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본질을 해체하는 시간의 깔대기

  

이선영(미술평론가)

  

청주미술창작 스튜디오에서 열린 아주사 우에노(Azusa Ueno)의 ‘Interval of fragility’ 전은 종이, 도자 흙, 수지 점토 같은 ‘여린’ 재료들로 만들어진 설치 전이다. 길게 이어 붙일 수 있는 종이, 굳기 전까지 자유로운 성형이 가능한 부드러운 흙은 그 자체의 고정된 형태보다는 재료의 간격이 작품의 규모를 만들어내는 가변적인 설치작품으로, 시간성을 축으로 변화되어 가는 과정을 시각화 한다. 노란색 메모지(포스트 잇)를 계속 이어서 전시장 바닥에 둥그스름하게 배열한 작품은 단순한 외곽에 복잡하게 주름 잡힌 내부로 인해 뇌나 미로의 구조 같은 형상이 떠오른다. 거대한 종이꽃처럼 보이기도 한다. 또는 무엇인가의 절단면 같기도...만약 그곳에 납작한 2차원적 동물이 그곳에 갇힌다면 출구를 찾기는 힘들 것이다. 또 다른 차원에서 봐야 그 구조는 무한에서 유한으로 변모할 것이다. 사고가 진행되는 과정도 비슷하지 않을까. 


설치전경


단순히 꼬리에 꼬리를 무는 논리적 연쇄 망으로 해결되지 않는 난제는 차원의 변주와도 같은 발상의 변환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대체로 아주사 우에노의 작품은 주어진(또는 작가가 정한) 차원을 늘려가는 변주를 즐길 뿐, 모든 과정을 간파할 수 있는 어떤 초월적인 시점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추상으로 귀결된 근대 회화는 그러한 전능한 시점을 요구(또는 전제)하곤 했다. 실재의 과정이 관념적으로 고정되면서, 코드화된 소비의 회로에 쉽게 빠져 들었다. 최초의 개념적 감성적 혁신이 일어난 후, 표면만을 가다듬는 맥 빠진 과정과 (미술)시장의 소비는 함께 가곤 한다. 그러나 아주사 우에노는 자신에게 주어진 평면을 주름잡고 균열을 허락하여 불순하게 만든다. 모더니즘적 순수가 아무것도 자라날 수 없는 불모의 것이 된 후 변화는 필연적인 것이 되었다. 그녀의 작품에서 변화는 유기체적 변화, 즉 변모(metamorphosis)를 지향한다. 


아무것도 써있지 않은 메모지 크기의 작은 사각형은 시간성과 수행성을 통해 변모한다. 그녀의 작품에서 빈 메모지는 기억하거나 이동하기 위해 필요한 망각을 상징하는 듯하다. 메모지들의 배열은 양 방향(para-)으로 쭉쭉 뻗어나가며 어디에 서인가, 언제쯤인가 만날 수 있을 역설적(paradox) 과정이다. 수많은 메모지들이 이어 붙어 만들어진 또 다른 전체는 ‘작품이기 보다 텍스트’(롤랑 바르트)인 현대예술의 연결망적 구조이다. 그 옆 좌대 위에 놓인 작은 작품은 대량생산되어 나온 종이 메모지를 구성단위로 삼아서 끈끈한 부분을 붙여 단순하게 이어가는 동작을 샘플처럼 보여준다. 바닥의 설치작품에 비해 규모가 작아서인지 그 구조가 한 눈에 들어온다. 시작과 끝이 꼬리를 물고 있는 둥근 형태는 비록 작은 규모이지만 끝없이 진행될 수 있는 과정을 모델화하기에 충분하다. 아주사 우에노의 작품은 방법론이나 구조가 단순하지만, 기념비적 형식을 취하지 않음으로서 오는 홀가분함과 자유로움이 있다. 


설치전경


둔탁하거나 장황하지 않은 작품들은 적은 부피로 접혀 있다가 어디에서라도 다시 유연하게 펼쳐질 수 있는 것이다. 그것들은 새로운 시공간에 맞춰 융통성 있게 맥락화 될 것이다. 벽에는 부드러운 수지점토를 일정 간격으로 죽 늘어 뜨는 작품이 걸려있다. 일정한 형상으로 주무른 흔적만이 전부인 소박하고 단순한 방식이다. 여기에서 작가의 솜씨를 한껏 살려서 심오한 의미를 전달하려는 거창한 의도를 찾기는 힘들다. 관객의 시선 약간 위쪽 나무 막대에 걸려있는 하얀 형상들은 마치 연동운동을 하는 장 같은 느낌이다. 그것들은 어떤 그럴듯하게 보이는 구성적 고안도 거부한 채 그냥 나란히 매달려 이완과 수축을 반복한다. 관객의 시야 아래에 설치된 또 다른 수지점토 작품은 그러한 연동운동의 산물일까. 그것은 마치 공중에 드리워진 그것으로부터 똑 떨어진 덩어리가 또 하나의 턱을 만나 잘라진 형세다. 두 개로 뚝 끊어져 길게 뽑힌 두 개의 말단은 마치 방금 끊어진 것 같은 생생함을 가진다. 


처음에는 부드러웠지만 시간에 의해 단단해진 형태는 유기적 과정에 대한 비유가 있다. 아주사 우에노의 작품은 재료의 성질이 잘 고려되어 있고, 손으로 만지작거릴 수 있는 아담한 규모가 특징이다. 큰 규모도 작은 것이 반복된 결과일 뿐이다. 물질과 육체가 직접 만나는 과정이기에 기계적 반복은 없다. 또 다른 전시실의 바닥에는 정사각형으로 깔아놓은 도자토가 마르면서 서서히 금이 가고 있는 중이다. 좌대 위에 올려놓은 도자토 판은 수축되어서 가장자리가 조금 들어간 상태이다. 그것은 숨 쉬는 재료인 흙의 섬세한 물성을 살린다. 종이나 수지점토에 비해 더 살아있는 재료라고 할 수 있는 도자토를 이용한 작업에서 전시 기간 중 관객이 보게 되는 형태는 미묘하게 차이가 날 것이다. 얇게 펼쳐지고 사각으로 잘린 도자토가 금이 가고 수축하는 물리적 과정은 매우 서서히 일어난다. 가시적으로 멈춰있을지라도 비가시적 차원에서는 미묘한 변화가 계속 되고 있을 것이다. 



[untitled], raw porcelain clay, 500x320x12cm, 2006

현대인의 눈길과 손길을 스쳐지나가는 인터페이스의 빠른 속도에 비한다면, 약간 과장해서 말해 거의 지질학적 시간대의 변화폭을 가진다. 물리학이나 생물학에나 관철될 그러한 장기적 시간대를 인간은 임의적으로 잘라서 ‘영원’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말이다. 동일성이 차이로 이루어져 있듯이, 영원은 순간들의 집합이다. 예술작품은 무한한 시간의 흐름 속 섬세한 차이를 가늠해달라고 요구한다. 현대미술에서의 소통은 게임의 공유를 전제하며, 이러한 공유는 대중적 차원의 소통에 비한다면 적지 않은 시간을 요구한다. 즉 현대미술의 소통에는 다소간의 무리함이 따른다. 이러한 무리함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현대미술에서의 소통은 불가능하거나 피상적일 것이다. 수수께끼처럼 보이는 사물의 양상에 더하여 작가가 그것에 접어 넣은 상징까지 감안한다면, 우리가 예술을 통해 소통해야 할 것의 층위가 얼마나 많은가. 


보이는(또는 보고자 하는) 사람에게만 보이고,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무의미의 덩어리들에 불과한 것들이 미술계라는 제도를 통해 그 존재를 이어가고 있는 것도 알고 보면 기적 같은 일이다. 현대미술가가 당면하는 어려움은 전적으로 부조리한 것만도 아니다. 공동체가 공유하는, 신화와 종교 같은 상징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현대에 예술은 소통의 어려움을 내장한다. 그러나 그 시공간만이라도 우리의 심신이 이고지고 있는 것들을 내려놓는 계기를 준다면, 바로 그것이 그 작품이 소통하려는 바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아주사 우에노는 최종적인 형태와 의미로 고정되기 힘든 부드러운 재료들이 서서히 전개되는 과정 자체를 중시하면서, 그자체가 목적이 아닌 어떤 계기를 마련한다. 최초의 시작, 즉 의도는 개입되지만 내버려 두는 과정 또한 중요하다. 예술가는 시작하는(또는 문제를 제기하는) 자이지 완성하는(또는 대답하는) 자가 아니다. 완성은 자연이나 공장, 장인이 한다. 또는 정치가, 과학자, 철학자, 역사가 등이 한다. 



[untitled], paper, 177x400x30cm, 2013

아주사 우에노의 작품은 필연과 우연이 합쳐진 결과이다. 여린 재료들은 전자 뿐 아니라 후자의 과정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 도자토의 사용은 독일로 유학을 가기 전, 일본에서 도예를 전공한 작가의 이력과 관계될 것이다. 아이들의 공작에 잘 사용하는 재료인 수지 점토도 비슷한 계열이다. 그것들은 잘 주물럭거려지며 일련의 형태가 만들어진 후(시간이 흐른 후)에는 단단해 진다. 작가가 애용하는 또 다른 재료인 종이 역시 도자기 재료를 특이하게 사용하는 방식과 비슷하다. 종이는 도자토를 얇게 펼쳤을 때, 그리고 완결된 형태보다는 공간적인 드로잉을 위해 일정한 크기로 잘랐을 때 하얀 종이 띠들을 연상시킨다는 점이 그렇다. 가령 흰색 켄트지를 잘라 풀로 붙여 한 층씩 쌓아 올린 이전 작품 [무제](2013)는 종이의 평평함을 얇고 섬세한 선으로 치환시킨 것으로, 동명의 도자 설치작품(2006)과 유사한 방식이다. 양자는 중력에 순응하는 자연적인 형태와 시간이 만들어낸 공간을 보여준다. 


작가에게 익숙했을 부드러운 재료들은 잡아당겨지고 늘어 뜨려지며, 잘려지거나 접혀진다. 아주사 우에노는 최초에 도자예술을 전공했지만, 무엇인가를 담는 도자기 보다는 화이트 큐브 자체를 하나의 용기(容器)로 삼아 그 내부를 잠시 거쳐 가는 가변적인 내용물을 만드는데 더 주력한다. 화이트 큐브는 이러한 물성의 전개를 섬세하게 드러내줄 뿐이다. 화이트 큐브가 아닌 곳에서는 장소 특정적으로 펼쳐지거나 접혀진다. 도자토, 즉 젖은 흙은 그릇을 만드는 과정이 아니더라도 그 자체로 다양하게 변화한다. 작가는 변화의 순간을 관객들이 포착하고 느끼기를 원한다. 그 순간은 하나가 아니다. 잔잔한 지속의 과정 속에 있는 그녀의 작품에는 어떤 결정적인 순간도 없다. 작품 [Drawing of cracks](2007)은 도자토가 건조되는 과정에서 생기는 균열들을 드러낸다. 주름살처럼 서서히 늘어가는 균열은 영원히 깨지지 말아야할 ‘도자예술’로서는 달갑지 않은 현상이지만, 작가는 그 과정에서도 아름다움을 감지한다. 영원함이 아니라 변화하는 속성을 주목하는 것이다. 



[drawing of cracks], ceramics, glaze, 38x48x7cm each, 2009/2014

작가는 균열이 늘어가는 과정을 영상으로도 찍었지만, 전시장의 관객에게 영상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빠르게 또는 느리게, 또는 편집을 통해 임의적으로 조작될 수 있는 시간성보다는 자연적 시간성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아주사 우에노의 작품은 물성을 중시하지만 그 물성은 본질을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과정 중에 있다. 그 과정이 너무나 천천히 진행되어 고정되어 보일지라도 말이다. 하나의 원형을 강조하는 본질은 관념적이다. 마누엘 데란다는 들뢰즈의 철학을 해설한 [강도의 과학과 잠재성의 철학]에서, 본질에 대한 관념을 비판한다. 어떤 재료들을 사용하든 부드럽게 접혀진 주름들이 특징적인 아주사 우에노의 작품은 본질이 아닌 다양체(manifold)에 가깝다. [강도의 과학과 잠재성의 철학]에 의하면, 본질 개념은 통일되어 있고 시간초월적인 동일성을 함축하는 반면, 다양체는 통일성을 결여하고 있으며, 또 전부 한꺼번에 주어지기 보다는 점진적으로 정의되는 동일성을 함축한다. 


아울러 본질들이 그 현실화의 경우들에 있어 모델이 복사본들에 대해 갖는 관계, 즉 다소간의 유사성을 함축하는 관계를 가진다면, 다양체들은 이런 유사성을 함축하지 않는 발산하는 실재화들(realizations)을 함축한다. 도자의 재료를 많이 사용하지만, 용기의 개념을 배반하는 아주사 우에노의 작품은 ‘물질(질료)을 외부적인 형식(형상)들을 위한 수동적인 용기로 간주하는’(마누엘 데란다) 본질들과는 달리, ‘외부적인 개입 없이 패턴을 낳는 자연발생적인 능력’을 강조한다. 아주사 우에노가 중시하는 물성은 전개 과정을 통해서만 명확해진다. 데란다가 들뢰즈를 따라 강조하는 다양체는 물질적 과정들에 내재적이다. 내재적이란 초월성과 반대되는 말이다. 거기에는 연속해서 짜여 지는 차이들이 있을 뿐, 영원한 존재나 본질은 없다. 하나의 본질이 아니라, 다양한 국면들을 중시하는 아주사 우에노의 작품에서는 균일성이 자연스러운 상태가 아니라, 차이가 자연스럽다. 


resin clay를 잡아당기는 모습(2007)


[a view of sticky threads], adhesive, polystyrene board, wood, 2012


그녀의 작품에서 차이의 생성은 시간성과 밀접하다. 작품에 겹겹이 드리워진 시간이라는 깔대기는 본질이라는 덩어리를 걸러낸다. 더 이상 그것이 본질로 여겨지지 않을 때까지. 리처드 테일러는 [형이상학]에서 플라톤은 시간을 영원의 움직이지 않는 그림자 외에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했는데, 이 후자는 곧 변화도 생성도 죽음도 없는 실재의 영역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그 후 줄 곧 형이상학의 특성을 이루어 왔다. [형이상학]에 의하면 영원이란 신과 같이 영원하고 불변하는 존재에 의해 보이는, 세계의 시간적 차원이다. 그것은 생성되거나 소멸되는 그 무엇으로 감지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있는 것이다. 리차드 테일러는 형이상학자들이 시간을 비실재적이라고 하거나 일종의 환상이라고 공언한 점을 강조한다. 시간은 모든 것을 시험에 들게 할 것이다. 합리적이고 기능적인 것을 따지는 현대인에게 그러한 시간성은 낭비로 다가올 것이다. 시간을 단축시키려는 모든 근대적 방법론 속에서 삶 또한 억압된 것은 아닐지. 


생로병사의 과정을 포함한 삶의 중요한 과정은 그자체로 시간이기 때문이다. [형이상학]에 의하면 움직이는, 그래서 역설적인 시간의 관념에 대비해서 형이상학자들은 영원이란 관념을, 끊임없이 움직이는 그 무엇으로서가 아니라 변화나 쇠퇴, 사멸 같은 것은 없고 실재하는 것은 한결같이 그렇게 있을 뿐인 일종의 무시간성으로서의 관념을 설정해 놓았다. 그러나 현대미술, 특히 미니멀리즘 이후의 설치미술은 시간을 통한 경과를 중시한다. 시간의 추이에 따른 지각의 생생함을 중시하는 현대미술은 본질의 재현이 아닌 순수한 생성을 포착하려 한다. 아주사 우에노의 작품은 현전의 순간을 강조하는 평면적 작품, 가령 도자토의 균열이 가는 과정을 직시하게 하는 작품에서 조차 시간성과 그것이 끌어들일 우연성을 강조한다. 그것은 예술작품 역시 태어나 성장하고 늙고 때로는 상처받고 치유되며 소멸하는 유기체와 동일한 계열에 놓는다. 다만, 그 유기체는 전체와 부분이라는 이전시대의 이원론적 관계에 기초한 유기체가 아니라, 시공간의 주름을 펼치고 접는 식의 ‘다양한 하나의’ 차원을 가진다.     

  

출전;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