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산만큼이나 판매에도 필요한 도약
이선영(미술평론가)
필자의 ‘서당 개’ 20여년의 경험에 의하면, 젊은 작가들의 작품에서 가장 많이 발견되는 것은 소외와 두려움, 소통과 치유 같은 내용이다. 가끔 작가들의 자료를 한 번에 몰아서 볼 때 작가 노트 등을 채우는 것도 대부분 그런 내용들이다. 논술세대라서 그런지, 두서없이 토로하는 단계를 넘어서 나름대로 논리적 형식을 갖춘 텍스트들도 발견되지만, 기본 줄거리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그런 내용이 자꾸 눈에 들어오는 것은 그러한 자료와 작품을 보는 평론가를 비롯한 미술계 종사자들 역시 불안한 상황을 공유하기 때문일 것이다. 현대 예술이 어둡고 기괴하게, 때로는 강렬하거나 냉소적으로 표현되는 장이 된 것은 근대 이래의 전통 아닌 전통이 되었다. 단적으로, 그 원인은 자신의 작품의 소통(또는 유통)이 원활하지 않기 때문 아닐까. 물론 그러한 이야기는 미술이 신화, 종교, 역사, 정치 등으로부터 자율화된 근대이후 줄곧 제기되어온 것으로, 사회와 예술 사이의 갈등의 원인으로 지목되어 왔다.

(참고도판) THE JACK, 루이비통 백 인 펠릭스(LOUIS VUITTON BAGS IN FELIX), 2012(F30), ACRYLIC ON CANVAS, 90.9×72.7CM
이러한 보편적인 이야기를 한국 사회라는 맥락에 끼워 넣으면 더 어두워진다. 공무원 등, 소수의 안정적인 자리를 제외하고, 가장 평균적인 우리의 생애 주기를 생각해보자. 근 30세까지 학업을 비롯해 수많은 ‘스펙’들을 쌓느라 청춘을 보내고, 본격적인 노동시장에 진입해도 50세 안팎이 되면 현장에서 퇴출될 걱정을 한다. 100세 수명 시대가 코앞에 다가왔는데, 나머지 반세기를 어떻게 보내야 한다는 말인가. 예술은 전업 작가로 살아가든 아니든 인간에게 필요하다는 믿음이 있지만, 우리의 평균적인 생애주기 속에서 예술이 끼어들 여지는 없다. 자신의 미래를 선택하기 위해 다양한 것을 실험해 보는 젊은 시기에도, ‘스펙’에 도움이 되지 않는 미술은 낭비라고 생각된다. 미술은 자신의 필요를 사회에 설득시키지 못해, 지금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 마구잡이로 미술대학을 신설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지원금이라는 돈줄로 미술대학의 생사를 결정하려는 공적 사회가 있다. 지배적 체계는 미술을 수익성이라는 기준으로 어떻하든 가지치기 하려고 전전긍긍한다.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는 미술계 관련 학과들을 다만 적응/도태라는 생태학적인 문제로 봐야 할까. 인생에 돈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설파해줄 인문예술사회 계통의 입 자체가 아예 막혀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은 자신의 활동 속에 사회 속 자기의 입지를 넓히는 내용과 형식을 포함시켜야 한다. 사회의 중간 세대가 되어 본격적인 생산에 복무할 때는 노동 그 자체에 대한 과부하가 있다. 일할 때는 너무 많이 일하고, 나머지 생애는 무위고(無爲苦)에 시달리는 것이다. 소외된 노동이 소외된 여가를 낳기 때문에, 여력이 예술까지 오지 않고 (대중)문화 단계에서 녹아버린다. 그렇게 생애 전반기를 보내고 나면, 50년 가까운 생애 후반기 아무리 할 일이 없어도 예술을 즐길 수 있는 방법은 전무하다. 예술을 생산하는 것만큼이나 소비하는 행위도 소양이고 자질이며, 의지이고 능력이다. 그 맛을 알아야 그것을 기억하고 향유하려 하는데, 각 시기마다 한가지에만 몰두해야 하는 우리의 전형적인 생애 주기는 그러한 기회를 봉쇄한다.
생애 전반기에는 너무 바빠서 후반기에는 그것을 향유할만한 자질과 물질적 여력이 없어서 그렇다. 사회에 진입하기 위한 오랜 준비와 과도한 노동 시간 및 레드 오션에서의 과당 경쟁은 눈 가린 경주마처럼 맹목적인 전진만을 요구한다. 그러나 예술은 그렇게 ‘전진하는’ 삶이 아니라, 전진 자체에 맥락을 부여하는 다양한 우회의 시공간을 제공한다. 물론 예술 또한 그러한 ‘전진’의 도구로 삼는 부류들이 있지만 말이다. OECD 국가 중 자살율 최고 수준, 출생율 최저 수준인 사회적 지표는 한국인들이 문화적 안전장치가 제거 된 위험한 삶을 살고 있음을 알려준다. 간혹 가다 주어진 삶을 벗어나 중간에 경로를 바꾸는 것은 길지 않은 생애를 보다 다채롭게 살아가려는 의미 있는 선택이기 보다는 모험이 된다. 무엇을 위한 바쁨인지 알 수 없는 무의미하고 불안한 삶이 젊은이부터 늙은이까지 짓누르고 있다. 그러한 대중의 삶을 표현하고 있는 이웃의 작가들이 있는데 우리는 서로 만나지 못하고 있다.
분리를 통한 지배를 꾀하는 시스템은 인간들끼리 실제로 모이는 것을 원치 않는다. 한 달에 통신비용만 적지 않게 쓰면서(또는 쓰기 때문에) 주변의 예술에 대해서는 눈 뜬 장님이다. 미술계 사람들은 소통을 외치고 있지만 대중들이 생각하는 소통과의 온도차는 크다. 미술 내부의 사정은 더 답답하다. 미술에 관련된 안정적인 직장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미술계는 그러한 안정을 택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이들이 더 많다. 늘 불안한 외줄타기를 해야 하는 개인적 작업과 누구와도 호환될 수 있는 주기적인 생산 활동과의 괴리는 크다. 그러나 작가도 부업이 아니라 자신의 본격적인 생산물로 당당하게 사회와 상호작용할 수 있어야 한다. 작업으로 남보다 잘 사는 것까지는 감히 바라지 않더라도, 지속가능하기라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술에도 시장이 필수다. 현재 수면에 떠있는 미술시장 외에도 대안의 미술시장이 될 수 있으면 많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시장은 투명해야 한다. 소수의 큰 손에 미술시장이 좌우될 때 다수에게 박탈감을 주는 물신적 체계가 작동하고, 가장 자유로워야 할 예술 또한 그러한 지배적 시스템에서 신음하게 되기 때문이다.
간혹가다 예술작품이 엄청난 가격이 붙어 매스컴에서 화려하게 화자될 때, 대다수의 대중들은 부조리함을 느낄 뿐이다. 그럴 때마다 대중은 미술에 더 거리감을 느낀다. 구성원 대다수를 구경꾼으로 만드는 시장이 아니라 구성원들이 주체가 되는 시장 또한 요구된다. 그래서 작년에 현장의 작가를 위한 장터 사업이 공공기금의 지원으로 개설되었다. 2015년 첫해에는 최소 2천만 원(남서울 예술인 마을)에서 최대 3억 원(한국 미술협회)까지 공공기금을 지원받아 서울과 부산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10개 단체의 사업이 펼쳐졌다. 회원 수가 가장 많은 미술계의 대표적 단체부터 대안공간의 성격을 띄는 공간을 주 무대로 활동하는 청년 그룹까지 종류도 다양했다. 각지에서 펼쳐진 사업들의 경향은 작가와 컬렉터를 직접 만나게 하고 중간 매개자의 유통비용 없이 작가에게 판매대금의 100%를 지급한다는 점에서, 기존 미술시장의 경향과는 차별 점을 두었다. 어떤 행사는 근처의 화랑이나 카페도 적극 포함시켜 지역 페스티벌 형식으로 진행하기도 했다. 특정 단체에 속한 작가 뿐 아니라, 다른 작가들에게 기회를 열어 놓는 것도 중요했다. 그러나 구색 맞추기 식의 부대행사는 그다지 효과적이지 못했다.
미술전시회가 아니라 작가가 주인공으로 나선 시장이라는 것을 의식하면서, 사고팔기에 적당한 크기와 가격대가 결정되기도 했다. 대중성에만 호소하는 다른 문화상품과 달리, 예술적인 질을 유지하는 것이 관건이다. 이 행사는 예술성과 대중성은 필수고, 거기에다가 공공기금이 투입되었으니 공공성까지 담보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펼쳐진 사업의 면면을 보니 자체 검열이 너무 심하지 않았나하는 생각이다. 거기에는 대중들은 이러이러한 그림을 좋아할 것이라는 편견이 깔려 있었다. 행사에 나와 있는 것들이 대부분 자그마한 장식을 벗어나지 못하는 형식들이었다. 작가의 상상력은 자신의 작품 내용에만 관철될 것이 아니다. 대중을 비롯한 '타자되기'의 상상력이 필요하다. ‘나라면 저것을 사고 싶을까’라는 기본적인 생각부터, 일회성 행사를 넘어 추후에도 이어질 관계에 대한 사고까지 말이다. 그러나 작품이자 상품이 진열된 방식, 즉 소비자에게 다가가는 방식은 평범하다 못해 초라한 경우도 많았다. 명색이 시각예술인데 보따리를 풀어 놓는 것 이상의 독특한 인터페이스를 갖춰야 하지 않을까.
본격적인 전시회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판매될 것들이 구매자의 욕망을 건드릴 수 있는 요소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몇몇 사업은 잠재되어있는 컬렉터들을 수면에 띄워놓는 등의 성과도 있었다. 만들기만큼이나 파는 것이 힘들다는 것은, 생산보다는 소비에 방점이 찍힌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특징이며, 미술 또한 예외가 아니다. 낭만주의 세계관에 입각한 전무후무한 위대한 예술가만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도약이 필요하다. 이 또 다른 도약은 생산자가 아니라 판매자가 감당해야 하는 몫과 관련된다. 예술가가 되기 위해 교육을 비롯한 수많은 소비 활동이 있었지만, 그 누구라도 어느 순간은 판매자의 입장에 놓이기 때문이다. 사실은 예술작품이 생산되는 것 자체가 도약의 연속이다. 그것은 깊은 몰입을 요구하고, 단순한 노동을 넘어서는 질적 전화를 요구한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 어렵사리 작업실을 포함한 모든 것을 다 세팅해 놓는다 한 들, 그림이 절로 그려지는 것은 아니다.
그리는 와중에도 예측할 수 없는 많은 기적을 경험해야하는 것이 작업이다. 그렇게 단련된 작품만이 단단한 실재감을 부여받게 된다. 스스로 서있을 수 있어야 작가 손을 떠나서도 작품 자기만의 삶이 가능할 것이다. 어디선가 다시 펼쳐질 작품을 위해 작가는 작품에 내용과 형식을 잘 접어 넣어야 한다. 그 모두가 작품의 독특함과 질을 결정한다. 그런데 여기에 추가돼야할 또 다른 도약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미술장터의 기획처럼, 판매에 관련된 도약이다. 그것이 도약인 한 예술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도약이 이번 행사들을 통해 이루어졌는지는 다소간 회의적이다. 판매단계에서의 도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학이 아닌 경제학의 도움이 필요하다. 일본의 평론가 가라타니 고진은 [은유로서의 건축]에서, 사회적 교환은 일종의 도약을 요구한다고 강조한다. 고전경제학의 입장에서라면 모든 상품 안에는 하나의 공통 본질인 인간 노동이 포함되어 있다. 고전경제학에서 상품들은 그것들의 공통된 본질 때문에 서로 교환될 수 있다. 마치 플라톤의 이데아처럼 말이다.
그래서 너의 노동과 나의 노동이 동등하게 교환될 수 있다는 기대치가 있다. 그러나 개인 간에도 세계화된 국가 간에도 그러한 동등하고 투명한 교환을 일어나지 않았다. 화가는 쌀을 사야하는데 쌀집 주인은 그림이 필요 없을 수 있는 것이다. 심지어는 비정규직의 예처럼, 같은 노동을 하고도 동일임금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가라타니 고진에 의하면 실제로 사회적 교환/의사소통은 ‘그 전체를 파악할 수 없는 하나의 이질적인 체계를 형성하는 교통’(마르크스)이다. 고진에 의하면 마르크스는 고전경제학자와 달리, 화폐와 가치가 균형 잡힌 체계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균형은 본질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에 시장 특유의 활력과 제어불가능성이 존재한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의하면 교환에 합리적인 근거란 없으며, 따라서 판매입장은 항상 ‘운명을 건 도약’을 요구한다. 예술작품도 자본주의 사회의 모든 다른 상품처럼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간격이 선명하다.
[은유로서의 건축]은 상품이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종합이기 위해서는 도약이 하나의 통과의례로서 행해져야 함을 강조한다. 자기 증식하는 화폐인 자본이 자신의 잉여가치를 발견하는 곳이 바로 체계들 간의 차이 속이다. 판매-구매 사이에는 비대칭적인 의사소통 관계가 있는 것이다. 미술의 예를 들자면, 현대미술작품 앞에 선 소비자가 바로 비대칭적인 의사소통관계에 있는 타자라고 할 수 있다. 단적으로, 이해돼야 소비될 수 있다. 자체의 역사를 빼곡하게 쟁이고 있는 현대미술은 알려지지 않으면 소비되지 않는다. 호당 가격이 매겨지는 등, 미술 시장에 이미 진입한 이들은 비평을 아예 무시하는 경향이 있지만, 현대미술 시장에서 비평적 담론은 필수다. 비평적 담론은 작품에 딸려오는 매뉴얼이 아니다. 예술은 그저 노동이나 상품, 문화에 머물지 않는다. 예술의 이질성을 타자들에게 성공적으로 설득시킬 수 있을 때에만 예술은 성공적으로 판매될 수 있다는 역설이 있다. 타자와의 대화는 교육이나 학습부터 생산과 소비 모두에게 관철되는 가장 중요한 과정이 될 수밖에 없다. 특히 시장은 매 심급마다 요구되는 그 대화들이 구체적인 결실을 맺는 장이다.
출전; 작가 미술장터 워크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