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기계
이선영(미술평론가)
인간은 점차 기계화되고 있고, 기계는 인간의 지위를 넘보고 있는 현대에 기계와 인간이 어느 때보다도 가까워진다. 기계가 인간 정신의 외화라면, 인간의 몸에도 기계가 있다. 인간도 기계처럼 냉정하고 정확해야 경쟁력이 있다고 간주되며, 기계적인 것일수록 인간적인 것을 더 살갑게 흉내 낸다. 인간/기계에 대한 상상은 데카르트나 라 메트리 이래, 근대적 사고에 있어왔던 것이다. 미셀 푸코의 [감옥의 역사; 감시와 처벌]에 의하면, 라 메트리의 [기계-인간]은 정신의 유물론적인 환원인 동시에 훈육에 관한 일반이론이기도한데, 그 중심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분석 가능한 신체에 조작 가능한 신체를 결부시키는 순종이라는 개념이다. 복종시킬 수 있고, 쓰임새가 있으며 변화시킬 수 있고 나아가서는 완전하게 만들 수 있는 신체가 바로 순종하는 신체이다. 그런 의미에서 라 메트리의 자동인형은 권력이 축약된 모델이다. 그러나 그러한 근대적 사고가 보다 구체화, 전면화 되는 것은 현대에 와서다.

Untitled Mixed media Dimensions variable 2012

眠眠 II (sleep) Mixed media Dimensions variable 2015
서울과 대전에서 선보인 홍기원의 최근 몇 년간의 작품들에는 기계들이 많이 등장한다. 디즈니랜드의 놀이기구를 떠올리는 알록달록한 기구들(2009), 전자저울(2012, 2015), 배구기계(2015), 지게차(2015) 등이 그것이다. 그가 최첨단 기계를 활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작품의 형식이나 메시지에 기계라는 존재방식이 차지하는 위치는 상당하다. 대개 풍자적이거나 단순한 메커니즘에 의존하는 작품 속 기계는 보다 근사한 스펙터클의 창조를 위한 것은 아니다. 그런 것을 원하면 자동차를 비롯한 최신 기계들이 출시되는 곳을 가보면 된다. 그의 작품에서 기계는 인간의 신체를 떠올리거나 몸과 상호작용하는 매체로 나타난다. 로우 테크에 의존하는 원시적 기계일수록 몸과의 비유는 더 직접적이다. 2012년 브레인팩토리에서의 작품은 건물 전체가 기계로 작동하는 경우이다. 보이는 것이라곤 작은 전광판 밖에 없는 횡 한 전시장에 들어선 관객이 딛고 서 있는 바닥이 저울이다.
처음엔 맞은편에 뜬 숫자의 의미를 잘 모르지만 그것이 몸무게라는 사실을 안 순간 심리적 변화는 미묘하다. 전시장이라는 공적 장소에서 자기 몸무게가 낱낱이 드러날 때 당황하는 것은 몸무게에 민감한 이들에 한정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몸은 이제 단순한 자연이 아니라, 권력과 자본이 집중하는 보이지 않는 치열한 전쟁터다. 그 작품은 몸무게에 한정된 것이었지만, 자기와 관련된 어떤 숫자가 공공 영역에서 즉각 뜬다는 것은 권력의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숫자는 ‘내 점수가 몆 점이다’라는 아이의 사고부터 ‘내 몸값이 얼마다’라는 성인의 사고까지를 관통하는 보편적인 기준이다. 그 외에도 수많은 수치들이 개인을 규정할 수 있는데, 그것은 빅 데이터가 되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대변하게 될 것이다. 저울은 몸을 객관적 대상으로 재현하는 것이다. 잴 수 없는 것까지 모두 저울대에 올려놓으려는 체계의 총체적인 기획이 있다. 홍기원의 작품 속 저울에는 ‘객관’, ‘대상’, ‘재현’이라는 가치가 기계에 들러붙어있다.

Untitled Forklift, pallet, jack,objects, painting on metal frame Mixed media Dimensions variable 2015

P.E class Bldc motors and controller, steel,volleyball 261 x 155 x 77 cm2015

Do not jump! Sewing leather letter on net, trampoline 100 x 340 x 340 cm 2015
정의의 여신은 저울을 들고 있다. 저울 자체는 투명할 수 있겠지만, 그 맥락과 의미가 투명한 것은 아니다. 해부학이나 현미경을 통해 인간의 몸이 보다 투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근대다. 미셀 푸코는 [임상의학의 탄생]에서, 임상의학의 탄생으로 기본적으로 볼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된 대상이 명쾌한 의학적 시선 안에서 포착되었다고 말한다. 의학사에서 최초로 모든 사물에 대해 자신을 개방하는 순간이 온 것이다. 그것은 점차 어둠으로부터 광명의 빛을 찾아 나오는 모든 권력, 알고 결정하는 시선, 즉 지배하려는 시선이다. 계몽정신의 막강한 힘은 어둠의 왕국에 새로운 시선의 왕국을 세워 놓는 것이다. 홍기원의 작품에서 전광판에 즉각 뜨는 숫자는 몸을 가시성의 장으로 안내한다. 미셀 푸코는 18세기 말, 근대의학의 탄생에서 구체적 인간의 몸을 합리적 언어에 접목시키려는 의도를 읽는다. 임상의학은 대상이 드러나는 장을 완전히 새롭게 코드화 하는 것이다.
테미예술창작센터에서의 작품은 좀 더 극적이다. [眠眠 II (sleep)](2015)라는 제목을 가진 이 작품은 무대 막처럼 어두운 커튼까지 처진 공간에서 숫자는 여전히 바닥을 디딘 관객(들)의 몸무게를 반영하지만, 막에 투영된 숫자의 크기는 훨씬 크고 눈에 잘 띈다. 마주보는 두 숫자는 마치 경기의 스코어 같은 대결의 느낌을 준다. 11월 초에 오픈한 ‘불균형한 균형’ 전에 나온 작품에는 지게차가 등장한다. 기둥까지 있는 실내에 1.5톤의 지게차를 운전하는 것도 그렇지만, 전시장 한 켠에 대기하고 있다가 소지한 오브제와 함께 지게차로 들려질 때 짐으로 환원된 인간이 받는 압박은 크다. 3미터 천정에 가까워질수록 인간-짐은 자세를 변화시켜야 할 것이다. 지게차에 들린 사람이 들고 있는 동글동글한 유리 오브제는 인간과 마찬가지로 강한 기계적 힘에 의해 산산조각이 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른 한켠에서 작품을 들고 서 있는 또 다른 사람은 그 과정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심란하다.

6.2009 Mixed media Dimensions variable 2009

14.2.2010 + Suspicion media Dimensions variable 2010~2011

Oh, Boy! Mixed media180 x 45 x 45 cm 2011
마치 주사 맞는 순서 기다리는 아이같은 심정일 것이다. 이러한 시련은 소수의 당사자보다 주변인에게 미칠 육체적, 심리적 영향은 크다. 그 과정이 불가피하다면 더욱 그렇다. 인생자체가 이렇게 시험대에 오르는 과정의 연속이다. 다음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은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몸을 변화시킬 것인가를 궁리할 것이다. 자기 수족을 움직이듯이 능숙하게 지게차를 다룰 수 있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 아니고선 운전 또한 조심스러울 것이다. 공사장에 있다면 눈에 띄지도 않을 단순한 도구가 학습관이자 전시장인 장소에 옮겨지자 도구는 중성적인 속성을 버린다. 작가는 기계가 놓이는 맥락을 달리함으로서 인간과 기계, 주체와 객체 간의 관계를 드러낸다. 그 작품은 작가 말대로 ‘움직임, 신체, 공간, 그리고 기억의 관계를 실험하는 시도’다. 이런 저런 기계를 활용해야 하는 인간의 노동은 공간 속에서 신체가 어떻게 위치지어지고 움직여지는지를 보여준다.
제품으로도 나와 있는 야구기계를 응용한 작품 [P.E class](2015)는 배구공을 넣으면 앞으로 발사되어 맞은편에 있는 이가 받아치도록 되는 구조다. 정숙해야 하는 규율적 공간인 학습관/전시장에서 퉁탕거리는 시끄러운 기계는 지게차만큼이나 버거우며 저항감을 준다. 던지고 받고 하는 인간적 상호관계에 기계가 개입되었을 때의 잔인한 측면이 있다. 기계는 우선 편리함이나 생산성으로 인지되어 있고 그것의 역기능은 생각되지 않는다. 믿믿한 인터페이스만 반짝거리는 날렵한 기계들의 시대에 작가가 동원하는 둔탁한 기계들은 기계라는 매개자의 물질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비좁은 공간 안에서 받기 힘든 공이 계속 공이 던져지는 게임은 위협적일 것이다. 그것은 현대의 인간적 상황에 대한 비유이다. 배구기계라 특정한 기구는 스포츠같은 전형적인 한 분야를 떠올리게 한다. 규칙이 확실하게 공유되는 스포츠는 예술보다 훨씬 대중적이고 보편적이다. 그것은 경쟁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와 조응하는 면이 있다.

Beth you can have me Mixed media 230 x 90 x 85 cm 2011
또한 오늘날 스포츠는 과학이다. 운동선수는 운동하는 기계이다. 훈련과정부터 기록에 이르기까지 기계와 몸이 하나가 될 정도로 단련된 이만이 대중의 갈채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놀이의 세계도 예외는 아니다. 디즈니랜드의 놀이기구로부터 영감을 받은 2009년에서 2011년 사이의 작품들은 동선 하나하나에 이윤이 매겨지는 놀이공원의 메커니즘을 풍자적으로 표현했다. 유치찬란한 색으로 뒤덮여 있지만, 그 기구들은 훈련이나 노동의 기구와 유사해 보인다. 이윤과 곧바로 연결될 수 있는 재미는 대중문화의 영역이지만, 예술은 이윤과 재미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의미를 묻는다. 뒤샹이나 피카비아, 팅겔리 같은 미술사의 선례를 가지는 홍기원의 풍자적 예술 기계는 인간이 창조한 기계가 다시 인간을 창조하는 부조리한 시대를 예견한다. 그의 작품에서 다양한 기계들은 큰 덩치를 차지하는 것만은 아니다.
2011년 독일의 레지던시에서 발표한 작품 [Zeitgeist]에 등장하는 줄넘기는 기계적 움직임을 낳을 수 있는 가장 단순한 기구일 것이다. 물건을 들고서 줄넘기를 하는 사람들은 매우 불편하고 힘들 것이다. 뭔가 잔뜩 이고지고 제자리 뜀을 하는 사람들은 반복되는 일상을 감내하는 현대인을 닮았다. 더구나 그들은 줄넘기 하면서 뭔가 말하기를 요구받는데, 뛰면서 하는 말이라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 힘들다. 몸도 그렇고 언어도 그렇고 그것들이 정상적으로 작동할 때는 의식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몸이 아프거나, 낯선 언어이거나 하는 상황에 맞딱뜨리면 그것의 불투명성이 단번에 드러난다.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일정정도의 자율성을 확보한 이후, 언어와 몸은 하나의 두 측면이라고 할만큼 밀접하다. 기호화될 수 없는 것까지 기호화하는 시대에 몸은 기호의 산물로 나타난다. 하나의 총체적인 시스템의 사회 속에서 기호나 신호를 오독하면 몸 자체가 위험해 질 수 있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들은 즉각적이다.

Zeitgeist Video 02;42 2011

Untitled C-print 60 x 45 cm 2015
기계는 즉각적인 피드백을 주기에, 기계와 공(共)진화하는 인간도 그러한 속도에 맞춰야 할 것이다. 즉각적인 소통의 시대, 소통은 현대 예술의 화두를 넘어서 생존의 문제가 되었다. 현실에 거리감을 둠으로서 현실에 대해 발언하거나 현실을 변형시키는 행위는 예술의 방식이다. 예술이 현실을 단순히 반영할 때 예술의 언어는 거울이나 창문처럼 투명한 것이지만, 현실을 변형하려 할 때 예술의 언어는 불투명해진다. 홍기원의 작업실에 잔뜩 붙어있는 평면작품들은 불투명한 언어의 정점에 있다. 그것들에서 어떤 가닥이 현실 속에 구체화될지는 작가 스스로도 가늠하기 힘들 것이다. 작업에서의 불확실성은 설렘과 불안을 동시에 낳는다. 물건 놓는 받침대 위에 엉거주춤하게 서있는 작가의 모습은 그가 20대에 겪었던 낙상사고의 결과이기도 하다. 그 때 하반신을 다친 그는 남들이 불편하게 여기는 자세가 편한 자세가 될 정도로 몸의 변형을 겪었다. 홍기원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기계 또한 꾸준한 재활치료 때 그가 접속해야만 했던 기계들의 영향으로 생각된다.
몸의 불편함과 물리 치료과정은 몸 역시 기계일수도 있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했을 것이다. 기계는 그에게 치명적 트라우마를 떠올리는 것이기에 감추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방식은 다양했지만 기계들은 계속 나오고 있다. 그의 작품에서 기계는 억압을 뚫고 유령처럼 출몰한다. 홍기원은 인위적인 것보다 자연적인 것을 사랑하는 부류지만, 예술에서 중요한 것은 의식적 선택이 아니라 무의식적 선택이다. 기계에서 떠오르는 죽음 및 죽음의 그림자는 삶으로부터 떼어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불가피한 것이다. 물리적 기계가 아니더라도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일상의 삶에서 우리는 죽음을 느낀다. 가령 저 지게차는 얼마나 많은 사고를 일으켰으며 얼마나 많은 노동자를 해고시켰을까, 저 저울 아래서 얼마나 많은 속임수가 벌어 졌으며 얼마나 많은 여성들로 하여금 자신의 몸을 학대하게 하였을까를 생각하게 된다. 저 기계들은 인간의 자연적 몸을 노동과 유희에 적합하도록 변화시켰을 것이다.

Reverse I Paint and object on canvas 26 x 23 cm 2013~2014

Untitled Paint and found objects onmetal plate 50 x 50 cm 2015

Untitled Paint on copper plate 20.5 x 30 cm 2015
인간의 몸은 자연인만큼이나 문화의 산물이다. 엘리자베스 그로츠는 [뫼비우스 띠로서의 몸]에서 푸코적인 주제를 발전시킨다. 그에 의하면 일반적으로 몸은 자연적인 것이자 기본적으로 생물학적인 것이며, 문화이전의 위상을 차지하며 사회적 역사적 문화적인 제요소들로부터 면제된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육체는 권력의 요청에 적응함으로서 자연적인 부분을 점차 축소시킨다. 몸은 문화적인 요청에 적합하거나 부적절한 몸이 된다. 푸코에게 몸은 권력의 대상이며 표적이자 도구이고, 권력을 작동시키는 가장 거대한 투자의 장이다. 몸은 한없이 다양한 문화적인 요청에 따라 무한한 방식으로 이용될 수 있다. 인간의 몸에 각인되는 것은 규율이다. ‘자연인’이라는 개념이 무색하게, 그러한 사회적 각인들에 의해 몸이 구성되고 생산된다. 미셀 푸코의 [감옥의 역사; 감시와 처벌]에 의하면 신체의 활동에 대한 면밀한 통제를 가능케 하고 체력의 지속적인 복종을 확보하며, 체력에 순종-효용의 관계를 강제하는 방법이 바로 규율이다.
규율은 단지 개인의 신체를 배분하고 그것으로부터 시간을 추출하여 축적하는 기술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힘을 조합하여 효율적인 장치를 만들어내는 기술이다. 신체는 다양한 부분으로 이루어진 기계장치의 부품처럼 조직되는 것이다. 푸코는 어떻게 개개인의 시간을 자본화하여 그것을 활용하고 통제할 수 있도록 각 개인의 신체나 힘이나 능력 속에 축적시킬 수 있을 것인가, 이익을 가져다주는 시간의 흐름은 어떻게 조립하는가, 공간을 분석하고 모든 활동을 분해하여 재편성하는 규율은 또한 시간을 가산하여 자본화하기 위한 장치로서 이해되는가를 묻는다. 몸은 감시와 억압이 지배하는 노동의 영역을 벗어나 스스로 욕망하고 조절하는 ‘자아 생산의 테크닉’(푸코)의 단계로 변모한다. 홍기원의 작품은 권력으로 작동하는 기계적 영역과 이러한 생산/통제를 벗어나려는 몸의 길항관계를 드러내고 있다.
출전; 대전 테미예술창작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