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들지 않는 꽃

  

이선영(미술평론가)

  

2014년과 2015년 사이에 그려진 권태수의 작품에는 꽃이 한 아름이다. 꽃그림은 꽃만큼이나 생생하면서도 실제의 꽃처럼 시들지 않으니 칙칙한 공간을 환하게 하는데 적격이다. 테이블보가 씌워진 탁자 위에 유리 또는 자기 재질의 꽃병, 그 안에 꽂혀있는 다채로운 색상과 형태의 꽃들은 비록 뿌리로부터 유리된 채 한시적인 삶을 살고 있지만 아름다움의 절정을 구가하고 있다. 그 아래에는 탐스러운 과일들이 배치되곤 한다. 꽃은 열매를 예기하지만, 화면 속의 꽃과 열매는 아무 관계도 없다. 대부분의 꽃은 관상용이며, 야생보다는 진보된 육종 기술에 의해 재배된 것이다. 키 작은 과실수에서 열렸을 큼직큼직한 과일 또한 마찬가지다. 그의 작품 속 꽃과 과일은 자연의 원초적인 모습이기 보다는 자연을 상징하는 단편이다. 예술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예술은 자연 그자체가 아니라, 자연으로부터 비롯된 것, 그리고 그것을 참조하는 인위적 기술, 특히 언어이다. 미술이니까 조형 언어이다. 전형적인 정물화 구도를 가지는 권태수의 작품에서 꽃과 과일은 그림을 위한 수단이다. 



꽃의 화려한 색상과 복잡 미묘한 실루엣이 잘 드러나는 바탕은 평면적이다. 벽면으로 간주된 빈 공간 한 켠에 기하학적 패턴을 깔아 놓은 것은 평면성을 강조한다. 패턴들은 기하학적이어서 마치 벽지의 무늬 같기도 한데, 단색의 바탕을 생각한다면 무늬들은 한데 모여 있는 셈이다. 갖가지 꽃들이 꽃병이라는 하나의 용기에 한데 모여 있듯 말이다. 특이한 것은 패턴의 일부를 차지하는 신문으로 보이는 인쇄물이다. 비록 화면 속 비중은 크지 않지만, 많은 작품에서 신문 패턴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그러나 글자가 거꾸로 보이는 등 가독성은 없다. 입체파의 꼴라주가 화면의 평면성을 강조하기 위해 신문지를 사용했듯, 누렇게 변색된 신문지 위의 인쇄 글자는 평면성을 강조한다. 기하학적 패턴 부분에서 신문패턴은 극히 적은 면적을 차지한다. 신문이 현실의 상징이기도 하다면, 그것은 현실이 작품 속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암시한다는 점에서 풍자적으로 다가온다. 신문지 조각으로 대변되는 현실이라는 작은 참조대상은 꽃병으로 대변되는 생생하고 화려한 예술 세계와 대조된다. 


신문은 어느덧 올드 미디어가 되어 역사의 뒤켠으로 사라지고 있기에, 자연과 예술에 비한다면 빛바랜 현실처럼 보인다. 바탕 면, 그리고 그 일부를 차지하는 추상적 패턴과 달리, 꽃과 과일은 평면적이지 않다. 꽃을 입체감 없이 회화적으로 처리한 작품의 경우에는 꽃병이 입체적으로 표현되었다. 꽃과 과일 등, 작가가 방점을 찍는 요소 외에는 평면적이다. 그래서 그의 그림 속 꽃과 과일은 바탕으로부터 튀어나온 듯 더욱 생생하다. 여러 작품에서 작가는 꽃병의 실루엣을 바탕과 연결시킨다. 투명 유리로 된 꽃병 역시 간접적인 방식으로 바탕을 동화(同化)한다. 푸른색을 배경으로 해를 바라보고 있는 큼직한 꽃이 있는 작품은 패턴이 없는 것으로 보아 실외의 장면이다. 비슷한 꽃이 실내의 꽃병에 꽂혀있는 작품은 그 화사함과 생동함이 덜하다. 5개의 풍경이 나란히 배치된 작품은 꽃그림처럼 단색의 바탕이다. 노랑색, 하늘색, 분홍색, 연두색, 회색 하늘이다. 이 하늘을 배경으로 위에만 잎이 무성한 기이한 형태의 나무들이 있고, 그 아래에는 나무의자, 장난감 모양의 차, 꽃 등이 있다. 


어떤 나무는 아직 푸릇하지만 어떤 나무는 단풍이 졌다. 나무들은 햇빛을 최대한 끌어들일 수 있는 나뭇가지가 빈약하다. 빈약한 나뭇가지는 빈약한 뿌리 또한 예시한다. 뿌리와 가지는 지상과 지하에서 서로를 반사하는 상을 이루기 때문이다. 마치 가지 하나를 잘라서 꽂아놓은 듯한 모습이 병 속의 꽃과 다를 바 없다. 풍경화 속에서도 작가는 현실성 제거에 역점을 두는 듯하다. 노랑, 분홍, 회색빛 하늘까지도 현실적일 수 있지만, 연두색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거대한 캔버스라고 할 수 있는 하늘, 그것을 이루는 수많은 색과 빛에서 하나씩을 뽑아 그 자체로 존재 의미를 가지는 또 하나의 하늘, 아니 수많은 하늘들을 화면 속에 세운다. 그래서 그러한 하늘 아래 놓인 사물들은 장난감처럼 비현실적인 느낌을 준다. 그 의자들과 자동차는 앉아있거나 탈 수 있는 모양새를 가지고 있지 않다. 사람보다는 인형이 앉아있다면 어울릴 것이다. 자연 및 사물에서 기능을 제거하고 보기 좋은 색과 구도로 변형하는 것은 정물화나 풍경화나 마찬가지다. 


어떤 것이든 그렇게 놓이고 보여야 하는 방식이 중요하다는 점에서 작가의 유미주의적 태도가 읽혀진다. 예술이자 삶에 대한 태도인 유미주의가 역사적으로 태어난 배경은 예술과 현실의 불화가 본격화된 근대이다. 문예사조사는 유미주의를 19세기 이래 서구의 사상을 지배해왔던 역사주의 및 그것의 통속적 형태인 진보의 믿음에 대한 붕괴가 위기의식을 불러일으킨 것에서 왔다고 기록한다. 유미주의는 아름다움, 특히 예술을 삶의 보편적인 기준으로 삼는 태도를 말한다. 유미주의자들에게 삶이란 예술을 위한 소재에 불과하다. 유미주의에서는 외부세계가 괄호처지고 예술자체의 자족적 소우주가 탐닉된다. 권태수의 정물화(그리고 정물화 풍의 풍경화 역시도)는 자연, 정원, 에덴, 유토피아로 압축될 수 있는 시공간이다. 현실이 차지하는 위상은 인공적 패턴과 함께 붙어있는 작은 신문지 조각정도이며, 그나마 읽을 수 없는 방식이다. 예술은 현실과 거리를 둔 유희로 다가온다. 꽃그림은 단지 꽃을 재현하거나 표현한 그림이기보다는, 작품을 이루는 구성요소를 한정하고 그 내부에서 무한한 조합을 행하는 유희적 태도의 산물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예술은 ‘하나의 게임으로서, 즉 언어요소들의 자유로운 결합을 통해 얻어진 상징적인 표현과 상상력의 가치들의 영역에서 행해지는 일련의 특수화 된 실험’(발레리)이다. 테이블 위로 한정된 공간에서 다채로운 색과 모양의 꽃과 과일을 배열하고 이를 그림으로 옮기는 것은 마치 장기판이나 바둑판에서 말을 이동시키는 놀이꾼의 진지한 몰입과 비유된다. 어떤 이에게는 그저 비슷한 꽃그림들 일 수도 있지만, 작가는 스스로 한정한 유희의 시공간에서 수많은 게임의 수를 실행한다. 유미주의, 또는 예술을 위한 예술은 놀이의 정신과 조응하는 예술사조라고 할 수 있다. 오스카 와일드에 의하면, 예술은 감정, 시대정신, 진리, 영혼의 표현이 아니며, 오직 예술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는 곧 순수예술의 이념을 예시한다. 권태수의 꽃이 있는 정물화는 ‘예술에 의해 세계가 정화되고 순간적으로나마 완벽하게 되는 것’(오스카 와일드)을 추구하며, 이는 삶의 진부함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다.

 

출전; 미술과 비평 가을호(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