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원들 사이의 교차와 횡단
곽선경 전 (10.8--11.5, 갤러리 스케이프)
베른트 할프헤르 전 (11. 11--12. 11, 사비나미술관)
이선영(미술평론가)
360도 공간 안에 어느 한 부분도 사각지대 없이 풍경을 구에 담는 베른트 할프헤르의 작품, 그리고 색색의 평면을 말거나 쌓아서 입체를 만들거나 공간에 드로잉 하는 곽선경의 작품은 2차원과 3차원 사이를 넘나든다는 공통점이 있다. 할프헤르가 사용하는 ‘Photographic sculpture’, 곽선경이 사용하는 ‘Sculptural drawing’라는 용어가 암시하는 바가 그것이다. 현실 공간으로 뛰쳐나가고 싶은 2차원 상의 환영, 그리고 현실 그 자체와는 구별되고 싶은 3차원 상의 어떤 대상이 어느 지(시)점에서 만나는 것이다. 이를 통해 환영은 실재화 되고, 실재는 보다 응집력 있는 상징성을 획득한다. 그것은 좀 더 구체화되려는 환영, 그리고 일상의 사물과 구별되려는 예술의 경향을 말한다. 이는 그들의 작품을 현실 속 넘쳐나는 이미지나 사물과 차이 짓기 위함이다. 그것은 예술이 자신의 자율성을 추구함과 동시에 생겨난 고민이기도 하다.
오랜 시기 동안 예술은 성과 속의 구별이 분명한 세계의 신화나 종교의 일부였지만, 근대에 예술은 그러한 원형으로부터 벗어났다. 현실로부터 떨어져 나온 예술은 동시에 환영으로부터도 떨어져 나왔고, 그자체로 자족적인 사물로 존재하게 되었는데, 세상에는 이미 있는 사물들과 새로 생겨난 사물들로 포화상태였던 것이다. 제도라는 틀 외에 작품을 작품으로 구별하지 못하는 사태가 예술의 위기를 불러왔다. 한 항목으로 환원되는 것을 부정하고, 변화 그 자체를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는 현대예술은 그래서 그렇게도 불확실하다. ‘125개 롤 감기, 48겹 쌓기, 72야드 말기’라는 긴 전시부제를 가지는 곽선경 전과 ‘Intersections’라는 부제의 베른트 할프헤르 전은 차원들 사이의 교차와 횡단을 암시한다. 그들의 작품은 서로 다른 차원 사이의 접속지점이 활성화되어 있다. 그들이 다른 차원 간의 만남과 변주를 중시하는 것에는, 독일 출신으로 한국에 정착한 작가와 한국 출신이지만 뉴욕에서 거주하고 작업하는 작가의 자의식도 반영되었을 것이다.

Sun K. Kwak_41 Rolls of Winding_2008_gaffer tape, wooden panel, varnish_top part 99x60cm bottom part 139x40cm
곽선경은 전시부제 그대로 감기, 쌓기, 말기 등의 방식을 통해 ‘공간 드로잉’과 ‘조각적 드로잉’을 보여준다. ‘공간 드로잉’의 예는 작품 [공간 꿰매기]로, 철사와 실 등, 가느다란 재료를 이리저리 꼬아서 3차원 상에 ‘드로잉’ 한 것이다. 선이 흐르는 바탕은 평면이 아니라 전시장이며, 프레임은 없다. 공간을 꿰매는 ‘바늘’은 평면을 한계를 벗어나 얼마든지 사방팔방으로 뻗어 나갈 것이다. 2층에 따로 전시된 드로잉들 중에도, [구성된 시간]이라는 제목이 붙여진 시리즈에서는 따로 그렸을 법한 드로잉들이 꼴라주 되어 있어 단일한 차원에 머물러있지 않다. 입체와 평면 사이의 유희는 프레임 안에 색선들이 쌓여있고, 선들은 어느 지점에서 입체로 흘러내리는 작품 [규정지을 수 없는], 그리고 색색의 테이프로 만들어진 평면의 한쪽 끝이 입체구조물로 변형되는 작품 [41롤 감기]에서 대표적이다.
촘촘히 쌓인 시간의 층은 면을 구축하고, 면은 다시 중력의 작용을 받아 아래로 흘러내린다. 반대 방향으로 생각하면, 겹겹이 층진 덩어리들은 씨나 배는 발아하고 발생하여 구조화될 것이다. 잠재적 덩어리는 평면으로 현실화된다. 곽선경의 작품에서 차원의 변주는 무질서와 질서, 무의식과 의식으로 변주되고, 그것들은 수시로 자리를 바꾼다. 거울은 대표적인 환영의 장치라고 할 수 있는데, 작품 [당신의 자화상]에서는 블랙 미러를 감싸고 있는 프레임이 색색의 테이프로 되어 있고, 거기에서 나오는 돌기들은 마치 덩굴손처럼 또 다른 지지대를 찾느라 분주하다. 돌기들은 거울이 불완전하게 반영하고 있는 조각난 현실들을 이어줄 듯하다. 그렇게 상상계와 실재계라는 서로 다른 차원은 이어질 것이다.
테이프의 단위는 좀 더 커져서 말대 형태가 되기도 한다. 작품 [공간 말기]에서, 풀려진 검은 비닐 말대는 물결처럼 오려진 형태를 하얀 벽면을 배경으로 흐르게 한다. 둘둘 말려 있던 평면은 벽면을 배경으로 형태를 펼친다. 작품 [60파운드의 먼지, 2킬로 그램의 모래, 32그램의 재]는 전시장 벽면에 붙어있는 평면 작품을 이루고 있을 법한 원재료들을 제목으로 삼아서 지형도처럼 펼쳐진 환영의 실재성을 강조한다. 긴 테이프로 변화무쌍한 형태와 구조, 관계를 만들어내는 곽선경의 작품은 끈과 판으로 이루어진 현대의 우주관을 떠올린다. 마가렛 버트하임은 [공간의 역사]에서, 우주 전역에 흩어져 있는 것은 거대한 ‘우주의 끈’과 ‘얇은 판’이라고 믿는 현대 물리학자들의 가설을 소개한 바 있다.
그것들은 거대한 중력이 응축된 수백만 마일 길이의 줄과 판들로, 은하계와 은하계 사이의 공간구조를 강하게 휘게 한다. 그에 의하면 해양처럼 상대론적 공간은 파동, 기류, 그리고 소용돌이, 즉 별과 별 사이의 바다와 같은 공간에서 거세게 굽이치고 물결치는 거대하고 유동적인 4차원 곡면에 의해 부단히 변형된다. 여기에서 시간은 공간의 또 다른 차원일 따름이다. 공간과 시간은 4차원의 전체 안에 하나로 묶여있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시간은 공간의 다른 차원이며, 이러한 4차원의 복합물은 시공간(spacetime)이라는 단어로 표현된다. 곽선경의 작품에서 보이는 시간의 층은 매우 유연하며, 전술한 바처럼 현대의 상대론적 우주처럼 움직인다. 천정과 벽, 바닥에 이런저런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들은 물질이자 주름 잡힌 공간이다. 그것은 공간에 물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물체가 바로 공간이라는 현대적 우주관과 상통한다.

베른트 할프헤르 개인전-Intersections 1층 전시전경
베른트 할프헤르의 작품에서도 공간은 단순히 배경이 아니라, 주인공이다. 2층과 3층이 연결된 공간에 설치된 작품 [Rescue]을 보면, 그물망 안의 구는 변모된 공간을 강조한다. 대상까지 포함하는 변모된 공간이 장(場)이다. [공간의 역사]에 의하면, 물리학자들은 공간을 거대한 트램펄린처럼 팽팽하게 당겨진 고무판에 비유한다. 태양과 같은 거대한 덩어리는 우주 공간의 얇은 막에 영향을 준다. 태양은 평평한 곳을 쑥 들어가게 함몰시킴으로서 주위의 공간을 변형시키는 것이다. 물체가 육중할수록 그것이 공간에서 야기하는 함몰은 더 깊어지고, 따라서 그 근처의 중력의 힘도 더 커진다. 물리학자들은 이렇게 움푹 패인공간을 만곡이라고 부른다. 할프헤르의 작품에서 항성처럼 생긴 둥근 구도 공간 조직에 만곡을 만든다.
이렇게 무수한 기복과 곡면들로 이루어진 공간조직이 우주의 경관을 형성한다. 그물망 안팎에 배치된 구는 곡면에 담겨진 평면들이다. 풍선처럼 텅 빈 공간을 싸안는 세계는 무엇인가를 담는 공간 개념과 다르다. 그의 작품은 상자가 아니라 얇은 막과 비교될 수 있다. 버트하임에 의하면, 뉴턴으로 대변되는 이전의 고전주의적 세계상에서 공간은 본질적으로 텅 비어있는 상자로 영원히 뻗어나가는 3차원의 무한한 공간이었다면, 현대의 공간은 광대한 얇은 막과 같다. 막은 상자보다 유연하여 전지전능한 시점까지도 내포한다. 구 또한 유한하면서도 무한하다. 할프헤르는 ‘2차원과 3차원 사이의 교차점’을 보여주는 구형태의 작업에 대해, ‘누락되는 부분 없이 전체를 볼 수 있는 이미지, 어떤 각도에서도 볼 수 있는 이미지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동기가 되었다’고 밝힌다.
구라는 완벽한 형태 안에 담긴 여러 풍경들은 전시장 이곳저곳에 배치되어 다양한 작품들을 이해하는 바로미터가 되고 있다. 그의 작품에서는 픽셀도 둥글다. 익명적으로 떠도는 이미지들은 추상적인 색 점으로 변모를 거듭한다. 둥근 형태는 벽에 붙어 작동하는 키네틱 작품에도 반향 된다. 작품 [Reiszeit]은 원형 틀 안에 쌀을 반 정도 채운 작품으로, 지속적으로 작용하는 어떤 힘을 지각하게 한다. 작가는 보편 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힘(중력)을 한국인에게 친숙한 쌀의 운동으로 가시화한다. 관객의 참여를 통해 접었다 펼쳤다 하는 작품 역시 차원의 변주를 보여주는 경우다. 작품 [Sommermärchen]는 관객이 접혀있는 금속 프레임을 열면 하늘과 땅으로 나뉘어지고 다시 하나가 된다. 접거나 펼쳐지는 우주에 대한 상은 작품 [Transformer]에서도 나타난다.
이 작품은 한국의 전통 가옥과 아파트 단지를 사진에 담아 입방체로 만든 것인데, 마치 매직큐브 게임처럼 이리저리 짜맞춰볼 수 있다. 그것은 허물고 짓기를 반복하는 한국의 풍경을 이방인의 시점에서 바라본 결과일 것이다. 그의 작품에서 과거와 현재는 접기를 통해 서로 다른 시공간은 불현 듯 조우한다. 그것은 급작스러운 차원의 이동을 보여준다. 2차원이 접혀져 만들어진 세계가 있다면, 3차원이 접혀질 때는 어떤 양상일까. 에드윈 애보트가 1844년에 쓴 [플랫 랜드; 스퀘어의 다차원 여행 로맨스]에 의하면, ‘2차원적인 냅킨을 3차원 공간에서 대각선으로 접을 수 있는 것처럼, 4차원 공간에서 3차원 공간의 두 부분을 서로 접을 수 있다’고 생각된다. 4차원 공간에서의 공간 접기를 상상할 수 있는 것은 수학도 함께 전공했던 할프헤르의 내공일 것이다.
출전; 아트 인 컬처 12월호(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