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체계의 역사가 있는 타자의 초상
이선영(미술평론가)
김용진의 작품에서 캔버스를 관통하는 수많은 금속선들은 이리저리 헤쳐 모여 사람의 얼굴이나 도자기의 형상으로 거듭난다. 사람의 경우 세계적으로 유명한 이들이고, 도자기의 경우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음직한 명품들이다. 한 전시에 나란히 걸리는 머리와 도자기는 우연한 만남 같지는 않다. 명품 도자기도 얼굴을 가진다. 달항아리를 비롯하여 옛 도자기를 향해 쓰여진, 흡사 연애편지를 닮은 듯한 그 수많은 심미적 담론을 생각해 보라. 유명인들의 경우 생김새도 관심을 끌지만, 그들의 뇌 속에는 무엇이 있을지도 궁금하다. 도자기나 머리는 무언가를 담고 있다. 그것은 나날이 발전하고 있는 인공지능도 탐내고 있는 정신일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무엇인가 담겨진 것들을 캔버스 안에 담는다. 대부분 사진에 바탕 한 소재들은 이미 죽은 것, 즉 부재하는 것들이다. 밀도가 강한 어두운 부분과 밀도가 약한 밝은 부분으로 번역된 화면은 실재와 부재간의 관계를 강조한다.

James Dean wire on canvas 75x75 cm, 2012
부재는 실재만큼이나 예술의 몸통이 되며, 실재/부재는 삶/죽음처럼 서로의 이면을 이룬다. 레지스 드브레는 [이미지의 삶과 죽음]에서, 이미지의 탄생은 죽음과 결부된다고 본다. 그에 의하면 분묘에서 나타나는 고대의 이미지란 죽음에 대한 거부이자 영생을 위한 것이다. 또한 레지스 드브레는 기호라는 말이 묘석을 뜻하는 세마(sema)에서 왔음을, 그리고 종교적 예식의 언어에서 ‘재현’은 ‘장례 의식을 위해 검은 포장이 덮인 텅 빈 관’을 가리켰음을, 그리고 ‘중세기의 장례식에서 고인을 대신하는, 빚어져 채색된 형상’(리트레 사전)이었음을 상기시킨다. 이미지와 죽음과의 이 같은 긴밀한 관계는 김용진의 작품에서 재현된 것이 예술 뿐 아니라, 종교와 연결됨을 알려준다. 비록 그러한 종교성이 이전시대와 질적인 차이를 가지고 있지만, 대중문화나 하위문화에 특징적인 컬트(cult)는 금기/위반에 관련된 인간의 무의식, 즉 종교성에 호소하곤 한다.
인간의 경우 달리, 니체, 간디, 제임스 딘, 오드리 헵번, 스티브 잡스 등 유명 예술가와 철학자, 성인, 그리고 한 시대를 풍미한 이들의 초상이다. 도자기 같은 고풍스러운 사물의 경우, 박물관 좌대 등에 안치되어 있는 것이지 사용되는 것이 아니다. 지금 여기에서 살고 있는 인물이나 사물이 아닌 그것들에는 강한 아우라(氣)가 있다. 특히 인물의 경우 신체 부위 중 가장 정신적인 기운을 뿜어내는 눈구멍이 있는 얼굴이 그렇다. 그래서 이전 시대의 성화들은 머리 뒤편에 후광을 그려 넣기도 했다. 도자기의 경우는 [기(氣)로 가득한 기(器)]라는 작품제목을 통해서 물성을 넘어서는 기운들을 강조한다. 금속선을 이용한 부재 기표의 재현은 아우라를 살려내는데 역점을 둔다. 자신을 찔러왔던(푼크툼) 미묘한 매력들을 부각시키기 위해 물질화된 코드가 동원되었다. 통상적인 코드는 자신이 전달할 것을 실어 나른 후 사라진다. 그래서 코드는 투명하다. 투명한 창이 그러하다.

니이체, 2012

기로 가득한 기, pin on canvas, 2015
그러나 현대로 올수록 투명성은 사라진다. 현대는 코드를 통해서 무엇을 보는 것이 아니라, 코드 그 자체에 주목하는 자기지시적인 특징을 가진다. 가령 김용진의 작품 제목이 초상의 이름과 같다는 점은 단지 그 자신일 뿐인 자기지시성을 말한다. 여러 굵기를 가진 금속선으로 이루어진 코드는 불투명하다. 그것은 어떤 내용을 실어 나른 후에도 그 자체로 남아있다. 이러한 물질적인 코드는 사물처럼 그림자가 있는 것이다. 조명에 따라 형상에 다른 분위기를 연출할 그림자도 틀려진다. 바늘 같은 금속선으로 팽팽하게 당겨진 천을 오고감으로서 만들어진 형상은 마치 자수 같은 방식이기도 한데, 실은 없고 바늘만으로 이루어진 기묘한 자수이다. 다만 본드로 고정시킨 뒷면만이 여러 마감 자국으로 어수선할 자수틀 뒷면같은 상황을 공유할 것이다. 그가 바늘이나 실처럼 사용하는 금속선의 종류는 열 가지가 넘는다.
때에 따라 색도 있지만, 대개 블랙 톤인 김용진의 작품이 마치 먹과 같은 다양한 농담이 가능한 이유는 크기별로 정렬해 놓고 필요에 따라 무한대의 조합을 행하는 방식 때문이다. 화가가 물감을 섞는다면 그는 계열들로 분류된 물질들을 섞는다. 여러 굵기의 핀들은 조합의 방식에 따라 밀도와 색의 톤이 틀려진다. 인물이나 사물의 외곽선을 이루는 가장 얇은 선부터 나무껍질이나 바위 표면 같은 두터운 면을 이루는 스프링까지 많은 단계의 선들이 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부조처럼 보인다. 일견 평면적 이미지 같지만, 무게로 친다면 그림이 아니라 조각 작품이다. 멀리서 보면 흐릿한 이미지지만, 가까이 가면 이미지를 이루는 조형언어가 각각이 또 다른 사물로서 자신을 주장한다. 아름다운 여배우의 가녀린 얼굴선이나 백자 항아리의 유려한 선들을 이루는 것은 캔버스 위에 서 있는 금속선이며, 가까이서 보면 하얀 표면 위에 부슬부슬 돋아날 털처럼 징그러울 때도 있다. 니이체나 제임스 딘같이 성격 있어 보이는 인물의 음영을 만들어내는 두툼한 금속 덩어리들은 그들의 묵직한 고뇌를 드러낸다.

기로 가득한 기, 2009

기로 가득한 기, 2015
작가는 광물질로 거의 먹이나 물감 같은 효과를 낸다. 김용진의 원래 전공이 조각임을 생각하면, 캔버스 위에 이미지를 그린다기 보다는 만드는 작업은 자연스럽다. 바다가 있는 속초의 작업실에서 매일 12시간 씩 금속선을 찔러대며 만들어진 것들은 그것이 형상화하고 있는 유명한 인물이나 사물들이 그렇게 되기까지의 고통과 노력을 작업을 통해 반복 수행하고 있는 듯하다. 수행이라는 것이 어떤 목적보다는 과정이 중요하듯, 김용진의 작품 속 인물이나 사물이 무엇을 표현하는지는 크게 중요치 않다. 그는 소재의 선택에 무게를 두지는 않는다. 물론 전혀 관심 없는 대상이 등장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다채로운 물성을 위한 수단으로 호출된 것들은 대중들이 쉽게 알아볼 수 있는 도상들이라는 공통점만 있다. 그러나 일정 거리를 두면서 전체를 보지 않을 때, 작품 표면들은 기이한 물성으로 출렁거리며 친근하게 알아 볼 수 있었던 이미지는 사라진다.
그의 작품은 거리에 따라 느낌이 달라지는 낯설게 하기 기법에 충실하다. 대중문화 뿐 아니라 팝아트 등, 고급예술의 영역에서도 수없이 소비되어 온 그 이미지들은 다른 무게감으로 채워진다. 즉 그것들은 다시 씌여지고 다시 생산된다. 그가 형상화한 인물들은 종교가 사회생활의 주요무대에서 사적인 영역으로 사라진 근대에 도상의 힘을 다시 불러들인다. 이전시대에 어떤 형상(form)이 가지는 힘은 그것이 단순한 형태가 아니라, 이데아를 담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근대화를 통해 상징적 우주를 가득 채웠던 마법적 힘이나 영혼은 사라진다. 계몽에 의한 탈(脫) 주술화 과정은 이전의 수직적 계층을 수평적 평등으로 변화시켰다. 찰스 테일러는 [근대의 사회적 상상]에서, 근대 사회의 세속성을 이러한 근본적 변화로 설명한다. 수지 개블릭도 [모더니즘은 실패했는가]에서, 근대사회의 기본구조를 형성하는 구성이념들을 세속주의, 개인주의, 관료주의와 다원주의의 연합으로 보면서, 이를 세계의 비(非) 영화(despiritualization)라고 할 수 있는 세속주의로 해석한다.

간디, 2012

스티브 잡스, 2012
신성한 것은 거부되었지만, 지상에 던져진 유한한 인간은 이를 일관되게 거부할 수는 없었다. 신성함을 늘 상 뒷문으로 다시 들어오곤 했다. 과거의 스타가 성인이었듯, 현대의 스타도 성인으로 연출될 수 있다. 김용진의 작품에 등장하는 예술가, 철학자, 연예인 등은 전통시대의 성인처럼 신비화되어 있다. 작가는 대중문화 혹은 고급예술에서 에서 실행되고 있는 신비화를 또 다른 버전으로 보여준다. 특히 금속선이라는 반영구적인 재료는 떠도는 얇은 사진 이미지들을 실재화한다. 이 전시에도 한 점 포함되어 있는 소나무는 예술적 실재감을 자연의 실재감으로 수렴시키려는 의도를 보여준다. 한 땀 한 땀 찔 러넣은 금속선들은 이전시대에 성화나 성상을 제작하던 장인, 또는 예술가들의 작업에 상응하는 것이다. 그것은 세속의 시대에 영원성을 붙잡아 두려는 시도이다. 찰스 테일러는 영원성이 단지 범속한 시간의 끝없는 전개가 아니었다고 본다.
그것은 불변성으로의 고양, 혹은 통일성 속으로 집결한 시간이다. 그러나 근대에 와서 이러한 통일성이 사라졌다. 근대의 사회적 형식들은 오로지 세속적 시간 안에서만 존재한다. 영령과 힘의 세계를 쫒아내고 텅 비워버리는 동일한 요소들은 인간을 점점 더 세속적 시간에 가두는 것이다. 규율화 된 반복적 일상 속에서 고갈되는 현대인은 자기 시대에서 성상을 찾으려 한다. 김용진의 작품 속 여배우가 성녀를, 남자배우가 영웅을, 철학자가 성인을 닮은 것은 그런 이유다. 그러나 핀으로 꽂아 만들어진 성상들은 열려있다. 그것은 이제는 담을 수 없는 것을 담으려는 불가능한 시도이다. 오늘날의 유사(類似) 성상에서는 과거의 성상과 달리 무엇인가 오롯이 담겨있지 않은 것 같다. 그것은 이미지의 의미가 영원한 것이 아니라 가변적인 것임을 알려준다. 레지스 드브레는 [이미지의 삶과 죽음]에서 이미지 자체의 역사성을 강조한다.

기로 가득한 기, 2009

기로 가득 한 기, 2012
그는 매체의 역사를 다루면서 마술적 시선과 미적시선 그리고 경제적 시선으로의 진화를 말한다. 그에 의하면 첫 번째 것은 우상을, 두 번째 것은 예술을, 세 번째 것은 영상적 시각을 불러냈다. 우상 또는 성상이 인류가 자연의 지배 하에서 두려움과 공포에 떨던 시대의 산물이라면, 예술은 그러한 공포를 떨쳐내고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그리고 영상은 대중-소비자의 순간적인 관심을 끈다. 레지스 드브레는 이러한 진화 속에서 앞에서 나타났던 것이 다시 나타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에 의하면 이미지에 대한 현재의 맹목적인 숭배는 예술의 시대보다 아득히 먼 우상의 시대와 더 많은 공통점을 지닌다. 동시에 우리는 현대적인데, 그것은 현대인이 그 본질을 자기 것으로 삼기 위해 더 이상 집단적 역사, 공유하는 신화적 장치를 통과해야할 필요가 없는 유일한 존재라는 점이다. 현대인 특유의 시선의 사유화는 이미지의 마술에 치명타를 가했다.
공동체가 필요 없는 사적인 시선은 신성한 이미지를 빛나게 하는 상징적 기호의 생명력은 사라지게 한다. 현대의 사회생활이 그러하듯이, 죽음이 잊혀질수록 이미지의 생명력도 그만큼 덜하게 되고 이미지에 대한 요구 또한 감소한다. 김용진이 부박하게 떠도는 이미지를 취하여 강조한 것은 이미지에 내재된 죽음의 몫이다. 그렇게 불러들여진 죽음이라는 타자는 사물을 포함한 초상들을 색다르게 다가오게 한다. 그의 작품에서 평범한 이들과 동렬에 놓이지 않는 인물들, 평범한 물건이나 상품과 동렬에 놓이지 않는 사물들은 겉보기에 신성한 도상의 위상을 지닌다. 그것들은 성상의 특징을 가지고는 있지만, 종교적 대상이 아니라 예술작품이다. 그것은 초상으로 존재하는 성자와 같은 현전성이 아니라, 재현에 해당된다. 근대의 재현주의는 매체적 단계로 보면 문자와 인쇄문화에 토대를 둔다. 김용진의 다음 작업은 이미지의 구성요소에 문자를 포함시키는 것인데, 그것은 최초의 소재들이 인쇄물이라는 것과도 연관된다.

오드리 헵번, 2012
동시에 그것은 재현에 대한 재현이다. 특히 마지막의 국면은 초자연적인 것에 바탕 하는 원형이나 자연에 바탕 하는 전형이 아닌, 시뮬레이션의 속성을 가진다. 즉 점들이 헤쳐모여 이루어지는 형태들은 마치 지글거리는 영상처럼 허상 같다. 실제 제작에 있어서도 작품 속 도자기나 얼굴에서 허(虛)로 나타나는 부분의 처리가 가장 까다롭다. 김용진의 작품에서 이 부분은 실재감을 가능케 한다. [이미지의 삶과 죽음]에 의하면, 허상은 모자이크의 형상을 띠고 있고 중층적인 구문의 입체성을 갖고 있지 않다. 이미지의 전파적 전달은 즉각성과 편재성을 결합시킴으로서, 이미지를 보는 것에는 더 이상 특별한 재능이나 훈련을 요구하지 않는다. 김용진은 노동과 수행 어딘가에 있는 작업을 통해서 실재를 일구려 한다. 그는 손가락으로 코드를 터치만 하면 되는 허상의 사회에서 다루기 힘든 재료로 작업하면서 이미지의 힘을 일깨우려 한다.