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여성에 대한 양가감정

  

이선영(미술평론가)

 

Francesco Ardini(1986- , Italy)의 작품에는 기와, 벽돌, 테이블같은 건축적 요소가 많이 등장한다. 누가 어떤 장르라도 시도해볼 수 있는 ‘융복합’의 시대지만, 그의 작품에 편재하는 건축적 요소는 그가 건축과 출신이라는 것에도 원인이 있을 것이다. 지금 그것을 하고 있지 않더라도 어떤 개인의 최초 선택은 일생에 걸쳐서 의식, 무의식적 요소로 표출될 수 있다. 자신의 모든 것이 동원되곤 하는 예술의 영역은 더욱 그러하다. 그의 작품에서 건축은 추상적인 공간이기 보다는 구체적인 삶의 자리를 상징한다. 그는 특히 집이라는 원초적 공간을 표현한다. 한국어에도 ‘집사람’이라는 표현이 있듯, 집은 전통적으로 여성의 영역이었다. 집(가정)의 아늑함을 떠올릴 때 아내든 어머니든 여성은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동시에 그곳은(그녀는) 기대가 크기에 실망도 큰 영역 아닐까. 프란체스코에게도 집은 어머니의 영역이다. 이런 저런 자리로 나타나는 영역에는 어머니의 흔적과 추억이 깔려 있다. 


전시전경



racconti sul tetto


한국의 가옥에서 영감 받은 기와 설치물에도 액체를 뿌려 흔적들을 표현했다. 프란체스코의 작품에서 청색 코드는 현대--그는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의 푸른색 이미지를 지적한다--를 상징하는데, 한국에 대한 인상이 청색 기와로 표현된 것은 현대와 전통의 종합, 또는 괴리를 표현해온 맥락에 놓여 있다. 이태리의 불황 탓에 건축 스튜디오를 유지하기 힘든 상황은 건축과 멀다고 할 수 없는 예술에 관심을 두게 했다. 특히 도자는 건축의 실내 장식 등에 잘 사용된다. 집이란 것이 바로 그릇 아니겠는가. 그 그릇은 모든 것이 유동적이 된 현대에 와서 매우 취약해지긴 했지만 말이다. 건축가들은 설계를 하면서 그 공간에서의 이상적인 삶을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그들의 작업은 종합예술로 확장되기 마련이다. 그것은 데 스틸이나 바우하우스, 러시아 구성주의같은 미술사의 예에서 확인된다. 대개 건축가들의 선언문에는 다소간 들떠 있는 이상주의가 있다. 프란체스코가 이번 전시에서도 많이 활용하는 테이블이나 그 변형으로서 건축적 좌대는 또 다른 작은 집, 가령 집 속의 집 같다. 


작가는 이태리의 중요한 전통으로, ‘온 가족이 테이블에 둘러앉아 식사를 하는 것’을 강조한다. 듣고 보니 그 유명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도 생각나고...그가 상기하는 집은 여전히 따스하고 보들보들한 핑크빛을 유지하고 있지만, 우울하고 불안한 느낌이 있다. 그에게 집의 기괴한 느낌을 이끄는 실체는 여성이다. 테이블 위에 널려있는 조각난 신체는 여성의 몸뚱이다. 그 앞에 벽돌로 쌓아올린 작은 좌대 위에는 칼, 빗, 깨진 그릇 같이 평소에는 유용한 생활도구이지만, 달리 쓰면 무기가 될 수 있는 도구들이 테이블 위의 조각난 신체를 향해 있다. 작가는 핑크 빛 액체로 흥건한 벽돌 위의 도구들로 신체 위에 여러 자국을 냈는데, ‘공격적 의도는 없다’고 말하고는 있지만, 그 형태에 가학 피학적 분위기가 없다고는 볼 수 없다. 피비린내 나는 선혈은 달콤한 딸기 시럽 같은 모습으로 변주되었다. 음식은 욕망의 대상이지만 동시에 죽음을 떠올린다. 


(참고작품) selection of woks . francesco ardini



(참고작품) selection of woks . francesco ardini



venere storpia sdraiata


다른 생명체를 죽여야 먹을 수 있다는 생태계의 법칙부터, 과도한 섭식이 불러올 육체의 망가짐까지, 자연 법칙에 기반 한 최소한의 에너지 섭취부터 생산력의 혁명에 의한 과식에 이르기까지, 현대인의 섭식에는 양가적 감정이 깔려 있다. 섭식, 특히 탐식에는 성적인 면도 포함되어 있다. 성 또한 음식처럼 욕망과 죽음을 연결시키는 극명한 예다. 피를 연상시키는 아주 붉은 색이 아니라는 점만이 공격보다는 불안한 느낌을 강조한 작가의 의도를 전달해 준다. 정신분석학에서 거세된 존재로 묘사되는 여성은 남성에게 불안감을 준다. 그녀는 거세를 연상시키는 트라우마적 존재다. 프란체스코의 작품에서 여성의 국부에 난 칼자국은 여성의 성기가 남성의 거세를 떠올리게 하는 기괴한 느낌의 원천이라는 정신분석학적 해석과 마주한다. 집-여성, 또는 어머니로 압축되는 상징적 장소가 불안으로 점철된 이유는 집-여성이 가지고 있는 이중성 때문이다. 


성인이 된 남성에게 전능했던 어머니의 영역인 집은 이제 작고 볼품없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존재인 어머니 역시 약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인다. 집은 친근하지만 낯선 곳, 프로이트가 말한 기괴함의 원천이다. 아이에게 완전한 우주였을 집의 위상 변화는 단지 심리적 요인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프란체스코의 작품 이력에서 테이블 위에 잔뜩 올려 진 오브제들은 과잉생산을 상징하는데, 그러한 과잉생산의 여파가 세계화를 타고 명품의 나라 이태리까지 뻗쳐 장인들의 오랜 작업대들이 텅 비게 된 상황을 말한다. 노동자들의 대량 실직은 전통적인 성별 분업에 의거한 가정의 빈약한 식탁으로 곧장 이어지지 않았겠는가. 장인의 작업 테이블부터 가족이 둘러앉은 식탁에 이르는 전통이 과거의 화려한 전성기에 비한다면 초라해진 상황이 반영되어 있다. 거시 역사의 흐름과 개인사가 중첩되고 있는 것이다. 거시/미시 역사의 결집체인 개인은 음식처럼 조각 난 채 자신의 상처를 테이블 위에 그대로 드러낸다. 


venere storpia sdraiata


vista

테이블 위에 놓인 음식물, 눕혀놓거나 세워놓은 토르소, 주름 잡힌 옷의 표현 등은 이태리의 정물화나 조각 등에서 찾아볼 수 있는 고전적 요소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서 전통은 현대문화의 중요한 키워드가 된 ‘기괴함’으로 번역되었다. 기괴함의 중심에 집이 있고, 또 그 안에 있는 것이 여성-어머니다. 크리스테바가 지적하듯, 어머니를 기억하는 것은 ‘향수’라는 말에 내재되어 있는 회귀(nostro)이고 고통(algos)이다. 전능한 어머니의 상실은 아이가 개체화되어 아버지의 영역인 상징적 우주로 진입하기 위한 필수조건이다. 어머니로부터 자립하지 않으면 사회 이전의 영역(자연)에 삼켜져 버리는 것이다. 몸뚱이에 새겨진 상처들은 상실의 기억에 내재된 외상(trauma)이다. 외상은 우울함과 공격성을 낳는다. 우울함과 공격성은 곧잘 상호전환 된다. 프란체스코의 작품에서 푸른 계열이 현대라는 공적 영역에서 비롯한 우울함을 연상시킨다면, 붉은 계열은 사적영역에서 비롯된 공격성을 연상시킨다.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검은 태양; 우울증과 멜랑콜리]에서, 우울함과 공격성의 관계를 정신분석학적으로 설명한다. 우울증 환자들의 수많은 꿈과 환몽에서 나타나는 멜랑콜리 증세의 식인행위(cannibalisme)은 내가 없애버리고 싶은 견디기 힘든 타자를 생생하게 더 잘 소유하기 위해 입안에(질이나 항문도 이 통제 작업에 동원될 수 있다) 넣고 싶어 하는 욕망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즉 상실하기 보다는 차라리 조각내고 분해하고 자르고 삼키고 소화하는 것이다. 프란체스코의 작품에서 표상 불가능한 타자인 모성은 그렇게 조각난 신체-음식으로 나타난다. 소스가 범벅이 된 고깃덩어리 같은 조각 뿐 아니라, 바삭바삭한 과자를 떠올리는 피부조각들이 그러하다. 크리스테바는 [사랑의 역사]에서도 타자인 어머니가 에로스보다 죽음인 리비도로 활기차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venere storpia


venere storpia  dettaglio

피카소의 여인들이나 데 쿠닝의 여인들은 바타유의 [나의 어머니]처럼 죽음-어머니이다.  원초적 어머니는 금기사항을 무시한다. 나를 태어나게도 했으나 나를 삼킬 수도 있는 어머니는 이중적이다. 생명의 기원이자 끝인 바다처럼, 모태는 동시에 무덤이기도 한 것이다. 크리스테바에 의하면, 원초적 어머니는 욕망과 증오, 매혹과 혐오의 극을 향해 이끌리고 있는데, 그 원초적 어머니는 요구들을 담은 그릇이 되기는 그쳤지만, 아직 욕망의 금기대상으로 형성되지는 않았다. 원초적 어머니는 주체도 아니고 대상도 아니다. 그것은 경계에 있는 어중간 한 것, 즉 비체(abject)이다. 인간은 자율성을 원하지만, 그 출발에는 터진 양수에서 쏟아져 나온 비체적 상황이 있으며, 그 상황은 언제라도 재연된다. 작가는 단단하면서도 깨지기 쉬운 도자기의 특성을 활용하여 집-여성에 대한 이중적 환상을 표현한다. 


작가는 어머니의 속옷을 활용했다. 작업실에서 본 아버지를 소재로 또 다른 작품에는 아버지의 작업복이 사용되었다. 프란체스코의 작품에 떠도는 기괴함이란 정서는 남성/여성에 대한 이원적 구조와 관련 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작가는 어머니를 떠올리는 뚱뚱한 여성 토르소에 속옷을 입히고 세라믹 액으로 칠한 후 날카로운 도구로 상처를 냈다. 그녀의 몸통은 먹다 남긴 케익 조각같은 모습, 고체도 액체도 아닌 상태로 ‘지저분하게’ 놓여있다. 작가는 이를 통해 어머니의 취약성, 가정이나 인간관계의 취약성을 표현했다고 말한다. 벽돌이나 테이블같은 기하학적 요소에 얹혀 진 유기적 요소, 이 양자 간의 대비는 강함에서 취약함으로의 변화를 극적으로 나타낸다. 벽이나 천정에 걸린 작품에서 유기적 요소는 더욱 파편적이다. 여기서도 전통은 기괴하게 변주된다. 작가는 이태리에서 ‘여러 가지가 모여서 사람이 된다’는 속담을 소개한다. 벽과 천정에 걸린 인체를 연상시키는 설치물은 점, 선, 면이라는 여러 요소가 복합되어 있다. 


sulla propria pelle seno dettaglio



sulla propria pelle seno dettaglio



(참고작품) selection of woks . francesco ardini


빛이 투과될 정도로 얇게 표현된 세라믹 피부는 중층적으로 배열되어 있을 뿐,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 소의 가죽으로부터 직접 떠낸 질감이 그대로 드러난 피부들은 핏줄을 연상시키는 붉은 실과 함께 얼기설기 매달려 있다. 설치작품을 이루는 색은 핑크, 레드, 화이트 등인데, 이 모두 몸의 색을 연상 시킨다. 어머니의 속옷이 동원되었듯이 여기에는 남자아이의 한복 일부가 섞여 있다. 작가는 옷과 피부를 동렬에 놓는다. 그의 작품에서 자연과 문화(대체로 전통과 관련 있는)는 조각나 있고, 자신의 무게를 비운 채 공중에 떠 있다. 핏줄 같은 붉은 실에 주렁주렁 매달린 작은 형태들은 땅을 상징한다. 땅은 인간이 내딛는 단단한 지반이 되지 못하고, 휴대용 기기나 작은 장식물처럼 보인다. 작가는 그것을 목걸이처럼 걸고 다니며 필자에게도 선물로 주었다. 오랜 전통을 가진 나라일수록 세계화가 야기한 변화에 대한 감정의 진폭은 클 것이다. 젊은 작가에게 맞딱뜨려진 모든 기괴한 상황은 그러한 괴리감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출전; 클레이아크 김해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