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눈/몸으로 보는 세계의 광경

 

주도양 전 (1.15-3.18, 사비나 미술관)

정정엽 전 (1.21 -2. 27, 갤러리 스케이프)

  

이선영(미술평론가)

  

비슷한 시기에 열린 주도양의 ‘곤충의 눈’ 전과 정정엽의 ‘벌레’ 전은 생태계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한낱 미물’로 강등되어온 존재가 주인공이다. 이 작은 존재들은 이전 시대를 주름잡던 메타 서사가 아닌, ‘보다 작은 단위로 작동하는 언어게임’(리오타르)을 한다. 주도양은 독학으로 사진을 공부하여 사진적 메카니즘으로 구현한 곤충의 시선에 주목하고, 정정엽은 우리 시야 밖에 존재하는 것들의 생태적 의미에 주목한다. 자신이 고안한 도구로 진기한 비전을 펼쳐 보이는 주도양, 썩고 상한 것들로부터 비롯되는 생명의 경이를 보여주는 정정엽은 현대에 다시 문제시 되고 있는 인간중심주의적 관점을 벗어난다는 공통점이 있다. 


인간중심주의는 날로 심화되는 생태계 문제와 정보의 혁명으로부터 온 충격에 의해 헐거워졌다. 지표면의 일부에 붙어서 살고 있는 인간이 생태계에 끼친 악영향은 크다. 자연에게 행한 것은 인간에게도 되돌아올 것이라는 점에서 인간중심주의는 상상 이상의 디스토피아를 낳을 것이다. 정보혁명의 경우는 손안의 컴퓨터를 비롯한 갖가지 편리성으로 감시 및 조절 사회를 넘어서는 유토피아적 비전으로 물들어 있다. 그러나 전 지구적 차원을 가진 정보의 세계 역시 인간적 차원을 넘어서는 것은 마찬가지다. 


노르베르트 볼츠는 [컨트롤된 카오스; 휴머니즘에서 뉴 미디어의 세계로]에서, 데이터 흐름들의 속력, 그리고 마이크로 전자공학의 기계장치들은 인간이라는 휴머니즘적 척도와 아무 관계도 갖지 않는다고 말한다. 저자는 컴퓨터에 의해 인간의 의식작용을 시뮬레이션할 수 있을 시대에 기존의 휴머니즘은 달라질 수밖에 없음을 강조한다. 주도양에게 인간의 시선은 또 다른 시선들에 의해 상대화 된다. 정정엽에게 인간 중심의 상징적 우주에 초대받지 못한 이질적 타자들은 강한 존재감을 발산한다. 근대 이후 만물의 척도로 선 인간중심주의는 자연을 도구화되고 착취하는 하나의 시선을 강요하였다. 그러나 이제 억압된 타자들이 복귀하고 있다. 


복귀된 타자들은 ‘전(前)현대적이거나 탈(脫)현대적’(줄리언 페파니스, [이질성의 철학])이다. 현대적 환경에 갑자기 등장한 원시적 괴물같은 정정엽의 작품, 미물의 시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항공공학 등에서도 요긴하게 쓰일 스마트 기기의 시점이 있는 주도양의 작품은 현대 전후의 탈 인간적 시점들이 편재한다. 주도양의 작품에서는 단안이나 양안이 아니라 복합적인 시선, 정정엽의 작품에서는 썩어가는 몸체로부터 발생하는 또 다른 생명의 과정이 나타난다. 이들의 작품에서 벌레의 이질적 관점들은 주체/대상의 이분법에 기초한 재현적 시선이나 가부장적 시선을 해체하는 차이의 시선이다.


 

주도양, Magnolia I, 100X200cm, C-Print, 2016, (4월25일 일산 호수공원)


‘시선의 기원, 곤충의 눈’이라는 부제로 열린 주도양 전은 인간보다 먼저 존재했고, 아마도 인간보다 더 오래 갈 곤충의 시선으로 잡힌 세상의 풍경을 표현한다. 오랫동안 독학으로 사진을 연구해온 작가가 제작한 수제 카메라에 잡힌 세상은 풍경 깊숙이 빨려 들어갈 듯 휘몰아치는 구도, 또는 흐릿하게 겹쳐진 형상이다. 연잎으로 감싸인 듯한 하늘, 대나무를 비롯해서 직립 구조들이 강하게 휘어지면서 만들어내는 에너지의 흐름은 황홀하다. 빈 깡통에 바늘구멍들을 내어 만든 핀홀 카메라로 여러 개의 홑눈으로 보는 곤충의 시점을 시뮬레이션 한 작품은 땅 위나 물표면, 또는 높은 곳 같은 시점이 통상적인 시야를 벗어나므로 낯설게 다가온다. 


작가노트의 한 대목처럼 ‘태초의 우주가 성립될 때의 혼돈의 세계’에서 ‘세상의 근심 걱정 모두 버리고 곤충처럼 이곳에서 생을 마치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의 몰입 강도를 느끼게 한다. 각 작품 아래에는 촬영 날자와 장소는 물론이고 그곳에 서식할 것이라고 추정되는 곤충들이 기록되어 있다. 가령 강릉 오죽헌에서 찍은 한 작품에는 개미, 일본 왕개미, 무당벌레, 칠성 무당벌레, 우리가시허리노린재 등, 보통 사람이라면 어떻게 생긴 지도 모를 벌레들의 시점이 담겨있는 것이다. 전시장 한켠에 차려놓은 복잡한 기구와 시약들, 그리고 카메라, 필름, 인화지 등을 만드는 방법, 심지어는 X 자로 그어진 폐기된 필름원본까지 빼곡이 담겨있는 그의 책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고 작업에 집중하는 법]은 세계를 보는 또 다른 시점을 열어 제치려는 조형예술가의 집념을 예시한다. 


주도양, Hexapoda II, C-Print, , Kodak Ektar100, Handmade pinhole camera,  120x170cm, 2016

예술은 끝없이 다름을 이야기하지만, 실제로 그것을 얼마간이라도 구현하려면 얼마나 집요한 노력과 희생이 요구되는가. 작가의 상상과 기술로 구현한 곤충의 ‘여러 방향의 낱눈이 본 입체적 시선’은 인간의 육안이나 외눈박이인 보통 카메라의 시점과는 사뭇 다르다. 전시된 작품들은 디지털 카메라와 핀홀 카메라로 촬영한 작품들로 나뉘어진다. 디지털 카메라로 찍은 것들은 컴퓨터로 재구성되어 현란하고 변화무쌍한 풍경으로 탄생하고, 핀홀 카메라로 촬영된 필름을 검프린트 방식으로 인화한 작품들은 흐릿하게 겹쳐진 형상들이 몽환적 분위기를 자아낸다. 곤충의 시선을 도입하려는 주도양의 작품은 근대 이후에 확립된 지배적인 시각성(visuality)을 다양화하려 한다. 


‘지배적인 근대적 시선’은 리차드 로티가 [철학과 자연의 거울]에서 근대적 인식론의 기본이 된 관념, 즉 ‘기하학적으로 등방(isotropic)이며, 직선적이고 추상적이며 균일한 것’을 말한다. 이 시선은 고정된 단일한 눈을 가진 사진의 시점이기도 하다. 인간의 눈을 시뮬레이션하는 사진기술은 표상의 역사에서 주요한 대목이다. 데카르트로부터 비롯된 근대적 세계관을 극복하려 했던 니이체는 ‘만약 모든 사람이 제각기 다른 구멍이 있는 자신만의 카메라 옵스큐라를 각자 갖고 있다면, 그 어떤 초월적 세계관도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 한 바 있다. 주도양만이 가진 카메라 옵스큐라는 니이체의 시대를 지배했던 휴머니즘의 익숙한 영토를 넘어서는 타자의 시점들을 가능케 한다.   

 


정정엽, 싹 4_2015_oil, acrylic on canvas_162x130cm


자연과 생명, 보살핌과 살림을 평화롭게 아우르는 여성성에 주목해온 작가 정정엽의 ‘벌레’ 전은 미물로 간주되어온 것들을 전경에 내세운다. 푸르른 밤하늘, 또는 비상구등이 켜진 회색빛 실내에 거대하게 떠 있는 나방은 그다지 사랑스러운 형태는 아니지만 전신을 뒤덮는 보송보송한 솜털은 신령한 기운을 뿜어낸다. ‘나는 벌레다...사람이 없는 곳에서 오히려 모든 생명들이 내뿜는 깊은 숨이 느껴질 때가 있다.’(작가노트)고 말하는 대목에서는 벌레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시선도 발견된다. 또 다른 작품군은 벌레의 생태계로 간주될 법한 식물들, 특히 여성의 일상과 친숙한 과일, 야채, 나물 등이다. 지구상 최초의 생물체로 다른 생물체를 가능하게 했던 것이 식물이라면, 움직이지 못하는 식물이 번성하게 도와줬던 것은 벌레다. 


그러나 정정엽은 벌레에 의해 꽃가루가 옮겨져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통상적인 과정이 아니라, 썩어가는 단계와도 함께하는 벌레를 주목한다. 전자의 과정이 미술작품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꽃그림과 과일그림을 탄생시켰다면, 썩는 과정에 주목하는 것은 소수의 악취미와 관련될 것이다. 그러나 정정엽의 작품에서 벌레를 닮아있기도 한 썩은 채소나 상한 과일은 부정적인 기운을 걷어낸다. 그것은 상투화된 미의식으로 고정되지 않고, 또 다른 생명의 과정으로 거듭난다. 붉은 팥 그림으로 강한 인상을 남겨온 작가는 이 전시에서 열매이자 씨앗이 되는 감자가 자신을 양분으로 삼아 싹을 내는 과정을 그린다. 기이하게 뻗쳐오르는 또는 토사물처럼 뿜어지는 싹의 줄기들은 미확인 생물체의 촉수처럼 보인다. 



정정엽, 지구의 한 마을-나방1, oil acrylic on canvas,162x130cm 2014


이 촉수는 ‘여리고 강한 것....징그럽고 아름다운 생명의 속살’(작가)이다. 그것들이 더욱 기이한 것은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는 현대적 실내에 배치되어 있는 점이다. 씨앗-싹들은 그자체로 자연스럽지만 그것이 기괴해 보이는 이유는 자리를 잘 못 잡았기 때문이다. 의외의 장소에서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자라나는, ‘병리적으로 보이는 이상(異常) 한 생명의 과정’(깡길렘)은 예술 및 예술가적 주체와도 중첩된다. 경계를 넘나드는 그 부적절한 존재는 반듯한 실내에서 거대하게 부풀어 올라 괴물처럼 똬리를 튼다. 그림이 전시된 화이트 큐브 역시 대상이 빛나기 위해 한 점의 티끌도 없어야 하는 공간의 전형이다. 그러나 청결을 위해 경계 밖으로 밀어낸 오물들은 다시 내부로 들어온다. 


이러한 역류가 필요한 것은 삶이 가능하기 위해 죽음이 있어야 하고 삶과 죽음은 순환되는 것이지만 상징적 우주는 죽음을 자신의 방식으로 길들이거나 경계 바깥으로 추방하기 때문이다. 썩어가는 자연물은 현실계(Real)처럼, 사회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위해 구축된 상징적 우주(Symbolic)의 이면을 이룬다. 현대의 정신분석학에 의하면, ‘실재계는 상상계와 상징계의 기반을 이루는 물질적 기질을 의미하는 질료’(라깡 정신분석 사전)이다. 여성, 자연, 몸 등이 이러한 질료들로 간주되었다. 질료들은 평가절상(숭고)되거나 평가절하(비천)될 뿐, 그자체로 주목되지 않았다. 육체 및 물질적 질료가 정신에 의해 지배되지 않을 때, 기괴하게 나타난다. 정정엽의 작품에서 그로테스크는 한갓된 환상이 아니라, ‘그로테스크 리얼리즘’(바흐친)으로 거듭난다.       

 

출전; 아트 인 컬처 3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