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와의 대화

   

이선영(미술평론가)

 

개인으로 뿔뿔이 흩어져 있는 현대사회에서는 홀로 말하기에 익숙하다. 기계는 대면 접촉을 최소화 하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으며, 기계와 공(共)진화하는 인간 역시 이러한 문화에 적응하고 있다. 공적 영역이든 사적영역이든 침묵 속에 잠시 눈에 띄는 항목만을 바라보는 시선만이 분주하다. 실행 또한 손가락 하나로 해결하는 것에 익숙하다. 미술계 역시 작가든 이론가든 홀로 말한다. 작가는 자신들의 작품을 보지 않는다고, 이론가는 자기 글을 읽지 않는다고 불평한다. 개별적인 생산의 현장을 넘어서, 학생이나 대중을 상대로 하는 교육 활동(재생산) 역시 홀로 말하기의 연장이다. 홀로 말하기는 반복을 낳는다. 대화에 필수적인 상호작용이 부족하므로, 처음 말하듯이 이전 것을 말하게 된다. 기회를 많이 가진 이와 그렇지 않은 이는 서로 다른 이유에서 반복한다. 전자는 너무 바빠서, 후자는 자신을 좀 더 효과적으로 알리고 싶어서 그렇게 한다. 

  

소통의 병목현상은 새로운 것을 시도하기 보다는 기존의 것을 더 체계적으로 가다듬거나 더 영향력 있는 기회를 찾는데 공을 들이게 한다. 작업의 몸통이라 할 창작활동 보다는 그 외의 것들에 더 신경을 써야 하는 예술계의 풍토는 소외를 이중으로--사회로부터 소외되고 스스로에게도 소외된다는 의미에서--각인한다. 인터넷이란 것이 생겨나 간접적으로나마 서로를 만날 가능성을 열렸지만, 애써 만들고 쓴 텍스트가 ‘콘텐츠’로 가공되어 몇 초 안에 진의를 파악할 수 있는 수많은 정보의 한 항목으로 축소되고 만다. ‘한눈에’ 파악되지 않는 것은 도태되어 간다. 사방팔방으로 열려있는 듯한 정보 환경이 고립된 자아와 예술을 개방시키는데 도움을 주었는지는 회의적이다. 타자와의 만남은 닫혀있는 경계에 트임을 만들고 상호간에 변화할 수 있는 중요한 기회이지만, 그러한 기회는 날로 줄어들고 가상적이고 피상적인 만남이 이를 대신한다. 그러나 새로움과 이질성을 기대 받고 추구해온 예술은 홀로 사고하고 말할 때조차도 타자와 대화한다. 


이탈하면서 구별하는 창조


예술가의 가장 중요한 자원은 흔히 믿어지듯이 자신이기 보다는 자신 속의 타자, 그리고 바깥의 타자와의 소통능력이다. 예술의 역사 자체가 누구와도 대치될 수 없는 창조적 개인의 독백이 아니라, 작가들 간의 대화의 역사로 이루어져 있다. 물론 자신이 영향을 받았던 선구자와 같은 것을 말한다면 그는 단순한 독자에 불과할 뿐이다. 그는 단순히 소비자에 머문다. 역사적 맥락 속에서 작가들은 모방하면서 이탈한다. 그러한 계통의 역사는 개인의 언어가 만들어지기 이전에 사회의 언어를 먼저 습득해야 하는 개체발생의 과정과 같다. 해럴드 블룸은 [영향에 대한 불안]에서 선구자로부터 이탈하면서 구별을 창조하는 과정을 말한다. 여기에서 필수적인 과정이 오독(또는 오역)이다. 그는 오독 혹은 오류에 대한 발상을 고대 철학자인 루크레티우스에게서 가져왔다. 그것은 우주에서 변화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 원자들이 이탈하는 것을 의미한다. 

  

루크레티우스는 ‘원자들의 진로에서 이탈이 없다면 자연은 아무것도 창조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예술의 역사는 이러한 수정적인 이탈들의 기록이라는 것이다. 이탈은 타락이나 퇴행의 느낌을 주지만, 예술적 창조의 동력이 되어왔다. 블레이크는 ‘내가 추락할 때 나는 이탈했고, 그 결과 나는 내 스스로의 창조에 의해 개선된 이곳 지옥에 있다’고 말했다. 반면 키에르케고르가 ‘일하기를 원하는 자는 자신의 아버지를 낳는다’고 말했듯이, 선구자의 반복에 머무는 이는 예술(생산)이 아니라 노동(재생산)을 행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해럴드 블룸은 이탈의 원인과 방향에 대해서는 확언하지 않는다. 모든 곳이 중심이라는 부르노의 사상이나 규칙보다는 예외를 우선시하고 모든 규칙이 자의적이고 예외적이며 부조리함을 주장하는 초형이상학(pataphysics)의 예를 통해서, 변화의 방향과 필연성을 확언하는 사고를 상대화한다. 예술가들의 세계에서 모든 규칙성은 ‘규칙적인 예외들’인 것이다. 

 

관계적 예술

  

대화를 통한 이탈의 역사로서의 예술사는 개인과 사회에 공히 적용되어왔던 동일성의 재현을 넘어서 이질성을 가능케 했다. 자크 랑시에르는 [미학안의 불편함]에서, 예술은 ‘사물들을 식별하는 새롭고 모순적인 체계’이며, 미학은 ‘새로운 무질서에 대한 생각’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를 통해서 예술의 해방 잠재력의 핵심인 이질적 감성을 강조했다. 그에 의하면 예술의 고독이 허용하는 순수함은 내적 모순과 부조화의 순수함이다. 그 모순을 통해 작품은 화해되지 않은 세계에 대해 증언한다. 세계의 모순을 기입하는 작품의 수수께끼는 타자의 힘에 대한 증언이다. 랑시에르는 예술의 고유성을 강조할수록 고유성을 극단적 이질성에 대한 경험과 동일시하게 된다고 말한다. 이질성과의 만남은 신비하다. 랑시에르는 신비를 이질적인 요소들을 이어주는 특정한 방식이라고 말한다. 신비는 적대적 현실을 충격적으로 강조하는 변증법적 행위와 달리, 이질적인 것들의 동류성을 강조한다. 

 

신비에 내재된 동등한 요소들은 무한한 유추의 놀이를 만들다. 이를 통해 가장 멀리 떨어진 현실들이 동일한 감각적 망 안에서 만들어진 것처럼 나타난다. 랑시에르에게도 예술은 동일자의 독백이 아니라, 타자와의 충격적 만남이다. 이를 통해 ‘유한 안으로 무한이 이동’한다. 그는 ‘관계적 예술’을 강조하는데, 관계적 예술이란 대상이 아니라, 상황들과 만남들을 창조하고자 한다. 관계적 예술은 사회적 관계의 새로운 형태와 상황을 고안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재현이 아니라 변형이다. 철학사에서 재현주의에 대한 강력한 원형은 플라톤이다. 랑시에르는 플라톤에게서 모델의 모방에 기반 한 지식들의 작품화를 발견한다. 여기에는 진짜 모방과 거짓 모방들이 있다. 이러한 재현체계에서는 예술이 고유한 이름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르네상스 시대에 복원된 플라톤주의인 신플라톤주의는 예술의 고유한 영역을 보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관념의 교육적 가치를 보존하기 위해서이다. 

  

왜냐하면 플라톤주의자라는 것은, 예술에 대한 질문이 결국에는 윤리적이라는 것을, 예술은 교육이라는 것을 확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저 높은 곳에 존재하는 이데아를 재현하는 과정에 상호작용적인 대화가 아니라, ‘원형’을 끝없이 되뇌이고 그것을 선점하며, 거기에 좀 더 가까운 곳에 있을 수 있는 권력이 중시된다. 독백과 반복을 낳는 재현의 방식은 플라톤주의 뿐 아니라, 계층적 질서를 전제하는 모든 사고에 내재해 있다. 가령 해럴드 블룸은 [영향에 대한 불안]에서 프로이트는 승화를 인간 최고의 성취로 인식했는데, 이런 인식으로 인해 그는 플라톤 및 유대교와 기독교의 모든 도덕적 전통과 연결된다고 본다. 프로이트적 승화는 더 세련된 형태의 쾌락을 위해 좀 더 원초적인 것을 포기하는 것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계층적 질서는 환원적이지만, 동등한 질서는 확산적이다. 독백적 사고는 필연성의 인식이, 대화적 상상력에서는 우연한 만남이 중요하다.

  

작가에 대한 자유주의적이고 휴머니즘적 담론

 

대화는 하나의 중심이 아니라, 여러 중심을 가진다. 독백보다 대화를 중시할 때 예술가에 대한 정의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다이엔 맥도넬은 [담론이란 무엇인가]에서, 작가를 작품의 의미를 낳는, 자유롭고 창조적인 원천으로 보는 개념이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반에 걸쳐 생겨난 자유주의 휴머니즘 담론의 합법적이고 교육적인 형식일 뿐이라고 비판한다. 그에 의하면 인문학과에 여전히 지배적인 휴머니즘 담론은 ‘예술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과 함께 그에 대한 대답을 제공한다. 이 담론에 따르면, 예술은 완전하고 중심적이고 직접적인 인간경험으로 정의되며, 세세한 부분에 대한 언급을 포함한다. 이 정의는 어떤 언어나 사회의 형식과는 별도로 인간 경험이나 인간 본성 같은 인식 가능한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것을 가정한다. 또 이 정의는 이런 경험이 작자에 의해 언어로 옮겨진다고 가정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언어의 투명성 여부는 둘째 치고, 인간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의문에 붙여진다. 

  

여성을 비롯해서 ‘인간’의 범주에서 타자로서 배제된 수많은 부류들을 생각할 때 그렇다. 여기에서 인간주체는 계급, 민족, 성, 종교 등의 강요된 불평등은 무시한 채 모든 사람을 대표해서 말한다고 주장되었기 때문이다. 주체만큼이나 언어의 중립성도 의문시된다.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언어체계나 구조가 있다는 관념에 의문을 제기하는 다이엔 맥도넬은 정치적 다양성 속에서 지배적인 말이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언어를 모든 사람이 공유하는 의미체계로 보는 것에서 벗어나서, 의미를 물적 사회적 구성물로 보는 관점이다. 저자의 담론 연구는 의미를 지시하거나 의미를 가지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 담론은 이데올로기 실천이라는 넓은 국면에서 벌어지는 의미의 언어적 또는 비언어적 구성으로 간주한다. 여기에서 의미는 기술적인 과정에, 제도에, 일반적인 행동의 패턴에, 전달과 유포를 위한 형식에, 그리고 교육 형식에 구체화되어 있다. 

 

이러한 관점은 알튀세의 논문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에서 비롯된다. 알튀세는 이데올로기가 무엇보다도 물적 실체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 논문은 현재 자본주의 국가에서 이데올로기 작용을 하고 있는 장치(즉 제도)의 개략적 목록을 나열했는데, 종교, 교육, 가족, 법률, 정당정치제도, 노조, 커뮤니케이션, 문화 등이 그러한 이데올로기적 장치이다. 알튀세는 의식이 이데올로기에 의해 구성된다고 주장한다. 이데올로기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들이 살고 있는 실제 관계에 대한 상상의 관계를 부여하는 의미체계이며, 주체 역시 단일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구성하는 이데올로기적 장치들의 산물이다. 개인은 출발이 아니라 목적지가 된다. 휴머니즘이 그랬듯이 개인 역시 역사적인 범주이다. 그것이 역사의 범주인 한 변화될 수 있다. 인간의 죽음을 선언하는 철학자 미셸 푸코는 개인을 자기 자신으로만 향하게 함으로서 대중을 개별화하려는 모든 것에 도전했다. 

 

이데올로기적 장치와 개인


휴머니즘을 역사화하고 비판하는 푸코는 개인을 규제하고 구성하는 실천과 담론으로서의 개인화를 문제 삼는다. 지배적 사회는 규율을 통해 ‘개인화를 통한 지배’(푸코)를 행한다. 주체는 이성을 대변해 왔다. 그러나 지금은 주체와 더불어 이성 또한 비판되고 있다. 자크 데리다는 [글쓰기와 차이]에서 이성이 그 반대를 배제함으로서 안도한다는, 즉 이성이 그 반대로부터 자기를 보호하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그것을 대상으로 구성함으로써 안도한다고 말한다. 데리다는 ‘유아론은 착란도 궤변도 아니다. 그것이 바로 이성의 구조’(레비나스)이며, ‘이성은 초월적 주관성 일반의 보편적이고 본질적인 구조형태’(후설)임을 강조한다. 이성의 지독한 자기중심주의는 타자의 말이 아니라, 자기가 한 말을 들으려 할 뿐이다. 동일자로부터 벗어나 타자 속으로 파고들기는 현대철학의 화두이다. 타자와의 대화를 통해서 ‘동일자의 전체주의와 압제’(데리다)와 ‘동일자의 폭력적 전체성’(레비나스)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데리다에 의하면 자아는 동일자이다. 그러나 예술은 자아중심의 동일화 작용을 넘어서 자기 밖 예측불허의 타자 쪽으로 가는 출구이다. 예술은 나 자신에게 향하는 길이 아니라, 바깥으로 향하는 모험에 찬 길이다. 동일자 속에서 차이를 회수하고자 하는 데리다는 소통에 있어서 차이를 강조한다. 그에 의하면 상이성 없는 순수한 소통은 없다. 이러한 생각은 ‘소통은 완전무결하고 충만한 한 존재와 다른 존재 사이에서 일어날 수 없다. 소통은 그들 자체 내에 죽음과 무의 한계에 위치된 존재들, 생명을 건 존재들을 가진 존재들을 원한다’고 말하는 바타유의 말에서도 확인된다. 소통은 자기동일성의 확인이 아니라 차이를 전제하며, 자기만의 것이라고 간주된 얼마 안 되는 소유물에 급급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전존재를 타자에게 거는 내기이다. 예술은 그자체가 차이의 장이다. 맞부딪히는 차이들은 대화적 상상력을 고무한다. 예술은 고독한 개인의 독백을 넘어서 타자들과의 대화로 더욱 활기차게 되어야 할 것이다.    

  



벨라스케스의 [시녀들](1656-57년)과 대화적 관계를 이룬 작품들은 피카소(1957년) 뿐 아니라, 고야(1778년), 달리(1960년), 위트킨(1987년) 등에서도 발견된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린 ‘시징의 세계’(2015년 5.27—8.2)는 김홍석(한국), 첸 샤오시옹(중국), 츠요시 오자와(일본) 등, 동아시아 3개국 작가들 간의 유쾌한 대화로 만들어진 전시이다.   



출전; 국립현대미술관 웹진 ART;MU (201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