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드러움에서 단단함으로, 실체에서 관계로
이선영(미술평론가)
클레이아크 김해 미술관에서 열린 작가 Laura Mergoni(1982- , Italy)의 전시는 돌로 만들어진 선반위에 유기체적인 형태가 얹혀있는 형식으로, 전시를 위한 좌대와 덩어리를 합쳐 벽에 붙은 설치물로 연출했다. 화이트 큐브를 배경으로 공중 좌대에 놓여 둥 떠 있는 비슷한 형태들은 띄엄띄엄 떨어져 있다. 작가에 의하면 그것은 달에 대한 자기만의 해석이다. 작가의 기분에 따라 달은 달리 보일 것이다. 고전주의의 상징이 태양이라면 낭만주의의 상징은 달이다. 이성보다 감성의 편에 선 달은 태양보다 더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며, 인간의 상상력을 고무해왔다. 백남준이 달에게서 텔레비전이나 비디오 같은 이미지를 상상했듯이, 로라는 달에게서 매번 달라지는 형세가 있는 작은 무대들을 본다. 어느 것을 1막으로 보고 어느 것을 마지막 무대로 볼 것인지는 관객의 선택에 달려있다. 그 내부를 자세히 보면, 선반 바닥은 바다나 호수처럼 푸른색으로 칠해져 있고 나머지는 하얗다.

클레이아크 김해미술관 전시전경
특정할 수 없는 외곽선이 몽실거리는 형태들은 마치 구름처럼도 보인다. 지구의 관점에서 볼 때 달과 물의 관계는 긴밀하다. 달은 밀물과 썰물 등, 해수의 운동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물아래 복잡하게 주름 잡힌 형태는 이국적인 외계의 지형을 형상화한다. 멀리서 바라본 고층 건물이 각각 칸막이 쳐진 방으로 나뉘어 있는 소우주처럼 보이듯이, 이 세계도 단자(monad)적 우주처럼 각자 그렇게 존재한다. 선반 역할을 하는 형태는 아래의 지형적 구조와 연결되어 깍아 지른 절벽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그녀의 작품은 고독함에 위험한 느낌까지 준다. 처음에는 부드럽고 말랑말랑 했을 것이지만, 고온을 거쳐 자기화 된 흙은 마치 사진처럼 어떤 시공간을 살아있는 채 고정시킨다. 유기적 형태가 서로 치대고 있는 것이, 마치 고대의 폼페이 화산 폭발로 갑자기 최후의 날을 맞은 사체들이 엉겨 있는 듯한 모습이다.
사랑하는 모습같기도 하고 싸우는 모습 같기도 하다. 삶과 죽음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사랑과 증오는 한 감정의 두 측면이다. 선반 위에 있는 그 수수께끼 같은 것들은 레지던시를 위해 온 한국의 미술관과 사무실 등에서 수집된 버려진 물건으로부터 왔다. 버려진 양말, 장갑 등을 세라믹 액에 담근 후 가마에 넣어 고온으로 구우면 알맹이는 타버리고 겉에 발린 흙 부분만 형태화 된다. 천을 세라믹액에 담그는 순간 형태는 어느 정도 변하겠지만, 애초의 흐물거리는 형태는 세라믹으로 반영구화된다. 마치 튀김이나 얼음, 순간적인 응고물이나 살아있는 화석같은 느낌이다. 천과 세라믹의 만남은 부드러움과 딱딱함을 연결시킨다. 작가는 자신이 유럽인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이원론적인 관계에 익숙하다고 말한다. 물론 그녀의 작품에서 두 항은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작용한다. 오브제를 활용한 선반 윗부분은 우연히 붙어있게 된 것들이지만, 선반 아래는 마치 만두를 빚듯 흙 판을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붙여가며 형태를 만든 것이다.


무의식에 해당하는 하부구조는 분리되어 있는 것들을 융합하려 한다. 또는 꿈처럼 자기들끼리 알아서 붙는다. 그러나 간극은 남아있다. 대개 잃어버리면 꼭 한 짝씩 잃어버리며, 사용된 후 뒤집혀진 채 볼 쌍 사납게 방치되곤 하는 양말이나 장갑은 몸과 행위의 흔적이 남아있는 사물로 작가의 관심을 끈다. 메르스가 유행했을 때 한국에 온 작가는 마스크도 양말이나 장갑 대열에 포함시켰다. 타자와의 접촉에 대한 공포를 대대적으로 불러일으켰던 메르스는 각자이면서도 함께여야 하는 사회가 얼마나 힘들게 유지되는지를 알려주었다. 작업실에서 작가가 그동안 모은 타인들의 양말과 장갑 한 꾸러미를 두려움 없이 바라볼 수 있는 것은 현재는 돌림병이 잦아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 때 누군가의 뜨거운 신체에 밀착해 있었지만 이제 차갑게 버려진 것들은 보호와 위험을 동시에 암시한다. 그것은 한 때 동일자의 신체를 보호했던 것이지만, 타자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다.
위험은 가장 가까이 있는 곳에서 야기될 수 있는 것이다. 그 오브제들은 하나의 사물에 투사된 양가 감정을 보여준다. 작가는 그 감정을 가장 구체적인 오브제로 가장 구체적인 몸의 감각에 호소한다. 각자 외따로 존재하는 별, 그리고 버려진(또는 잃어버린) 물건들의 조합, 흔적만 남은 형태 등, 작가가 선택한 소재와 기법에는 삶에서 비롯된 강렬한 감정이 녹아있다. 젊은 예술가에게 그러한 감정을 낳는 가장 강력한 것은 사랑과 예술일 것이다. 어떤 이에게는 사랑과 예술이 완전히 중첩된다. 바닥에 놓여있는 또 다른 작품 [간극]은 벽돌이 빠진 벽을 형상화했다. 뻥 뚫린 마음처럼 상실감을 주는 형태다. 하얀 뼈대로 보이는 것은 벽돌을 연결시켜주는 재료인 모타르인데, 작품에는 연결망만 남아있는 상태다. 알맹이는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아있는 다른 작품들처럼 말이다. 그녀의 작업실에 있는 하얗고 얇은 도자기들도 스크린 같은 느낌을 준다.

(참고작품) Re dis cover White clay 20×20×15cm 2014

(참고작품) Re dis cover White clay 30×10×15cm 2014
전시실의 작품 또한 관객으로 하여금 텅 빈 하얀 구조물에 뭔가를 투사하도록 한다. 도자 작업을 하러 한국에 왔지만, 로라는 원래 자기 작품의 50%가 영상이라고 말한다. 그녀가 ‘video drawing’이라고 말하는 방식은 투사된 영상 위에 드로잉을 하는 과정이다. 처음에는 영화로 시작되었지만, 나중에는 자기가 찍은 영상이 바탕이 되었다. ‘홍상수 감독 영화 같은 정적인 화면’(작가)과 액션 영화에서의 반응은 다를 것이다. 러닝 타임은 같다. 영상이 1시간이면 드로잉도 1시간이다. 영상이 실재를 참조하는 허상이라면, 로라의 비디오 드로잉은 허상에 또 다른 허상을 추가한다. 이러한 과정을 끝없이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작가는 비디오 드로잉 작업을 통해서 이미지의 움직임과 흐름을 따라간다. 같은 것이 나오지는 않지만, 막연한 상상보다는 선재하는 것들과의 대화가 중요시 된다. 최초의 참조대상은 사라지고 관계만이 남는다는 점은 영상, 드로잉, 세라믹 작품에 일관된다.
A와 B가 합쳐지지만, A도 B도 아닌 것이 남는다. 관객은 현재 남아있는 흔적을 통해 본래의 참조대상을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최초의 출발 지(시)점이 사라지지만, 버려진 물건, 영상 등으로 선택되는 구체적 대상은 상상이 뻗어나가기 위한 출발이다. 대상과 주체를 연결하는 것은 상상이다. 로라의 작품에는 상상의 대상이며, 상상하는 주체가 있다. 상상 속에서 서로는 합일점을 가질지 모르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그 간극이 남아있다. 그래서 그녀의 전시작품 중 하나는 아예 간극만으로도 바닥에 우뚝 서있는 것이다. 타국에서의 그리움이 달이라는 무대에 투사되듯, 관객과 마주 서 있는 인간을 닮은 그것은 모든 인간관계에 내재된 간극을 드러낸다. 인간관계 중 그러한 간극이 가장 강렬하게 체감되는 것은 사랑이다. 안과 밖이 다르고, 위아래가 다르며 아름답지만 위태로운 로라의 작품은 사랑에 대한 은유로 다가온다.

미란 보조비치는 [암흑지점]에서, 사랑을 스피노자와 라캉의 관점에서 해석한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사랑을 낳는 것은 바로 사랑하는 자인 타자가 내안에서 보는 것과 사랑받는 자인 내가 나 자신에 관해 상상하는 것 사이의 근본적인 불일치에서 생겨난다는 사실은 사랑이 상상에 많이 의존함을 알려준다. 타자는 자율적 존재이기 보다는 주체의 상상을 위한 빈 스크린이 되는 것이다. 스크린에 비춰지는 것은 자신이다. 작가는 그(녀)를 그리지만 실은 자신을 그린다. 캔버스는 거울이 된다. 미란 보조비치는 사랑의 나르시시즘적 특징을 강조한다. 사랑은 나에 대한 그의 사랑을 통해 자신을 사랑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사랑하는 대상은 ‘주체의 은유’(크리스테바)인 것이다. 달을 보며 무엇인가를 그리워하는 것은 동시에 자기를 보는 행위와 같다. 작가가 달을 표현하기 위해 선반 바닥을 호수처럼 칠한 것은 나르시시즘에 반드시 필요한 거울을 말한다.
작업의 반을 차지한다는 영상을 이용한 드로잉에도 비디오라는 매체의 나르시시즘적 특성이 내재되어 있다. 비디오의 즉각적인 반사가 거울의 특성을 가질 뿐 아니라, 선재하는 흐름 위에 덧그려 지는 것은 다름 아닌 자아의 흐름인 것이다. 의식이기보다는 무의식, 몸의 흐름이다. 그러나 주체와 대상의 간극은 작업의 조건이기도 하지만, 그것에 깔려있는 정서는 불안과 우울이다.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사랑의 역사]에서 불안은 언제나 사랑의 배제에서, 즉 자신을 사랑하는 자아에서 생긴다고 말한다. 저자에 의하면 사랑의 관계는 한편으로는 나르시스적인 만족감에, 다른 한편으로는 이상화에 기초를 두고 있다. 로라의 작품에서 최초의 대상은 사라진 채 껍데기와 간극만이 남아있는 것, 즉 시뮬라크르들은 작가 스스로를 비추며 그것을 바라보는 관객 또한 비춘다. 그러나 예술은 자신만의 거울에 불과한 상상계에 머무르지 않는다.

(참고작품) Videodrawing Exhibition View 2013

(참고작품) Videodrawing Ink marker on korean paper 150×210cm 2013
작가는 지금 전시된 작품이나 작업실에 있는 작품 외에, 동양의 사원과 서양의 성당에서의 작업, 그리고 성과 속을 대비시키고 결합시킨 이전의 작품을 소개해 준다. 진정한 사랑과 예술은 모든 것을 자아로 환원하는 빈약한 방식이 아니라, 이질적 타자와의 만남을 말한다. 그래서 그녀는 머나먼 한국 땅까지 왔는지도 모른다. 비디오에서 도자에 이르는 다양한 기법에 대한 실험 역시 타자들과의 대화를 위한 형식적 조건이다. 타자들은 동일한 방식으로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을 향해 나있는 창에다 끊임없이 지기만을 되뇌이는 작품들은 얼마나 지루한 동어반복인가. 그들은 불확실한 세상에서 오직 확실한 것은 자아라고 믿을지 모르지만, 세상에는 그러한 비슷한 자아들이 넘치고 넘치는 것이다. 타자의 자아로의 환원은 현대 특유의 이기적이고 경쟁적인 생태계에서 번성한다. 사랑이나 예술과 마찬가지로 신화나 종교의 영역도 현대의 동일성을 넘어선 타자의 영역에 속해 있으며, 작가가 깊은 관심을 두고 있는 영역들이다.
출전; 클레이아크 김해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