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전으로 당겨진 풍경
이선영(미술평론가)
2014-15년에 그려진 이광민의 최근 작품 ‘스페이스 하모니’ 시리즈는 다채로운 색과 형태로 변모하곤 하는 숲을 표현한다. 풀과 나무들로 가득한 숲은 원초적 자연을 상징하기에 충분한 공간이지만, 이광민의 작품에서 그 공간은 유기적이지 않다. 숲을 이루는 유기적인 것들은 그림의 형식적 요소인 선과 면들을 채우고 있을 뿐이다. 화면 속 병렬된 면들은 하나의 숲이되, 서로 다른 시공간을 담고 있다. 약간의 차이를 둔 시공간의 파편들이 재구성된 화면들에서 숲이라는 대상을 인지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마치 어떤 전능한 존재가 숲 안에 반투명한 블라인드나 버티컬을 설치해 놓은 듯, 기하학적 요소가 개입되어 조율된 장면으로서의 풍경이다. 그러한 장면이 그림이 된다면 숲을 반영하는 반사면들이 촘촘히 이어진 형태가 될 것이다. 그림이라는 것이 세계를 보는 창, 또는 세계를 반영하는 거울이라면 이광민의 작품에서 그 거울은 깨져있다.

이광민 Space harmony_116.8x80.3cm_acrylic on canvas_2014
총체성이라는 지난 시대의 관념은 틈과 균열을 부정적인 요소로 간주하지만, 유동성을 고무하는 시대에 틈과 균열은 변화를 위한 보이지 않는 작은 시작점들이 될 수 있다. 이광민의 작품에서도 이러한 틈과 균열은 명확하여 자연은 목전에서 산산이 깨져 발 아래로 내려앉을 듯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화면의 시각적 리듬과 활기를 주기도 한다. 제목에 포함된 ‘하모니’라는 단어는 긍정적인 느낌이 강하다. 풍경은 깨진 상태로 방치된 것이 아니라, 조화롭게 재구성된다. 재구성은 미묘하다. 대상이 있고 그를 둘러싼 공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양자가 자리를 바꾸기도 한다. 가령 공간에 해당되는 부분이 나무의 실루엣을 가진 채 다른 나무와 섞여 있기도 한다. 네가티브 스페이스가 포지티브 스페이스가 될 수 있고, 그 역도 가능하다. 빈번히 일어나는 대조 항들 간의 자리 바꾸기는 평범한 숲 풍경을 벗어나게 한다. 그 숲은 저 멀리에 있는 관조적 풍경이 아니라, 관객 앞으로 확 당겨오는 듯한 강렬한 시각 효과가 두드러진다.
현대의 시각적 전통은 이러한 당겨 옴을 강화한다. 현대예술이 속해 있는 현대 문화가 바로 목전에서 바로 바로 선택할 수 있는 스펙터클(상품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러한 형식상의 유희가 아니더라도, 숲에서 기하학적 속성을 감지할 수는 있을 것이다. 가령 빽빽한 숲 사이로 스며드는 햇빛은 자연에서는 찾을 수 없는 힘든 직선이나 면을 어둑한 공간에 흩뿌릴 것이다. 빛의 산란은 원근법의 규칙이 적용되는 깊은 숲의 이미지를 기하학적 요소로 분해할 것이다. 이광민의 작품은 햇살이 스며드는 숲에서의 그러한 인상을 형식적 장치를 통해 더 강화한 것일 수 있다. 숲을 이루고 있었을 다양한 촉각적인 요소들은 작가의 야성적인 붓터치가 실린 아크릴 물감의 질감으로 재탄생한다. 캔버스 위에 아크릴 물감으로 뒤덮인 화면의 질감은 자연의 질감을 희미하게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경쟁하는 평행한 존재가 된다.
자연이라는 분명한 요소로부터 출발하지만 결국 그림이라는 실재 또한 강조하는 이광민의 작품은 재현에서 구성으로, 해체로 이어지는 현대미술 및 철학의 흐름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이광민의 작품에서 풍경에 개입된 기하학적 요소는 자연의 깊이가 아니라 자연의 표면을, 광학적 환영이 아니라 촉각적 질감을 강조한다. 그 표면과 질감은 곧 자연을 비롯한 지시대상이 없이도 스스로 서 있을 만큼 자율적인 것이 되어간다. 원근법에서 벗어나는 평면화, 관념적 환영을 벗어나는 표면효과에 대한 관심은 모더니즘의 첨예한 관심사였다. 그것은 그림이라는 특수한 대상의 자율성을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예술의 자율성은 많은 것을 잃게 했지만, 동시에 다른 부문의 자율성이 그러했던 것처럼 ‘생산력의 진보’를 가능하게 했다. 단순한 상품의 생산이 아닌 예술에 있어서의 생산력이나 진보란 무엇일까.
눈과 손의 기능으로만 화가의 역할을 한정시키는 분업화의 시스템에 끼어드는 것? 또는 그 연장선상에서, 성공하면 엄청난 가격이 보장되는 물신숭배라는 상품화의 회로에 끼어드는 것? 요즘 유행하는 말로 ‘창조경제’의 주역이 될 수 있는 독특한 아이템? 아니면 인간사회의 진보를 위한 효과적인 정치적 수단이 되는 것? 모든 것을 생산과 연결시키는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여 거칠게 나열하긴 했지만, 대략 그것들은 예술에 있어서의 생산력과 진보를 역사주의적 관점에서 해석할 때의 결과들이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에 맹위를 떨치고 그 이후에도 수그러들지 않은 역사주의는 예술의 본질과는 거리가 있지만, 늘 새로움과 진보를 추구해야할 예술을 맴도는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발전된 미래를 향해 앞으로 나아가는 방향성을 가진 역사를 미술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근대 미술사는 미술의 진보를 이끈 주역들로 마네와 세잔, 그리고 피카소와 브라크를 기록한다.
이광민의 숲 그림처럼, 그림의 평면효과를 위해 빛을 조절한 예는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에서 찾아진다. 여전히 신화적 모티브와 내러티브가 잠재해 있기는 하지만, 마네의 숲은 그 이전의 다른 화가들의 숲과 달리 깊이감이 없고 평평하다. 이러한 평평함은 비현실적이기 보다는 더 화사하고 활기 찬 화면을 가능케 했다.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의 예는 그림이란 물감으로 뒤덮인 평평한 표면이라는 생각이 근대미술의 근본적인 이념이 됨을 알려준다. 그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환영적 공간이 아니라, 만져보고 싶은 이광민의 풍경은 마찬가지로 기하학적 구성요소가 두드러졌던 입체파의 촉각적 공간구성과 비교될 수 있다. 앨런 보네스는 [모던 유럽아트]에서 브라크는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새로운 종류의 화면 공간을 원했다고 서술한다. 그에 의하면 무한히 확장될 수 있는 깊이의 표현은 이제 일시적인 면들을 가진 형태로 대체되었으며, 그 결과 모든 요소들이 분명하게 표현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그림의 표면과 관련된다.
색의 기능은 또한 묘사적인 것이 아니라, 구축적인 것이다. 미학적 함의에 비한다면 이름이 상당히 잘못 붙여진 ‘입체파’는 공간에 대한 브라크의 관심과 형태에 대한 피카소의 관심을 합친 결과이다. 몇 년간 협업으로 지속된 브라크와 피카소의 실험은 공간과 대상은 자연스럽게 뒤섞일 수 있게 했으며, 그것은 그림이라는 평면의 자율성을 향한 거대한 일보였다. 입체파의 시각적 문법을 공유하는 이광민의 ‘스페이스 하모니’는 나무와 나무를 둘러싼 공간이 섞여 이루어진 것이다. 이 공간이 바로 그림의 면이다. 그녀의 작품에서 발견되는 기하학적 파편화는 그림을 현실과 대등한 존재로 만들려는 근대미술의 경향을 따른다. 그 결과 숲의 풍경을 그린 것이 아니라, 풍경을 그림이라는 공간 속에 집어넣은 효과가 두드러진다. 그러면서도 자연과의 연관 고리를 포기하지 않는 것은, 근대미술가들이 점차 추상화되어가는 자신들의 작품들이 패턴이나 장식으로 전락하지 않을까 대한 염려를 공유하기 때문일 것이다.
출전; 미술과 비평 가을호(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