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중앙미술대전 평면부문; 일상과 무의식의 접점에서
이선영(미술평론가)
평면, 입체, 매체 부문으로나뉘어 접수된 706명의 자료는 평단이나 미술시장 등에서 이미 이름이 알려진 중견 작가의 정선된 작품부터아직 갈피를 못 잡고 있는 작가 지망생 수준, 심지어는 인사동의 풍물 공예 샵 스타일까지 그 편차가실로 다양했지만, 한 시대의 미감을 대변하는 실례로 간주될 만하다. 짧은시간 동안이지만 집중적으로 살펴본 작품 경향은, 지난날 과도한 작가 의식의 바탕이 되어왔던 사회, 현실, 역사, 주체 등의큰 범주들이 일상과 무의식으로 숨어들었다는 점이다. 상당수 작품들이 자폐적 환타지의 동굴 속에 칩거하면서들이 파는 스타일이다.
유비쿼터스 환경 속의 젊은 작가들이 처한 역설적 상황을 들여다 본 것 같아 흥미롭다. 물론 좁아진 비전 대신에 작품의 밀도는 극대화되어 있다. 이러한유서 깊은 공모전을 통해 부각되면, 상품가치를 가질 만한 작품도 상당수 있다. 그러나 근시안적으로 명품 만들기에만 치중하는 것은 그리 바람직해 보이지는 않는다. 아래에 작가별로 서술한 평면 부문의 경우, 어느 하나의 극에 매몰되지않고 일상과 상상 사이의 연결고리를 가지는 공통점이 있으면서, 그 면면들이 전체 출품작들의 주요 경향을예시하기에 충분하다.
이혜인은 재개발 지역의 거주공간을 냉정하면서도 시적인 시선으로 담는다. 작가가 살아온 오래된 동네의 작은 집들을 섬으로 만드는 홍수는 재난의 현장이기 보다는, 각자의 거처를 가득히 비추는 석양빛의 고요함과 어우러진다. 그것은특정 장소에 관련된 개인 혹은 집단의 상상이 고여 있는 장소로, 재개발이라는 현대성의 빠른 순환주기에걸려들어 통째로 수몰될 처지에 있다. 파괴의 와중에도 일상은 흔들리지 않고 지속된다. 그것은 대지 위에 굳건히 뿌리 박아야할 지상의 거처조차 더 많은 잉여가치를 위한 생산 품목에 속해 버린 부박한시대의 풍경으로, 어떤 비판적인 입장이 내재되어 있다. 고립과표류라는 이미지가 그러하다. 이 유폐의 공간에서 현실과 상상은 서로 얽혀든다. 그녀의 작품에서 상상은 일상으로부터 촉발된다. 상상 속에서 견고해보이는 일상의 질서와 테두리는 느슨해진다.
반복되면서도 조금씩 변화하는 일상성이 전개되는 장소는 상품 소비로 특징 지워지는 도시이다. 일상과 상상이 한 공간에서 만나고, 때로는 과거의 공간이 분석적인시점으로 회상되면서도, 일러스트처럼 깔끔하게 처리된 화면은 재현 주체를 포함한 인간의 온기나 흔적, 그리고 감정의 무게를 휘발시킨다. 그것은 차갑고 견고하게 자리 잡은익명적 시스템의 심미주의이자, 새로움과 파괴라는 양면성을 지닌 현대성을 드러낸다. 이혜인의 그림은 무의미한 반복으로 점철된 일상성과 새로움과 진보라는 현대성이 만나는 접점에 존재한다. 그 이념이나 양태에 있어서 현대성과 일상성은 상반된 것이기 보다는 동전의 앞뒷면 같으며,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이루고 있다.
홍원석은 어둠 속에서 주행하는 자동차를 둘러싼 세계에 환상을 펼친다. 필요한 것이 갖추어져 있는 소우주이면서, 떠나고 싶을 때 떠날 수있는 자동차는 현대적인 삶의 상징이다. 번잡한 주변의 환경으로부터 단절될 수 있으면서, 거리를 둔 채 여러 상황과 자유롭게 조우할 수 있는 여행자의 시점이 현대적 인터페이스의 보편적 모델이 된 것도우연은 아닐 것이다. 운전자는 사회적 체계의 회로도를 따라 주행하면서,차창을 통해 세상과 만난다. 그의 작품은 세상 어디라도 떠날 수 있을 것 같았던 아버지의택시로부터 비롯된 유년의 기억에 뿌리박고 있다. 특히 야간운행 중에 전조등에 잡히는 불연속적인 이미지는관객의 상상력을 북돋운다. 전조등이 켜진 자동차는 심해나 대우주 같은 깊고 넓은 공간 속에서 자리한주체에 의해 상상된 이미지들과 나란히 배치된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과 상상의 모든 것을 조정하는 전능한 시점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환상의 발원지인 자동차는 거대한 우주공간 속에서 떠도는 반디 불같은 존재에 불과하다. 그의 작품에서 운전대를 잡는 일상적 상황은 비 일상, 즉 환상으로도약한다. 전조등 주변의 상상적 이미지는 일상의 차가움과 상상의 뜨거움을 대비시킨다. 일상이 공허했던 것만큼이나 비 일상, 즉 환상의 세계는 충만하다. 그것은 가혹한 삶을 견디던 성냥팔이 소녀가 성냥을 한번 켤 때 마다 두둥실 떠올랐던 환영들과도 같다. 그것이 보여주는 비전은 소외에서 벗어나 자신과 비로소 일치되는 순간이다. 일상적반복은 무한한 생성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홍인숙은 자신과 가족 등 주변 인물들의 일상적 생활을 종이 인형 같은 이미지로 표현한다. 그들은 손에 손을 잡고 꽃이 활짝 핀 야외로 소풍을 가거나 집에 돌아오는 중이다. 어린이가 그린 만화처럼 단순하고 어눌한 선으로 묘사된 캐릭터들이지만, 인간의희로애락이 효과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종이인형 놀이처럼 오려낸 캐릭터를 상황 속에 배치하는 것은 70-80년대의 인형놀이를 생각게 하지만, 문자와 이모티콘으로 역할놀이를 하는 사이버 문화와도 맞닿는 부분이 있다. 영원한 젊음을 추구하는 예술은 유년기를 예술적 영감의마르지 않는 저장고로 삼으며, 아예 그들의 어법을 흉내 내면서 순박하고 천진스런 비전으로 되돌아가고자한다. 그 세계는 냉소와 부정이 아닌 관심과 긍정의 세계이며, 영원히행복할 수밖에 없는 세상이다.
캐릭터의 배경을 이루는 배경은 민화의 모티브가 있다. 그녀의 작품에서민화와 만화는 원래부터 한자리에 있었던 양 잘 어울린다. 이러한 조화는 우연이라기보다는 민화와 만화가가지는 내용적, 형식적 공통성과 관련된다. 민화 역시 민족의유년기에 닿아있으며, 전래되는 문화적 유전자를 보유한다. 또한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소박한 기복 신앙은 집단적 주체가 가지고 있는 욕망을 드러낸다. 형식적인 면에서양자는 선과 선을 메우는 평면적 색채로 이루어진다. 숭고한 가치이지만 대중을 오도하기 십상인 심오함, 초월성, 독창성이라는 예술의 이데올로기를 벗어던지고, 솔직함, 행복함, 편안함에잠겨있는 작품의 정서는 현대미술의 한 장르처럼 자리 잡은 키치적 미감과 관련된다. 기능 및 통일성보다는집합과 병렬이 두드러지는 구성방식 또한 키치적이다. ‘최대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는’(아브라함 몰르) 키치의 미학은 유치증으로의 퇴행이 아니라, 예술을 지상으로 끌어내려 다시금 우리의 일상적이고 보편적인 삶과 접속하기 위한 가장 직접적인 방법이 된다.
정지현의 작품은 자신의 미감을 표현하기에 알맞은 한정된 소재를 극도로 정제된 조형언어로 거르고 있다는점에서, 모더니즘이라는 고급문화의 전통에 속한다. 소파나선인장 같이 별로 주목되지 않는 일상적 사물들은 부드러운 피부와 털을 가진 것처럼 변모한다. 선인장의두툼한 육질과 가느다란 가시는 색감, 질감, 그리고 형태의대조로 시각적 활기가 부여된다. 프로이트가‘보는 것이란 궁극적으로 만지는 것으로부터 파생된 것이다’라고했듯이, 그것은 단순히 시각 성을 넘어서 촉각 성으로 확장된다. 정지현의주요 소재인 선인장의 핏빛 가시와 몸을 연상시키는 소파와 꽃에서 방출되는 듯한 붉은 구슬은 물활론적인 생기를 부여하는 조형적 장치이다. 조형적 장치의 밀도와 세련됨은 사물의 우연성과 상대성을 필연성과 절대성으로 위치 지운다. 이러한 도약의 매개자라고 할 수 있는 주체는 물체의 명료성 뒤에 숨는다.
순수한 형태로 고양된 일상적 사물들은 구체적인 상황과 단절된 자체의 명료성을 획득한다. 대상들은 시각적 실험실에 놓여있는 시료와도 같은 성격을 가진다. 가령관객은 정지현이 그린 식물이나 가구가 놓인 맥락이나, 그것의 소유주가 누구인지 쉽게 상상할 수 없을것이다. 그것은 사물과 인간이 상호반영 되었던 이전의 인간중심주의적 시선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사물들은 정밀하게 묘사되어 있지만, 거기에는 인간적인 이야기가 전개될실체감이 축적되어 있지 않다. 사물들은 탈색되어 있고 그 위에 리드미컬한 시각적 악센트만 남아있다. 그리기라는 순수한 여정을 통해 도달하는 사물들은 또 다른 체계의 그물망에 사로잡혀 있다. 그것은 바로 언어의 감옥이다. 그것은 주체의 유폐라는 현대적 상황에상응한다. 이런 맥락에서‘감옥 안에서의 세계의 재창조’는 저주이자 축복이기도 한 예술의 자율성을 잘설명하는 말이다.
경지연은 차이를 둔 반복적 선의 흐름이 만들어내는 시각적 환영을 가면이라는 주제와 연결시킨다. 옵티컬(optical) 패턴이 가면으로 변모하는 작품이나, 인물 사진 위에서 발생하는 추상적인 선의 간섭효과가 자아내는 위장과 어지러움을 통해, 인물 이전의 원초적 무의식과 동일성 이전의 타자성을 끌어낸다. 철저한계산과 수작업에 의존하는 작업방식이 만들어내는 교란성은 극도의 질서 감각이 무질서로 변모하는 순간과 연결된다. 가장및 의태(擬態, mimetism)와 관련되는 가면은 공포와 호기심, 불안과 매혹을 겸비한다. 가면은 숨기면서도 드러내는 것이다. 그것은 변신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과 사회적 역할을 잊게 하고 방종과 해방의 분위기를 조성한다. 경지연의 작품에서 옵티컬 패턴으로 뒤얽힌 가면과 인물은 현기증이라는 주제와 만난다.
인류학자 로제 카이와는 가면은 축제, 즉 현기증, 흥분 및 유동성이 지배하는 권위의 공백기에 나타난다고 지적한다. 축제때에는 세계의 질서 있는 모든 것이 다시 생기를 얻어 나타나기 위해서 일시적으로 파괴된다. 초 자연력으로변신을 통해 인간이 두려워하며, 또 인간으로서는 지배할 수 없다고 느껴지는 힘이 갑작스럽게 출현하는것이다. 일상과의 급격한 단절은 축제 외에도 혁명을 통해 달성된다. 차가운일상이 자리 잡은 현대에는 예술을 통해서도 가능하다. 정교한 기계적 메카니즘으로 작동하는 경지연의 작품이도달하는 곳은 야성과 원초성이라는 점이 독특하다. 가면과 현기증이 지배하는 세계는 지각의 안정성을 교란시키고원초적인 혼돈에의 일시적 복귀를 통해 각질화 된 일상성을 파열하여 창조성의 일단과 접촉할 수 있다.
지용현의 그림은 현실이 반영된 정신적인 구조물이자, 가공할만한묵시록적 비전이다. 그것은 환상과 현실이 기괴하게 융합된 북구적 전통과 닿아있다. 역사상의 묵시론적 전통이 그러했듯이, 그것은 황당한 허구성을 통해리얼리티와 만난다. 그의 그림에서 어두운 바탕과 뒤섞여 떠돌거나 꿈틀거리는 유기질과 무기질의 형상들은멀리서 보면 추상화처럼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뒤엉킨 식물 모티브와 어디에서 어디로 이어지는지알 수 없는 악무한의 건축적 구조들, 그 사이사이로 그림자나 유령처럼 박혀있는 작은 인간들의 모습이드러난다. 어두운 에너지가 고여 있는 바탕 면은 넝쿨들, 연기들, 점착성 물질들, 거대한 구멍들로 이루어진 미로 같은 공간성을 가진다. 그곳은 이성에 의해 구분되는 범주나 경계, 그리고 금기가 위반되며, 어떠한 균형감각도 지켜지지 않는 과도함이 있다. 공간공포증적으로빼곡히 채워진 형상들은 혼돈이 과정이 아니라, 혼돈 그자체로 굳어버린 듯한 지옥도를 이룬다.
인간은 여기에서 시공간적 차원에서 질서 감각을 잃고 고립되거나 길을 잃는다. 희미한인간의 실루엣은 모든 방향에서 그를 위협하는 적대적인 세계에 의해 위축된 그들의 존재감이 반영되어 있다. 프랭크커머드는 [종말의식과 인간적 시간]에서 가공할 일들과 퇴폐는묵시록적 패턴에서 반복되는 요소 중의 두 가지라고 지적했다. 퇴폐는 보통 쇄신의 희망과 결부된다. 쇄신에의 희망은 역사적 연속성이라는 비전을 통해 획득될 수 있다. 그러나지극히 다양하고 모순 된 가치들이 공존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작가에게 의미를 제공해주는 시간적 지속성은 유지되기 힘들다. 지용현의 작품에서 기원과 전체에서 분리된 채 쇄도하는 단편들은 헛된 시간성과 무의미 그 자체를 예증한다. 그러나 이러한 가혹한 혼돈 속에서 예술작품이란 것이 탄생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진실이다. 어두운 혼돈이 잠재적인 활력으로 약동하는 그의 그림은 모든 종류의 조합이 실험되고 있다. 이를 통해 자폐적인 환상은 고립을 넘어 타자와 무한하게 연결된다.
출전; 중앙일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