학자 콕세터의 전기를 쓴 시오반 로버츠는 [무한 공간의 왕]에서 ‘위대한 발견들은 모두 대단히 단순하다. 콕세터의 책들은 우아하고도 간단한 말로 사물을 설명한다’고 평가한 바 있다. 


기하학자로 하여금 일상생활의 혼란을 벗어나 예술적 심미성의 세계로 인도한 것은 대칭을 비롯한 단순한 패턴들이었다. 물리학적 법칙과 사회 규칙을 연결시켜 생각하는 저자 필립 볼은 [물리학으로 보는 사회]에서, ‘어느 학문 분야의 이론 연구에서든 주된 목표들 중의 하나는 대상이 가장 단순하게 보이는 시각을 찾아내는 것’임을 강조한다. 단순함은 소통의 전략에 있어서도 유효하다. 복잡함의 사막 속에서 단순함의 오아시스를 찾는 현대인들에게, 대안의 세계로 통하는 입구는 단순할수록 매력적이다. 입구가 너무 구식의 은유라면 인터페이스라고 해두자. 인터페이스가 단순하면서도 무한대로 열리는 창 같은 예술이 있을 수 있다. 다양한 해석학적 상상력, 대화적 상상력을 일깨우는 작품의 인터페이스는 장황하지 않다. 반대로 복잡에서 복잡으로 끝나는 작품들은 ‘도대체, 왜’라는 질문을 낳게 할 뿐이다. 상품이 자신의 모든 매력을 표면에 띄워놓는 경향이 있는 반면, 예술은 차츰차츰 단계별로 풀려나갈 풍부한 내용을 함축한다. 아래에 소개하는 12명 작가의 작품은 그러한 의미에서 ‘심플’하다. 그들의 작품은 매우 다양하지만, 작품의 핵심에 단순함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최성임


최성임은 일상적인 재료로 삶의 무늬를 짠다. 가령, 작품 [황금이불]은 화려한 카리스마를 연상시키는 작품 제목을 가지고 있지만, 번쩍거리는 일회용 포장 끈으로 짠 덮개이다. 신체를 포근히 감싸는 섬유로 짜여 지지 않은 금속성 덮개는 죽음이나 부장품 같은 분위기가 있다. 황금 이불에서 봉긋 솟아오른 굴곡 면들은 무덤을 떠오르게 한다. 그것들은 일상의 사물과 매우 닮아있으면서도 필요로부터 멀리 벗어나 있다. 소소한 유용성으로부터 벗어난 이 낯선 사물들은 팽팽한 긴장감으로 잔뜩 날이 서있다. 가학 피학적이다 싶은 작업 방법론은 삶, 그리고 예술과 함께 하는 삶이 야기하는 상처가 감추어져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피 흘리는 현실이 아니라, 삶의 무늬로 고양된다. 최성임의 드로잉은 두서없이 끝없는 과정만 있다. 축 늘어지거나 주름져 있는 그들의 선은,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중요한 기원으로부터 출발하여 어떤 목적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강한 지향성이 발견되지는 않는다고 해서 맥 빠진 형상들에 불과한 것은 아니다. 드로잉에는 기승전결이 없는 그 막연한 이야기를 끝없이 이어가겠다는 의지가 느껴진다. 최성임의 작품에는 부재를 메우려는 끝없는 일 또는 놀이, 그리고 근본적 결핍을 채우려는 끝없는 보충이 있다.

   

이안 리


하얀 종이 위에 빠르게 그은 선으로 이루어지는 이안 리(Ian Lee)의 작품은 언뜻 동양화의 필획. 또는 그러한 필획들을 추상화한 것처럼 보인다. 거기에는 먹과 여백을 상기시키는 흑백의 대조, 그리고 절도 있는 흔적이 만들어내는 형상이 있기 때문이다. 정자, 올챙이, 물고기, 원자, 혜성, 때로는 인간까지도 떠오르는 꼬리가 길게 빠지고 양쪽에 지느러미나 손, 또는 분출된 액체나 기체처럼 보이는 곁가지를 단 형상은 먹의 농도나 손의 완급조절로 만들어진다. 그가 사용하는 종이는 달력 따위를 인쇄하는 미끌거리는 아트지이며, 붓 대신에 사용된 것은 손이나 손바닥이다. 그의 작품은 파도가 휩쓸어 가면 곧 지워질 모래 위에 그어진 낙서 같은 소박함으로부터 시작한다. 매끈한 빈 종이위에서 먹물을 윤활유 삼아 미끄러지듯 나아가는 그의 작품은 파도나 바람이 매번 지워주기에 매번 깨끗해지는 빈 판에서 또다시 놀이를 시작하는 듯한 홀가분함이 있다.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자유 외에 그 어떤 것도 될 수 없었던 무위의 행위들은 무한한 몰입을 낳는 놀이 그 자체이며, 그러한 행위가 무엇을 표현하고 의미하는 것은 그다음 일이다. 작가에게 매순간 다르게 흐르는 몸과 정신의 에너지를 낱낱이 받아주는 것이 바로 예술이다. 

  

하상림


하상림의 작품은 자연의 선을 뽑아 축조한 세계이다. 평면회화에서 이러한 생생한 느낌이 가능한 것은 인공적인 조형언어의 힘이 극대화되었을 뿐 아니라, 자칫 정제된 형식이나 구조로 굳어질 수 있는 언어를 활성화시킬 수 있는 독특한 대상과의 만남에서 비롯된다. 여행을 통해 만난 식물을 사진으로 찍고 컴퓨터를 활용하여 식물의 선을 추출하고, 이렇게 빼낸 선을 강렬한 대조로 표현한다. 작가의 눈길이 닿은 지상의 피조물에서 빼지도 보태지도 않았지만, 추상적 바탕에 가득 펼쳐놓은 선은 단순한 외관을 넘어 살아있는 생명 에너지가 흐르는 내부의 체계 또한 표현한다. 이런저런 선별과 강조점에 의해 자연의 형태와 과정이, 겉과 속이 동시에 투명하게 드러난다. 마치 X-레이 사진처럼 풀을 지탱하는 크고 작은 뼈대들이 낱낱이 드러나는 작품 속의 생명, 즉 바람 불면 눕고 가물거나 계절이 바뀌면 말라붙을 연약한 존재들은 겉보기와 다른 굳건한 구조를 가졌다. 누구에게 보여 지기 위해 피고 지는 것이 아닌, 지상의 작은 피조물들을 화면 전면에 주인공으로 일으켜 세운다. 풀을 그림으로서 더욱 겸허해졌을 작가는 불교신자로서, 동물에 비해 에너지 소모가 적은 경제적 기능체계를 갖춘 식물에 끌렸을 것이다. 

  

임춘희


방전된 것이 충전 되면 붉은 빛이 녹색 빛으로 변하듯이, 임춘희의 초록빛 가득한 작품들은 도시적 삶이 야기하는 긴장과 피로로부터 벗어나 재생과 치유를 향한다. 식물은 최소한의 에너지로 버틸 수 있는 자생적 존재지만, 동시에 지구를 살 수 있는 곳으로 만든 근원적 존재이기도 하다. 식물적 삶은 동물의 극적이고 역동적인 삶에 가려져 있지만, 조용하고 지속적으로 이 세계의 삶을 가능하도록 이끄는 원동력이 되어왔다. 특히 그 세계에서 초록을 입은 대표적인 상징인 나무는 인간(나)을 포함한 모든 자연적 과정을 압축하여 재생하는 우주로 다가온다. 그림 역시 이 우주에 속한다. 인간이라는 자연이 그림이라는 또 다른 자연에 자연을 담는다. 삼중의 동어반복, 또는 순환은 작가 스스로를 원점에 되돌려놓곤 한다. 개념적이거나 눈에 띄는 한 가지 방법론에 통달하는 ‘전문가적인’ 방식과는 거리가 있는 임춘희의 ‘아마추어적인’ 작업은 아주 빠르거나 아주 더디게 진행된다. 영도(零度)에서 매번 다시 시작해야 하는 예술은 저주이자 축복이다. 소유와 축적이 욕망되는 시대에 비운다는 선택이나 설정은 불안하지만, 작가는 너무 많은 것을 담으려다 아무것도 담지 못하는 무거운 그림을 벗어나 끝없이 내려놓고 비우려 한다. 

 

고진한


고진한이 최근에 그리고 있는 사과들은 정물화의 전형적 수법이 아니라, 캔버스 틀에 약간 외곽선이 잘려져 있을 만큼 가까이 당겨져 있으면서도 멀리 있어 보인다. 작품 속 사과는 화면 가득히 포착되어 있지만 베일처럼 드리워진 두터운 공기층 뒤편에 놓여있는 가상으로서의 위상을 숨기지 않는다. 캔버스라는 사각 공간 속의 거대한 사과는 단순함과 불가해함이 공존한다. 고진한의 사과는 주변에 편재하지만, 그것을 본격적으로 알려하면, 뒤로 쓱 빠지는 사물의 면모가 있다. 그의 사과는 흔한 대상이다. 그것은 굴러다니는 돌멩이 같은 것이고, 사람으로 치면 철수나 영희 같은, 또는 알파벳만으로 호명되는 카프카적 인물이다. 고진한은 명확한 개념(그리고 그것의 상징적 의미)으로부터 최대한 멀어지려 한다. 미묘한 굴곡 면과 색채에 실려 오는 사과에는 중력에 의해 휘어진 우주공간, 화이트홀과 블랙홀, 노을과 오로라, 사막과 공백, 피부와 살덩어리, 항성이나 또 다른 과일 등이 숨어있는 듯하다. 단순하고 정적으로 보이는 대상에는 대지나 바다, 하늘같은 변화무쌍함이 있다. 그것은 단순함 속에 있는 풍부함, 하나 속에 있는 여럿, 유한 속에 있는 무한, 확실성 속의 불확실성이다. 그것은 재현이 아니라, 순수하게 감각적인 것, 순수하게 가시적인 것의 제시이다. 

 

박찬민


기하학적인 정글이라할 만한 그의 도시풍경은 과도하게 현실적이어서 초현실적으로 보이는 지점들이 있다. 좀 다르게 보일 뿐, 여전히 현실에 바탕 한 현실을 지시하는 그의 사진은 분명한 참조대상을 가지기에 비판적일 수 있다. 작가는 현대인이 이미 세뇌되고 중독되어 감지할 수 없는 모순을 가장 흔한 대상을 통해 드러낸다. 그가 선택한 것은 지엽적 소재가 아니라, 일종의 시스템이다. 사진 역시 그림처럼 3차원을 2차원에 넣는 기술이며, 궁극적으로 평면적이지만 작가는 사진의 속성과 평평화 되고 있는 세계를 중첩시킨다. 모든 것의 즉각적인 소비를 위해 바짝 당겨지고 상호간섭 또한 극대화된 세계는 평평하다. 모든 것이 상품, 또는 코드가 되어 일렬로 정렬될 수 있는 시대는 평평하다. 평평함은 시간과 공간이 압축된 결과이다. 박찬민의 도시풍경은 시간-공간의 압축에 의해 마치 꼴라주같이 보인다. 도시경관에서 구조자체를 변경하는 일은 없다. 글자나 창문을 지우는 등의 간단한 조치가 전부이다. 포토샵이 많이 사용되지 않는 이유는 허구보다는 현실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작가는 추상적인 매트릭스의 공간을 우리의 일상적 공간에서 찾아가면서 현대의 삶을 틀 짓는 구조를 가시화한다. 

  

윤명순


윤명순의 [하루, 욕망하는 풍경] 시리즈는 무게와 부피를 대폭 덜어내고 선이라는 최소한의 물질적 구조로 만들어졌지만, 정겨운 삶의 터전을 표현하는데 모자람이 없다. 금속이지만 따뜻한 느낌을 주는 동 선들을 용접하여 공간에 드로잉 하듯이 구축한 마을 풍경들은 추상적 공간이 아닌, 구체적 자리들이다. 윙윙거리며 움직이는 기계장치를 부착하지 않은 단촐한 작품은 시시각각 변하는 형태화의 과정이 있다. 규모가 커지면 작업보다는 작업을 가능케 하는 맥락--타인의 노동력을 동원하는 문제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자본, 조직 등--에 더 신경을 써야 하고, 결국은 작업의 지속가능성과 작품의 밀도가 불확실해진다. 좁다란 골목길 사이사이로 연결된 오래된 집들은 가로 세로의 투명한 좌표축을 따라 정의되는 아파트가 보편화된 한국 사회의 추상적인 주거양식에 비교한다면 불투명하다. 오래된 자연을 닮은 깊은 색감과 두들길 때 끈적거리는 물성을 가지는 용접된 동선은 총괄적인 계획에 의해서가 아니라, 옆에서 옆으로 그때그때의 상황에 맞게 증식한다. 제목에 포함되어있는 ‘욕망’처럼 사방팔방으로 뻗어나갈 수 있는 불확실한 방향성을 가진다. 멈추지 않고 흐를 것만을 욕망하는 윤명순의 작품은 자연처럼 자라나려는 야망이 있다. 

    

윤정희


윤정희의 작품은 실처럼 가느다란 동선으로 성글 게 짠 둥그스름한 구조물들이 편재한다. 여러 겹으로 이루어진 덩어리 뿐 아니라, 동질이상을 이루는 일련의 것들은 증식하는 것 같은 환영을 만든다. 세포 같은 모습을 한 덩어리들은 생명의 축소판으로, 생명의 먼 기원을 알려주는 원시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들은 거대 유기체보다 환경변화에 유연하게 반응한다. 여러 겹의 층을 이루는 표면들은 선으로 엮여있는 망들은 최소의 부피에 최대의 표면을 함축하는 구조이다. 망은 최대한 펼쳐진 표면을 의미하며, 생명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윤정희의 작품은 단순하지만, 단지 단순함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내포적 다양성과 외연의 확장으로 이어진다. 촉촉하면서도 따스해 보이는 덩어리들은 세포에서 어머니-지구까지 생명으로서의 자연이라는 은유로 확장된다. 윤정희의 작업은 기본적으로 여성들의 오랜 노동이자 예술이기도 했던 뜨개질 같은 방식으로 진행되지만, 생명 및 인공생명을 포괄하는 네트워크의 비유 또한 강력하다. 기술은 과거의 딱딱한 외관을 버리고 생명과 보다 자연스럽게 접속할 수 있는 인터페이스를 갖추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음을 염두에 둘 때, 윤정희의 작품은 첨단적인 것일수록 근본적인 것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려준다.  


장용선


장용선의 작품에서 여러 크기의 지름으로 잘려진 스테인레스스틸 관들을 하나의 세포로 삼아 확장된 표면들은 유기적 형태를 갖춘다. 작은 금속관들을 용접으로 도포하여 만들어진 판은 완전한 개체라기보다는 그 출발이 되는 씨앗의 형상이다. 생명의 씨앗은 크게 확대된 모양새여서 고래, 정자, 낙엽, 조개, 여성의 성기 같은 것이 연상되기도 한다. 소우주와 대우주를 관통하여 유비의 그물망을 증식시키는 그의 작품은 에머슨이 [자연]에서 ‘자연이 별, 모래, 불, 물, 수목, 인간 따위로 다양한 조합을 늘려가더라도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재료로부터 만들어진 것’이라는 문장을 떠오르게 한다. 하나의 표면 또는 여러 겹의 표면으로 이루어진 크고 작은 덩어리 안팎에서 출렁이는 섬모는 유전자 구조처럼 나선형으로 꼬여 있다. 그것은 구조이자 형태, 내부이자 외부, 대상이자 과정이다. 자연을 구조적으로 모방하는 단위인 작은 금속 원들은 물질과 에너지를 최대한 머금을 수 있으며, 생명의 자기항상성을 유지하는 견고한 형태를 이룬다. 생명은 그저 생존하는 것을 넘어서, 적극적으로 물질과 에너지를 교환하고 움직이고 변화한다. 작품의 단위를 이루는 둥근 빈 형태는 견고성과 유연성을 동시에 가진다. 그것은 예술과 자연 모두가 열려진 계임을 알려준다.  

  

위세복                        


커다란 보석같은 느낌을 주는 위세복의 조각은 내부의 반사면으로 더욱 빛난다. 그의 작품은 몇 가지 변주들이 있지만, 정다각형 금속조각을 용접하여 입체를 만들고, 그 내부에 또 다른 구를 넣어 무한 반사면을 만들어내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다각형 조합물인 입체들은 모서리가 부드럽게 처리되어 있어 금속 특유의 날카로움 대신에, 풀잎 위의 이슬처럼 부드러운 표면장력으로 빛을 머금고 있다. 작품의 기본 방식은 두께 3mm의 스레인레스 스틸 판으로 만든 구인데, 이 난이도 높은 작업에서 용접과 표면 연마는 기본적인 과정이다. 그것은 지상 또는 외부와의 닿는 면적을 최소화 한 채 내부에서 무한대로 파열한다.  그의 작품에서 생명은 외양이 아니라, 내재율로 표현되고 있다. 반사면을 통해 작은 형태로 부서지는 프랙탈 이미지는 해안선이나 눈송이 곡선같은 물리적인 현상은 물론 유기체의 세계에도 적용된다. 거울 효과를 통한 무한 반사작용이 이루어지는 작품에는 프랙탈의 핵심인 자체 유사성(self-similarity)이 있다. 라이프니츠가 상상했듯, 한 개의 물방울에 생명으로 가득 차 있는 우주전체가 들어있고, 다시 그 우주 속에는 물방울이 들어있고, 그 물방울에는 새로운 우주가 들어있는 세계가 위세복의 작품에서도 펼쳐진다. 

 

조재영


조재영은 전체(U)에서 무엇인가 빠진(-A) 나머지를 표현한다. 정상과 상식의 몫에 세상이 부여하는 중요함을 생각한다면, 그것을 뺀 나머지들은 비정상적이고 주변적인 것이다. 작가는 한정된 전체(U)라는 무한의 차집합에서 또 다른 무한을 본다. 그리고 그 나머지 것들을 주인공으로 전면화한다. 핵심은 관객의 눈앞에서 사라지고 유령 같은 것이 되며 주변적인 것은 긍정적인 방식으로 형태화된다. ‘차집합’으로 지시되는 타자적 이질성을 조형적으로 가시화하는 조재영의 방식은 사뭇 엄밀하다. 작가는 전통적 조각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덩어리보다 그것을 싸는 표면, 또는 공간에 관심을 갖는다. 덩어리는 하나지만 껍데기는 많을 수 있다. 이전에는 이러한 다양성이 진리가 아닌 거짓으로 폄하되었지만, 바야흐로 하나의 본질이란 것이 의심에 붙여지는 시대가 왔다. 조재영의 3차원적 다면체(polyhedra)들은 꽤나 까다로워 보이지만, 확실한 무엇으로 환원되기를 거부한다. 거기에는 기준 자체를 다르게 적용시켜 배치된 또 다른 질서, 현실의 어떤 공간과 닮았는데 어슷하게 다른, 상황 논리에 따라 가변적인 기하학이 있다. 고전주의는 한계에 낭만주의는 무한에 충실하다고 지적된다. 그러나 조재영의 작품은 고전주의처럼 자를 사용하면서도 무한이 가능함을 보여준다. 

 

정윤진


정윤진에게 화이트 큐브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하는 지각의 실험실이다. 그것은 모든 것을 보이게 만들고 그것을 분절화, 코드화 시켜 하나하나 가격을 매기며, 이러한 그물망에 포착되지 않은 것들은 없는 것으로 치부하는 생산과 소비의 시대에 역행한다. 지각의 실험을 위해 새로이 좌표축이 설정된 전시장 속 또 다른 공간에서는 명암과 형태의 미세한 변화도 적지 않은 파장과 울림을 낳는다. 하얀 사각 공간 속에서 서서히 돌아가는 하얀 원은 만다라를 입체로 구현시킨 듯, 명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원근법적 공간에서 공중에 매달린 후프가 제자리에서 돌면서, 형태는 공간 저편으로 조금씩 사라지며, 어느 순간 직선이 되어 공간에서 완전히 사라진듯하다가 다시 둥근 형태로 자라난다. 하나의 형태는 관찰자의 위치와 시간대에 따라 원, 타원, 직선 등의 방식으로 변형되며, 마치 일식이나 월식, 특히 금환식(金環蝕) 같은 천체 현상처럼 나타남과 사라짐을 주기적으로 반복한다. 작품의 출발이 된 것은 하늘이다. 빛으로 가득한 하늘은 무한함, 신비함, 신성함이라는 상징을 포함한다.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 사이의 관계에 대한 실험의 장, 이 실험무대를 완결 짓는 것은 신이 세상을 창조했을 때 제일 먼저 명령 했던 ‘빛이 있으라’의 그 빛이다.

 

출전; 양주시립 장욱진미술관 제1회 학술 세미나-'장욱진의 simple 정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